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구보다도 조선미술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깊은 이해를 보여준 일본인 유종렬은 그의 저서인 「조선과 그 예술」에서
"내가 나량(奈良)의 박물관을 찾았을 때 법륭사 소장의 놀랄 만한 고예술를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국보라 부르고 어물(御物)이라 일컫는 그들의 거의 대부분이 조선의 작품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들이 올리는 성덕태자 천삼백년제는 실로 조선에 대한 예찬이었다. 조선의 민족이 위대한 예술의 민족이라는 사실은 나를 자극하고 나를 고무하고 누를 수 없는 희망을 미래에 갖게 한다."
고하였다. 진실로 삼국 시대에 일본에 대한 여러 문물의 전수가 주로 우리 반도를 통하여 (특히 백제를 통하여) 이루어졌음은 두 나라의 문헌과 유물이 명시하는 바이거니와, 불교 문화에 있어서는 더욱 현저한 바 있었다. 그러므로 삼국의 문물이 황폐하고 백제의 옛땅이 초토화한 오늘에 이르러 삼국 미술, 특히 백제 미술의 자태를 규명하려 함에 있어서 그 트집거리를 일본에서 찾고자 함도 결코 무리한 방도는 아닐 것이다.
다행히 일본에는 당대의 장엄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수 보존되어 있으며, 그 중 주요 작품은 거의 백제인이 제작한 것으로 전칭(傳稱)되고 있는 사실도 내외가 모두 시인하는 바이다. 일본에서도 세계 최고의 목조 건물로서 일컫는 나량 법륭사는 현존하는 주요 작품과 고기록 및 '백제양칠당가람(百濟樣七堂伽藍)'이라고 부르는 건물 배치에서 미루어 그 모든 상설이 우리 백제 공인의 손에서 이루어졌음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지난(1950년) 2월 법륭사 금당 소실의 보도는 우리의 큰 놀라움이었고, 동시에 고구려 승 담징의 작품이라고도 전하는 금당 벽화의 손상은 세계의 손실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손실이라 하여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곳 5층목탑의 중수를 계기로 하여 그 지하 심초석에 경영된 사리장치에 대한 보도가 일본 각 신문에 특대서 되어 일반의 관심을 높이었고, 또 이어서 그 상세한 학술 조사가 사계(斯界) 전문가의 손으로 시행되었다는 소식은 또한 우리의 마땅히 주목할 바라 하겠으므로 이곳에 그 개요를 소개하고 아울러 중국, 조선에서의 같은 유례에 언급함으오써 당대 문물전수의 일면을 살피고자 한다.
2.
법륭사 5층석탑 심초 밑에서 거대한 공동이 발견된 것은 지금부터 24년 전인 1925년 1월이었다. 그리하여 그 직후인 동년 4월 5일 전문 학자 4명(관야정, 윤동충태, 추야중삼랑, 안태길)과 법륭사 관주 좌백정륜 등이 입회하여 극비 속에 그 공동 및 심초 내에 장치된 사리 용구의 실체가 조사되었었다. 그러나 자료의 '문외불출'과 '구외금지'로 인하여 그 진상은 마침내 학계에 공개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것이 이번 중수를 기회로 「팔십오척이천사백관」의 신심주의 건립식을 앞두고 그 재조(再調)가 요망되었다. 그리하여 '발굴공개, 학술연구, 완전보전'의 세 요구를 절규하는 일본학술회의, 미술사학회, 문부, 국립박물관의 양직조(兩職組) 등 전 일본 학계와 이에 불응하는 법륭사 당국과의 의견 대립을 보았으나 마침내 문부성과의 타협이 성립되어 재조의 실현을 보게 되었음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상세한 보고는 후일의 공간(公刊)을 기다려야 하겠다.
3.
대저 불탑의 건립은 불사리를 봉안함이 그 본의라 하겠거니와 다만 사리 장치의 방법은 시대를 따라 변천되어 왔었다. 법륭사탑에서 본 바와 같이 심주 심초를 지하 갚이 묻고 그 심초석에 사리를 봉안하는 방식(전술한 공동의 발견은 이같은 심초구조에서, 곧 그 부식에서 이해될 것이다)은 종래에 있어서는 이른바 '굴립식'이라 하여 일본에만 고유한 성덕태자의 '어창안(御創案)'인 듯 주장하는 일본학자가 적지 않았으나 중국 내지 조선에 현존하는 문헌이나 유적에서 미루어 그것이 우리 반도를 경유하여 일본에 전수된 대릉계 방식임이 명백하다. 먼저 중국에 있어서는 육조 시대 목탑에 있어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으니 육조 제일의 목탑으로서 유명한 영녕사 9층탑이 그러하고 아륙왕사 탑이 또한 그러하다.
