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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니엘 영재교육원 원문보기 글쓴이: 천사
크는 아이 셋, 크는 어른 둘
주순기 지음/방선기 추천
도서출판/예림서원
크리스챤뉴스위크가 추천하는 베스트1위
추 천 글
이 책의 주제는 자녀 양육이다. 사실 부모들이 부모다운 부모가 되지 않고서는 자녀를 제대로 양육할 수 없다. 자녀 양육은 기술이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됨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남편과 함께 세 아이를 키우면서 체험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실제로 필요한 정보요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대부분의 부모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을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고 부모 교육과 자녀 교육을 위한 교훈으로 승화시켰다. 사실 젊은 부부들이 너무 쉽게 부모가 되어버리는 모습을 본다. 그저 아기 하나를 낳기만 하면 부모가 된다. 하지만 부모다운 부모가 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젊은 부모들이 부모의 길을 헤쳐나가는 데 이 책이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 줄 것으로 확신한다.
1996년 새해를 맞으며 방선기 이랜드 사목
직장사역연구소장 / “일하는 제자들” 편집인
저자 소개 : 주 순 희
저자 주순희는 서울 태생으로 연세대 대학원(독문학과)을 졸업했다. 사랑의 교회 청년부를 6년간 지도했고, 지금은 (주)이.랜드에서 부사장으로 근무하는 박성남(남편)사이에 지희, 현희, 규희 삼남매를 키우고 있다.
역서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제자도](두란노)
[인격적인 사랑, 효과적인 훈육](두란노)이 있다.
수녀같은 순희가 아이를 셋이나.......
장차 태어날 아기는 불안하고 믿을 수 없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의 나라 백성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그 아이의 일생은 아는 게 없고 전혀 준비가 안 된 이 엄마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고 친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에 확실하게 맡겨져 있음을 점차 깨달아 가게 되면서 나는 엄마로서 성숙해져 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생후 2개월 된 “평화의 여신”
아기는 부부 사이를, 또 자칫 어렵고 소외되기 쉬운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따뜻하게 해주는 평화의 천사이다. 부부간에 긴장이 있다가도 아이가 아프면 그애를 향한 애틋함으로 어느새 하나가 되어 있기도 하고 아이가 엉뚱한 행동이나 말로 웃음을 자아내면 둘 사이의 긴장은 훨씬 완화되는 때가 많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아이는 해맑음을 안겨 주며 사랑을 베푸는 기쁨을 누리게 한다.
아기는 정형화된 일상 한가운데 있는 예술이다. 그들은 아직 사회화되지 않아 원시적이고, 아직 틀에 들어가지 않아서 창조적이다. 창조주의 손길에 저항 없이 내맡겨진 자유로운 자연의 세계와 같이 하나님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비춰준다.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사는 것은 출산할 때마다 몸이 새롭게 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엄마는 아기를 낳을 때마다 몸과 마음이 새로워진다. 아기를 다시 낳을 때마다 다시금 ‘아기 엄마’의 신선함을 회복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풍성함을 계속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당장 해내야 하는 벅찬 집안 일, 인간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아이가 쏟아내는 엄청난 과제와 병치레가 엄마의 황홀경을 깨뜨린다.
그래서 마침내는 아이가 없는 빈집을 쾌적하게 느끼게 되고 아이가 발리 커주기를 조급히 기다리게 되고 만다. 특별히 나처럼 ‘성과 중심(成果中心)’의 성향이 강한 부모라면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마음에 사로잡혀서 아이를 그저 즐기는 일에 무척 가난해지기가 쉽다.
출산을 축하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축하해, 애썼다. 건강이 빨리 회복도기를 바래.” 하고 말하곤 하는데, 미국에서는 "Enjoy you baby!"(아이를 맘껏 즐기라.)라는 인사를 한다.
긴장을 풀자. 그리고 말썽을 피우고 제 할 일을 제대로 못하는 아이에게서 내가 미처 못 풀은 선물 보따리를 풀어보자.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을 바쁘다는 이유로 아직도 덮어 놓고 있다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세상의 지혜롭다는 자들이 못 보는 것을 어린 아이들은 그 맑은 눈으로 본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 애들이 보는 그 소중한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삶은 더욱 풍성 할텐데.........,
다시 태어난 엄마
“인생의 기술은 문제점을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더불어 성장하는 데 있다”.........................버나드 M. 버루크
하루에도 몇 차례씩 아이들의 욕구 불만에 시달리고 나면 나는 탈진하고 좌절된 심정으로 잠자리에 들 때가 적지 않았다.
타고난 천성이 인생의 50%를 차지한다는데, 나의 부족으로 그에 일생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면 어떡하나!
그 애가 자기 성질을 못 이겨 할 때마다, 나나 다른 사람이 그애와 부딪칠 대마다 이 뿌리 깊은 죄책감이 건드려지곤 했다. 그런데 둘째가 5살쯤 되던 어느 날 아침 묵상 시간에 하나님은 로마서8:28절 말씀으로 마침내 이 죄책감의 사슬에서 나를 풀어 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9).
그렇다!
둘째를 가졌을 때의 어려움은 어차피 역부족의 상황이었고, 하나님은 인생이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의 책임을 모두 우리에게 물으시는 분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부분이야말로 하나님이 맡아주셔야 할 은혜의 부분이 아니던가.
그때의 해방감이란..........,
그 이후로 나는 둘째의 엄마로 다시 태어났다. 그애와의 관계에 늘 깔려있던 절망의 구름이 걷힌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둘째를 향한 남다른 소망을 주셨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자유로운 상태에서 그 애를 대하면서 새록새록 발견하게 되는 것은 까다로운 성격 속에 감추인 섬세한 감각과 따뜻한 마음이다.
둘째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각별하고 사랑을 받거나 아름다움을 느낄 때 쉽게 쉽게 감동을 받곤 한다.
지금도 둘째와는 씨름을 많이 한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의 격려를 받으며 해 나가는 씨름이라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승리의 가장 무서운 방해꾼은 ‘절망’이 아니던가.
병역 필
여자에게서 출산 후 2-3년이 군대 생활과 같다고 한다.
살림하랴 애보랴 시장 갈 정신도 없어 반찬은 늘 그렇고 해서 남편 보기 미안하고, 집안은 늘 어수선하고 하루 종일 좁은 공간에서 아이라는 상관의 지시(울음)에 우왕좌왕 하다보면 하루가 간다.
인류가 가슴에 품고(?) 결혼에 임했는데......
차분히 앉아 신문을 볼 시간이 있나, 보고 싶은 친구를 만날 수 있나. 천방 지축 세상 모르는 애를 데리고는 식당도. 남의 집도 쉴 곳이 못 된다. 어쩌다 바람을 쐬러 애를 안고 나가면 어깨죽지는 빠져 나가는 듯하고. 애는 애대로 불편해서 찡찡대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얘기라도 해볼까 하면 쉴새없이 보살핌을 요구하는 아이의 모습에 결국은 아쉬움을 남기고 자리를 떠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남편과의 오붓한 시간은 언제 가져봤던가 싶다. 가끔씩 찾아오는 부부동간 기회도 몇 년간은 그림의 떡이다. 이쯤되면 ‘내가 기대하던 결혼생활이 이거였나?’ 싶다.
하루 이틀로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이니 터널에 갇힌 기분마저 든다. 아이는 엄마를 허물어 간다. 생활의 리듬도. 취미도. 품위까지도.........,
큰 꿈을 갖고 결혼에 임한 한 여자는 어느새 1시간의 단잠. 한끼의 차분한 식사. 남편과 오붓한 외출을 사모하는 단순한 여자가 되어버린다.
