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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요집 제5권
7.3. 간위연(簡僞緣)
『현우경(賢愚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어떤 단월(檀越)이 열여섯 종류의 사람을 따로따로 갖추어 청하면 비록 복의 과보는 얻는다 하더라도 그 또한 많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것을 열여섯 종류라고 말하는가?
비구와 비구니에게 각각 여덟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네 사람을 널리 청하여 얻는 공덕과 복덕만 못하니, 그 십육분의 일에도 마치지 못한다.
장래 말법 시대에 바른 법이 다 없어지려고 할 적에 정녕 비구가 아내를 얻고 아들을 안으며 또 네 사람 이상의 이름뿐인 승가대중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사리불(舍利佛)이나 목건련(目揵連) 등과 같이 꼭 공경해야 할 것이다.’
그 때 미륵(彌勒) 보살이 대중 스님들께 물었다.
‘만약 어떤 단월이 계율을 지켜 깨끗한 한 사문을 청하여 그 집에 갔을 때 그에게 공양하여 얻은 이익과
어떤 사람이 십만 전(錢)을 얻은 이익을 비교한다면 어떠합니까?’
그 때 교진여(憍陳如)가 말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백 수레의 귀중한 보배를 얻더라도 그 복리(副利)를 계산해 보면
계율이 깨끗한 한 사문을 집으로 청해다가 그 사람이 집에 오면 공양하고 얻은 이익보다 못합니다. 이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가령 어떤 사람이 한 염부제에 가득한 귀중한 보배를 언더라도
계율이 깨끗한 한 사문을 집으로 청하여 공양하고 얻은 이익만은 못하니 이것이 더욱 많습니다.’
목건련이 말하였다.
‘가령 어떤 사람이 두 천하에 가득한 보배와 나아가 사전하에까지 가득한 진귀한 보배를 얻은 그 이익은
계율이 깨끗한 한 사문을 청하여 집에 왔을 때 그를 공양하여 얻은 이익보다 못하니, 이것이 더 우세합니다.’
또 『상법결의경(像法決疑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단월이 음식을 차려 놓고 아울러 많은 스님들을 청할 때에는 사람을 보내 대문을 닫고 비구와 여러 늙고 병든 사람이거나 가난하고 빌어먹는 사람들을 막아 그 법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들은 음식만 축낼 뿐 마침내 아무런 선분(善分)이 없기 때문이다.”
또 『보광경(普廣經)』에서 말하였다.
“네 무리의 제자가 만약 재계(齋戒)를 행할 때에는 마음으로 꼭 시방에 있는 승가를 청하라라 생각하되 그의 선과 악, 그리고 그가 계율을 지키는 것에 대해 그 계율을 헐거나 그의 행(行)이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여러 사찰에 가서 스님들을 청할 때에는 승려의 차례를 따라 공양하고 다른 생각이 없으면 그 복은 많고 많으며 한량없고 끝이 없으리라.
또 아라한이나 네 가지 도의 과보를 얻은 사람과 큰 마음을 가진 이를 만나면 이 공덕을 연(緣)하여 그가 받는 복은 끝o] 없을 것이며,
단 한 번이라도 설법을 들으면 지극한 도(道)인 위없는 열반[無上涅槃]을 증득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십송률(十誦律)』에서 말하였다.
“녹자모(鹿子母)가 오백 명의 나한들을 따로 청했을 때 부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지혜롭지 못하고 옳지도 못한 일이다.
만약 승가 중에 승차(僧次)에 의하여 한 사람을 청하면, 그가 얻는 큰 공덕과 과보를 얻는 이익은
오백 명의 나한을 따로 정하여 일체의 원근(遠近)어디에서나 듣지 못하는 이가 없는 것보다 터 뛰어나니라“’
또 『청승복전경(請僧福田經)』에서도 갖가지로 꾸짖어 따로 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렇게 따로 청하는 것은 바로 외도(外道)들의 법이요 칠불(七佛)의 법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 『범망경(梵網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어떤 단월(檀越:施主)이 와서 많은 대중 스님들을 청할 때 객승(客僧)들에게도 그 이양(利養)의 한 몫이 있으면, 승방(僧房)의 주인은 마땅히 차례차례 보내 객승들로 하여금 그 청을 받게 해야 한다.
