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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성광(熾盛光) 여래 공능
지혜신통부사의(知慧神通不思議)
실지일체중생심(悉知一切衆生心)
능이종종방편력(能以種種方便力)
멸피군생무량고(滅彼群生無量苦)
별은 타오르는 신화다.
밤하늘 궁륭에서 명징하게 빛나는 별을 보면 우리의 의식은 날개가 돋는다. 그 날개를 휘저으며 은하수 강변을 비상하면 영원한 현재성을 획득한 신화들이 천상의 음악이 되어 쏟아진다. 신화의 원류는 역시 미리내의 북쪽 기슭이다. 거대한 국자 모양의 별자리, 북녘 천상의 시계이며 신화의 보고인 북두칠성!
소년은 북두칠성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뒷동산에 올라 밤이 이슥토록 별을 우러른 소년은 촛불 아래서 울렁이는 가슴을 달래며 뭔가를 써내려갔다. 난생 처음으로 쓰게 된 시였다. 소년이 시를 쓸 때, 그의 어머니는 장독대에 흰 사발 가득 정화수를 올려놓고 칠성님께 치성을 드렸다. 성장하면서 소년의 시는 점점 길어졌고 다채로운 북국의 신화들 속으로 갈래를 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그의 할아버지들이 주석했던 남녘 마이산 암자의 산신각에서 의인화된 칠성탱화를 본다. 별이 신이 된 그림, 사람이 별이 된 그림이었다. 그것은 놀라운 충격이었다. 북쪽 밤하늘에 반짝이는 일곱 개의 별이 일곱 명의 사람이었단 말인가. 사람은 누구나 별이 될 수 있는가. 염원일까, 환영일까. 소년은 끝없는 물음 속에 빠졌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저작 속에서 별을 치성광 여래(熾盛光如來)나 보살로 비유한 칠성기도문을 발견한다. 치성광이란 밝게 빛나는 별로 북극성을 말하며 부처를 상징한다.
북두제일 자손만덕 탐랑성군.
북두제이 장난원리 거문성군......
그것은 그가 맨 처음으로 접촉한 종교의 한 원형이었다. 종교 철학자 엘리아데나 화이트헤드와 만나기 전의 토착적 인식이었던 셈이다. 실은 전통사상과 도교와 불교가 융합된 유산이지만 말이다. 탐랑성군이나 거문성군 등에 나타나는 성군의 명호는 도교의 유습이며 탱화에는 칠성여래와 칠원성군이 함께 등장한다.
흔히 절집 맨 꼭대기에 자리 잡은 칠성각은 어느덧 하나 둘 사라지는 추세다. 맨 꼭대기에 자리 잡은 게 아니라 후미진 곳으로 밀리다가 자취를 감춰간다고 해야 옳다. 옛적 암자에서 본 탱화는 일곱 남자의 형상으로 그려진 양두성(陽斗星)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자의 형상으로 그려진 탱화는 음두성(陰斗星)인데 절집보다는 신당에 모셔지기 예사다.
동양사상은 하늘과의 관계설정과 닮아가기다. 하늘은 우주론과 심성론의 바탕이자 도덕률이기 때문이다. 종파나 학파에 따라 제석, 천도, 황천상제, 삼청이나 옥황상제로 명칭을 달리하지만 인간사를 주관하는 상위개념이기는 마찬가지다.
“북두칠성의 고향은 바이칼이다. 바이칼 호수를 그대로 조림하지. 그래서 세상의 오족(五族)이 바이칼에서 기원한 것이야.”
청년시절, 철학적 스승으로부터 충격적인 말씀을 듣는다.
어서 바이칼로 가라!
그것은 심연에서 울리는 거역할 수 없는 정언명령이었다. 청년은 오래도록 북녘 하늘을 우러렀고 드디어 북로역정에 올랐다. 만주벌판에서 만난 북두칠성과 고구려 고분벽화 속으로 내려온 별들과 제신들! 흥안령을 넘어 바이칼로 다시 야쿠츠크로 이어지며 거듭된 북로역정을 통해서 그의 사상적 기반이 다져져갔다. 그것은 저 유심한 동아시아 사상과의 원초적인 접붙이기 의식이었다. 왜냐하면 섬 아닌 섬이 되어 대륙과 단절된 현대사에서 그가 배워온 것들은 남방도 아니고 서방의 외래 사상이었던 까닭이다. 원시반본(原始返本)이라던가. 오랫동안 목마른 청년의 의식은 본능적으로 북방 감로수를 들이켰다.
