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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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百濟時代)에는 동노현(冬老縣)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는 군령현(郡領縣)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조양현(兆陽縣)이라고 하였다. 1396年(朝鮮太祖 4年)에는 고흥군(高興郡)에 속(屬)해 있었으나, 1442年(世宗 23年) 폐현(廢縣)되어 조양면(兆陽面)에 편입(編入) 되었다.
1911년 행정구역(行政區域) 폐합(廢合)에 의하여 조양면(兆陽面)과 대곡면(大谷面)을 합(合)하여 조성면(鳥城面)으로 개칭(改稱) 현재(現在)에 이르고 있다. 지금 면 소재지는 조성리(鳥城里)로 운영(運營)되고 있다. |
[원촌(院村) : 조성면 조성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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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촌리는 한때 대곡면 지역으로서 조선조 때 파청역(波靑驛)에 딸린 조성원(鳥城院)이 있으므로 원몰 또는 원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월리, 월평리, 연촌리, 금장리를 병합하여 조성리라 해서 조성면에 편입되었으며 조성면 소재지에 지서, 학교, 우체국, 시장, 역 등이 있다. |
[월평(月坪) : 조성면 조성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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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月坪)마을은 본래 대곡면 지역으로 일제시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조성리에 병합되었으며 월평(月坪)이라 하여 한 개의 자연 부락이 되었다. 약 300년전 영광김씨(靈光金氏)가 살기 좋은 곳을 찾다가 이 마을에 들어와 보니 금장산(金庄山)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산세가 좋고 농토가 비옥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마을 중앙에 큰 구덩이가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우측 마을에는 효자(孝子)가 배출되고 좌측 마을에는 효부(孝婦)가 배출된다는 구전과 함께 구멍이라 불러오다가 약 150여년 전부터 마을 뒷산 금장산(金庄山)이 반달모양으로 마을을 감싸고 있다 하여 월평(月坪)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사월(沙月) : 조성면 조성3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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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마을은 옛 조양현 관문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매뚝, 서드래, 새터, 서당촌을 병합하여 사월(沙月)이라 하였다. 사월마을은 1580년(광해8년) 성령대군 종의 후손 좌승지 전주 이원윤(李元閏)이 폐모 사건에 연류되어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인조반정 이후 특사로 풀려 벼슬을 버리고 낙남 정읍 능주를 거쳐 1626년 축내 마을에서 거주하다 2년후 인조6년(1628년)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조양현 당시 마을앞이 포구로 현 대곡천이 마을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어 서드내라 불렀으며 이후 마을 형국이 반달 모양의 형국에서 연유 사월(沙月)이라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석부(石鳧) : 조성면 조성4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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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부마을은 한때 대곡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중돔, 원촌, 깐치등, 광대샘을 병합하여 석부 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창녕조 부정공 조대관이 득량 박실을 거쳐 한실(현 중촌) 마을에 정착하고 그의 8대손 광진이 1760년 경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원촌이라 칭하였다 한다.
이 마을의 지명은 약 150여년전 조광진의 며느리 유택을 마을뒤에 정하고 묘자리를 파는데 그곳에서 오리형의 돌이 출토되어 그후 마을명을 원촌에서 돌오리 즉 석부(石鳧)로 개칭하여 부르고 있다. |
[평촌(坪村) : 조성면 조성5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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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촌(坪村)마을은 한때 대곡리에 속하였으나 1980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분구 되어 조성리 5구로 편입되면서 한 개의 자연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1910년 경에 김해인 김경환(金敬煥) 대곡에서 이주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의 지명은 대곡천이 굽이굽이 흐르는 물길따라 하천의 구부러짐이 활궁(弓)자 같다하여 궁장터로 불리워 왔으나 구장터로 와전되었으며 1980년 취락구조 개선사업 이후 분구 조성5구로 편입되면서 들 가운데 형성된 마을이라 평촌(坪村)이라 칭하였다. |
[매곡(梅谷) : 조성면 매현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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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현리는 한때 보성군 대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궁현리, 연전리, 구입석리, 덕촌리 일부와 흥양군 대서면의 남당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매곡과 궁현외 이름을 따서 조성면에 편입되었다.