먼저 그곳에 사는 스님만 청을 받고 객승을 보내지 않으면 그 방주(房主)는 한량없이 많은 죄를 받게 되어 축생(畜生)과 다름 없으리라.
또 그는 사문(沙門)이 아니요 석씨(釋氏) 종성(種姓)도 아닐 것이며, 경구죄(輕垢罪)를 범하는 것이 된다.”
또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어떤 부귀(富貴)한 장자(長者)가 많은 스님들을 공양하기 좋아하여 승집사(僧執事)에게 아뢰었다.
‘나는 차례대로 스님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날마다 차례로 청하여 마침내는 사미(沙彌)에 이르렀다.
그런데 집사는 사미를 초청하는 것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여러 사미들이 물었다.
‘무슨 까닭에 사미는 허락하지 않습니까?’
대답하였다.
‘단월이 나이 어런 사람들을 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곧 게송을 설하였다.
수염과 머리털은 눈처럼 희고
이[齒]는 다 빠지고 피부는 주름이 졌네.
곱사등이 걸음걸이에 몸은 말라빠진
이와 같은 대중을 청하기 좋아했네.
그 때 이 모든 사미들은 다 대아라한들이었다.
이들은 사자의 머리를 치는 듯 홀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게송으로 말하였다.
단월은 지혜 없는 사람이어서
형색만을 따지고 그 덕은 취하지 않으며
이 나이 어린 모습은 다 버리고
다만 마르고 검버섯 돋은 노인들만 가려서 초청했네.
나이 많고 덕있는[耆年] 모습만을 숭상하고 존경한 것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이른바 장로(長老)의 모습이란
꼭 나이가 많기 때문만은 아니라네.
얼굴은 바짝 마르고 수염과 머리털이 희거나
부질없이 늙기만 하고 안으로 덕이 없는 그런 이가 아니라네.
능히 죄와 복의 과보를 버리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범행(梵行)을 실천하며
이미 일체의 법을 다 여읜 이라야
이것을 이름하여 장로(長老)라고 말하리.
이 모든 사미들은 다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들은 저 단월이 스님들의 좋고 나쁨을 헤아리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바라볼 수만은 없다.〉
그리고는 곧 게송으로 말하였다.
찬탄(讃嘆)하고 꾸짖고 욕하는 가운데에서도
우라들의 마음은 비록 한결같지만
이 사람은 부처님의 법을 헐뜯고 있으니
반드시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우리는 마땅히 빨리 그 집으로 가서
벌을 설하여 가르쳐 주자.
우리들이 만약 제도하지 않으면
이야말로 중생을 버리는 것이 된다.
즉시 모든 사미들은 스스로 그 몸을 변화시켜 모두 나이 많은 노인이 되었다.
수염과 머리털은 눈처럼 희고
빼어난 눈썹 드리워 두 눈을 덮었으며
피부에 잡힌 주름 물결 같고
등은 구부러져서 마치 활과 같았다.
두 손엔 지팡이를 짚고 걸어다니며
차례에 따라 청을 받을 때
온몸은 후들후들 모두 떨려서
가고 서기 저절로 편안하지 않은 모습이
비유하면 마치 백양(白楊)나무가
바람 따라 움직이고 흔들리는 것 같았네.
단윌은 이와 같은 무리들을 보고
기뻐하며 맞아들여 자리에 앉게 하였네.
그렇게 앉은 뒤 얼마쯤 지나
순식간에 다시 나이 젊은 모습으로 돌아오자.
단월이 깜짝 놀라서 하는 말이
이와 같이 연세 높으신 노인의 모습이
어느새 소년의 몸으로 변했구나.
마치 젊어지는 약을 먹은 것과 같나니
도대체 이것이 그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모든 사미들이 말하였다.
‘그대는 의심하지 마시오. 예사롭게 평가하는 그대가 너무도 불쌍하고 가엾기 때문에 이런 변화를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당신은 깊이 알아야만 하나니, 거룩한 승가 대중[聖衆]은 가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게송으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유하면 모기가 그 부리로써
깊은 바다 밑을 헤아리려는 것과 같아서
일체의 저 하늘과 사람들은
아무도 스님들을 평가할 수 없네.
