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왜 약 많이 먹게 되나 병원·약국·제약사 팔수록 '돈'… 美는 약 적게 쓸수록 수익… 약 좋아하는 한국문화도 한몫
한국인들은 왜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약을 많이 먹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의약품 소비시스템이 병원이나 약국, 제약사 모두 약 판매량이 늘수록 좋은 구조인 것이 약 소비를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진현 서울대 간호대학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 건강보험 제도가 처방을 할 때마다 보상해주는 행위별(건별) 수가제(酬價制)이고, 약에 대해서도 사용량에 따라 보상해주다 보니 약 처방도 늘고 약 사용량도 많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울산의대 예방의학교실 이상일 교수는 "미국 메디케어(대형병원)는 환자당 미리 정해진 진료비를 주는 포괄수가제로 병원이 약을 적게 쓸수록 많이 남는 구조인데, 우리나라는 행위별 수가제라 병원, 약국, 환자 어느 쪽도 약을 적게 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병원의 경우 자체 소비하는 약이 있는 데다 외래 처방에 어떤 약을 처방하느냐에 따라 약 판매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제약회사 입장에서는 병원을 상대로 판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리베이트(의약품을 처방하는 대가로 금품·향응을 제공하는 것)가 끊이지 않는 데는 이런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웬만하면 약으로 해결하려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도 약 소비를 증가시키는 원인 중 하나다.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정형선 교수는 "우리나라가 의약분업을 시행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약에 의존하는 습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면서 "환자들이 의사에게 진료만 받기보다는 약을 받아야 제대로 진료받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병원에 가면 주사 한 대 맞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우리 가족(4인)이 프랑스에서 5년 살았지만 외래로 병원에 가서 단 한 번도 주사를 맞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김보연 이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옛날부터 약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고령사회에 진입하고, 사람들이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약 소비가 늘어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보건사회연구원 박실비아 연구위원은 "약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점도 (약 소비량이 많은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번에 평균 4가지 藥 처방… 美보다 2배 더 복용
"과잉·중복 처방 많다" 비판, 항생제 비율도 여전히 높아… 비싼 태반·감초·마늘주사… 효능 입증안된 주사제 남용도... 약값 늘어 건보 재정 악화
김명자(가명·78)씨는 지난해 경기도의 한 종합병원에서 한번에 2520알의 약을 처방 받았다. 15가지 약을 하루 3번씩 56일간 먹도록 한 것이다. 류머티즘관절염·골다공증·폐렴·위식도역류질환을 진단받긴 했지만 아스피린 등 해열·진통·소염제가 4가지, 신경안정제·진해거담제(가래약)·위궤양약이 각각 2가지씩, 이뇨제·면역강화제·혈압약·호르몬제·칼슘제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은 같은 효능을 가진 약을 중복 처방한 것으로 보고 이 병원 진료비를 깎았다.
심평원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한번에 13가지 이상의 약물을 쓴 처방은 6만4000여건에 달했다. 심평원은 이중 상당수는 과잉·중복 처방일 것으로 보고 이를 가리기 위한 심사를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은 '약(藥) 천국'이다. 환자들은 병원에 가면 주사 한대 맞고 약을 처방받아야 제대로 치료받았다고 생각하고, 병원들은 이런 환자들의 심리를 충족시켜주는 쪽으로 처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휠씬 약을 많이 먹고 있다.