매곡(梅谷) 마을은 장(張), 서(徐), 황(黃) 3성씨가 살았다고 구전 되어오나 기록은 없고 1430년(중종 12년) 가 입향 매화(梅花) 낙지형의 명당(明堂)이라 하여 터를 잡고 중종(中宗) 35년(1540년) 천안 전(天安 全)씨, 명종(明宗) 10년 (1555년), 영광 정씨 숙종 15년(1689년), 무인박씨, 숙종 33년(1707년), 보성 선(宣)씨가 입향 마을을 형성하였다 전한다.
마을뒷산(봉두산) 형세가 단봉사지와 목화목 형국으로 생겨 왕래가 빈번하면서 매화 골짜기로 불리워 오다가 한자음 표기로 매곡으로 명명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입석(立石) : 조성면 매현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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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석마을은 영광인 대양군 정덕성의 후손 위열도가 신라현안왕조에 공훈으로 영성군(현, 영광군)에 봉하고 녹읍을 받고 사우대양군 및 영성군 유택을 현 마을 뒤에 정하므로 유택을 보존하고자 그후손들이 영광에서 이주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한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 북동쪽(매현리 561번지) 에 10여기의 선돌군이 있어 그 연유로 선돌(작은돌) 이라 불러왔으며 이를 한문식으로 표기하여 입석(立石)이라고 하였다. |
[덕촌(德村) : 조성면 매현3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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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촌(德村) 마을은 한때 보성군 대곡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궁현리와 상선돌(석촌), 수나리 분토골를 병합하여 덕촌(德村)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조선조 성종 甲千년에 장수인 영의정 “黃喜” 5대손 “ ”이 남원에서 살기 좋은 곳을 찾기 위하여 이곳을 지나다, 봉두산 형국이 풍요롭고 경치가 좋아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의 후손들은 각지로 흩어지고 현재는 1가구만 살고 있으며 선조조에 입보성한 경주인 김택보의 6대손인 김인수가 촌동마을에서 이주하여 마을이 번창하였다 한다.
이 마을의 지명은 마을 어귀에 선돌이 상선둘(큰윗선둘)이라 하였으나 선돌 모형이 마치 구걸을 요하는 형태로 좋지 않다하여 선돌에 성덕을 베푸는 마을이라 하여 덕촌(德村)이라 개칭하였다. |
[사초(莎草) : 조성면 은곡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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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곡리는 한때 보성군 대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야, 은림, 세동, 반곡, 사초, 입석, 덕촌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은림과 반곡이름을 따서 은곡리라 해 조성면에 편입되었다.
사초 마을은 1593년경 경기도 광주에 거주하던 경주인 이욱이 왜적과 싸우다 많은 공을 세웠으나 당시 경주이씨면 모두잡아 학살하는 바람에 이순신 장군 휘하인 이곳으로 피난 정착하게 되었다.
이 마을의 지명은 마을 뒷 산 준령의 형국이 뱀 처럼생겨 뻗어 내려왔고 뱀이 풀속에서 나온다는 말에 연유 뱀사를 넣어 “사초정”이라 이름 붙여 내려오다가 1943년경 뱀사를 빼고 떼속에서 풀이 자란다 하여 떼 “사(莎)” 풀“초(草)”로써 사초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반곡(盤谷) : 조성면 은곡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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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곡(盤谷)마을은 한때 대곡면에 속한 지역으로 서리골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면 가는줄을 병합하여 자연마을로 법정리인 은곡리와 행정리인 반곡(盤谷)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시 낙남한 창녕인 조대관이 당시 산양현 대곡면(현 중촌)에서 시어로위락 서기 1615년 별세하자 봉두산 밑에 유택을 정하고 그 후손이 유택을 보존 하고자 이주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 마을의 지명은 조대관의 유택이 봉두산6대 명당중 하나이며 혈이 반용혈이라 전하여 그의 후손들이 “반용혈”하에 거주하에 마을명을 반용혈이라 칭하여 “반(盤)”자를 이용하여 서죄골로 칭하여 오던중 한문식으로 반곡이라 표기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은림(隱林) : 조성면 은곡3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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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림(隱林)마을은 임진왜란시 낙남 대곡면(해 대곡리)에서 시어로 위락한 창녕 조대관이 서기 1615년 세상을 떠나자 봉두산(峰頭山) 및 (현 반곡마을 뒤)에 유택을 정하고 보존하고자 아곳에 이주정착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한다.
