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책가방김소연
나와 같은 아이
『홍당무』쥘 르나르 글,펠릭스 발로통 그림,심지원 옮김(비룡소펴냄,2003년)
책에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코는 움푹 꺼진 두더지 굴 같다.
귀는 아무리 씻어 내려도 항상 귀지가 차 있다.
혀는 항상 허옇거나 누런 설태가 끼어 있다.
걸을 때는 발목끼리 부딪히고 곱사등이처럼 뒤뚱뒤뚱거린다.
목에는 시커먼 때가 마치 목걸이처럼 끼어 있다.
『홍당무』(비룡소, 2003,244쪽)
겨우 참새만한 작은 사냥감, 파닥거리는 자고새의 머리를 구둣발로 아작 낸다. 저녁 요리 감으로 써야 하기 때문이다.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 두더지는,
‘실컷 가지고 놀다가 죽이기로 결심’ (43쪽)한다.
조그만 생명을 곤죽이 되어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공중으로 던져 돌 위에 떨어뜨린다. 평생을 바쳐 충성한 늙은 하녀를 쫓아내기 위해 꾸민 음험한 음모에 자발적으로 가담해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기숙사 젊은 사감 선생이 예쁘장한 학생을 유달리 귀여워하자 교장에게 일러바쳐 해고당하게 만들기도 한다.
가히 전대미문의 인물이다. 그 동안 섭렵했던 동화책 중에 이처럼 강렬한 캐릭터는 없었다. 게다가 슬픈 건 모든 악행의 근원이 가족 속에 뿌리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좀 더 정확히 지적하자면 엄마에 의해 조장된 일이란 뜻이다. 사냥해 온 새의 숨통을 끊으라고 내미는 것도 엄마였으며, 갈 데 없는 늙은 하녀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벽난로에서 냄비를 치워버리도록 사주한 것도 그녀였다. 아이는 엄마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이 모든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아니, ‘서슴없이’ 저지르는 척 한다. 그런데도 아이는 엄마에게서 차별을 받는다.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형과 누나가 설날 선물로 각각 장난감 병정 한 상자와 커다란 인형을 받을 때, 아이는 겨우 담배 파이프 모양의 막대 사탕을 받는다. 아이는 편차가 심한 선물에 대한 실망을 꽁꽁 숨긴 채 형과 누나에게 지지 않으려고 초라한 사탕 선물에 대한 과장된 만족감을 표시한다.
「곡괭이」 편에는 요즘의 시선으로 보면 거의 아동 학대에 가까운 편애의 장면이 묘사된다.
형이 휘두른 곡괭이에 이마를 맞아 피범벅이 된 홍당무는 겨우 상처를 수건으로 동여맨 채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다. 조심스럽게 옮겨져 침대에 누인 사람은 홍당무가 아니라 그의 형 팰릭스이다. 동생의 이마에 흐르는 피를 보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엄마가 호들갑을 떨며 기절한 큰 아들을 돌보는 걸 홍당무는 의자에 올라서서 어깨너머로 구경할 뿐이다. 이마에 두른 붕대가 빨갛게 물들다 못해 피가 스며 나와 뚝뚝 흐르지만 홍당무는 울지 않는다. 그래 봤자 소용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큰 아들이 정신을 차리자 그제야 한숨을 돌린 어머니 르픽 부인이 홍당무를 돌아보며 말한다.
“만날 이 모양이라니까! 정신을 차렸어야지.
바보 같은 녀석아!”(36쪽)
이쯤 되면 독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혹시 계모 아니야?'
나는 홍당무가 르픽 부인이 낳은 친자식이 아닐 거라고 굳게 『홍당무』(비룡소
믿었다. 우리 엄마가 분명히 말했다. 열 손가락 물어서 안 아픈 2003년)
손가락 없다고……. 그렇다면 홍당무는 분명 밖에서 주워 온
업둥이거나 하인의 자식이 틀림없다. 하지만 슬프게도 책 말미에 실린 <작품해설>에는 이 이야기가 모두 작가의 어린 시절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라고 나와 있었다. 나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못된 엄마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커다란 부조리가 담겨 있는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처럼 느껴지는 엄마의 편애, 이 모든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방조하는 무뚝뚝한 아버지, 막내 동생의 비극을 놀려먹고 이용해 먹기 바쁜 형과 누나, 그 모두로 인해 다른 생명의 고통과 감정에 무뎌진 아이의 이야기가 슬픈 매혹을 빚어내며 나를 끌어 들었다.
여섯 살부터 쓰기 시작한 두꺼운 안경 덕분에 난 아주 어릴 적부터 외모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었다. 거기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성격 탓에 남들 앞에서는 국어 책 한 줄도 제대로 읽지 못할 만큼 심한 말더듬이였다. 덕분에 친구들과 활기차게 노는 대신 틈만 나면 홀로 앉아 창밖을 보며 멍을 때리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 내게 유일한 낙이란 부모님이 장만해 주신 동화 전집 몇 질과 학교 도서관이었다. 운 좋게도 당시로서는 꽤나 훌륭한 도서실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읽어도 읽어도 끊임없이 새로운 책이 발견되는 그곳은 외톨이에겐 신나는 놀이동산과 다름없었다.