한국에서는 의사가 한 번 처방할 때 4.16가지의 약품을 쓰는 반면, 일본에서는 3.0, 호주에서는 2.16, 미국에서는 1.97가지 약품을 쓰고 있다. 내성(耐性)을 예방하기 위해 사용 범위를 철저히 지켜야 하는 항생제를 쓰는 비율도 여전히 높은 편이다.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성인 1000명이 하루에 소비하는 항생제 사용량은 2003년 23.0명분, 2005년 24.7명분으로 계속 증가하다가 의료기관별로 항생제 처방률을 공개한 2006년을 기점으로 다소 감소해 2007년에는 21.5명분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네덜란드(12.3명분), 독일(14.2명분), 영국(15.3명분) 등 선진국들에 비하면 크게 높은 수준이다. 바이러스가 원인인 감기 환자에게도 항생제를 쓰는 비율이 50.4%(2009년)가 넘는다. 선진국들은 15~40% 수준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의약품과 건강기능식품의 경계가 모호한 채 "몸에 좋은 것은 모두 약"이라고 여기고 약을 쉽게 먹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가급적 사용을 자제하는 주사제가 한국에서는 피부 미용, 노화 방지, 심지어 숙취 제거용으로 쓰이고 있다. 태반주사·마늘주사·감초주사 등 이른바 '주사제 3총사'는 최근 서울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직장인과 수험생들 사이에 유행이다. 셋 다 원기회복 등에 좋다는 이유로 '피로주사' 같은 별명도 붙었다. 강남의 한 개원의는 "일부 노화방지 클리닉에서는 수천만원을 내고 1년간 패키지로 맞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느 주사제도 아직 의학적으로 약효가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 우리 국민들은 하루 평균 3알씩 먹을 정도로 약을 많이 먹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나친 약 소비는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건강보험 재정을 부실하게 하는 요소라고 말했다. /게티이미지 멀티버츠
우리 국민이 이렇게 약을 많이 먹으면서 생기는 부작용도 심각하고 건강보험이 부담하는 약값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숙명여대 약대 신현택 교수는 "한번에 많은 종류의 약을 먹으면 약물 간 상호작용이 일어나면서 특정 약의 약효가 목표치보다 크게 올라가거나, 약효가 아예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며 "어느 경우든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적정량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먹는 약·주사제·바르는 약을 모두 합한 약값으로 건강보험 재정에서 빠져나간 돈은 2007년에는 9조5000억원에서 2010년에는 12조8000억원으로 급증했다. 전체 의료비에서 약제비(藥劑費)가 차지하는 비중도 2001년 23.5%에서 2009년 30%에 육박했다.
서울대 의대 의료정책실 권용진 교수는 "약의 오·남용이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급속한 인구 고령화로 전체 의료비 증가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지나친 약 소비는 건강보험 재정을 부실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 요소"라고 말했다.
병원 돌며 한해 수십년치 약 타가는 의료쇼핑族도 문제
일부 의료급여 수급권자들 공짜 악용해 약 되팔기도
의사 김모(47)씨는 지난해 지방에 의료봉사 활동을 갔다가 깜짝 놀랐다. 주민들이 무척 기다릴 거라 생각하고 준비해간 약이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이미 온갖 종류의 약이 한 소쿠리씩 있었다. 김씨는 "약을 주는 것보다 노인들이 약을 오남용하거나 유통기한 지난 약을 사용하는 데 대한 관리가 더 필요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기초생활보장대상자나 국가유공자·탈북자 등에게는 거의 무료로 병·의원을 이용하게 하는 의료급여 제도가 실시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는 이를 악용해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며 약을 타는 '의료쇼핑'을 하고 있다.
의료급여 수급권자(1종)인 김모씨는 지난해 9월 10일 하루 동안 동네 의원 5곳을 찾았다. A내과의원에서 소화불량 증상을 호소하며 30일치 약을 처방받는 등 이날 하루에만 114일치 약을 타갔다. 이런 식으로 김씨는 지난해 6월부터 11월까지 5개월간 1332일치(하루 평균 7.3일치) 약을 처방받았다.
2009년의 경우 의료급여(처방·진료) 일수가 2000일을 넘는 수급권자는 379명이었다. 보건복지부가 이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자신이 앓고 있는 질환에 따라 적절하게 이용한 경우는 81명(21.4%)뿐이었다. 나머지는 ▲약물 오남용(89명·23.5%)이거나 ▲습관적으로 약품을 타서 쌓아놓는 경우(75명·19.8%) ▲여러 병원에서 의료쇼핑을 한 경우(55명·14.5%) 등이었다.
부산 사하구에 사는 이모(41)씨는 2009년 당뇨병약 8267일치, 순환계약 6823일치, 소화기관약 5823일치 등을 중복 처방받았다. 당뇨병약만 해도 23년 가까이 먹어야 할 분량이다. 고혈압약과 당뇨병약은 과다복용하면 혈압저하와 저혈당을 초래해 심한 경우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
보건복지인력개발원 관계자는 "의료쇼핑족으로 분류된 사람들의 집에 찾아가보면 집집마다 약이 쌓여 있거나, 파스·연고 등을 주변에 나눠 주거나 불법으로 파는 경우도 있다"며 "약 과다복용으로 건강을 해치는 것도 큰 문제"라고 말했다.