스님은 공덕을 가졌으므로 그 귀함을
오히려 분별할 수 없거늘
그대는 고작 나이를 가지고
저 모든 대덕(大德)들을 가늠하고 있구나.
크고 작은 것은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지
늙고 젊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네.
지혜도 있으며 또한 부지런히 정진하면
아무리 젊다해도 그가 곧 장로라네.
게으르면서도 또한 지혜마저 없으면
아무리 나이 많아도 곧 어린 것이니
당신이 지금 승려들을 평가하고 헤아리는 것은
바로 커다란 실수가 된다네.
당신이 지금 스님들을 평가하는 것은 마치 한 개의 손가락으로 큰 바다 밑을 측량하여 알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지혜로운 사람의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당신은 부처님의 말씀도 듣지 못했습니까?
〈네 가지 일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가벼이 해서는 안 된다.
태자는 아무리 작아도 장차 국왕이 될 사람이니 그를 경솔하게 대할 수 없고,
뱀 새끼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그 독은 사람을 죽일 수 있으니 그 또한 경솔히 할 수 없으며,
조그만 불씨는 아무리 미약하다 해도 산과 들을 다 태울 수 있으니 그 또한 경솔히 다룰 수 없고,
사미가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 해도 거룩 한 신통(神通)을 열었으니 또한 경솔하게 대해서든 안 된다.〉’
단월이 그 말을 듣고 이미 이와 같은 신통을 보았기 때문에 크게 놀라 온몸의 털이 다 곤두섰다. 그래서 합장하고 사미들을 향하여 말하였다.
‘여러 성인들이시여, 저는 지금 참회합니다. 저는 바로 범부(凡夫)라서 마음 속으로 늘 죄를 짓곤 합니다.
그래서 지금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불보(佛寶)와 승보(僧寶)가운데 믿는 미음이 청정하면 어느 쪽의 복이 더 우세합니까?’
사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들은 애초부터 불보와 승보 중에서 더하고 덜함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한때 사바제성(舍婆提城)에 들어가셔서 걸식을 하고 계셨습니다.
거기엔 바라타서(婆羅埵逝)라는 성씨를 가진 어떤 바라문(婆羅門)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주 그의 집에 가서 걸식을 하곤 하셨기 때문에
그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사문은 왜 이렇게 자주 찾아오는가? 마치 빚진 사람 같구나.〉
그러자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적절한 시기에 자주자주 비가 내리면
오곡 또한 자주자주 자라나고
자주자주 복업(福業)을 닦으면
그 과보를 자주자주 받는다네ㆍ
자주자주 태어나는 법을 받으면
그 때문에 죽음도 자주자주 받나니
성인의 법 자주자주 이루면
그 누가 자주자주 나고 죽으리.
바라문이 이 게송을 듣고 나서
〈큰 성인께서 내 마음을 다 알고 계시니 너무도 부끄럽구나〉 하면서
발우를 가지고 집으로 들어가서 맛있는 음식을 가득 담아 가지고 나와 부처님께 받들어 올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받지 않으시고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게송을 설하였기 때문에 이 음식을 얻는구나. 나는 그 음식을 먹지 않겠다.〉
바라문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음식은 마땅히 누구에게 주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사람으로서는 이 음식을 소화시킬 수 있는 이를 보지 못했다.
그대는 이것을 가지고 가서 풀이 적은 땅이나 벌레가 없는 물 속에 버려라.〉
그는 곧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그 음식을 가지고 벌레가 없는 물 속에 버렸습니다.
그러자 물이 곧 펄펄 끓어오르면서 연기와 불꽃이 한꺼번에 나왔는데, 그것은 마치 매우 뜨거운 쇠를 불에 던져 넣은 것 같있습니다.
바라문은 그 모습을 보고 나서 매우 놀라고 두려워하며 말하였습니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로다. 나아가 음식에까지도 저러한 신통의 힘이 있구나.〉
그리고는 부처님께 예배하면서 참회하고 출가하여 계 받가를 빌었습니다. 그리고는 차츰 번뇌[結]들 끊고 아라한도(阿羅漢道)를 증득하였습니다.