이 마을의 지명은 옛 조양현과 분형현(낙안) 경계 마을로 비끼재 밑에 있는 터라해서 “비귀”라 불렀으며 그후 마을 형국이 맹호 출림형의 명당이라 하여 한때 호산으로 불러 왔으나 마을이 산과 숲으로 감싸 숨겨져 있다하여 은림(隱林)으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대야(大也) : 조성면 은곡4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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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大也)마을은 한때 대곡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대실과 봉함촌이 병합 대야라 하여 조성면에 편입되었고, 1980년 상신 마을에 딸린 갈산을 병합하였다.
이 마을은 약 250년전부터 소씨와 황씨가 거주해 왔다고 구전되나 확인할 수 없고 마을 어귀에 있는 정자나무를 소씨가 심은 정자라 하여 소정지라 불린 탓으로 보아 추측할 수 있다. 그후 약 114년전 보성 오(吳)씨 상백이 충청도에서 살기 좋은 곳을 찾기 위해 왔다가 이 마을에 들어와 보니 담봉함서의 명당이라 정착하였다고 한다.
지형이 가장(양다리 벌린) 형태라 가장금 또는 소정지라 불렀으며 마을이 형성되자 넓다란 공지가 있어 대실이라 하여오다 담봉함서의 풍수리지설에 의해 봉화하 하여 대실과 봉합촌을 병합 대야라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상신(上新) : 조성면 신월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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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월리는 한때 보성군 대곡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천동리, 하신리, 상신리, 월곡리, 갈산리를 병합하여 하신과 월곡의 이름을 따서 신월리라 하고 조성면에 편입이 되었다.
상신마을은 약 300여년전인 1650년경, 인근 천동 마을에 살았던 경주 김씨가 왜구의 침입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지고 “광유” 임씨가 입촌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지명은 조선조에 여한 현 원터가 있다하여 원골(상신)이라 하였다. |
[천동(泉洞) : 조성면 신월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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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泉洞) 마을은 주변에 흩어져 있는 묘적으로 장수황씨, 보성오씨가 거주했던 것으로 추측되나 기록은 없고 경주인 김택선이 선조조에 살기좋은 곳을 찾아 경주에서 이 마을에 들어와 보니 산세가 좋고 농토가 비옥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이 마을의 이름은 마을 곳곳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우물(샘)이 10여군데 있어 샘이 많다하여 샘골이라 현재까지 부르고 있으며 이를 한문식으로 표기하여 천동(泉洞)이라 한다. |
[수당(水塘) : 조성면 귀산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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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산리는 한때 산양면 대곡면 지역으로 거북처럼 생긴 산밑이 되므로 귀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당리를 병합하여 귀산리라 하여 조성면에 편입되었다.
수당 마을은 고려조 초에 진동 김씨가 집성을 이루며 살았다고 하나 당시 나라에 왕자가 태어 낳는데 등뒤에 전라도 진동김씨 후예라는 점자가 새겨진 것을 왕이 이상히 여겨 진동 김씨를 수소문하자 반역자로 몰리까봐 본관을 광산을 변경 각지로 실향했다는 말이 구전되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원말 마을 앞에 귀꽤가 있다하여 귀당(龜塘)이라 불렀고 그후 마을 뒷 산세가 연화이수형국, 동쪽은 마봉이 있으며, 서쪽에는 갈 몰래 형국이며, 남쪽은 학무릎형국과 귀재가 있다하여 수당으로 부르고 있다. |
[귀산(龜山) : 조성면 귀산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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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산마을은 보성 오씨가 정착 살아 왔으나 후손들이 실향하고, 1595년 무렵 축내 마을에 임보성한 장흥인 관산군 광세의 후손이며 진사 회중의자 삼도공 임계영이 산의 형국이 거북형이라 부귀영화와 자손만대 창성 하리라 정착하였다. 지금도 장흥(長興) 임(任)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
[삼정(三亭) : 조성면 축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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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내리는 한때 산양현 대곡면의 지역으로써 방죽 안쪽이 축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장리, 전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축내리라 해서 조성면에 편입되었다. 삼정 마을은 구전에 의하면 이천 정씨가 살았다는 설이 있으며 1511년 장흥인 임국담 회중이 장흥 관산에서 입촌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임희중이 택지를 정할 때 산세가 갈마음수격이라 하여 마을앞에 저수지를 신축하고 저수지안 마을이라 하여 축내(築內)라 하였으며 마을 중심지에 정자나무 3그루가 있다하여 삼정(三亭)이라 하였다. |
[중촌(中村) : 조성면 대곡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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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리는 한때 대곡면의 지역으로 큰 골짜기 안이 되므로 한실 또는 대곡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고장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대곡리라 하여 조성면에 편입되었다.
