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조용하고 세상은 고요하다 The house was quiet and the world was calm
월리스 스티븐스
집은 고요하고 세상은 조용했다.
독자는 책이 되고 여름밤은
책의 살아있는 마음 같았다.
집은 고요하고 세상은 조용했다.
말은 책이 없는 양 말하여지지만,
독자는 지면 위에 몸을 굽히고,
굽히고 싶어하고, 무엇보다도 책이
진리인 학자이고 싶어하고, 그에게
여름밤은 생각의 완전함 같기를, 집은 고요하고 고요할 수밖에.
고요함은 의미의 일부, 마음의 일부.
그것은 지면에 다가가 차오른 완전함.
그리고 세상은 조용했다. 조용한 세상의 진리,
그 안에 다른 의미가 없는, 그것은 바로
조용함이며, 바로 여름이며, 밤이며,
독자가 몸 굽히고 그 자리에 책읽기이다. (김우창 옮김)
[단상] 여름밤에 읽는 이 한 편의 시!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1879~1955)의 책읽기, 혹은 고요에 관한 시가 그것. 시는 고요에서 나와 고요로 돌아간다는 폴 발레리,「단 한 번만이라도 완전히 고요해진다면」의 시인 릴케, 내적인 고요만한 행복은 없다고 한 시몬 베유, 안셀름 그륀에게 고요는 이미 있었다. 고요가 없으면 같음이 계속된다는 철학자 한병철에게 정신이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내거나 수용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고요가 필요하다는 사실. 이렇듯 차이를 생성하고 포이에시스(Poiesis)에 이르는 고요의 시선과 마음은 먼저 이덕무의「夏夜讀書」에 머문다.
燭花頻剪夜三更(촉화빈전야삼경) 촛불 심지를 자주 자르며 밤은 삼경에 이르고
獨對遺編萬感生(독대유편만감생) 홀로 옛 성현의 책을 마주하니 만 가지 감회가 이는구나.
蟬曳殘聲過別樹(선예잔성과별수) 매미는 남은 소리를 끌며 다른 나무로 넘어가고,
月移虛影入空庭(월이허영입공정) 달빛은 기울어 빈 그림자를 뜰안에 비추는도다.
여름밤 독서의 아름다움과 깊이가 느껴지는 이 시에서 우리는 한 유생-독서인을 만나게 된다. 촛불 심지를 자르고, 점점이 멀어져 가는 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교교한 달빛이 뜰안을 비추는 풍경과 내면에서 남다른 감회에 젖는 것은 홀로 책읽는 사람만이 누리는 순수한 기쁨이다.
한편,「검은지빠귀 새를 바라보는 열세가지 방식」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의 여름밤은 어떠한가? 고요한 책읽기가 전부인 집의 여름밤은 하나의 진리가, 은유가 살아있는 시간이다. 생각의 몰입과 완전함으로서의 팽이. 팽이의 고요는 의미와 마음의 일부이며, 독자의 책과 책의 독자가 만나는 장이다. 이 시는 책읽기를 통해 인간의 의식과 세계가 어떻게 하나로 녹아드는지 보여주는 아름답고 심오한 텍스트로서, 책읽기의 핵심은 책을 읽고 진리에 이르고 스스로의 뜻에 따르며 그렇게 함으로써 과부족이 없이 마침내 충족된 평화에 이르는 것이다.(김우창,「홀로 책읽는 사람」) 이 마음의 평정이야말로 참된 희열-법열이자 선(禪)이며, 실재로서 주이상스(jouissance)인 것이다. 이‘바깥에 사로잡히는 경험’이 진정한 시간으로서 문학적 사건이라면, 책읽기는 여름밤마저‘책의 의식’처럼 느끼게 하는,‘완전한 몰입’이다.
월리스 스티븐스에게 고요는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마음과 사물이 서로 떠나지 않은, 심물일여(心物一如)의 경지를 말한다. 그에게 진리란 별도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거창하고 신비로운 곳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 집과 세상이 고요해진 바로 그 순간의 진리. 홀로 책읽는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집이 곧 우주라는 사실에 있다. 거문고자리와 전갈자리, 그리고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만나는 견우와 직녀의 별자리가 겸손한 독자의 머리맡에서 빛난다. 말과 뜻, 마음과 사물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새로운 사물로 마음으로 되살아나는 밤의 고요. 여름의 미토스는 내 안의 모든 것이 열리는 계절이다. 로망스다. 고요에는 또 무엇이 있는가?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
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 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오규원 시「고요」전문
첫댓글 월리스 스티븐스에게 고요는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마음과 사물이 서로 떠나지 않은, 심물일여(心物一如)의 상태를 말한다. 그에게 진리란 별도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거창하고 신비로운 곳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 집과 세상이 고요해진 바로 그 순간의 진리. 홀로 책읽는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집이 곧 우주라는 사실에 있다. - 채우 김상환 시인님의 글은 언제나 '심물일여'의 그 고귀한 정신을 깨우쳐줍니다. 책 읽는 사람의 등을 보고 있으면, 세계는 빛나는 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