‘자신의 혼으로 살지 못하면 넋 빠진 삶이다.’
청년은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바이칼 여행에서 처음 만나는 황홀경은 자작나무 숲이다. 시베리아 타이가 삼림지대, 그 나무의 바다에서 하얀 둥치를 반사하며 황금빛 이파리를 살랑대는 우주목(cosmic tree)이다.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간 순수한 힘, 섬세한 가지와 우아한 자태, 수려한 광채는 숲의 귀족답다. 사슴뿔과 함께 우리의 고대 금관 장식에 그대로 올라와 있는 나무다. 곧은 나무 장식의 신라 금관과 달리 백제의 금관은 불교의 연꽃이나 화염문(火焰紋)과 흡사하다. 자작나무와 사슴뿔로부터 전이된 형태로 보인다.
자작나무는 샤먼이 영계(靈界)를 여행할 때 오르내리는 매개체다. 그리고 북방민족의 식량원이자 생활의 동반자인 사슴의 뿔은 왕을 상징한다. 우주목을 닮은 사슴뿔은 대지의 초목들과 같이 돋아나고 자라고 빠졌다가 재생을 반복한다. 그리하여 우주사슴(cosmic elk)이 된다.
우주목을 세우고 그 위에 새를 앉히며 헝겊을 묶는 솟대신앙 역시 시베리아가 원류다. 자아라라는 헝겊을 묶어놓고 소원을 비는 세르게가 그것이다. 우리의 당산나무나 서낭당에 속한다. 나무에 묶어두는 헝겊이 오방색(五方色:청, 백, 적, 흑, 황)인 것도 거짓말처럼 똑같다. 게다가 북극권에 가까운 야쿠츠크에서 기러기를 앉힌 솟대를 보고는 이곳이 과연 우리네 본향이라고 생각했다. 전통 혼례식에서 초례청에 기러기를 앉혀두고 북방의 조상님들께 자손이 짝지음을 고하게 하고 손의 번창을 비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부친초자(父親醮子)... 재배전안(再拜奠雁)...합근이윤(合巹而酳)
아버지가 아들에게 초례를 지내게 하고 두 번 절하고 기러기를 바친다. 술잔을 합하여 마신다.
결혼식장에서 초례(醮禮)라니. 초제는 도교에서 별에게 제사하는 의식을 말한다. 그런데 결혼식을 별에게 행하는 의식이라고 한다. 지금이야 대낮에 식을 올리지만 옛날에는 저녁에 별이 돋아난 다음에야 자작나무 껍질을 태워 불을 밝히며 식을 올렸다. 어떤 별을 보고 올린 것일까. 당연히 북두칠성이요, 북방의 새로서 철따라 남쪽 나라를 오가는 기러기는 전령이다. 북두칠성은 인간의 생사를 주관한다고 믿는 북방민족의 문장(紋章)인 셈이다.
역시 북로역정의 정점은 물과 별이다. 세계 최대 담수호 바이칼 호수와 바로 머리 위에서 비밀스런 신화를 쏟아내며 빛나는 북두칠성이 압권이다. 드넓은 시베리아 대지의 젖줄이 되는 생명력 넘치는 바이칼에서 밤을 지새웠다. 자작나무로 화톳불을 피우고 천상의 별들이 내는 음악소리를 들었다.
물에 젖은 별들은 꿈을 꾼다.
음악은 하늘 궁창에 부딪치며 여러 형상을 그려낸다.
은하수 강가에서 생명수를 길어 올리는 여인 하나와 만난다.
그녀는 7공주 집안의 버려진 막내딸 바리데기다. 부친이 병들자, 여섯 언니는 이 핑계 저 핑계로 거절하지만 버려진 그녀는 영계로 불사약을 구하러 떠난다. 온몸을 던지는 고행 끝에 생명수와 꽃을 얻는다. 부친을 살린 바리데기는 만신의 왕이 된다. 바리데기는 칠성님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7공주 자체가 북두칠성의 의인화다.