중존마을의 형성시기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고조리(마을명)이란 고씨가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아 고씨가 맨 처름 정착 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임진왜란시 창녕 조대관이 낙남 정착하였으며 이후로 광주(廣州) 이씨가 입촌 일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고씨 조씨 이씨가 살았다 해서 고조리라 불렀으며 이후 중똠 또는 큰똠이라 하다가 큰 골짜기 안이 되므로 한실이라 하여 한자음 표기로 중촌(中村)이라 하고 있다. |
[고장(高墻) : 조성면 대곡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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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마을은 조선 중종 丙黃年에 從 진사 박연(朴衍)을 따라 김해에서 이곳에 왔던 김초(金超)가 산세가 좋고 농토가 비옥하며 돌의 경관이 고고함을 보고 정착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이름은 예부터 돌이 많아 담장을 이루웠고 담 높이가 높다하여 높은댐이라 불리워 오다가 한문식 표기로 고장(高墻)이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고내(庫內) : 조성면 우천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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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리는 한때 산양현, 조내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동리, 안성리, 고내리와 대곡면의 고장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소와래와 고내의 뜻을 따서 우천리라 하고 조성면에 편입 되었다.
고내 마을은 백제시대부터 형성된 동굴현으로 어떠한 성씨가 거주 했다는 기록이 없고 고려말엽 임시와 염씨가 권력 싸움을 하다가 한림학사 임세미가 광정대부 리부상서 대광, 찬성, 좌업사(匡靖大夫 吏部尙書 大匡贊成左業射)로 조양군을 봉하고 조양현(고내마을)에 귀양 정착하게 되어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백제시대에는 동로현, 통일신라시대 제31대 군령현이 되었고 고려때에는 조양현이라 불렀으나 조선 세종 22년에 폐현되고 마을뒤 언덕위에 이충무공이 정유재란 때 재기의 군량을 얻었던 군량창고인 조양창이 있어 고안 즉 고내(庫內)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대동(大洞) : 조성면 우천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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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마을은 형성 시기는 상고할 수 없으나 약 360년전 김해 남추공 김선이 대곡리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며, 마을 이름은 조양현의 육방 관속들이 거주하면서 큰 고을을 형성 큰고을(大洞)이라 부르고 있다. |
[청능(靑陵) : 조성면 봉능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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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능리는 한때 산양현 조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방리, 봉산리, 청능의 이름을 따서 조성면에 편입되었다.
청능 마을은 마을주변에 흩어져 있는 묘적 및 지명(강가배미는 강가밭)으로 보면 진주강씨와 보성선씨가 오랫동안 거주했을 것으로 추측되나 기록은 없고 조성면 감동마을에 입촌한 김해김 구청자신 순재공 홍업이 약 430년전 감동마을에서 이주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한다.
