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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중심은 어디일까?
14억 5천 만 세계 최대의 인구를 가지고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은 예로부터 자기네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처했다. 그 반대편에 있는 잉카 제국도 자기네 수도 쿠스코를 세상의 중심이라고 했다.
나 개인 생각으로는 동서양을 잇는 터키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지역이 테러발생 위험 지역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기피하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이 찬란한 계절에 나는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내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터키로 향한다.
"나도 따라 갈래요" 짐을 꾸리는 사이 반려견 Berry가 떡하니 가방 안에서 엎드려 시위를 한다.
국내 단골 콘도에 가는 걸로 아는 모양이다.
얘야, 이번엔 비행기를 타야 한단다. 어서 나오렴, 꿈쩍도 않는다. 내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외국 항공사와의 가격 경쟁, 테러 발생지역이어서 여행 기피 등으로 인해 국적기의 좌석은 여유가 있어서 11시간 반의 비행은 아주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본래의 계획은 그리스와 터키 두 나라를 여행하는 거였는데 그 상품이 성원이 되지를 않아 터키 한 나라만 하게 되었다.
사도 바울의 족적을 따라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언덕에 올라가서 그 유명한 바울의 설교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서 사도행전을 몇번이나 읽었는데.....
사실 이 부근이 테러발생 위험지역이라고 하나 I.S와는 무관하다.
국경지대에 사는 크루드 족은 독립을 원하고, 터키 정부가 진압하는 과정에서 남편을 잃은 여인들의 폭탄 테러가 두어 번 빚어진 작은 현상에 불과하다.
주위에서 만류도 있었지만 흘러가는 세월이 너무 안타까워서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동서양을 잇는 나라, 교역의 중심지.흑해를 머리에 이고 지중해를 품고 있는, 남한의 8 배 크기의 나라.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 에덴 동산 인근, 노아의 방주가 머물었다는 아라라트 산이 있는 곳,
아브라함이 살던 땅 하란이 있는 곳 ........ 사도바울의 전도 여정을 조금이라도 따라 걸으면서 그를 느끼고 싶었다.
이스탄불에 내린 나는 하룻밤을 호텔에서 묵고 이른 아침에 갑바도키아로 가는 비행기에 다시 올랐다.
터키 지도에 갑바도키아라는 곳은 없다.
갑바도키아는 신약 성서에 나오는 지명으로, 로마의 박해를 피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피신한 곳이다.
갑바도키아는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중동부를 일컫는 고대 지명이다.
버스로 9 시간 남짓 걸리는 길이 비행기로는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다.
Money talks ! 돈이 좋다.
대규모 화산 폭발과 지진활동으로 잿빛 응회암이 덮여있고,오랜 풍화작용으로 특이한 암석군이 형성되어 있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 같은 곳이 있는가 하면 브라이스 캐년 같은 곳도 있다.
그림은 내 맘대로 구도를 만들 수 있지만 사진은 그럴 수 없다.
괜찮은 장면을 하나 발견하고 한참을 기다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것도 비율 좋은 유럽인이,
누군지 모르지만 참 고맙다.
세계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이런 모습을 구경하려고 몰려든다.
터키 국민은 땅을 잘 만나서 가만히 앉아서 복을 누리고 있다.
8,000만 터키의 국민소득은 우리나라의 절반 수준이지만 행복지수는 우리보다 훨씬 높다.
사우디나 모로코 등의 무슬림은 아직도 남자가 4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있지만 터키는 일부일처제이다.무스타파 케말 대통령의 작품이다.
세계대전 중에 독일 편에선 터키, 독일이 패전하게 되자 터키는 독일과 더불어 덩달아 나라가 거덜나게 된 지경, 군인 무스타파 케말은 전열을 가다듬어 연합군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운다.
초대 대통령이 되어 정치와 종교를 분리, 터키 어를 창제하고 일부일처제를 정착시킨다.
1934년 터키 국회는 그에게 아타 튀르크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터키의 아버지란 뜻이다.
이스탄불의 국제 공항도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아타 튀르크 국제 공항.
갑바도키아 전지역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수많은 동굴회화들이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군데 군데의 동굴은 지금 호텔로도 영업 중인데 작은 방 하나 빌리는 데 최소 4만원, 큰 방은 수십만 원이 필요하다.