말 할 것도 없이, 아이로 인한 기쁨과 보람은 모든 엄마들의 삶의 이유이다. 해맑은 미소와 귀여운 몸짓, 자라가는 그 모습은 프랑스 영화보다 황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보람과 기쁨 사이사이로 내 생활이 철저하게 포기되는 데서 오는 욕구 불만이 삐죽삐죽 튀어 나온다.
‘신은 여기에도 또 저기에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들은 만들었다.’는 유대 격언이 있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한 여자가 어떻게 이런 위치가 될 수 있을까.
나의 권리가 유보되고, 삶이 내 의사와 전혀 관계없이 전개되는 바로 그 현장에서 ‘엄마’가 태어나는 것이다. 마치 터무니없는 기합과 의미 없어 보이는 일에 젊음이 바쳐지는 것을 견디는 동안 인격이 빚어지는 군대에서처럼.
미개인의 대열에 서서
셋째를 가졌을 때, “하나님, 아이의 건강과 성격을 책임져 주지 않으시면 전 정말 자신 없습니다.”하고 졸랐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 주셔서 건강하고 당당한 막내를 주셨다. 아기는 언니, 오빠의 정서를 풍부하게 해주었다. 해맑은 표정과 귀여운 몸짓,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아기를 돌보는 동안 둘은 채워지고 성숙해 갔다. 아이를 데리고 놀아 주는 언니와 위험한 것을 부지런히 치워주는 오빠의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늦게 난 동생 덕분에 우리집 첫째, 둘째는 아기들을 무척 좋아하고 재밌게 데리고 놀 줄 안다. 큰 애는 동네 꼬맹이들을 모아 놓고 미니 올림픽을 열 정도이다.
막내는 큰딸의 정서를 열어 주는 귀여운 창문이다. 원래 첫째들은 모범적(?)으로 크느라 감정 표현에 어려움을 느끼는 편인데, 나는 특히 그면에 서툴러서 큰 애를 정서적으로 풍성하게 해 주지 못했다. 그런데 막내가 그 문을 열어 준 것이다.
둘은 목욕도 같이 하고 인형놀이, 학교놀이도 하면서 서로를 채워 간다. 큰애는 학원에서 어설프게 배워온 영어를 동생에게 가르치면서 익히고, 그 덕분에 막내는 무료로 조기 영어 교육을 받는다.
아이의 욕구만큼 정열적으로 놀아 줄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 놀이에 대한 아이들의 열정은 정말 못말린다. 놀아 주는 데 별로 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판’만 잘 벌여 주면 된다. 저녁 때 촛불을 켜 주거나, 넓은 이불을 펴주고 씨름 방송을 신나게 해준다. 방학 때는 친척이나 친구와 함께 자게 하거나 가끔씩 마루에 이불을 펴고 셋이 함께 자게만 해주어도 아이들은 흥분한다!
둘째를 낳기 겁나하는 엄마에게 나는 첫째가 1의 힘이 든다면 둘째는 1/2. 셋째는 1/3의 힘이 들 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시127:3-5)
모이자! 뭉치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10:24).
여름, 겨울 방학을 제외한 매주 수요일에는 동네 엄마들이 함께 모인다. 관심있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모임으로 가칭 ‘아름다운 모임’이라 칭했다. 몇 주에 걸쳐 역사나 환경 공부도 하지만 이 모임의 주된 관심사는 ‘자녀 양육’이다. 아이들은 정상적으로 성장해 가지만 초보 엄마들에게는 아이들의 반응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도전인 때가 많다.
대개 7-8명의 엄마들이 모이는데 아이들만 해도 한 방에 가득하다. 갓난애기부터 꼬맹이들이 다녀가면 장난감이 망쳐지기도 하고 큰애가 정리해 놓은 서랍이 뒤죽박죽이 되거나 아껴놓은 사탕이 껍질만 남기도 한다.
처음엔 아이들끼리 서로 싸우느라 엄마들이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아이들도 차츰 적응해 가고 늘 동네에서 만나는 친구들이라 이내 가까워지기도 하였다. 혼자 고민고민하다 엄마들과 나누면 나누는 것 만으로도 짐이 덜어진 느낌이고. 함께 고민해 주면서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각 연령의 아이마다 나름대로 비슷한 씨름거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크게 위로받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눈시울을 적시면서 얘기를 하면서 아이에게 미안해 하고 자신을 반성하는 감동적인 시간을 갖기도 한다. 아이들을 잘 키워볼 마으로 모인 엄마들이 많은 것을 나누는 동안 정도 들고 생활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도 함께 나누는 관계가 되어 간다!
엄마 이전의 이야기
“어딘가 하늘 아래 하나님께서 그대를 위해 그대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마련해 놓았노라”..............호러스 부쉬넬
결혼을 하면 여자는 일이 곧 사랑(가정, 부부관계)이고 사랑이 일인데 반해 남자는 일과 사랑이 반반씩이라고 한다. 남녀를 비교하면 대체로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여자는 사랑이 일이고 일이 사랑인가?
함께 있다보면 내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그런 부인들을 나는 진심으로 부러워한다. 아이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저서적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부인들이다.
그런데 나는 오랫동안 가정에서의 삶만으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어떤 갈증을 언뜻언뜻 느껴왔다. 그런 목마름을 강하게 느낄 때마다 내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거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제대로 살지 못한 탓이라고 여겨왔다.
문가 일을 벌이고 결과를 봐야 만족하는 나의 성격은 한없이 푸근하고 포용해야 하는 아내와 엄마의 역할에는 잘 안어울리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이 한 사람의 불안한 기질에 제한받으시는 분인가?
우리는 정말 어설프고 불안하게 부모의 삶을 살지만 그 엉성한 구멍 구멍에 하나니미 개입하시는 경험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내가 엄마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을 때 그 분은 밤새고 나를 괴롭히신다. 마침내 하나님 앞과 아이 앞에서 내 잘못을 고백하기까지.
곤경에 처하고 아이와 마찰이 심할 때는 잠에 약한 내가 이른 새벽 교회에 무릎꿇고 있고, 바른 양육을 갈망하며 책을 읽고 조언을 구하게 하시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후배 엄마들과 경험을 나누게 하신다.
의욕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결제가 없는 의욕은 자칫 흉한 욕심일 수가 있다. 어떤 면에서 여자는 남편과 아이들을 통해 정화되고 거룩해진다. 그렇다고 그 정화의 과정이 억울함과 자포 자기의 연속일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신사적이시다. 하나님은 인류의 시작이래로 여자가 처한 위치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그 억울하고 부당한 입장에 처한 여자들을 존귀하게 대우하시고 세상의 반응에 도전하셨다. 한 인간으로서 욕심을 내려놓은 과정을 그분은 섬세하게 배려하시고 하나를 버릴 때마다 존귀함을 더하신다.
움켜잡음은 가난함의 표시이다. 보물을 본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기꺼이 내다 판다. 희미한 눈이 열리고 나의 욕구를 채우기엔 너무 좁다고 여겼던 가정 속에 세계가 보이고 하나부터 열까지 뒤를 봐 주어야하는 아이들 속에서 벅찬 미래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저렇게 해보고 씨름하는 동안. ‘내 속에서 거칠게 불쑥불쑥 자라던 막연한 욕구들이 어느덧 뽑힐 것은 뽑히고 다듬을 것은 다듬어지고 햇살과 비를 흠뻑 맞으며 쑤욱 자라기도 한 느낌이다.
신나는 것은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을 그곳에 하나님이 기대를 갖고 나를 보고 계심을 감지한다는 것이다.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는 하나님(시139:2).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 하나님께 나의 현재의 갈증. 미래의 꿈까지 맡기면서 깊은 평화를 맛본다.