이 무속설화는 다분히 불교의 옷을 입고 있지만 원형은 전통사상이며 효(孝)와 불멸의 하늘사상, 곧 천부(天符)사상을 일깨운다.
우리에게 있어 하늘사상의 태동은 단군신화를 근원으로 삼는다. 그런데 단군신화는 바리데기와 같은 샤머니즘 설화나 고구려 동명성왕 설화보다 고도로 발달된 형태로 등장한다. 원시의 질박성은 오히려 후대의 설화에 더 짙게 배여 있다. 어찌된 일인가. 역방향 영향주기가 아닐 수 없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동명성왕은 하늘의 아들이면서 알을 깨트리고 탄생한다. 북방의 천신신화와 남방의 난생설화를 겸하고 있다. 그가 쫓겨 남하하면서 엄리대수를 건널 때, 거북이 떠서 다리가 되어 준다. 나라를 창업하고 죽어 승천할 때는 황룡이 내려와 업고 올라갔다고 한다. 용과 거북은 <주역>의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전제한 이론이다. <주역>의 근원이 되는 음양사상의 원류가 동이족의 우골이나 갑골로 점을 치던 유습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생성된 단군신화에서는 무속의 ‘천제’가 불교의 ‘석제환인(釋帝桓因)’이 되어버린다. 곰과 호랑이 토테미즘은 물론 도교적 사유까지 물씬 배여 있다. 이로써 단군신화가 동명성왕 설화보다 후대에 성립했다기보다는 후대에 보완 완성되었다고 봄이 옳겠다. 채록자 일연스님의 개인적 취향 반영은 더더욱 아니다. 당시에 이미 우리 고유의 사상이나 문화에 불교적인 색채가 전반적으로 폭넓게 가미되었던 것이다.
남북 분단이후 반세기 동안 단절된 바이칼이 우리 앞에 왔다. 그의 후예들은 언제 남방으로 이주했고 어떻게 그들의 본향을 기렸는가. 그리움은 알알이 밀교의식이 되어 종교 속에 숨었다.
북두칠성 모시기를 해온 먼 조상들을 다시 추적해보자.
북방문화의 자궁, 물에 젖은 신화의 고향 바이칼에서 북동쪽으로 네 시간을 날아가면 야쿠치야 공화국이 있다. 매머드 박물관이 있는 동토의 땅이다. 그곳에도 별은 빛나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른바 몽골리안 벨트권이기 때문이다. 머리 바로 위에서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빛나고 있다.
아랑가스 슬르스.
야쿠트 원주민들이 일곱 개의 별이라고 부르는 북두칠성이다. 그들의 장례풍습에는 나무 위에 관을 올려놓는 아랑가스 장법이 있다. 우리의 칠성판을 연상케 한다. 이른바 칠성장법으로 망자의 영혼이 쉽게 북두칠성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배려다.
북두칠성 문화공동체의 남방 이주를 문화인류학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바이칼을 중심으로 살아온 북 몽고족 계통의 그들은 13,000년 전 후빙하기 충적세에 따뜻한 기후를 찾아 남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곳에 눌러있지 않고 남하를 결행했다는 사실은 그네들의 진취성과 도전정신을 엿보게 한다. 우리는 그들의 후예인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지닌 역동성의 근원이다.
어쨌든 그들은 한반도의 토착 세력이나 남방계와 섞이면서 동화했다. 손에는 좀돌날 몸돌이라는 석기를 쥐고 있었고 머릿속에는 북두칠성이 들어 있었다.
흑요석 몸돌 하나에서 동일한 석기를 대량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은 혁명적이었다. 당연히 그네들이 갖고 있는 이념이나 종교가 다른 족속들의 그것보다 더 위대해 보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북쪽에서 남하한 사람들의 석기 제작 기술과 함께 종교도 받아 들였다. 마을에 칠성단이 들어서고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공동체가 발족되었다. 사시사철 머리 위에서 빛나며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는 별, 그 별을 신앙하는 무리면 하나의 겨레가 되었고 아니면 오랑캐로 여겼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민족이 형성 되었다.