마을의 지명은 동쪽에 당집이 있어 당산제를 지낸 연고로 땅꼴이라 불러오다 마을 뒤산과 흠동에 차나무를 재배해 항시 푸른 능선의 차밭이라 하여 청능이라 한다. |
[봉산(鳳山) : 조성면 봉능3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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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 마을은 약 500여년전 탐진최씨 몽득의 장자 남정이 자연 경관을 따라 유람하면서 마을 형국이 스님이 춤을추는 형태라 불심이 서린 곳이라 하여 진원박씨 딸을 맞이하여 정착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지형이 스님이 바랑을 지고 춤을 추는 형국이다 하여 불뭇등이라불러 오다가 마을 뒷산에 봉함의 명당이 있어 각지에서 지관의 래왕이 잦아지면서 봉산(鳳山)으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신방(新坊) : 조성면 우천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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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방 마을은 여산송씨(礪山宋氏)가 처음 거주 하였다하나 상고할 수 없고 조선조 중종 19년 보성선씨(寶城宣氏) 선측이 득량면 정흥리에서 이 마을에 들어와 보니 주월산이 웅장하여 산세가 좋고 농토가 비옥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마을의 지명은 보성선씨가 입촌하기 전부터 마을명을 미고라 불렀다고 하며 당시 촌전(新坊)이라 하고 있다. |
[덕정(德亭) : 조성면 덕산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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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리는 한때 산양현 조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감동리, 산정리, 수풍리 덕정을 병합하여 덕정과 산정의 이름을 따 덕산리라 하여 조성면에 편입되었다. 덕정마을은 박씨가 마을에 노송을 심고 정자를 지었다하여 방정지라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방씨가 최초로 입촌정착 이후 정씨ㆍ지씨가 연고를 맺은 것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마을지세가 작등형상이라 하여 “까치머리라 불러오다가 마을앞에 방씨가 김은 노송 5주와 정자가 있어 마을주민들의 휴식처 및 마을일을 협의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방씨가 지은 정자라 하여 방정지라고도 불렀다. 그후 간척지 축조공사가 완공되어 각지에서 유랑민이 입촌 정착후 덕을 그리는 정자라하여 덕정이라 명명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수풍(水豊) : 조성면 덕산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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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풍마을의 형성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산양현 조내면 소재지로 수풍천을 끼고 교통 및 행정의 중심지로 발달 약 250년전 김해 김만석이 득량 도촌에서 이주 정착했다고 구전될 뿐이다.
마을의 이름은 주월산을 배경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물이 흔한 마을이라 하여 물팽촌이라 불렀으며 그후 물풍쟁이라 불러오다가 한문식 표기로 수풍이라 하였는데 1968년 마을앞에 저수지를 축조하므로서 풍수설과 현실이 일치되었다고 한다. |
[산정(山汀) : 조성면 덕산3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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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마을은 1628년경 탐진 최남진이 장흥에서 살기 좋은 곳을 찾기 위해 조성에 왔다 이 마을에 들어와 보니 산의 수려함과 하천에 흐르는 물이 석관수임에 이곳에 정착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이름은 1679년 탐진최씨 사취당이 문과에 급제하자 산의 신성함과 강상(임금)을 배알하였다 하여 산쟁이(山亭) 명명해 오다가 1941년 매년 가뭄이 심해 마을내 우물이 고갈되고 하천수가 메마르자 “亭”자는 메마르다 하여 “汀”자로 개정에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감동(柑洞) : 조성면 덕산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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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마을은 마을주변에 흩어져 있는 묘적과 구전에 장수황씨를 비롯한 몇 씨족들이 거주했다고 하나 상고할 수 없고 약 450년전 김해 수로왕 후손으로 고려조에 도청관직을 역임하였던 경신을 중시조로한 10대손 가 김해로부터 고장마을에 정착 그 증손인 구정이 감동마을로 입향마을을 형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북쪽 바위틈에서 나오는 물맛이 감미롭다하여 감탕골이라 불러오다 조선말 도청관 공 17대손 성균관진사가 감동으로 개칭하였다. |
[수촌(藪村) : 조성면 동촌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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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촌리는 한때 흥양군 조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수촌리와 동곡리, 신촌리 일부와 송곡면의 호동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동곡과 신촌의 이름을 따서 조성면에 편입되었다.