점심시간 혹은 방과 후, 홀로 찾아 나선 동화의 세계는 핑크빛 희망이고 안식이었다. 동화 속 세상은 내가 딛고 서 있는 현실과는 딴판으로 언제나 해피엔딩이었고, 통쾌한 권선징악의 시범장이었으며, 근거 없는 용서의 한 마당이었다. 그곳은 항상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 또한 결국 용서를 받아 결국엔 모두가 행복해지는 낙원이었다. 주인공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내면과 능력을 소유한 영웅들이었다. 나는 그렇게 1980년대 한국 동화 출판업계에서 가열차게 유통되던 동심천사주의에 한없이 매몰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홍당무』. 어라? 이 책은 달랐다. 주인공 홍당무만은 달랐다. 그 아이는 딱 나와 같은 아이였다. 나는 본문을 탐독하며 저릿저릿한 전율에 휩싸였다. 그리고 홍당무의 일상을 스케치한 그림과 마주칠 때마다 볼품없는 안경잡이 계집애 하나가 오버랩 되곤 했다.
쥐약을 먹고 온몸이 경직되어 뒷골목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고양이에게 돌팔매질을 해대던 숨겨진 악마성은 「두더지」 편을 읽을 때 환한 햇살 속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가난한 동네에 살적엔 친하게 지내던 생선 장수 아줌마를 조금 나은 동네로 이사했다는 이유로 모른 척 하던 엄마의 눈치를 보느라 똑같이 외면하던 비겁함을 「냄비」 편을 읽으며 뼈아프게 확인하기도 했다.
4학년씩이나 된 계집아이가 자는 이불에 실례를 해서 앞집 아주머니에게 소금을 얻으러 갔던 그 모욕적인 감정이 (좀 뭐한 얘기지만)에서 고스란히 재현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그 집에 살던 중학생 오빠가 소금을 얻으러 온 나를 보며 짓던 가증스런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말 안 듣고 내달리다가 엎어져 시멘트 길바닥에 무릎을 갈아 우는 나 대신 내 피와 엄마의 비명소리에 놀라 자지러지던 남동생을 달래기에 급급했던 엄마의 모습을 확인 한 「곡괭이」 편에선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아! 도대체 누가 어린이의 세계를 천사와 같은 동심만으로 가득한 낙원이라고 정의했을까? 누구든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을 객관적으로 회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아이들은 무작정 순진하지만은 않다는 걸……. 그렇다고 천사와 같은 동심이 없다는 것도 절대 아니다. 아이들 마음속엔 악마와 천사가 동시에 존재한다. 어른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다만 그 천사와 악마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을 뿐이다. 마음 속 천사와 악마에 가면을 씌우고 스스로조차 속여 가며 사는 건 어른이 된 후의 일이다. 순진한 악마와 천사는 아이의 행동과 표정, 말에서 불쑥불쑥 맨 얼굴 그대로 출현한다. 그 자연스러운 모습을 섬세한 필치로 포착해 낸 『홍당무』야 말로 어린 시절 내가 만난 가장 강렬한 리얼리즘 소설이었다.
인간 내면의 모순과 본능이 살아 꿈틀거리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으리라. 그 이야기들은 비단 붉은 머리 주인공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불편한 진실과 진심을 담담하게 털어놓는 용기가 이 작품을 출간 된 지 백년이 다 된 지금도 읽히게 하는 힘이라는 걸 말이다.
이 책에선 글과 함께 삽화 또한 빠뜨릴 수 없는 중요 요소이다. 펠릭스 발로통이 묘사해 놓은 홍당무야 말로 진정한 홍당무의 초상이다. 간결한 판화체로 그려진 장면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에피소드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고스란히 머릿속으로 그려질 수 있도록 길잡이를 해준다. 단언컨대 이 책에서 발로통의 삽화가 빠진다면 그것은 『홍당무』라는 책을 반만 인쇄해 출간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될 것이다.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해서 마련한 경비로 유럽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프랑스 파리, 꼭 가보고 싶었던 미술관을 찾아 지도를 들고 거리를 헤매던 나는 어느 고등학교 교문 앞을 지나게 되었다. 교문 옆에는 게시판이 하나 서 있었는데 그 위에 발로통이 그린 홍당무 그림이 하나 붙어 있었다. 짧은 제 2 외국어 실력으로 해석해 보니 그 학교 학생들이 『홍당무』를 극으로 꾸며 올린다는 연극 홍보 포스터였다.
20대 중반이던 나는 한참을 서서 포스터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살았던 유년시절의 동무를 재회하는 감회에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 기괴하고 불편한 느낌에 사로잡히면서도 끝까지 읽기를 멈출 수 없었던 이야기가 그렇게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 대단할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그 감정이 다시 한 번 되살아나고 있다. 부모의 편애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나름의 생존전략으로 성장해 나가던 그 대단한 녀석이 삼 십여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내 앞에 서 있다. 괴팍한 장난질을 나보란 듯이 해치우고 또 한 번 히죽 웃는다. 그 웃음 속에 가면으로 가려놓았던 내 어린 시절의 시뻘건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 난 누가 뭐래도 홍당무 그 녀석 편이다.
김소연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간에서 몇 년을 제외하고 미포구 한 지역에서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남사당 조막이』『야만의 거리』『몇 호에 사세요?』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