<삼국유사> 제5권에는 이런 칠성신앙 공동체가 불교의 환생설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성덕사 승려 선율은 <육백반야경>을 펴내고자 했다. 그러나 끝마치기 전에 저승사자에게 잡혀갔다.
“빈도는 만년에 <대품반야경>을 만들려 하다가 도중에 명이 당하여 왔습니다.”
“네 수명은 이미 다했지만 다시 인간 세상에 돌아가서 보전을 이루도록 하라.”
북두칠성의 명을 집행하는 염라대왕은 선율을 살려 보낸다.
돌아오는 도중에 우는 여자 하나를 만난다.
“저도 남염주의 신라사람이오. 부모가 금강사의 논을 빼앗은 일에 연루되어 저승에 잡혀 와서 고통을 받고 있소. 우리 부모에게 논을 돌려주라고 일러주시고 어디어디에 가면 살아생전에 제가 감춰두었던 참기름 한 병과 고운 베가 있으니 그것으로 불등에 불을 밝히고 불사에 사용하십시오. 하오면 제 고뇌가 소멸될까 하오.”
선율이 돌아와 경주 남산에 이르러 여자의 당부대로 하니, 여자의 영혼이 찾아와서 말한다.
“법사의 은혜를 입어 저는 이미 고뇌를 벗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감동했고 서로 도와 <반야경>을 완성시켰다. 그 책은 경주 승사서고에 보관돼 있다.(일연 스님 당시)
하늘을 가슴에 모신 사람들
머리를 들면 거기 하늘이 보인다.
영원성이나 영성을 말할 때 우리는 반드시 저 고원한 우주나 하늘을 말한다. 동양학의 머리 경전인 『주역』에서는 합벽(闔闢)이라는 표현으로 우주의 열고 닫힘을 묘사한다. 현대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플랑크 상수(10~23m.초)가 곧 ‘무극이면서 태극’이며 빅뱅과 빅클런치는 합벽이다. 우리가 숨을 쉬는 것처럼 우주 역시 열고 닫히기를 계속한다. 우리가 까마득하게 여기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시간 주기를 지닐 뿐이다. 태초의 시간과 공간의 기점이 되는 바로 그 극도로 미미한 무엇, 무(無)라고밖에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무는 아니다. 그것은 마치 공(空)이 허(虛)가 아닌 것과 같다.
현대물리학이 수치를 들어서 설명하지만, 동양의 철학자나 종교적인 천재들은 이미 그 태초의 무엇을 인지했다. 무극이 태극이라거나, 공 혹은 불생불멸이라고 하면 무시되고 빅뱅이나 빅클런치라고 하면 신빙성을 얻는다. 우리 안의 자괴감의 발로다. 플랑크 상수라고 하는 것도 가정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언제 어떤 이론으로 다시 재편될지 아무도 모른다.
이렇듯 하늘은 인간의 다양한 인식론과 추론을 넌지시 내려다보며 말없이 거기 있다. 신성성과 영원성을 지닌 절대자의 표상으로.
반면, 지상에서의 사람들의 삶이란 유한하며 속되다. 악착스럽고 변덕스러우며 허우적대고 심지어는 가죽 주머니나 구공(九空)으로부터 냄새까지 풍긴다. 그에 비해 저 청한 하늘은 고매하기만 하다.
한국의 고유사상을 한 단어로 말하면 청(晴)이다.
맑게 갠 푸른 하늘이다. 찌꺼기 하나 없는 순일무잡(純一無雜)이다. 청청한 하늘은 이 땅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래서 선인들은 흰옷을 입었고 청자나 백자를 빚어 냈다. 날이 저물어 스스로 깊어지며 가물가물한 하늘에는 영롱한 별빛이 눈을 뜬다. 그 자체로 깨달음의 빛, 영성의 빛이 아닐 수 없다.