여섯 살에게 당한 ko패
“험한 언덕을 오르려면 처음에는 천천히 걸어야 한다.”...............세익스피어
요즈음 금연 학교에서는 다른 접근을 한다고 한다. 하루에 3갑씩 피우는 사람은 ‘60일 작전’, 2갑을 피우는 사람은 ‘40일 작전’에 들어가는데 첫날에는 평상시 실력으로 하루 3갑(또는 2갑)을 마음 놓고 편안하게 다 피우라고 한단다.
그 다음날에는 딱 한 개피를 뺀 59개피(39개피)를 피우고 셋째날에는 또 한 개피를 빼고 피우는 식으로 충격을 줄이고 점차적으로 적응해 가도록 유도한다고 한다.
아이를 바르게 잘 키워야겠다는 열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아이들의 부족한 부분에 더 초조해질 수 있다.
그런대로 컨디션이 좋을 대는 아이의 부족한 면에 여유를 보이다가도 피곤한 일이 있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보내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엄마들이 매일 부딪히는 상항은 어떤 것인가.
‘동생을 괴롭힌다.’, ‘밤 늦게까지 숙제 때문에 씨름한다.’, ‘아침에 너무 늑장을 부려 매일 전쟁을 치른다.’, ‘밥 한끼 먹이기가 너무 힘들다.’ 등등. 그 순간은 정말 화가 치민다.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지혜와 여유가 빛을 발하는 상황이다. 제 앞길을 못 가리니까 보호자가 필요한 ‘미성년’이고,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임을 되새기면서 있는 지혜 없는 지혜를 모아가며 상황을 반전시켜 보는 것이다.
금연 학교의 원리를 적용해 보자면. 문제를 많이. 그것도 심각하게 갖고 있는 아이는 60일(60개월까지의 다소 긴 시간)작전을 염두에 두고 여유있게 대하자는 것이다.
하루에 다섯 번은 동생을 울리는 오빠가 있는데 어느날 두세번밖에 안 울렸다면 축제를 벌일 일이고 감탄의 표창장을 줄 일이다.
작은 진보를 놓치고 “넌 오늘도 여전히 동생을 울리고 말았구나.”하고 핀잔을 주어버리면 그애는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여 다음날에는 동생을 여섯 번 울릴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들은 몇 번 설명하고 참아주면 어느 순간 맨 꼭대기에 와 있어 주기를 부지중에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와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그 ‘사랑의 참을서’인 것 같다(롬2:4)_. 우리에겐 너무나 어려운 대목이어서 사도바울은 ‘오래 참음’을 위한 기도를 거듭 거듭 강조(골1:11)하였나 보다.
문득 생각하면 우리는 어처구니없게도 계단의 끝에 올라서서 맨 바닥에 있는 아이가 그 꼭대기에 올라오면 박수를 쳐 주겠다고 아이를 닦아 세우는 모습이기도 하다.
계단의 끝은 너무 멀다.
시간도 충분하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아이가 유쾌하고 의욕적으로 한계단 한계단을 밟아 올라가도록 해주자. 그리고 계단 하나를 올라오면 개선 장군처럼 맞아주자. 사실 그애로서는 장군의 용기와 성실로 임한 것이니....,
어차피 하나의 성격을 지닌 엄마나 아빠가 또 다른 성격의 자녀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래서 관찰이 필요하고 연구와 실험 정신이 필요하다.
자아가 강한 셋째에게는 더 강한 부모가 되어야 함을 느끼고. 여리고 감정적인 둘째에게는 힘써 사랑을 표현하고 더 많은 격려를 보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리고 요구가 많지 않은 첫째의 주문은 귀담아 두었다가 지체없이 들어 주려고 애쓰게 된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그애만이 갖고 있는 개성과 독특한 필요가 보이는데 그것을 조심스럽게 키우고 채워갈 때 부모들은 바야흐로 예술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이다. 아이를 여럿 낳아 기르신 부모님들이 새삼 존경스럽다. 그분들이 인간에 대해 얼마나 깊고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계실까 하는 어설픈 짐작을 해본다.
재미본능
“생물 중에 인간만이 웃음을 안다. 인간 중에서도 현명한 자만이 잘 웃는다.”..............유태격언
얼마 전에 교육학을 전공한 친구에게서 인간의 5가지 기본적인 욕구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소속과 사랑, 성취, 자유, 즐거움, 생리적 욕구 등인데 내게 새로웠던 것은 즐거움의 욕구, 즉 재미 본능(fun need)이라는 것이었다.
배고픔, 사랑받고 싶은 욕구 등은 옮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확실한 필요이다. 지독하게 배고파하는 사람에게 음악의 즐거움은 와 닿지 않는 얘기이다.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음악을 듣는다면 몰라도. 그런데 ‘재미 본능’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해당한다니....,
재미 본능에 대해 듣다 보니 뒤늦게 이해되는 것이 많았다.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나면 마음이 넉넉히 채워져서 즐겁게 제 일을 하던 기억이 났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여건이 안 되는 남편이 그렇게 쉽게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결도. 남편이 며칠 집에 없으면 왠지 집안이 건조해지고 뻑뻑한 느낌이 들었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까탈스러워도 좋다
쑥쑥 자라만 다오
어려운 아이를 키우는 일은 몸도 마음도 훨씬 수고롭다. 문제에 부딪히는 일도 더 많고 그런만큼 감정이 폭발하는 일도 많다.
반복되는 좌절감과 죄책감.
10여 년 간 둘째와 이런 저런 일로 씨름을 하면서 터득한 중요한 깨달음은 ‘어려운 아이’를 ‘어려운 아이’로 인정하는 것이다.
어느 자녀와의 관계이든 매끄럽고 평화롭게 지내지 못한 날은 속상하고 후회스럽다.
그런데 한 아이와 하루에도 몇 번씩 부딪치고 실랑이를 벌이게 되면 ‘뭐가 잘못돼도 근본적으로 잘못됐구나.’ 싶다. ‘내가 너무 무능하다.’거나 ‘내 인격이 너무 형편없구나.’ 하는 생각에 짓눌리곤 한다.
엄마로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늘 소중한 자세이지만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내 탓이오.’ 하는 것은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드는 셈이 되기도 한다.
여러 가정과 아이들을 대하다 보면 확실히 ‘어려운 아이’가 있고 ‘쉬운 아이’가 있다. 대체로 감정적인 아이, 낯선 상황에 쉬 적응하지 못하고 움츠리는 아이,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기분에 잘 사로잡히는 아이들은 어려움에 자주 부딪치고 그 애를 돌보는 부모 역시 더 애를 먹게 되고 그 아이를 사랑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기질차이가 신생아실에서부터 확인된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보면 어려운 아이는 커서도 대체적으로 어려운 아이로 남아 있다. 이것은 그애가 인격이 떨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애가 원래 갖고 있는 독특한 필요나 예민함이 외부 상황이 바뀌어도 여전히 그애에게 어려움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신앙과 삶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차츰 수월해지겠지만.
이런 객관적인 이해가 ‘어려운 아이’와의 관계를 오히려 건강하게 해준달. 내가 좀더 교육적으로 잘 하면 이 애가 ‘만족한 아이’, ‘늘 행복한 아이’가 되겠지 하는 순진한 기대는 오해려 좌절을 안겨 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애를 돌보는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은 그애 자신이다. 부모인 나는 그애와의 관계에서 가끔 어렵지만 그애는 대부분의 인간 관계와 상황에 두루 어렵지 않겠는가?
남들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에 혼자 걱정하고 힘들어하니.......
생각하면 안타깝고 측은하다. 나를 힘들게 할 때마다 그애에 대한 내 마음이 냉랭해지는 것을 느끼곤 하는데 무조건적인 사랑을 본능으로 받은 부모가 이러면 그애는 어디로, 누구에게로 가야 하나.
‘어려운 아이’, ‘쉬운 아이’가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잘 돌보는 엄마’, ‘잘 돌보지 못하는 엄마’가 있다. 잘 돌보는 엄마라 함은 무엇보다도 아이를 거부하지 않고 사랑함으로써 아이 스스로 사랑의 확신 속에서 자라게 해주는 엄마라 하겠다.