그 뒤에 마하교담미(摩訶憍曇彌)는 금색으로 된 위아래 옷을 지어 부처님께 바쳤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승가에 보시하라고 권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라면 능히 소화해낼 수도 있고 또한 능히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보와 승보에는 복이 많고 적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게송으로 말하였다.
만약 어떤 이가 부처님을 사랑하고 공경한다면
또한 마땅히 승가도 사랑하고 공경해야 하리.
분별하게 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니
저 둘은 똑같이 보배가 되기 때문이라네.
또 『법구유경(法句喩經)』에서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사람이 마땅히 생각과 마음 가점에 있어
먹을 음식 없어도 만족할 줄 알면
그 때문에 질병은 적어지고
절제하고 소화시켜 수명을 보전하리라.
또 『십송률』에서 말하였다.
“그 때 왕사성(王舍城)에 거사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시리구다(尸利仇多)였다.
그는 큰 부자로서 재산이 많았으나, 이 사람은 외도(外道)의 제자였기에 늘 의심했다.
‘사문 구담(瞿曇)에게 정말 일체지(一切智)가 있을까?’
이렇게 의심한 그는 부처님 계신 곳으로 가서 아뢰었다.
‘사문 구담이시여, 내일 저희 집에 오셔서 공양하십시오.’
부처님께서는 그를 꼭 제도해야겠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잠자코 그의 청을 받아들이셨다.
그 때 거사는 집에 이르러 문 밖에다 큰 불구덩이를 만들었는데, 그 불에서 전혀 연기가 나지 않게 하고 그 위에 모래를 살짝 덮어 놓있다.
또 집에 들어가서는 평상에 엮지 않은 자리를 깔고, 음식에 독약을 섞어두고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만약 구담이 참으로 일체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 일을 알아야 할 것이요, 만약 일체지가 없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이 불구덩이에 빠지고 음식에 중독되어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심부름꾼을 보내 부처님께 아뢰었다.
‘음식이 이미 다 마련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비구들로 하여금 나보다 먼저 가게 하지 말라.’
그리고는 즉시 부처님께서 앞서 가시고 비구들은 뒤에 들어오게 했다.
시리구다가 만든 문 앞의 불구덩이를 부처님께서 연꽃 핀 못으로 변화시켜 그 못에 깨끗한 물이 가득 차게 하였는데 그 물은 이미 달고 시원했다.
부처님과 스님들은 모두 꽃잎 위를 걸어서 집으로 들어갔다.
엮지 않은 자리에 앉으시어 그 자리가 저절로 엮어지게 하시고는 부처님께서 시리구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마땅히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의심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진실로 일체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거사가 두 가지 신통력을 보고 곧 신심(信心)이 생겨나 부처님을 존중하고서 합장한 채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음식에는 독약이 들어 있으니 부디 부처님께서는 드시지 마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그 음식을 내놓아라. 스님들에게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승려들에게 내 명을 전하라. 다같이 공양하자[等供]고 외치기 전에는 하나라도 먹어서는 안 된다.’
이 때 부처님께서 주원(呪願)을 하셨다.
‘음욕(婬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가 이 세계 안의 독이 된다.
그러나 부처에게는 진실한 법이 있어 일체의 독을 제거한다.’
이 진실한 말씀 때문에 독은 다 제거되고 음식은 곧 깨끗해졌다.
대중 스님들이 맛있게 배불리 먹고 나니 거사가 부처님 앞에 앉아서 법을 듣고 곧 앉은 자리에서 법안(法眼)이 깨끗해졌다.
부처님께서 돌아오셔서 스님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셨다.
‘지금부터는 초청한 자리에 부처를 앞서 간다거나 또는 화상(和上)ㆍ사승(師僧)ㆍ상좌(上座)보다 앞서 가지 말고 다 같이 공양하자고 외치기 전에는 음식을 먹지 말라.’“
또 『마덕륵가론(摩德勒伽論)』에서 말하였다.
“대중들이 음식을 돌릴 때에 상좌는 꼭
‘일체는 평등한 것이다’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
사람을 시켜 이와 같이 승발(僧跋)을 외치고 난 뒤에 다 함께 먹어야 하느니라.”
[여기 말로는 등공(等供)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