옛 조상들은 머리 위 하늘을 가슴에 모셨다. 하늘 모시기는 가장 소박한 종교다. 그런데 저 이상적인 하늘을 어떻게 표상할 것인가. 청자나 백자는 색체를 반영함이고 달 항아리는 모양을, 칠성탱화는 종교적 표현이다. 대를 물리며 염원하던 별에서 사람의 형상을 한 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것은 집단무의식의 자연스런 발로다.
이 땅 사람들은 언제부터 칠성님을 하늘 모시기의 대표적 의례로 발전시켰을까. 지금으로부터 약 10만 년 전쯤의 북쪽 밤하늘엔 북두칠성이 없었다. 별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국자의 네모 모양이 딱 붙어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하여 지금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앞으로 몇만 년 뒤에는 완전히 벌어져 일렬로 늘어서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이 그러하니 땅도 그러하다는 이법천관(理法天觀)에 따라서 칠성신앙은 사라지게 될까. 아마 그렇게 되리라고 보는 게 옳다. 그때 가서는 문화사 정도에 등장하고 말 것이다. 하긴 지금도 칠성신앙은 거의 화석화 되어 버렸다.
인류는 불변의 가치를 하늘에서 찾아냈지만 사실 하늘 역시 변한다. 별도 사람처럼 나고 자라고 죽는다. 다만 일생이 길다는 것이며 소멸의 순간이 생성의 모태가 된다는 것뿐이다. 이것이 종교성이다. 인간의 마을에 있는 모든 종파가 하나같이 하늘 모시기를 하는 까닭이다.
종교적인 염원과 달리, 인간은 한편으로 줄곧 하늘과 멀어지기 위해 안간힘을 써 왔다. 역설적이지만 인간의 문명사란 결국 하늘과의 관계 끊기의 역사랄 수 있다. 그 질긴 끈을 자르고서야 인간은 더 이상 하늘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 마음껏 문명사회를 즐겼다. 그리고 급기야 하늘을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에 불을 지폈다. 우주선을 쏘아올리고 우주 정거장을 만든 것이다.
연금술은 기술 문명의 씨앗이다. 불을 활용하여 광석을 제련하고, 금속을 만들어 내는 기술을 통해서 인간은 놀라운 물질의 변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주체가 신이 아니라 인간일 수 있음을 눈치채 버렸다. 기술 문명을 주도하는 주체적인 일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여기는 인간에게 종교적 구원은 가능한가.
에밀레종이라고 부르는 봉덕사 신종에 답이 들어 있다고 본다.
종을 만드는 장인은 조물주를 대신한다. 최소한 종을 만드는 과정 속에 창조자로서의 신은 죽었다. 오직 기술이 있을 뿐이며 신성(神性)은 장인 자신이 지녔다.
그런데 펄펄 끓는 구리물에 아기의 인신공양은 어찌된 노릇인가. 그리하여 ‘에밀레!’ 하고 울리는 깊은 여운을 얻었으니 주체자의 희생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닌가. 장인이나 아이나 인간이니까. 에밀레종에는 아기의 뼈에 든 만큼의 인(P) 성분이 들어 있다고 한다. 합금에 인이 필요했다면 동물 뼈라도 상관없었다. 굳이 사람의 뼈를 넣은 행위에서 기술 문명의 진보와 종교가 공생하는 미래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칠성탱화를 통해서 이 땅 사람들의 별과 하늘 모시기 신앙의 역사를 살폈다. 이천 년 한국 불교가 머리 위 북두칠성을 섬겨온 까닭은 밀교의식에 속한다. 현대불교는 원시불교에 비해 지극히 담백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자연보다 담백한 것은 없다. 선(禪)이 순수의식의 영역에서 건져내는 명징한 사리구슬로 여기지만 인간의 의식은 본래 뒤엉킨 실타래와 같다. 별이나 달, 나무, 바위 같은 자연의 원형에 귀의하지 않고서 참선은 없다.
선불교로 일컬어지는 한국불교가 이 땅에 공인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72년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삼국시대로 보는 역사일 뿐이다. 가야도 지리산과 낙동강 일원에 엄연히 존재한 나라였고 일본(倭)에 끼친 막대한 영향을 생각하면 사국시대 관점으로 문화를 읽어야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가락국을 세운 김수로왕은 북방에서 온 철기문화의 선구자다. 그는 강력한 철기를 가지고 남녘 청동기 부족국가를 쉽게 정복해버린다. 고구려의 주몽이 그랬던 것처럼 수로왕은 토착세력들을 단숨에 접수해버리는 것이다.