교육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잘 돌보지 못하는 어마’에게서 크는 ‘쉬운 아이’보다 ‘잘 돌보는 엄마’에게서 자라는 ‘어려운 아이’가 훨씬 긍정적인 성장을 한다고 한다.
이쯤 되면 마음의 짐이 어느 정도 내려진다.
원래 ‘어려운 아이’는 있다. 그애와의 어려움이 자주 ㅂ라생하는 것은 부모 탓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이 탓도 아니므로 또래 아이들과 비교하여 부모 자신이나 애를 고달프게 할 필요가 없다. 어려운 아일수록 사랑하기가 수월하지 않지만 그 아이야 말로 더 순수한 사랑을 필요로 한다. 훌륭한 부모의 진가는 ‘어려운 아이’에게서 나타난다. 그리고 아이가 힘든 ㅛ인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돌보는 엄마의 사랑 속에서 ‘어려운 아이’는 더욱 멋지게 자랄 수 있다.
‘어려운 아이’를 둔 엄마들이여! 아이와의 마찰을 부끄러워 말자. 그리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스릴과 감격이 기다리고 있는 희망의 길을 떠나자.
사랑의 또 다른 얼굴. 무반응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전도서 3:1-7
나름대로 엄마가 되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열심히 책도 읽고 선배들의 경험 얘기가 좋은 기초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전은 전혀 다른 얘기다. 어차피 자기만의 양육법을 터득해 가야 하고 시행 착오도 각오를 해야 한다.
자칫 실수를 안 하려는 지나친 긴장이 절망감을 안겨줄 수 있고, 그 좌절은 그렇지 않아도 멀게만 느껴지는 자녀양육의 길은 즐겁기는커녕 벅찬 숙제로 느끼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인지 대개 첫아이와의 관계는 유쾌하고 즐겁기보다는 심각하고 조심스럽다.
열심인 엄마들이 터득하기 힘든 기술 중의 하나가 ‘무반응’이 아닐까. ‘무반응’이라 함은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며 아이들의 어떤 행동을 ‘애써’ 못 본 척 하는 것을 말한다. 성격이 낙천적이거나 나름대로 제 일이 있어 바쁜 엄마는 이 면에서 유리한 점이 있다. 이 점에서는 아이가 여럿인 것도 결정적으로 좋은 결과를 낳는다.
예민한 성격 때문에 늘 엄마가 걱정하고 마음을 쓰는 어떤 딸이, “엄마, 엄마는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요. 나는 엄마가 없는 듯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하더란다.
아이들에게도 여지가 필요하다. 실수도 해보고 그러면서 스스로 깨우치기도 할 여지.
실수한 즉시 엄마나 아빠로부터 듣는 ‘좋은 지적’도 아이의 인격을 세워주지만 아이 스스로 터득한 깨달음의 위력은 대단하다. 나 자신이 늘 부주의해서 엄마의 걱정스런 주의를 들으며 커왔지만 정작 내가 실수를 줄이려고 애쓰게 된 이유는 부주의해서 다치기도 하고, 중요한 도장을 잃어버려 낭패를 당해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있는 기력, 없는 기력 다 써 가며 아이들간의 다툼에 관여하다가 마침내 지쳐 물러섰을 때 뒤늦게 이 ‘무반응’의 교육적 효과를 깨달았다. 나는 형제끼리 마찰이 생길때마다 최고의 공정성과 인생의 경륜을 가지고 심판을 봐 주려 애썼지만 결과는 늘 한쪽이 억울해 하거나 내 눈을 피해 가며 여전히 서로를 째려 보는 ‘냉전’이 계속되는 것을 보았다.
수년간의 시행착오로 알게 된 것은 아이들은 그 모습 그대로가 더 완벽한 인생으로서 서로를 가르치기에 충분하다는 점이다. 실상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부대끼며 사귀어야 할 아이들은 바로 내 집에 있는 동생, 오빠와 성정이 같은 아이들이 아닌가.
그 이후 요즘은 아이들이 다투어도 적당히 모른 척 한다. 병원에 가게 될 것 같지 않으며.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경우 자기들끼리 끝낼 대가 된 것을 안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5분 후에는 언제 싸웠냐 싶게 어울려 재미있게 논다는 것이다.
레이다 작동 중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아2:15
때때로 아이들의 삶에는 그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가 등장하곤 한다.(아2:15) 크지도 않으면서 뿌리를 갉아먹고 줄기를 뜯어 버려 포도원을 황폐하게 하는 작은 여우는 그애가 처하게 된 쉽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고 때로는 아이 주변의 사람이 되기도 한다.
친구를 이기적으로 선택할 수는 없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어려운 동료를 품어야 함도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 판단이 연약하고 모든 영향에 민감한 아이들에게 좋은 우정의 길을 터 주는 것은 우리 부모에게 맡기신 중요한 책임 중의 하나일 것이다.
관공서나 중요한 기관에는 항상 레이다와 같은 폐쇄 회로가 작동한다. 너무 중요한 것이라 치명적인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그곳을 안전하게 지키려고 마음을 쏟는다. 아이들의 귀한 삶을 맡은 부모로서 우리들의 레이다가 하나님의 감각으로 늘 점검되고 있다면 우리는 그 작은 여우들이 어디서 나오든지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고 아이들의 포도밭이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똥차와 BMW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고상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평화롭고 고요하게.
1단계는 말수를 줄이는 것이겠다.
이제껏 엄마나 아이나 ‘3번째 지시’에 반응하는 시스템이었다면 그 패턴을 바꾸기가 수월치 않다.
신문을 보면서, 도는 설거지를 하면서 무심코 하는 ‘잔소리식 지시’는 떨쳐버려야 할 습관이다.
엄마가 하던 일을 멈추고 그애에게 가서 딱 한 번 “지금부터 숙제를 끝내고 놀아라.” 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분명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아이는 100%로 말하는 사람에게는 100%로, 30%로 말하는 사람에게는 30%로 반응한다.
때로는 행동을 낳기 위해 행동을 보일 필요가 있다.
여러 번 주를 줬는데도 계속해서 동생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그만두지 않으면 매맞는다...매 맞는다고 그랬는데...매 좀 맞을래?” 등의 반협박 대신 엄마가 하기로 한 대로 매를 들 때 아이와의 관계 더 진실해진다.
아이 키우기가 어려운 것은 아이의 부정적인 행동 자체 때문이라기보다 그 행동을 못 고치는 것이 절망스러워 아이가 부담스러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부모의 말이 불발탄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단호함과 친절함이 함께 따라야 하는 듯하다.
따뜻한 봄날, 밖에서 신나게 노는 아이들을 식사가 다 됐다고 느닷없이 불러 들이는 것보다는 5분 전쯤에 미리 알려주고 5분 후에 확실하게 들어오도록 하면 아이들은 억울해 하지 않는다.
반복적인 지시와 반협박, 그리고 아이도 다 아는 잔소리를 줄임으로써 아껴 놓은 언어는 결정적인 칭찬과 격려의 말로 대체될 필요가 있다.
자녀와의 관계가 질실해지기 위해 마음을 쓸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부모는 얼떨결에, 도는 아이에게 바른 행동을 요구하기 위한 조건으로 무심코 약속을 하지만 아이들은 가기 편에 유리한 약속에 대해서는 기억력이 비상하고 약속 이행에 대한 요구 또한 집요하다.
언어의 공사를 하자.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도 성의를 다해 진실된 말을 하자.
매연도 소음도 없이 매끄럽게 달리는 갓 나온 BMW를 연상하면서.