여행 중에 현지인 한 명이 나와 사진찍기를 원한다.조용히 응해주면서
아르카다쉬 ! 했더니 눈이 똥그래진다. 다시 이 아르카다쉬! 했더니 화들짝 놀라면서 내 두 손을 덥석 잡는다.
친구여, 내 진실한 친구여 !
내친김에 나는 ''알라후 아크바르'라고 한 마디를 보태었다. '알라는 위대하시다'란 뜻이다.
샤하다(이슬람의 신앙고백, 이 세상에 알라 외에 다른 神은 없습니다. 무하메드는 그 분의 사도입니다) 살트, 쟈카드, 샤리아,우스와 하사나, 인샬라....생각나는 말들을 두서 없이 말했더니 내 두 볼을 자기 볼로 부비면서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말이 안되는 나는 그 상황이 감당이 안되어서 몇 마디 영어를 쓰다가 이도 저도 안되기에 아예 그의 말을 따라했다. 난리가 났다. 자기 가족을 불러 함께 사진을 찍고, 주위 친구들, 친구의 아내들 모조리 불러서 한바탕 북새통을 이루었다.
터키 말 몇 마디 시작으로 나는 졸지에 스타가 되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현지어를 몇 가지 외웠던 거 제대로 써먹었다.
내가 외국에 나와서 외국인에게 이렇게까지 환영받기는 태어나서 처음이다.
트루크, 우리 말로 돌궐.
6.25전쟁 때 14,936명이 참전, 우리를 도왔다. 유엔 참전국 중 네번째로 많은 숫자다.
부산 유엔군 전사자의 묘지에는 462명의 용사가 잠들어 있다.
전쟁이 발발하자 터키 고교생들이 빨리 한국으로 달려가서 참전하라고 가두 시위를 벌였다.
1만 5천 명 대부분은 자원병이었다.
21일간 배 위에서 미군 장교가 그들에게 무기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고구려와 터키는 동맹관계였다. 중국을 견제하려면 이와 잇몸 같이 서로가 필요한 관계였다.
조선 세종 때에는 돌궐인과 방계인인 위그루 족이 개성까지 내려 와서 많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은 회회교를 믿었고 모스크를 지었으며, 세종도 꾸란 일부를 외웠다고 한다.
조선이 숭유배불주의로 가면서 두 나라 사이는 멀어져만 갔다.
500년이 흘렀지만 6.25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들은 피를 흘리면서 우리를 도왔다.
88 서울 올림픽이 열렸을 때 터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를 보고 실망한 그들, 터키로 돌아가서' 한국 짝사랑, 이제 그만하자'는 타이틀로 대서특필을 하게 된다.
국제사회에서 그동안 우리에게 우호적이던 그들이 그 사건 이후 눈에 띄게 냉담하게 된다.
우리가 심했다. 너무도 심했다. 은혜를 모르는 민족, 교육의 부재다. 정부가 아주 큰 잘못을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2002 월드컵 한국과 터키의 3,4위전이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렸다.
한국은 태극기보다도 더 큰 터키 국기를 흔들며 그들을 응원했다.
그들은 충격적인 감동을 받았다. 그들 표현을 그대로 전하자면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그들의 터키 국기 사랑은 세계 최고다.미국인의 성조기 사랑 그 훨씬 이상이다.
칸 카라다쉬 !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
개인이나 국가나 어려울 때 도와준 친구를 잊으면 안된다.
무슬림은 무하메드의 혈통을 잇자는 시아파와 능력있는 사람을 무하메드 후계자로 삼자는 수니파로 나뉘어진다.
I.S는 시아파 중에서도 극단주의자들이고,터키는 순하디 순한 수니파이다.
무슬림은 알라와 선지자 무하메드를 섬기고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무하메드가 천사 미카엘에게 계시를 받은 꾸란을 성경으로, 무하메드의 언행을 기록한 하디스, 그리고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가 그들의 경전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구주로 섬기게 할 수 있을까.
이 바위를 보는 순간 푸껫의 제임스본드 섬이 생각난다.
베트남 하롱베이의 사랑바위 생각도 난다.
사랑바위 몸통은 바닷물 속 145m 속에 잠겨져 있다.