수촌마을은 1356년 하동 정태현이 한지(漢紙) 행상차 경상도 하동에서 이곳에 와보니 서쪽의 도름봉산이 경치가 좋고 산세가 뛰어나며 농토가 비옥하여 이곳에 정착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
[신촌(新村) : 조성면 동촌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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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마을은 형성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장자라는 부자집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오다가 1928년경 마을앞에 간척지 사업으로 비옥한 땅이 형성되자 많은 유랑민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장자 부자가 사는 마을이하여 장자마을이라 부르다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마을형국이 힘차게 뛰어 오르는 암말의 형상이라 하여 새몰(새몰)이라 불리워지다가 한문 표기로 신촌이라 하였다. |
[동곡(東谷) : 조성면 동촌3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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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곡마을은 1928년 일본흥업주식회사가 간척지 방조제 준공후 겸백 저주지 수몰 이주민 9호에 농지 10단보씩을 배분하여 이주마을을 형성하고 신촌마을에 편입 정착시킨 후 비옥한 간척지 때문에 고흥군 일대를 비록 각지에서 이주자가 유입하자 독립마을로 분리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득량면 예당리의 관터 동쪽에 있다하여 동시리 즉 동곡(東谷)이라 하고 있다. |
[신동(新洞) : 조성면 동촌4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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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마을은 1937년 간척지 방조제 준공후 비옥한 농토가 형성되자 겸백저수지 수몰이후 수몰민 이주계획에 의하여 김규원 일가가 죽곡에서 이주 정착후 각지에서 이민들이 정착 동시리(동곡)에 편입되었다가 1954년 7월 20일 분리 동촌리내의 한 개의 자연마을로 형성 되었다.
마을이름은 동시리(동곡) 동북쪽 간척지에 새로이 형성된 마을이라하여 신동이라 부르고 있다. |
[흥촌(興村) : 조성면 용전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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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전리는 본래 산양현 조내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용두와 대전의 이름을 따서 용전리라해 조성면에 편입되었다.
흥촌마을은 1928년 일본 흥업주식회사 간척지 방조제 공사시 전북 익산에서 김일출의 4가구가 공사장에 취역하고자 왔다가 비옥한 농촌가 형성되자 정착하게 되었고, 그후 1936년 무렵 고흥군에서 이민한 사람들이 정착하여 대흥마을에 편입되었다가 1954년 독립마을로 분리 용전리 내의 한 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이 잘되고 부족함이 없는 마을로 영원하리라는 의미에서 흥촌(興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
[대흥(大興) : 조성면 용전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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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大興)마을은 조양현 용두로 번창하여 왔으나 1700년 무렵 장흥 위영환이 비옥한 농토와 득량만의 풍부한 수자원을 따라 이곳에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지명은 용처럼(龍頭)처럼 생겼다하여 용머리 또는 용두포로 불렀으며 간척지가 되면서 번창했는데 간척지로 가는 큰길을 만든 후 대통이라고 불렀다하며 그후 크게 흥한다 하여 대흥(大興)이라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신기(新基) : 조성면 용전3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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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 마을은 350여년전 이천 서문보가 유배차 입촌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마을뒤 팽나무도 이즈음 심었다고 구전되어 오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장사(장군)가 많이 나온다 하여 대장촌이라 하였고 중심지가 되자 가운데똠(중촌)이라 불러오다가 해방후 새터라하여 한문식 표기로 신기(新基)라 하였다. |
[대전(大田) : 조성면 용전4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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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마을은 조선 숙종조에 경주 김광성이 사헌부 감찰의 벼슬을 그만두고 유랑생활을 하던 중 이 마을에 들어와 보니 농토가 비옥하고 남방으로 뻗어갈 수 있는 해안이 형성되어 의식주의 풍족함과 자손들이 번창할 것이라 하여 가족과 함께 정착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 마을은 조선 숙종조부터 촌전에 큰 염전밭이 있어 한밭이라 불리워 왔으며 한문식 표기로 대전(大田)이라 하고 있다. |
[정문(旌門) : 조성면 용전5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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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마을은 1580(광해 8년) 좌승지 전주이씨(全州李氏) 원윤이 강화도로 귀양을 갔다가 인조반정 이후 특별 사면되어 1623년 벼슬을 버리고 낙담 정읍 능주를 거쳐 1626년 축내 마을에 들어와 살다가 2년후인 1628년 사월마을로 이주하였고 1630년(인조 8년)이 마을로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 고종조에 전주이씨 응오가 부친 중병시 백년묵은 산돼지를 구하여 완쾌시켰으며 1888년(고종 25년) 효자 교지를 받고 이 마을에 이 효자문을 세우니 이를 정문이라 불렀는데 이효자문(爾孝子門)에서 연유 마을명을 정문(旌門)이라 부르게 되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