멜빵 멘 아빠
시야가 자기 아이들에게만으로 좁아지기 쉬운 엄마들은 바깥 세상을 보고 있는 남편의 시각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부모 눈에만 예쁜 자식으로가 아니라 이웃과 세상에 보탬이 될 사랑스런 아이들로 키우려면 객관적이고 넓은 안목이 필요하다. 확실히 이것은 남편들의 몫이 아닐까 한다.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면 그때부터 나는 우아해진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내 대신 들어 줄 사람이 있고, 엄마가 언제나 자기랑 놀아 줄 수 있나 호시탐탐 노리던 아이가 이제는 아빠가 식탁에서 숟가락 놓으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뿐인가. 아이들끼리 톡탁거리거나 터무니 없이 땡깡이라도 부릴라치면 아빠가 알아서 무마해 주니............,
아니, 아이들은 아바가 오시면 이미 모범적이 된다. 거기다 ‘외아들’의 괴로움을 늘 외치는 둘째를 상대로 남자들끼리의 신나는 시간을 갖는 모습을 볼 때는 그야말로 행복의 한 가운데 있는 느낌이다.
아빠들이여! 우리 헤매는 엄마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울리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니다
“물건은 쓰기위해 존재하고 사람은 사랑 받기 위해 존재한다.”............리유엘 호웨
로스 캐벨 박사의 {진정한 자녀 사랑}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 책은 아이에게 전달되지 못한 엄마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같은 사람이지만 아이는 어른과는 다른 독특한 존재라는 것을 그 책의 저자는 강조한다. 인격을 이루는 지.정.의, 세 요소 중 깨달은(지)이나 의지(의)는 아주 연약한 반면 감성은 출생하기 이전부터 충분히 갖추고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기가 ‘느끼는 대로’ 판단한다고 한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니까 나를 사랑하겠지.’ 하는 생각은 우리 어른들에게나 통하는 이론인 것이다. 그러면서 그 책은 ‘사랑의 표현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어려운 대목이었다.
한국 사람이 감정 표현에 약하다지만 나는 더더욱 그렇다. 책임과 도리를 중시하는 한편 감정 표현에는 소극적인 가정에서 자란 영향도 있는 것 같다. 기쁨이든 노여움이든 감정의 표현을 삼가는 것을 덕으로 여겨 왔다.
{진정한 자녀 사랑}이라는 책을 공부한 이후 나는 많이 노력을 해오고 있다. 내 인생을 다 쏟아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그 아이가 내 사랑을 못 느낀다면, 그것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 있을까?
울리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니듯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삶은 끊임없는 감정의 표출을 요구한다. 하기 싫은 일을 할 때, 핀잔을 받거나 실패했을 때에도 감정의 그룻은 비워져 간다. 마치 통장 잔고가 간당간당 하듯이.
벅찬 삶으로 비어가는 감정의 그릇은 부지런해 채워져야 한다. 사랑의 그릇이 가득 채워진 사람은 웬만한 도전이나 고비쯤은 거뜬히 넘길 수 있다고 심리학자들이 말하지 않던가.
그래!
땀 흘려 일하고 장래를 위해 저금하듯. 아이들의 앞날을 위해, 그애들이 맞을 온갖 고비와 시련을 함께 맞는 마음으로 사랑을 쏟아 붓자, 더 많이 웃어주고, 더 뜨겁게 안아 주고, 더 가까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자.
기쁨의 강에서 헤엄치는 아이들
“아버지가 자식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그들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다.”..............테오도르 M. 헤즈버그
TV에 등장하는 것 같은 ‘정식 부부 싸움’을 우리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결혼 10년 만에 아이들을 재워 놓고 처음으로 목청을 돋구어 가며 언쟁을 딱 한 번 해 봤다. 그러나 오랜 기간 내면의 싸움은 똑같이 해온 셈이다. 남녀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에도 서로에게 아쉬움이 있었고 자라온 환경과 기질의 차이 때문에도 긴장이 많았다. 이런 저런 차이가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에 휘감겨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알 수 없이 뒤엉켜서 오랜 시간을 보낸 느낌이다.
부부간의 긴장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뒤로 미룰 수 없는 일은 아이들 양육이었다. 생각이 있는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듯이 남편과 나도 각자의 부모 역할에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남편은 아이들을 잘 데리고 놀아 주었고 규율을 잡아 주었지만 한 번도 분을 품고 매를 든 적이 없었다. 나는 나대로 성실하게 아이들을 돌보려고 애를 쓴 편이다.
그러나 각자의 정성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하나되지 못한 그 경계선에서는 늘 덜컹거림이 있었다. 부부간에 생각이 다르고 느낌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이 점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럴 것이다. 아니, 마땅히 그래야 바람직할 것이다. 문제는 나와 생각이 다르고 반응이 다른 상배방을 인정하고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려는 마음이 부족했던 것이다.
부부간에 사랑이 넘치면 아이들도 그 속에서 푹 젖어 저희들끼리도 사랑하고 행복하게 지낸다. 부부간에 긴장이 있으면 아내와 남편은 서로를 향한 경계심에 기력을 낭비하느라 양육에도 힘이 딸린다.
사랑한다고 결혼을 했지만 살수록 그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염된 것이었는지를 절감하게 된다. 하나님의 깊고 큰 사랑을 접하면서 다시금 거짓과 이기심의 허울을 한꺼풀 벗겨 가며 우리 부부도 조금씩 하나가 되어 가는 느낌이다.
삶의 기준이나 가치관이 나아 갈 방향이라면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 누리게 되는 기쁨은 그 길을 달려갈 수 있는 힘이다. 갈 길은 확실한데 기력이 없어 지쳐있는 모습은 너무 안타깝다.
사랑을 나누자, 부지런히 주고 함께 큰 기쁨을 누리자. 그리고 아이들이 그 기쁨의 강에서 맘껏 헤엄치게 하자.
돌팔이 의사의 용기
교육에서 ‘방법론’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사실 사람을 다루는 교육서의 경우 섣부른 방법론이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으므로 이런 점을 가볍게 넘겨서는 결코 안된다.
그러나 소중한 사람을 대하는 일인 만큼 마음의 동기 못지 않게 방법적인 부분에도 숙달을 목표로 둔 배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뜨거운 사랑을 품은 의사 지망생이 해부학과 임상병리를 철저히 공부해야 하고, 교육을 통해 변화를 꿈꾸는 교사 지망생이 교수법을 익히지 않고서는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없듯이 자녀를 한없이 사랑하는 부모들도 바른 양육을 위한 효과적인 접근을 계속 배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실한 마음’으로 기르실 뿐 아니라 ‘공교한 손’(Skillful hands)으로 지도하셨다.(시8:72).
모든 새로운 시도에는 부작용이 있고 시행 착오가 있게 마련이다. 엉터리로 테니스를 치던 사람이 정식으로 자세를 교정받으면 한동안 어색하고 서툴러 이전 엉터리 폼으로 치던 때보다 공이 더 안 맞을 것이다.
피아노든 수영이든 가르치는 분들이 똑같이 하는 말씀은 처음 배우는 사람보다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은 잘못 배워 온 사람들이란다. 한 번 틀이 잡히면 그 틀을 바꾸기란 어려울 뿐 아니라 결코 유쾌한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많은 교육 기관에서 활용하는 ‘보상’이라는 방법이 있다. 사실 이 방법만큼 쉽게 사용하면서도 부작용이 많은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보상의 가장 확실한 효과는 아이들이 반복적이 훈련에 자기 동기를 갖고 즐겁게 임하게 한다는 데 있다.