김해 구지봉에는 새로운 왕을 맞이하는 부족의 집단의식이 전해온다. 북방에서 온 수로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여섯 개의 알에서 태어난 아이 가운데 가장 출중한 것으로 묘사된다. 천손신화는 북방문화이며 난생신화는 남방문화인데 수로왕의 경우는 양자가 결합된 형태다.
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에서 왕후를 맞는다. 바로 허왕후다. 두 사람은 AD 48년에 국제 결혼식을 올린다. 김병모 교수의 『쌍어문의 비밀』에 보면 인도와 가야의 해양교류사가 물고기 문양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나 있다.
허왕후가 배에 싣고 온 신물이 파사석탑이다. 그리고 동행한 오빠 장유화상은 김해 불모산(佛母山)에 절을 세운다. 장유사가 그것이다. 왕위를 물려받지 못한 수로왕의 일곱 왕자도 삭발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절을 세웠으니 오늘날 칠불암으로 남아 있다. 불교는 이미 그때부터 이 땅에 뿌리내린 것이다. 우리가 해양사를 무시하고 내륙을 통한 교섭만을 생각하면 역사가 이렇게 좁혀져버린다.
김해(金海)라는 지명은 참 반갑다. 6백만이나 된다는 김해김씨들의 관향인데 한글로 풀이하면 ‘철의 바다’다. 실제로 김해 지역에는 철이 많이 매장돼 있었고 수로왕은 거기서 생산한 철을 바다를 통해서 교역하여 국부를 창출했다.
김해의 동쪽에 초선대(招仙臺)와 칠점산(七點山)이 있다. 현재는 금산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다. 김수로왕이 신선도에 능한 왕이었음은 여러 사적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칠성신앙을 가진 북방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아내를 불교국가에서 맞아들임으로 해서 가야는 전통 신앙과 불교가 융화되기에 이른다. 특이하게 물고기 이름이 들어간 신어산(神魚山) 은하사, 만어산(萬魚山) 만어사가 가야 건국시기에 세워진 사찰들이다.
허왕후는 죽어서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이름의 가야 산신이 된다. 산신은 전통신앙의 원형이다. 허왕후의 10남 2녀 가운데 작은 딸 묘견(妙見) 공주는 구름을 타고 왜국에 건너가 여왕이 되어 야마대국(邪馬臺國)을 경영한다. 규슈의 가야 분국이다. 아직도 여전히 비밀에 쌓인 가야와 고대 일본의 교섭사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더 깊은 한일 고대사 연구는 일본학자들과 열린 교류를 해야 가능하다. 북한 사학자 김석형의『고대한일관계사』나 김성호의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일본 규슈의 『야스시로시사(八代市史)』등을 보면 놀라운 사실들을 추론할 수 있다.
1995년 2월24일, 나는 규슈 야마모토현 야스시로시 묘견신궁(妙見神宮)을 찾았다. 정체성을 찾는 일환으로 만주와 시베리아를 쏘대다가 일본 나라나 규슈지방까지 범위를 넓힌 셈이다. 내 자신이 곱슬머리를 가진 김해김씨여서 더 그랬다. 게다가 묘견은 칠성신앙의 유습이 아니던가.
신궁 궁사로부터 소개받은 박물관의 일본인 학예관은 내가 사학자인 줄로 알고 있었다. 뿌리 찾는 젊은 작가라고 말하자 혀를 내둘렀다. 그는 조총련계 지인을 소개했고 그 덕분에 고생을 덜했다.
나는 야스시로 일대의 가야관련 유적들을 샅샅이 뒤졌다. 박물관에서는 묘견신궁의 전수유물인 사인검(四寅劍)에는 옴마니반메훔이라는 육자대명왕 진언이 상감돼 있었다. 가야의 묘견이 왜국에 건너갈 때 이미 칠성신앙과 불교가 함께 건너간 단서였다.