다음에 우리 반도에 있어서는 1936년 부여읍 군수리에서 백제 시대 사찰지가 조사 발굴되었는데, 그 목탑지 중앙지표하5척5촌에서 심초석으로 추정되는 한 변 길이 3척1촌의 방형 초석이 발견되었다. 중문,탑,금당,구당이 남북선 위에 일렬로 배치된 이같은 가람의 구조는 일본 대판 사천왕사(추고천왕 원년, 서기592년, 성덕태자 건립)의 그것과 사리 장치법에 이르기까지 전혀 동일한데 이같은 가람의 신유적의 발견은 또한 일본 불교 문와의 수입 계로가 확실히 백제임을 명시하는 가장 유력한 자료의 하나라고 하겠다. 다만 이곳에서 주의할 것은 법륭사 탑에 있어서는 심초석내 그 자체에 사리가 장치되었음에 대하여 전거한 중국 육조 시대의 목탑이나 우리 백제에 있어서는 심초석 밑에 장치하였음이 그 차이점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심초와 사리가 모두 지하 깊이 봉안된 점에 있어서는 전혀 동일하다 하겠으며, 따라서 중국 및 백제의 것이 법륭사식의 선행형식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이곳에서 부언하고자 함은 신라 삼보의 하나인 동시에 조선 최대의 목탑이었던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함에 있어서 백제의 공장 아비지를 청래하여 비로소 이룩하였음은 현존하는 유지와 「입찰주', '사리백립분안어주중」이라 한 기록과 함께 매우 흥미있는 사실이라 하겠으며, 이와 아울러 신라 통일 직후에 경영된 경주 사천왕사 망덕사의 현존하는 목탑지 심초석의 구조는 주목할 만하다. 또 신라 석탑의 한 예로서 천보 17년 운운의 조탑명을 기단 중석에 갖고 있는 금천 갈정사 동서 3층석탑(현재 국립박물관) 기단 밑에는 한 장의 자연석이 놓이고 다시 그 밑에서 사리병이 장치된 석재가 발견된 사실은 비록 그 연대와 탑재가 다르다 하더라도 그 의도는 목탑에 상통하는 바 있다고 말할만 하겠다.
4.
다음에 사리의 장엄 특히 그 용기의 문제인데 이에 대하여서는 인도를 비롯하여 동양 삼국에 있어서 거의 공통함을 보겠으니 대개 최외부에는 석함이 사용되었고 그 내부 용기로서는 금은칠보로써 하였다. 이같은 유례는 인도 본토에서도 발견되어 있으며, 중국, 조선을 거쳐 일본에 전달되었음은 문화 추세로 보아 가장 타당한 순로임은 의심할 수 없다. 전술한 바와 같이 법륭사탑의 사리 용기가 심초석 내에 있어서 외부에서 내부로 동-은-금-유리,용기의 순서임은 중국의 고기록과 우리나라의 문헌과 유물을 동시에 곧 연상시킴은 흥미있는 점이라 하겠다. 먼저 중국에서의 한 예로서는 상주한 남사 부남전 아륙왕사탑조에는
(석함)내유철곤(內有鐵 ) 이성은감(以盛銀 ) 감내유금루와( 內有金鏤 ) 성삼사리(盛三舍利) 여률립대(如栗粒大) 원정광결(圓正光潔) 함내유류리완(函內有瑠璃椀) 완내득사리급발조(椀內得四舍利及髮爪) 조유사매(爪有四枚)
라 있어 외부 용기로서 석함, 내부 용기로서 철, 은, 금, 기타 유리가 사용되었음을 알겠다. 다음 우리나라에서는 당대 문헌의 전래가 없어 목탑의 장엄을 알 수 없음은 매우 유감이라 하겠다.
다만, 「삼국유사」 권삼 전후소장사리조에 통도사 계단에 대하여
내외소석함(內外小石函) 함습지중저이류리통(函襲之中貯以瑠璃筒) 통중사리지사립(筒中舍利只四粒)
이라 한 것이 잇고, 동조 불아함에 대하여
함본내일중침향합(函本內一重沈香合) 차중순금합(次重純金合) 차외중백은함(次外重白銀函) 차외중류리함(次外重瑠璃函) 차외중라전함(次外重螺鈿函)
이라 한 곳에서 그 일단을 추측함에 그칠 뿐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1942년 경주 구황리 랑산동록 소재 삼층석탑(속칭 황복사 탑) 제2층 옥개 내에서 발견된 금,동합 안에 장치된 사리 용기는 유명의 동개 및 순금 좌불 입불 각 1구와 함께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다. 금동합 중앙에 위치한 사리 용기 주위에는 법륭사탑에서와 같이 유리제 주옥 등이 가득히 담겨 있었고 정입방체인 사리합은 3중으로 되어 있으니 외합은 은제이었고 그 안에는 한층 작은 동형의 금합이 들었고, 다시 그 안에는 녹색 유리제의 사리병이 들어 있었다. 이 사리병은 조각조각 파쇄되었으나 그 중에서 사리 4매가 검출되었다고 한다.