‘감동’이라는 열쇠
“만물은 성스러운 사랑에 의해 움직인다.”............단테
남편과의 관계가 한참 어려울 때는 함께 앉아 있기가 부담스러운 때도 있었는데 응어리가 녹아내린 이후 식사 준비에도 더 마음을 쓰게 되는 것 처럼............,
사람은 옳은 것을 가르치고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 상대로부터 사랑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마음을 같이 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조건 없는 사랑과 용납은 상대의 감추어진 사랑과 능력의 잠재력을 가장 멋지게 열어 주는 열쇠임을 기억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엄마들에게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면, 처음에는 모든 게 순식간에 나아질 것을 기대하고 적용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저 모든 것을 처음으로 돌리고 원래의 자기 방식대로 아이들을 대하고 만다.
나름대로 바람직한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정말 좋다.
아침에 제 시간에 일어나 학교에 가는 일, 자기 전에 장난감 치우고 이닦는 일 등과 같이 매일 반복되는 대수롭지도 않은(?) 일로 아이들과 전쟁을 치러 본 일이 있는 엄마라면 이 기나긴 싸움을 끝낼 수 있는 우아한 길이 없을까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사랑하는 아이들과 그런 일 때문에 관계가 거칠게 굳어진다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글짓기 그룹을 짜는데요.
첫아이에 대해서는 늘 초조하다. 차분하게 생각하면 내 생각이 옳은 것 같다가도 주변에서 ‘미술도 해야 된다.’, ‘영어도 일찍 시작하는 게 좋다더라.’, ‘글짓기 그룹을 짠다더라.’하면 갑자기 불안해지는 것이다.
초조해 하는 그 엄마에게 선배엄마로서 조언을 해주었다.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감인 것 같아요. 아이가 자기에게 맞는 페이스를 유지하는 가운데 엄마가 옆에서 지혜롭게 도울 수 있고, 아이에게 과외 활동을 시킬 확실한 필요나 적절한 시기가 확인되면 그끼가서 알맞게(벅차지 않게)시켜 주면 아이가 즐겁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엄마가 불안해 하면 아이도 영향을 받게 되지요.”
아이들을 지켜 보면서 느끼는 것은 교육의 주체는 철저하게 아이 자신이라는 것이다. 훌륭한 교사도 필요하고 좋은 학습 프로그램도 중요하지만 아이 안에 준비된 ‘의욕’은 최상의 교육 효과를 낳는다.
‘스즈끼 바이올린’ 학습법에서는 아이들이 실제로 바이올린을 만지기까지는 6개월을 기다리게 되어 있단다. 그때까지는 엄마가 대신 바이올린을 배우고 바이올린은 옷장 위에 올려 놓아 아이 손에 쥐어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 기간에 아이 안에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은 욕구를 키워간다는 뜻이겠다. 대체로 첫애의 경우에는 아이의 욕구가 무르익기도 전에 교육이 주어져서 교육의 주체인 아이가 프로그램에 끌려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돈이 많이 들어 아무나 할 수 없거나 연줄이 있어야만 가능한 프로그램은 최상의 교육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생명과 자연과 사랑이라는 가장 고상한 선물을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넉넉히 주시지 않았는가.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 안에 가장 멋진 교육의 길도 있으리라. 보편적인 질서 속에 담겨있는 교육의 길을 진지하게 찾아보자.
“차라리 더 자라”
인격과 지혜(실력).
이 두 가지는 어떤 일을 하든지 너무도 필수적인 요소인 것 같다. 그리고 이 두 요소는 서로 맞물려 있다.
사람은 좋은데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사람은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고, 장사 수완은 있는데 신용이 나쁜 사람은 사업에 성공할 수 없다.
부모로서 인겨이 부족하면 그가 갖고 있는 양육의 지혜가 빛을 보지 못하고, 그런가 하면 아이들의 여러 성장 과정에 대한 이해와 다양한 지혜를 부지런히 배워가지 않으면 한계에 부딪쳐 그의 인격마저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도전받고 흐트러진다.
아이들과 마찰이 생겨 인격과 실력이 함께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을 때 세상은 너무 캄캄하다.
아이들 일이 아니고서야 내가 하나님을 그토록 절실하게 찾을 제목이 있을까.
때로는 내 인격이 한심해서, 때로는 도대체 출구를 못 찾아서 다급히 하나님을 찾는다. 그럴 때마다 그분은 먼저 내 절망을 받아 주신다. 그것은 내가 다시 하늘을 바라볼 기력이 되고 아이들을 새롭게 맞을 기쁨이 된다.
그리고 지혜를 구할 때마다 마치 보따리에 싸 놓고 내가 오기를 기다리셨던 것처럼 길을 보여 주신다.
아이들은 오토매틱이 아니다
“알맞은 때의 한 바늘이 아홉 바늘을 절약한다.”...............폴러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도 기어 변속 기술이 필요함을 느낀다. 아이들이 어릴 때(3-4)는 1단 기어 시기이다. 정지해 있는 차를 움직일 때 강력한 힘이 필요하듯이 세상도 모르고, 남 사정을 헤아릴 줄 모르는 떼쟁이를 규제할 때는 그 이상의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모르면 용감하다. 그 시기의 아이들은 자기 속에 넘치는 욕구에만 집중해 있어서 그 끈질기고 지칠 줄 모르는 요구를 거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시기의 엄마들이 지치는 것은 일거리가 많아서 뿐만 아니라, 그 고집을 맞서서 다스리기가 벅차서일 것이다. ‘인격적인 양육’이라는 말이 이 시기의 엄마들을 더욱 헤매게 만든다.
이 시기의 아이에게 ‘왜 하면 안되는가.’를 설명하려고 애쓰는 것은 불쌍한 노릇이다.
어떤 의미에서 부모의 권위를 입체적으로, 내지는 감각적으로 깨달아야 할 시기이다. 이맘 때에 부모가 이긴 싸움 하나 하나는 훗날 수백 번의 싸움을 피하게 해준다고 한다. 물론 매=승리가 아님은 확실하다. 어떤 매는 패배의 표현이기도 하니까.
이 시기에 건강한 승리를 하려면 아이에 대한 이해와 뚜렷한 가치관에 근거한 신념이 절대 필요하다. 일관성있는 규칙을 아이의 어떠한 도전(울음, 끈질긴 요구, 울다가 토하는 것까지)에도 불구하고 밀고 나가고, 적절한 상황에서 감각적 고통(매)이 분노 없이 가해질 때, 아이들은 마침내 권위에 순종하게 되고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아쉽다는 자제력이 키워진다.
아이들의 자아가 형성될 만 1-2세 즈음에, 우리 아이들은 아빠한테서 배움의 가장 중요한 기초인 ‘순종’을 감각적으로 배웠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는 맺나니”(힘12:11)하는 말씀처럼, 아이가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워 아바의 징계를 받는 그 순간은 그애도, 나도, 그리고 징계를 내리고 있는 아바도 고통에 처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다.
한두 번 정신이 번쩍 들도록 교정을 받은 아이들은 마침내 권위의 울타리 안에서 자라는 평안을 누리게 된다. 감정의 폭발 없이 정당하게 행해진 훈육은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남편은 아이를 미워함 없이 잘못된 행동을 교정해 주었고, 그런 아바를 아이들은 진심으로 따랐다.
1단계가 안정선에 들어가면 2단으로 도약이 필요하다. 2단계는 4-13세까지의 시기로 부모와 자녀가 ‘함께 수고하는’ 과정이다. 아이들의 인격과 습관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시기로 많은 내용을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할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아이가 항상 그 이유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왜 부모에게 순종해ㅑ 하는지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삶의 도리를 깨달아 가는 시기이므로 부모와의 의지 대립은 훨씬 약화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중요한 과제는 각 아이의 개성을 이해하는 가운데 그 아이가 너무 어렵지 않게 순종할 수 있도록 여러 방법을 시도해보는 작업이다.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훈련의 시기이기도 하므로 가능한 유쾌하고 효과적인 접근을 위한 지혜가 필요하다.