일본인들이 묘오껜상으로 부르는 묘견은 바다와 연결된 야스시로 강을 통해 상륙한다. 가랏빠라 부르는 하동(河童) 3천명과 함께였다. 그들은 구지봉을 연상케 하는 거북모양을 한 배를 타고 왔다. 가랏빠는 ‘가야의 무리(輩)’이며 그들 도래인들이 상륙한 강변 나루터에는 커다란 화강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야스시로시에서는 오늘날까지 그것을 기념하는 축제를 벌이고 있다. 축제의 이름이 오레오레데에라이따(オレオレテーライタ)다. 곧 경상도 사투리로 ‘오래 오래 되어라’인 것이다. 우리말로 그대로 읽으면 무슨 말인지 분명한데 가타카나로 읽으면 무슨 말인지 뜻을 모른다. 멀리 가야를 떠나와 남쪽 왜국에 상륙하니 이곳에서 부디 오래오래 가는 나라를 세우겠다는 약속이었다.
일본의 사상가 고야스 노부쿠니 교수는 최근 한국 강연에서, 근대 일본의 성립과정은 가라, 즉 ‘한(韓)’의 흔적을 지워온 역사였다고 고백했다. 일본의 고대사는 없다. 그것은 곧 가야사요, 백제사이기 때문이다.
묘견신궁의 제신 천어중주존(天御中主尊)은 신녀이자 여왕인 히미꼬(卑彌呼)의 별칭이다. 천어중주는 북신(北辰)이며 북신이 곧 관음의 화현인 묘견보살이다. 고대 가야에서 일본으로 전수된 칠성신앙의 흔적이 묘견신궁이다. 학계에서는 백제 위덕왕 44년(597) 일본에 전수된 것으로 보지만 이미 오래전인 가야시대에 직접적인 전수가 있었던 셈이다.
물론 이런 추론은 아직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한데, 나는 바이칼을 찾아서 우리 문화의 원류를 탐방한 것처럼 묘견신앙을 찾아서 두어 차례 일본을 찾은 것에 지니지 않는다. 그래도 한 작가가 이십대 시절, 자기 정체성을 찾아서 북으로 남으로 답사를 다니다 이제 사십을 넘겨 다시 그 내용을 정리하자니 감개가 남다르다.
북두칠성이라는 일곱 개의 별자리를 가지고 북으로 야쿠츠크로부터 남으로 규수 야스시로시까지 무모한 여행을 했던 청년은 이제 『주역』에 빠져 살고 있다.『주역』은 단순한 철학서가 아니다. 그것은 문자나 기호로 추상된 또 하나의 선(禪)이다. 별이며 해이며 달이며 못이다. 불, 우레, 바람, 물, 산, 대지다. 뿐인가. 종파나 국경을 떠나 하나의 원형으로 상징되는 동아시아인들의 문화사이며 정신사이기도 하다.
우리는 갑골문자(甲骨文字)가 고대 은나라의 유물임을 안다. 그러나 갑골 이전의 우골(牛骨)에 새긴 동이족의 문화는 잘 알지 못한다. 소뼈에 점을 친 동이족들은 일찍부터 음양(陰陽)사상을 발전시켰다. 당시 중국인들은 동이(東夷)의 선진문명을 부러워했다. 동이족이 사는 방향을 인방(人方) 혹은 인방(仁方)이라고 명명하며 사람다운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동경했다. 실제로 그들의 문화유산인 갑골문이나 금문(金文)에서 인방이 나오면 동쪽이다. 은나라는 인방을 정벌하면서 성대해진 나라다.