로마의 박해를 피해 첩첩산중 동굴에다 교회를 지었다. 천정에 성화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아래 움푹 파인 곳은 당시 침례를 베풀던 곳이라 한다.
바깥은 둘러보니 척박한 땅, 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면서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데린구유라는 지하 마을에는 깊이 80미터의 30여 개의 동굴이 있는데 30만여 명이 숨어서 신앙을 지켰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편하게 예수를 믿는 것 아닌가. 감사에 너무 인색하면서 사는 것 아닌가.
아내와 함께 사파리 투어에 참여했다.
이 곳 사파리 투어는 사자나 호랑이 늑대 야생말 등의 야생 동물 사이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험악한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각종 명소를 찾아 다니는 프로그램이었다. 험한 코스를 무사히 마치고 기뻐하는 아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화산 바위가 요정의 굴뚝으로 변해진 곳.
스머프라는 영화가 이곳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어졌단다.
한 여학생이 내게 다가오더니 쭈볏쭈볏,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한다.
촉 제다
베라베!
세니세비요름! 했더니 난리가 났다.
얘들아, 너희들 아주 예쁘구나.
우린 한 형제야.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들. 거기에다 한류가 기름을 끼얹어 놓았으니 우리 관광객만 신이 난다.
이 밖에도 나는 안탈랴, 피에로티 언덕 등에서 아주 괜찮은 이들로부터 사진을 찍자는 제의에 응했고 우리나라 인사말 '안녕하세요'를 가르치기도 했다. 터키 말 몇 마디 말로서 환대를 받았다.
내가 이 다음에 올 때는 한류스타 몇명 이름과 간단한 춤동작은 배워 와야지......
안탈랴는 지중해의 유명 관광지, 유럽 관광객이 많이 몰려 드는 곳.
하드리아누스 문을 기준으로 구도시와 신도시로 나뉘어진다.
오브룩한, 낙타 대상들이 묵었던 숙소이다.
스페인의 세비야를 닮은 듯하면서도 집의 구조가 좀 다르다.넓은 골목도 다르다.
꽃을 좋아하는 터키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곳은 히에라 폴리스, 10만의 주민이 살았다는 고대도시이다.
옛날의 부귀 영화를 엿볼 수 있다.
탁 트인 전망, 드넓은 평야에서 넉넉한 양식을 수확했다고 한다.
아직도 따끈한 온천수가 변함 없이 넘쳐 흐르고 있다 .이 온천에서 클레오파트라가 목욕을 즐겼다고 한다.
히에라 폴리스 이곳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바로 아래는 파묵칼레. 목화의 성이라는 뜻인데 온천수가 너무 좋았다.
물이 적어서 광고에 나오는 그림이 나오지 않아 다소 실망했지만, 아래 쪽에 있는 호텔에서 한 야외 온천욕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우리 나라 동해안에 있는 덕구 온천, 백암 온천수가 좋다고 하나 이 물에는 견줄 바가 못 되었다. 이런 곳에서 두 달만 살아도 육신의 온갖 질병이 다 나을 것만 같았다.
"그대 오늘 내 앞에 서 있지만, 내일이면 내 곁에 있으리라"
원근 각처에서 많은 환자들이 모여들었지만 온천 치료요법이 만병통치는 아니다.
파묵칼레 인근에는 온천에 치료 받으러 왔다가 죽은 사람들의 대형 공동 묘지가 있는데 그 중 한 무덤 비문에서 발견된 글귀이다.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사형 선고를 받고 태어난 아담의 후손들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파묵칼레, 문명은 발달하였으나 우상 숭배가 심했으며,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명인 빌립이 순교한 지역이기도 하다
위에서 흐르는 온천수가 아래에서도 연못을 이루었다. 이 일대 호텔도 모두 온천수가 공급이 된다.
그리스의 그 유명한 히포크라테스가 근무하던 병원이 지척에 있다고 했다. 온천 처방으로 많은 환자를 치료했다고 한다.
저 너머 보이는 계곡이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초대 교회 중의 하나인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던 장소이다.
환상적인 호텔 야외 온천이다.
맨 윗칸은 뜨거워서 몸을 담지 못할 정도, 한칸씩 내려오면 자연적으로 온천수의 온도가 낮아진다.