[藥 많이 먹는 대한민국] 위 출혈·불면증… 약 잘못 먹어 생긴 부작용 작년 5만건
허술한 처방관리시스템 무좀약 복용하던 50대… 상극인 약 먹고 사망한 경우도 환자 藥처방 관리 시스템, 작년 말 도입해 아직 미완성고혈압, 경동맥협착증, 전립선 비대증, 만성 폐렴 등을 앓고 있는 김모(85·서울 서초구)씨는 동네 병원 세 곳에서 진료를 받았다. 1년 이상 치료를 받으면서 세 병원에서 각각 처방받은 약을 모두 더해 매번 12알씩 먹었다. 약을 먹는 동안 김씨는 계속 어지럼증에 시달렸다.
하지만 세 병원 중 어느 병원도 어지럼증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다 최근 폐렴 악화로 대학병원에 입원하면서 어지럼증이 그동안 먹어온 약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씨가 복용한 약에는 혈압을 낮추는 약이 4알이나 중복돼 있었다. 그래서 적정 용량을 초과한 고혈압약의 부작용으로 어지럼증이 나타난 것이다. 이후 고혈압약의 용량을 조절해 복용약을 8개로 줄이자 어지럼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스냅샷으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조선닷컴
◆약 많이 먹으니 부작용도 많아
약 먹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약으로 인한 부작용도 많이 겪는 편이다. 김씨처럼 여러 병원에서 받은 각각의 처방은 문제가 없지만, 한꺼번에 먹는 바람에 약효가 과잉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다른 병원 처방 내용을 모르고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을 실수로 처방하는 바람에 환자가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실제로 2006년 무좀약 케토코나졸을 복용하던 50대 이모씨는 두드러기 증상으로 동네 내과를 찾았다가 항히스타민제 페르페나딘을 처방받았다. 두 약을 함께 먹은 이씨는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두 약은 함께 쓰면 심장에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병용금기(倂用禁忌)' 약이었기 때문이다.
빠른 효과를 보려고 많은 약을 한꺼번에 먹어서 부작용이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하루라도 빨리 살을 빼고 싶은 환자에게 식욕억제제, 지방흡수 억제제, 이뇨제 등을 모두 넣어 한 번에 8∼10알씩 처방하는 비만 치료가 대표적이다.
가톨릭의대 가정의학과 김경수 교수는 "약을 많이 쓰면 오히려 부정맥, 현기증, 입 마름, 불면 같은 부작용만 커진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식품의약품통계연보에 집계된 의약품 부작용 보고 건수도 2008년 7210건, 2009년 2만6827건에서 지난해 5만3854건으로 급증했다. 식약청 관계자는 "부작용이 갑자기 늘었다기보다는 2006년부터 지역약물감시센터가 차례로 문을 열면서 자발적인 부작용 신고가 늘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부작용 방지시스템 아직 느슨
이런 의약품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지난해 말 처방조제지원시스템(DUR)을 도입했다. 의사가 처방하는 약이 환자가 이미 다른 병원에서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는 약과 중복될 경우 DUR 전산망을 통해 알려주는 것이다. 현재 쓰려는 약이 이전 처방에 따라 먹고 있는 약과 충돌해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위험이 있을 때에도 경고 메시지가 뜬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함께 쓸 수 없는 약, 소아·노인에게 쓸 수 없는 약, 임신 중에 쓸 수 없는 약에 대한 정보를 의사가 처방하는 순간에 알려줌으로써 부작용을 미리 차단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며 "현재 전국 병·의원, 약국의 94%가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도입 초기 단계인 국내 DUR의 '그물망'은 아직 느슨하다. 아직까지는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전문약에 대한 정보만 제공될 뿐 처방전이 필요 없는 일반약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김씨의 경우처럼 '약효 과잉'으로 인한 부작용이 일어나는 경우도 알 길이 없다.
국내 DUR이 900여건의 정보만 담고 있는 반면 이미 1970년대 DUR을 도입한 미국은 3만5000건이 넘는다.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박병주 교수는 "기본적으로 모든 약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 만큼 꼭 필요할 때만 복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