10년 정도 긴 2단계기의 시기를 지나면 새로운 단계가 우리 부모들을 기다린다. 확 트인 대로를 2단 기어로 계속 달리면 차가 저항을 나타내듯, 어느날 아이들은 ‘다르게 대해 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중학교를 전후하여 언젠가부터 지시나 간섭을 싫어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하는 때가 온다. 부모가 무심코 던진 말에 쉽게 자존심 상해하고 엄마가 뭘 시키면 유치원 동생보다 더 반응이 느리고 탁하다.
그쯤 되면 기어를 바꿀 시기가 온 것이다. ‘아이에게서 물러서는 시기로’ 그 애를 향한 사랑과 관심을 떨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더 많은 결정의 권한을 물려 줘야하는 때가 온 것이다. 사실 이 작업은 1,2단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면 문제가 많이 생기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자녀는 부모의 신뢰, 그리고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의 사랑을 힘입어 독립성을 키워 나가야 한다. 성인으로 조심스러운 도약을 하는 실험을 시기이기도 하다. 이렇듯 단계마다 특성이 있다. 장난감 가게 앞만 가면 시도 때도 없이 조르는 3살짜리 아이와 ‘대화’로 해결하려는 시도. 공부하는 방법과 습관을 익혀야 할 1학년 아이에게 “너를 믿는다. 스스로 계획해서 잘 할 수 있겠지?” 하며 과분한(?) 신뢰를 보내는 일, 며칠씩 늦게 집에 귀가하는 중학생 딸에게 참다 못해 매를 드는 일 등은 양육의 단계 조정에 문제가 생긴 경우일 것이다.
우리집 큰 딸애는 3단으로 돌입하고 있고 둘째, 셋째는 2단에 있다. 도로에 나가면 아직도 무서워 4단 기어를 잘 넣지 못한다. 그래서 차가 매끄럽게 나가질 못한다. 큰애가 4단으로 넘어가기 전에 우리 부부가 그 단계에 나아가 있어야 할텐데.........,
내 마음은 호수요
언제부턴가 어른이고 아이고 사람을 대할 때 내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모습 중의 하나는 ‘안정감’이다. 이 안정감은 그 사람의 객관적인 능력이나 외모와는 무관한 것으로 그저 그 자신으로 평온하고 자족한 상태이다.
안정감이 있는 사람은 겸손하면서도 열등감에 눌려있지 않다. 안정감이 있는 사람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긴장이 저절로 풀리고 머리와 어깨에 지고 있던 짐을 내려 놓고 싶어진다.
안정감이 있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에민하지 않아 대확 자유롭고 유쾌하다.
아이들 중에는 허세를 부리지 않으면서도 행복해 보이는 아이들이 있다. 달리기에서 1등이 아니어도, 친구들 중에서 힘이 제일 세지 않아도 하루를 신나게 지내는 데 별 문제가 없는 아이들이 그런 아이들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당신의 형상을 담으셨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바로 생각하고, 바로 느끼고, 바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아이들을 기르다보면 착한 일을 스스로 하는 모습에 문득문득 감격하는 때가 있다.
아파하는 오빠 옆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막내, 빨랫대에 널려고 흩어놓은 젖은 세탁물을 엄마를 기쁘게 하려고 개어 놓는 둘째, 출장에서 돌아오시는 아빠를 위해 동생들과 합작품을 만들어 놓는 큰애에게서 언뜻언뜻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된다.
모든 인간 안에 담긴 이 하나님의 형상이 가장 멋지게 표현될 수 있는 터전이 안정감이 아닐까 싶다. 마치 고요한 호수위로 숲 속의 아름다움이 흔들림 없이 비추이듯이.
그런데 이 고요함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들은 무엇일까? 너무 많다.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복잡한 세상이 정신없이 돌을 던지고, 아이를 돌본다는 부모도 부지중에 합세하고, 아이들 속에서도 끊임없이 어리석음과 욕심의 돌들이 그 고요를 앗아간다.
어수서한 세상 속에서 아이들이 고요함을 간직하도록 돕는 것이 우리 부모들의 역할이겠지. 단정하고 평온한 집, 그리고 나를 반겨주는 식구가 있는 집은 안정감의 좋은 터전일 것이다.
만족한 부모, 특별히 만족한 엄마에게서 평온이 나온다. 뭔가 욕구가 안 채워져 안절부절하는 엄마는 아이들을 불안하게 한다. 가정의 기본적인 질서와 규칙 또한 아이들을 고요하게 해준다. 어른들 편한 대로 느닷없이 아이들의 계획을 바꿔버리면 아이들은 더 힘들고 어수선해진다.
때때로 아이들의 욕심이 거칠게 드러날 때는 “따끔한 질서잡기”가 흔들리는 아이를 다잡아 준다. 그런가 하면 엄마가 늘 자기 곁에 있다고 느끼는 아이의 안정감은 날로 깊어진다. 선생님한테 억울하게 야단맞았을 때, 친구에게 말 실수를 해서 마음이 괴로울 때, 내일 실기 시험이 걱정될 때 등 이런 저런 상황에서 두렵고 화나고 걱정되는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아이는 행복하다.
또한 아이들의 영혼을 맑게 하는 숲속과 같은 공기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부부에게서 나오는 것 같다. 모성애는 지극한데 남편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엄마는 안타깝게도 아이를 향한 노력의 절반밖에 결과를 얻지 못한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아버지가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해도, 부부 관계가 돈독한 집 아이들에게는 남다른 평온함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생각해 보면, 모든 인간에게 심겨져 있는 불안의 뿌리는 오직 사랑, 곧 무조건적인 사랑으로만 제거되는 게 아닐까?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일4:18)
터무니없는 실수를 하고, 형편없는 모습이 되는 순간에도 부모에게 조건없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한 아이들은 가장 행복한 아이들이다. 사실 그럴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되겠나?
여기에 우리의 절망이 있는 것이 아닌가.
계산이나 욕심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경험하고, 온전한 사랑에 실패할 때마다 다시금 그 사랑을 기억하고 새롭게 간직할 수 있는 부모는 아이의 영혼을 평온하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얌체 며느리의 반성
교사를 하는 친구의 얘기로는 아이를 보면 부모가 훤히 보인다고 한다. 예의 바르고 여유있는 아이를 보면 사랑으로 넉넉하게 후원해 주는 부모가 보이고, 눈길을 마주치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움츠리는 아이를 대하면 경직되고 완고한 부모를 떠올리게 되는데 실제로 부모를 만나 보면 영낙 없다는 것이다.
부모마다 아이를 바라볼 때 희망하는 방향이 있을 것이다.노력 하는 아이, 베푸는 아이, 책임있는 아이, 행복한 아이 등등.
언젠가부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게 아닌데, 뭔가 아쉽고뭔가 소중한 것이 빠져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 느낌은 아이들이 장난감을 치울 대 “이건 내 장난감이 아니에요.” 하며 책임 떠넘기기를 한다거나, 서로의 실수에 대해 넘어가 주지 않을 때 더욱 강해진다.
‘아이들이 왜 이리 인색할까. 왜 서로를 품어 주는 따뜻함이 없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런 생각을 깊이 하면 할수록 그 원인은 내게서밖에 찾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에게서 느끼게 되는 아쉬움은 바로 나의 부족한 모습 아닌가.’
생각해 보니 나는 내 책임을 다하려 하고 남에게 피해를 안 주려 해왔지만, 다른 사람의 실수나 부족을 덮어주고 오히려 내가 대신 감당하는 사랑에는 늘 인색하지 않았는가?
나는 손해 안 보고 살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겼는데 내가 이제껏 피하려고 애썼던 ‘손해’가 ‘사람’을 만드는 것임을 아이들의 모습에서 배워야 하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나는 회개하고 간구했다. 내게는 전혀 없는 온유를 심어주시라고. 엄마의 ‘온유’가 아니고서는 아이들을 결코 따뜻한 아이로 키울 수 없음을 고백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빌2:13) 하나님을 기억하였다.