맨 아랫칸은 아이들도 부담 없이 물놀이 할 수 있는 곳이다.
터키의 그리스 마을 쉬린제.
옛 모습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게 정이 간다.
한 아낙이 빵을 굽고 있다.
호텔 빵을 먹다가 한 음식점에서 이 빵을 먹어 보았는데 맛이 일품이었다.
그냥 밀가루에 약간의 소금간을 한 것이 이렇게도 맛이 있을 줄이야. 각종 야채나 고기를 넣어 시큼한 야쿠르트와 함께 먹으니 제대로 된 건강식이었다.
에페수스 유적지를 찾았다.
당시 28만 명이 거주했다는 곳. 사통팔달 교통에 그리스와의 교역 중심지.
우상 숭배가 판을 쳤다는 곳.
바울이 전도에 정성을 쏟던 곳, 두란노 서원이 있던 곳.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구석구석을 살펴 보았다.
이곳은 셀시우스 도서관. 당시 도서관은 요즘의 도서관과는 의미가 다르다고 했다.
옛자료들을 필사하는 게 주요 목적이었다고 한다.
고대 젊은 과부가 살아 갈 길은 두 가지라 한다.
첫번째는 부자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서 먹고 사는 일이며,(나오미와 보아스를 참고하면 된다)
두번째는 몸을 파는 일이라고 했다.
마음이 싱숭생숭한 사람은 오세요. 구멍이 숑숑 뚫려있다.
돈을 가지고 와야 해요. 동그란 구멍은 동전을 의미.
미성년자 출입 금지합니다. 발의 크기가 이것보다는 커야 올 수 있어요. 발가락 위 + 표시가 사람을 웃기게 만든다.
이탈리아 폼페이에서도 비슷한 표시가 있어서 사진을 찍어 온 적이 있다.
이 곳에 있는 원형 극장은 아르테미스의 사당을 만든 장인이 바울에게 거역하고 폭동을 일으킨 장소이기도 하다.
2만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원형극장은 검투사와 맹수의 결투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에페수스 인근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 요한이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산 집이 있다고 했다.
뷜뷜산 성요한 성당 인근에 있다는데 빡빡한 여정이어서 가볼 수 없어서 유감이었다.
이곳은 그랜드 바쟈르.실크로드 대상들이 거래하던 곳. 4,500여 개의 상점이 미로처럼 얽혀져 있다.
모로코의 페즈를 연상시키지만 그에 비해 이곳은 넓은 길이 비교적 많이 있다.
가격을 모르고 들어 갔다가는 바가지 옴팍 쓸 수가 있다. 경험 삼아 몇 점의 물건을 사보았는데 내 생리에는 맞지 않았다.
'이슬람'은 복종이라는 뜻이다.
이슬람 교는 포교 과정에서 한 손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꾸란을 들고, 죽음이냐 개종이냐 선택을 강요한 종교였다.
'무슬림'은 복종하는 남자, '무슬리마'는 복종하는 여자를 의미한다.
무슬림들은 모스크에 들어 가기 전 반드시 손발을 닦아야 한다.
무하메드의 출생지 메카를 향하여 하루 다섯 차례의 기도 시간, 미쳐 모스크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도처에 모여서 기도를 드린다. 왜 다섯번이냐. 우스와 하사나! 예언자 무하메드가 하루에 다섯번을 기도했으니까 모든 무슬림은 그렇게 해야 한단다.
평생에 한 번은 구경해야한다는 블루 모스크에 입장하기 위해 관광객은 긴 줄을 서야 한다.
이곳은 지금도 무슬림들이 기도를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방해를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내부를 볼 수 있다.
200여 개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푸른 빛을 띈다고 하여 블루 모스크라 했다.
블루 모스크의 전경이다.
전통 복장을 입은 한 아이가 부모와 함께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고 있었다. 염치 불구하고 쫓아가서 불러세웠다.
이 아이를 놓치면 돌아서서 두고 두고 후회가 될 것 같아서,
카르다쉬!
베라베!
May I take a picture?
얘야, 우리는 형제란다.
사람은 동작이 빨라야 한다.
율법에 따라 사내 아이는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해야 한다.
기한이 지나면 어느 시기까지 포경 수술을 해야 한다.