외부에 석, 내부에 동,은,금,유리의 순서를 가진 사리 용기의 이같은 장엄은 법륭사탑의 그것과 비교 고찰할 때 전혀 동일함을 보겠는데, 비록 하나는 목탑이요, 다른 하나는 석탑이요, 하나는 땅 속 깊이 심초석에 위치하고, 하나는 지상 높이 탑신 속에 장치되어 있어 탑재아 그 장소와 밑 용기 형태에 판이함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 사리 장엄에 피차 또한 많은 유사점을 발견함은 우연의 일치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법륭사의 사리 장치법과 그 용기만은 혹 창건 당초의 방식을 준수한 것으로도 추측도나, 이것은 그 조사 기록이 공표되기까지는 판정을 보류함이 마땅할 것이다.
대저 법륭사탑의 건립 연대에 대하여서는 일인 학자 사이에 「일본서기」에 의거하는 천지천황9년(서기 670년) 소실 후의 재건설과 성덕태자 창건(추고천황 15년, 서기607년 준공) 동시라는 비재건설의 두 학설이 대립하고 있어 그 장구한 논쟁은 학계의 이채로서 유명한 사실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에 사리 보기안에서 발견된 동경1개가 특히 주목할 만하다고 전한다.
이 동경은 그 무늬에서 판단하여 분명히 해수포도경(海獸葡 鏡)이라고 보도되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상의 논쟁에 대하여 어떤 결정적인 자료가 될만하다고 하였다. 그것은 '해수포도경'이라 부르는 경감(鏡鑑)은 중국에서 서방 아시아 페르시아 지방의 영향을 받아 대략 육조말 수당 시대에 비로소 제작 유행케 된 것으로서 일본에서는 나랑조 이전의 고분에서 발군된 일은 없고, 도리어 정창원의 소위 어물(御物) 중에 많은 점에서 사리호 안에서 발견된 그것이 중국 본토 또는 신라를 거친 전래품이라 할진대, 그 연대는 일본에서는 나랑 시대보다 더 올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탑의 차건이라 전하는 추고 시대 사이에는 약 백년에 가까운 연차가 생긴다.
이 점이 전술한 안씨의 「보기조사기」에서 재건설에 유리한 자료라고 암시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데, 의외에도 이곳에 문제 해결의 열쇠가 시사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실사구시의 현대 학문에서는 이같은 사소한 한 개 유물의 출현이 때로는 모든 오인과 미신을 분쇄하는 중대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법륭사탑의 문제는 동시에 우리의 관심사이며 그 해명은 우리에게도 적지않은 도움이 될 것을 확신하며 앞으로 그 공표를 접하기를 고대하는 바이다.
5.
끝으로 삼국 시대에 백제와 신라에서 각각 일본 대화조연(大和朝延)에 대하여 불사리를 전수한 사실을 일본측 기록에서 적기하여 당대에 있어 우리나라로부터 왜국에 대한 일방적인 문물전륜(文物傳輪)의 일단을 추상코자 한다.
먼저 백제에서는 「일본서기」권이십일 숭준천황기에
원년 시세(是歲) 백제국사와 승 혜총(惠摠) 령근(令斤) 혜식(惠寔) 등을 보내 불사리를 헌(獻)하다.
하였고, 다음 신라에서는 동서 권 22 추고왕 31 년기에
신라 대사 나말지세이(奈末智洗爾)를 보내고 임방 달선나말지를 보내 함께 내조하다. 그리하여 불상일구를 급(及) 금탑 병하여 사리 또 대관령의 번일구(幡一具) 소번(小幡) 십이조를 공(工)하다. 즉 불상을 갈야(葛野)의 태사에 거케 하다. 여(餘)의 사리 금탑 권정번 등으로써 모두 사천왕사에 납하다.
고 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은 사리의 전수는 동시에 그 장치법과 사리용기 등 그 장엄에 대한 지식의 전달을 결과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에 있어서의 모든 문물은 그 직접 유래한 바를 우리 반도에서 구 하여야만 될 것이다. 오늘날 이 땅에 유존하는 삼국 시대 관계의 문헌과 유물이 비록 매우 희소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같은 문화 추세의 타당한 계로를 부정 내지 과소평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진실로 당시에 있어서는 조선은 확실이 일본보다도 학문 기예에 있어 선진이었다. 다만 금일 이 땅의 문헌이 인멸되고 유물이 탕진되고 또 이 방면에 대한 우리 자신의 연구와 애호가 심히 부족함은 우리가 마땅히 차지할 문화적 지위를 충분히 천명케 하지 못하고 있음을 이곳에 지적하여 둔다.
우리의 피가 통하고 우리의 땀이 얽힌 법륭사탑 사리 장치의 장엄이 보도됨을 읽고 다시금 찬란하던 삼국 시대 문화에 대하여 외경의 감회를 참을 수 없는 동시에 법륭사에 현존하는 백제 관음 옥충주자(玉蟲廚子) 등 모든 작품의 영구 보존을 기원하고자 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