그날 후로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온유를 향한 목마름을 주셨고, 그 갈증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준비가 된 만큼 나를 채우실 것이라는 확신도 주셨다.
아이들이 가정에서 온유를 넉넉히 맛보고 자기의 것으로 삼아 이 땅에서 참으로 부요한 자로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아이들과 돈
지혜로운 자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잠30:8)하고 기도하였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9)라고.
정말 그렇다. 아이들도 너무 인색하게 주면 오히려 돈에 유혹을 받아 거짓말을 하게도 되고 친구 관계도 돈에 매일 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후하게 준다고 풀어 놓으면 다시 돌이키기 어려운 소비 성향이 생기고 돈의 소중함도 깨닫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색하지도 않고 돈에 휘둘리지도 않는 중간 지점은 어디일까.
태국에서 원숭이를 잡는 방법은 입구가 작은 투명한 병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넣어 놓으면 예외 없이 손을 그 속에 집어넣는데 그때 사냥꾼이 다가선다고 한다. 사냥꾼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도 원숭이는 바나나를 포기하지 못하여 그냥 손을 병에서 빼지 못한 채 어이없이 잡힌다는 것이다. 그렇게 머리가 좋다는 원숭이가.
바나는 언제고 다시 생기는 것이고 생명은 한 번 잃으면 끝인데 눈 앞의 바나를 포기 못해서 잡혀 가는 원숭이의 미련함은 아이들에게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가를 선명하게 말해주는 예화였다. 그리고 잠언 30:8-9말씀으로 우리가 왜 부자가 되려는 유혹을 다스려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었다.
정말 그렇다. 하나님의 기준대로 살고 싶다는 나부터도 큰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해도 돈이 필요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돈을 아쉬워함으로써 진심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고, 생활의 필요가 채워지는 정도야말로 최상의 상태임을 자주 망각하곤 한다.
‘땀의 가치’는 아이들에게 확실히 소중한 가르침이고 그렇게 받은 돈이라 신중하게 쓰게 된다. 다만 본래의 의도가 희미해지는 미묘한 상황이 벌어질 때 엄마가 여유를 가지고 아이를 지도한다면 고비를 넘길 수 있다고 본다.
커갈수록 아이들의 용돈 사용이 더 고상해지고 지혜로워지겠지만 나는 지금 아이들의 용돈 사용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전자 오락과 룰라춤
“사람은 좋은 것을 많이 볼수록 더 좋은 것을 많이 찾게 된다.....존 메이슨 브라운
아이를 출산하여 2-3년 정신 없이 바쁜 시기를 지나면 엄마는 다소 여유롭게 아이를 대할 수 있게 된다. 종이에다 여러 가지 색을 써가며 뭔가를 그리는 아이가 대견해 보이고 이리저리 시도하다 퍼즐을 맞추면 신통하게 여겨진다.
하루가 다르게 지혜가 자라는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 엄마들은 부지런히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시간을 내어 책을 읽어주며 지능개발을 위한 다양한 놀이감도 제공해 준다.
그런데 흥미를 갖고 부모가 제공하는 ‘문화의 장’을 즐기던 아이들은 언제부턴가 또 다른 줄기의 문화를 접하게 된다. 어딜가나 흘러 나오는 신나는 유행가, 길거리에서 쉽게 만나게 되는 오락실, 코미디언이 히트시킨 유행어는 어느새 친구들 사이에서 대화의 중심이 된다.
유치원 또래의 아이들도 노래를 시켜면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을 부르고 룰라 춤을 춘다. 남자애들은 남자애들대로 오락게임이 자유로운 집으로 휘몰려 다니기도 하고, 동전 몇 닢을 들고 좀더 흥미진진한 오락실로 향하기도 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부모 몰래 오락실을 갔던 일로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내용이 그렇고 그런 드라마나 ‘가요 톱10’ 등을 보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부모들이 고민을 하게 된다.
우리는 나름대로 생각을 한 후 이 부분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대처하기로 하였다. 어른들의 지시로 음악을 대하기 보다는 그애의 감각 자체가 잘 가꾸어지기를 바라면서 저녁 때 좋은 음악을 들려주기로 하였다. 선명회 합창단의 동요나 민요, 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가벼운 클래식 소품들을 들려 주었고 조용한 가스펠송을 들으며 잠자리에 들도록 배려하기도 하였다.
재미를 느끼는 것은 본능이달. 어른이나 아이나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재미를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 마땅하고 건강한 삶이다. 차이가 있다면 재미를 느끼는 방향과 감각의 차이일 것이다. 정서를 아름답고 풍요롭게 키워주고 삶에 건강한 활기를 불어 놓어줄 수 있는 고상한 재미를 아이들에게 소개하고 키워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고 특권이다.
좋지 않은 프로를 막는 정성 이상으로 필요한 것은 좋고 재미있는 프로로 아이들을 안내하는 수고일 것이다. 여건이 허락하는 한도내에서 좋은 공연을 보여 주거나 미술관에 데리고 가는 일, 집에서 식구들끼리 작은 음악회를 열어 보는 일, 시청률 올리기에 급급한 불건전한 드라마 대신 ‘옥이 이모’나 ‘사춘기,’ ‘신비의 세계’같은 프로를 함께 보며 즐기는 일, 그리고 아바가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축구를 하는 것 등은 아이들의 정서 함양을 위한 고상한 수고가 될 것이다.
아이들이 접하는 문화에 감각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도 예민한 기준을 가지고 한계를 그어 주고 설득력있게 지도하는 것은 요즘 시대의 부모들에게 주어진 만만찮은 과제임에 틀림없다.
연못에 던진 바다,
아니 바다에 던진 연못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키엘케고르
기도는 하나님을 내 편으로 끌어 들이는 방법이라기보다 기도 속에서 내가 오히려 하나님께 끌려가는 변화의 장이다. 좋은 학교에 입학하게 해 달라고. 좋은 친구 만나게 해 달라고 다소 이기적인 기도를 하다 보면 어느 새 기도했던 내용 자체보다도 그 아이 인생 전체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보게 되고.“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시138:8)는 약 속의 말씀처럼 가장 멋진 구상 속에서 그 아이의 일생을 책임지시리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이전. 믿음의 어머니들 중에는 아이에게서 어떤 소질이나 성향을 확인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 그 아이를 향한 구체적인 소원을 갖고 평생 기도했다는 분들도 있다. 그렇게 해서 그 자녀가 자라 실제로 목사가 되고 하고, 의사가 되고 했다는 이야기를 간혹 듣게 된다. 나로서는 아이의 미래에 대해 그렇게까지 구체적이고 확고한 기도를 하게 되지는 않지만 아이의 앞날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그 아이의 삶을 펼쳐 가시는 것을 보면서 흥미진진한 기대를 갖게 되곤 한다. ‘이 아이의 인생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길래 이런저런 상황과 기회를 허락하시는 걸까?
하나님이 아이의 삶에 가까이 계심을 느낄 때마다 아이를 향한 그분의 구상이 멋지게 펼쳐질 수 있도록 협력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하나님과의 협력이라 하면 아이의 재능을 잘 키워주는 것도 되겠고, 하나님의 뜻과 충돌되는 부모 욕심으로 아이를 몰아가지 않으려는 신중함도 되겠고, 아이가 하나님과 풍성한 사귐을 가질 수 있도록 아이의 영혼의 창을 열어 주는 정성도 들어가야 한다.
누군가 말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연못에 퍼 넣을 바다를 가지고 있다고. 그러나 하나님을 정말 아는 자들이라면 그분의 바다에 자기 연못을 던짐으로써 더 큰 자유와 부요를 누리는 자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