부모는 이를 격려하고, 전통 복장을 입혀서 축하를 해주는 전통이 있다.
천 년 만 년을 갈 것 같던 로마가 1453년 오스만 트루크 메흐메트 2세에게 망한다.
전차 경기장을 지나니 낯익은 건물이 눈에 들어 온다. 가까이 가서 표지판을 보니 오스트리아 황제 빌헬름 2세가 선물한 우물이다. 로마제국 이후 중원을 다스리게 된 터키, 10대 술탄 술레이만 전성기에는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의 34개 나라를 지배하게 된다. (술레이만은 솔로몬의 터키 식 이름이다) 슐레이만과 그의 아내 휘렘(본명 알렉산드레 록셀라나)의 사랑 이야기는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가운데 원은 비잔틴 황제의 대관식이 이루어지던 곳.
바깥 열 두 원형은 12 사도를 의미했다고 한다.
교회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무슬림들이 이 성화에다 덧칠을 한 것이 어느 정도 복원이 되었다.
정말 귀한 자료이다.
성 소피아 성당이다.
유스티나우스 로마 황제가 이 성당을 짓도록 명령을 했다. AD537년 성전이 완공된 후 그는 외친다.
"내가 솔로몬을 이기었노라."
소피아 성당은 1453년 5월 29일부터 1931년까지 이슬람 사원이었다가 1945년 2월1일부터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비잔틴 건축물, 소피아 성당.
예술적 가치로는 모자이크, 대리석 기둥, 돔을 통해 건축의 역사를 바꾸었다.
1520년 스페인의 세비야 성당을 짓기 전까지는 이 성당이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고 한다.
톱카프 궁전 입구이다.
톱카프는 터키 어로 '대포 모양의 문'이라는 뜻이다.
오스만 제국 전성기 1467년, 메흐메트 2세 때 완공되었다.
3개의 정원,시청각관,도서관,전시관 들이 있다.실크로드를 통해 宋,元,明 외에 일본 아미라 자기,유럽의 각종 1만 2천여 점의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정원 오른쪽에는 수백 명의 조리사가 궁중의 식구들과 방문객들을 위한 식사를 준비했던 곳도 볼 수 있다.
엄청난 규모의 하렘은 술탄의 부부, 어머니, 환관, 술탄의 여자들이 살았던 곳으로 화려했던 그 시절을 엿볼 수 있다.
이곳은 돌마 바흐체 궁전.
오스만 제국의 내리막길에(1843-1856년) 술탄 압둘 마지트에 의해 지어졌다.
홀이 43개, 285개의 방, 발코니가 6개,접견실이 56개, 750개의 등이 달린 4.5톤의 샹들리에.....인테리어 장식과 각종 名畵들은 모두 유럽에서 수입, 큰 목욕탕 하맘이 6개가 있다. 스페인 궁전, 베르사이유 궁전을 방불케 하는 초호화 궁전이다.
터키의 초대 대통령 아타 튀르크가 이곳에서 1938년 11월 10일에 숨을 거두었다.
궁안의 모든 시계는 9시 5분을 가리킨다.
아타튀르크의 사망 시간이다.
혼자 갔더라면 건질 수 없는 기념 사진이다.
이 순간을 담아 준 아내가 고맙다.
서울에서 왔다니까 사진을 함께 찍자고 한다. 몇 마디 말로 기쁨을 함께 나눈 터키의 젊은이들.
터키, 형제의 나라.
동굴 극장에서 터키의 전통 무용에 이어 밸리 댄스를 감상했다.
각국의 관광객과 함께하는 포크 댄스도 즐겼다.
보스 포러스의 아름다운 뱃놀이,
에게 해의 저녁 노을,
톱카프 궁전에서 86 캐럿의 영롱한 다이아몬드, 술탄이 전쟁에 들고 다녔다는 화려한 검, 페르시아 황제한테 선물하려고 했다는 보석이 박힌, 예술품 같은 단검.
히에라 폴리스의 꿈같은 온천욕.....
세상은 넓고 갈 데는 많다.
열심히 일했으니 부지런히 떠나자.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첫댓글 실제로 터키 톱카프 궁전 뜰에는 이렇게 포인트를 정하여 세계의 중심이라고 표시해놓은 곳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