은나라를 계승한 주나라 때, 역학이 정리되어 『주역』이라고 부르지만 마지막 완성한 이는 공자다. 공자가 춘추시대에 도가 행해지지 않자, 군자국인 구이(九夷)의 나라에 뗏목을 타고 건너가 살고 싶다고 한 얘기는 『논어』<자한편>에 나온다. 『산해경(山海經)』에도 동이는 군자국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중국 하(夏)나라 이전에 태평성대를 열었던 순(舜)임금은 동이 출신이었다. 『맹자』 <이루장>에 분명히 기록돼 있다. 『주역』의 근간이 되는 음양론이나 한자의 원류가 동이족의 문화유산임을 안다면 우리의 고대사에 전혀 열패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한반도를 종만물(終萬物) 시만물(始萬物)의 땅이라고 한다. 만물이 이 땅에 와서 그치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교건 불교건 선도건 이 이 땅에 들어와서 화려한 꽃을 피우고 맨 나중에까지 빛을 발한다. 그 까닭이 무얼까. 단순히 수용 발전시키는 걸 잘해서일까. 일찍이 최치원 선생이 간파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그 어떤 사상도 능히 소화해낼 수 있는 고신도(古神道)를 바탕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티베트 카일라스(須彌山)를 안팎으로 돌고 온 적이 있다. 인도나 네팔, 티베트 사람들의 평생소원이 이른바 안꼬라, 바깥꼬라라고 하는 수미산 산돌이 의식이다. 수미산 산신의 거룩한 가피를 힘입어 영혼을 진화시키기 위함이다. 나는 수많은 한국 스님들이 선방에서 해제되는 순간 찾아가는 곳이 인도 명상센터나 히말라야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정말 안타까웠다. 한국의 선원처럼 바른 종지와 시스템을 지닌 종파가 지상 어디에 있을까. 이 땅은 정신수행에 더없이 적합한 터다. 산신 신앙이 여전히 살아 있고 머리 위에는 북두칠성이 명징하게 빛나고 있다. 도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여기 이곳, 그리고 내 마음 속에 있다.
수행자들은 왜 별을 숭배했을까. 머리 위 북두칠성을 보살로 모시며 탱화로 내걸었던 걸까. 별은 순양체(純陽體)다. 순일무잡의 명징한 불덩어리를 의식에 끌어들여서 차크라를 여는 데 활용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런 존재다. 머리 위에 하늘을 이고 살지만, 그 하늘을 머리 속으로 끌어들일 줄 아는 영성체다. 우주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우주가 담겼다. 일미진중 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기 때문이다.
선사들은 선방에 들어서 화두가 잡도리되지 않을 때마다 자연 물상을 보았고 별을 우러렀다. 특히 명징한 별빛은 친구가 되어 유원한 정신세계로 이끌었다. 그게 보살이었고 여래였다.
칠성각을 절집 후미진 구석으로 내밀린 원시종교의 유물로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주역』을 선종과 무관한 유교나 도교의 경전으로 밀쳐두는 일도 마찬가지다. 별과 자연물의 추상을 끌어안을 때, 참선공부에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나의 화두는 북두칠성이다. 내 마음 안의 선방에는 어간이 있다. 『반야심경』과 『주역』이다.
무안 승달산에는 호승예불혈(胡僧禮佛穴)이라는 이 나라 최대의 천하대명당이 있다고 한다. 호승은 라마승이다. 라마승이 만 리 밖에서 와서 스승께 예불을 올리는 터인 것이다. 세계적인 종교가 새롭게 창시되리라는 풍수적 예언이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오고 있음이다. 바로 이 땅에서 원효성사를 잇는 새 시대의 성자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염원이며 오랜 세월동안 쌓여온 염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불교와 문화>
丌山 김종록: 전북대 국문학과와 성균관대 한국철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87년 『파수병 시절』로 제17회 삼성문학상을 수상했고 1988년 『칼라빈카』로 제1회 불교문학상을 수상했다. 동양정신을 바탕으로 현장을 누비며 역사와 전통을 오늘의 시각에서 살려내는 체화된 글쓰기를 시도하는 작가다. 주요 저서로는 『동동』, 『왕자의 눈물』, 『풍수』(전3권), 『제왕의 길』 등의 장편소설과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 『바이칼 - 소설가 김종록의 북방 탐험기』, 『내 안의 우주목』 등이 있다.
선본사(갓바위)의 치성전
월광변조보살 月光遍照菩薩 일광변조보살 日光遍照菩薩
최승세계운의통증 東方最勝世界運意通證如來佛 제1 자손만덕 子孫萬德 자손 만덕 탐랑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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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고 자료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