조선왕릉에 대한 약간의 사전 공부를 하여
1월 26일 서삼릉을 향했다.
꽃피는 춘삼월도 좋고, 녹음 우거진 풍광도 좋지만
전체를 잘 볼 수 있는 계절이라면 조금은 추워도 겨울이 제격이기 때문이다.
송두리채 벌거벗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나의 '조선왕릉' 투어가 시작되었다. 차 한 잔 준비하여...
원래는 희릉, 효릉, 예릉 이 있어 삼릉이라 하는데, 예릉은 비공개지역이라 이 날 참견을 하지못했다.
3월에서 9월까지 매주 2째, 4째주 토요일. 오전 10시. 일회에 한하여 가능하다기에 다음을 기약하고 희릉과 효릉만을 볼 수 있었다.
거의 모든 곳이 능침공간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정자각 쪽에서 바라보고, 차 한 잔 올리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서삼릉
서삼릉이란 고양시 원당동에 소재한 孝陵, 禧陵, 睿陵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총 면적은 약 7만여 평이며 중종의 계비인 章敬王后 尹氏의 희릉자리로 택해지면서 처음 능자리로 사용되었다. 본래는 130여만여평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을 차지하였으나 지금은 여러 곳으로 분할되어 약 7만여 평이 남았으며 이 중 절반가량이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는 3기의 능 이외에도 태실, 공주·옹주묘, 소경원, 효창원 등이 있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을 조성하면서 서삼릉의 역사가 시작됨. 중종의 정릉이 조성되었으나 서울 삼성동 선릉 곁으로 옮겨갔고, 중종의 아들인 인종과 비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 철종과 비 인철왕후 김씨의 예릉이 있다. 그밖에 소경원 ․ 의령원 ․ 효창원 등 세자의 園 3기와 폐비 윤씨의 회묘를 비롯한 45기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1. 희릉
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1491~1515,25)의 단릉이다.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8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장순왕후 한씨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1515년 인종을 낳고 산후병을 얻어 7일 만에 사망하였다. 능은 원래 헌릉(서울 서초동)에 있었으나 22년 뒤 김안로의 술책(정광필, 남곤 등이 조성한 묘자리에 큰 돌이 깔려있어서 좋지 않다는) 때문에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다.
연산군이 페위된 후 왕위에 오른 중종에겐 세 왕비가 있었다. 첫째는 반정 후 즉위한 뒤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7일만에 페위당한 장경왕후 신씨, 둘째는 바로 이곳 희릉의 주인인 장경왕후 윤씨, 마지막 세번째는 세왕후를 두고도 중종을 독수공방하게 만든 문정왕후 윤씨이다.
이곳 희릉엔 중종과의 합장릉으로 정릉이라 명명된 적도 있었으나 1562년 서울 삼성동 정릉 자리로 중종릉이 천장된 후 장경왕후가 홀로 있게 되었다.
봉분에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두른 단들으로 조선 전기의 능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곡장이 둘러지고, 석양과 석호가 봉분을 호위하고 있다. 봉분앞에는 혼유석과 망주석, 장명등,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호, 석마 등이 배치되어 있다.
능원 아래에는 부속건물인 정자각, 비각,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곳 예감, 능 출입시 참배하는 곳인 배위, 홍살문 등이 있다.
2.예릉
25대 철종(1831~1863,33)과 철인왕후 김씨(1837~1878,42)의 쌍릉이다. ‘강화도령’으로 널리 알려진 철종은 강화도에 살던 중 1848년 24대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영조의 유일한 혈손이었기 때문이다. 철종의 조부인 은언군은 그 아들 상계군 담이 반역을 꾀했다고 하여 1786년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1801년에는 천주교인이라 하여 은언군의 처 송씨와 며느리 신씨도 사사되었다. 게다가 철종의 형 원경은 모반을 꾸미다 발각되어 사사되었으니 철종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죽어나간 것이다.
그렇게 왕이 된 철종은 힘든 생활을 이어가다가 재위 4년 6개월만에 사망한다.
예릉은 이러한 철종과 철인왕후의 쌍능으로 조선왕조의 상설제도를 따른 마지막 능이다.
예릉은 조선 제 25대 철종과 왕비 철인왕후 김씨가 잠들어 있는곳이다.
전계대원군 광의 세째 아들이었던 철종은 헌종이 재위 15년만에 자손이 없이 돌아가시자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가 강화도에 살고 있던 철종을 불러들여 19세때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고 그 뒤로는 외척의 세도로 인하여 국정을 바로잡지 못하고 재위 14년 12월에 창덕궁에서 돌아가신 왕이었다.
예릉의 석물은 다른 릉에 비해 굉장히 크다.
그 이유가 근래에 밝혀졌는데, 나라의 살림이 넉넉지 않자, 중종의 릉이 천장되고 남아있던 석물을 이곳에 재 사용했기 때문이라 한다.
항간에 너무 미안해서 크게 조성했다는 얘기가 있었으나, 문헌이 발견됨에 따라 그 이유가 분명해 졌다고 한다.
정자각 또한 다른곳에 비해 웅장하고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 또한 기존의 2단이 아닌 3단으로 되어있다.
국조오례의에 의거한 마직막 능인 예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두 개의 봉분을 에워사고 난간석을 설치하였으며 난간석 기둥에는 방위를 나타내는 12간지 문자가 새겨져 있다. 그 앞에는 혼유석과 망주석 석양, 석양 문인석 무인석 석마 장면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어 그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예릉의 참도는 황제로 추존된 후 삼도로 조영되어 있다.
대한제국시절 고종황제는 시조인 태조를 비롯하여 장조, 정조, 순조, 문조를 추존했고, 이어 순종황제 때 진종, 헌종, 철종을 추존했다. 이에 예릉의 철종 능은 황제추존 이후 1908년 중국 황제 능의 예에 따라 3도로 다시 조성되었다.
**효창원
조선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 묘소이다. 문효세자(1782~1786)는 의빈 성씨의 소생으로, 1782년(정조6년)에 태어나 5세의 어린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용산구 청파동 효창공원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44년에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의령원
조선 영조의 아들 장조(사도세자)의 제1자 의소세손의 묘소이다. 의소세손은 이름은 정이며, 3세의 어린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서대문구 북아현동(중앙여고 내)에 있었으나 1944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비문의 글씨는 영조의 어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