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 오선지에 감춰진 슬픔 -
세월아
- 최 인 락
달력 한 장 이 손으로 넘기려니
이제 남는 것 하나도 없네
달력은 세월 싣고 가는 종이배
넘기지 않으면 그대로 있을까
종심從心에 얻은 시간이라
빠르게 달리는 하루하루가
그저 어지럽고
넘기지 않아도 저 해는 또 저물어
하늘을 보고
먼 산을 봐도
너는 언제나 그대론데
어찌하여 나만 백발이 성성한가
*최인락 : 한국공무원문학협회 시, 시조 등단. 작품집으로 ‘달빛풍경’ 등 다수.
회상에 젖어 여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될 때였다. 저만치서 병실 담당 간호사가 손나발로 나를 불렀다.
“뭐야? 한참 재미있는 순간에.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녀와 깨끗이 헤어졌어?”
201호는 간호사의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그다음 내용을 독촉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이어가기엔 이미 분위기는 깨져버렸다.
“의사 선생님 회진이에요. 빨리 오세요.”
간호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핏대를 올렸다.
“이런 제기랄! 하필이면 의사 회진이야.”
201호는 못내 아쉬운 듯 휠체어를 투박스럽게 잡더니 병원 입구 쪽으로 거칠게 몰았다. 나는 여전히 그날, 헤어지자는 그녀의 말에 여운이 남아 정신이 어지러웠다. 병실에 도착하자 나는 그게 언제 이야기라고 지금도 가슴이 아픈지 스스로 책망했다. 그렇지만,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가슴 아픈 사랑의 잔해는 언제든 표면 위로 떠 오르기 마련이었다. 이제 거의 다 잊은 줄 알았던 그녀와의 사랑이 오늘 다시 생각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 달 이상은 입원해야 합니다.”
담당 의사는 짤막하게 소견을 말하고선 병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나는 한 달 동안이나 병실에 있어야 한다는 말에 201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201호는 기가 찬지 창밖만 쳐다보다 내 표정에 짜증을 내었다.
“그래도 안 돼. 나도 올라가야지. 벌써 3주나 있었어.”
“다음 주면 피서철이야. 손님이 엄청 몰려올 건데.”
“그야, 당신 사정이지. 나도 올라가면 할 일이 엄청 많아.”
201호는 어떻든 이쯤에서 발을 빼려고 눈을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펜션을 봐주지 않으면 볼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도 그것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환심을 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좋아! 칠 대 삼”
그는 내 말에 콧방귀를 꼈다.
“누가 칠이고 누가 삼인데?”
“그야 내가 칠이고 그대가 삼이지.”
그러자 이번엔 그가 짐짓 화를 내었다.
“야! 올라가면 내 일당이 하루 얼만데 겨우 삼이 뭐야?”
그의 말에서 나는 잘만하면 그를 잡을 수 있다 싶어 나름대로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오 대 오!”
그런데도 그는 별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답답해진 내가 그에게 도대체 어떤 조건을 원하는지 물었다.
“칠 대 삼인데, 내가 칠!”
그는 당연한 듯 말했지만 듣는 나로선 기가 막혔다. 아니, 매년 여름에 올 때마다 숙박비를 반 정도 할인해주었고 펜션 시설을 자기 것인 양 사용해도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던 나였다. 나는 그의 뻔뻔함에 치를 떨었지만 지금 이 상태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한 시간 만에 결론을 내었는데 그 조건은 육 대 사, 물론 내가 사였다.
201호는 그제야 흡족한지 아픈 나를 두고 당장 펜션으로 향했다.
여름 장마였다. 하필이면 본격적인 피서철을 앞두고 일주일 내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201호의 얘기로는 펜션에 제법 많은 손님이 왔다고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펜션 영업이란 게 사실 이곳에는 한 철 장사였다. 여름 피서철에 벌어들인 수입으로 일 년을 사는 나로선 고무적인 사실이었다.
병실에 종일 누워있으니 아내와 아이들이 생각났다. 비록, 한때 나의 실수로 헤어졌지만, 아내는 좋은 여자였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 두 아이의 엄마로서 그녀는 손색없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 기억과 맞물려 내 머릿속에 자꾸 떠오르는 사람은 정유희, 그녀였다. 남편 손에 이끌려 서울로 올라간 그녀가 아무런 문제 없이 잘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몇 번이나 머리를 흔들며 괴로워했다.
201호는 사흘에 한 번꼴로 병실에 찾아왔지만, 함께 술도 못 마시는 처지인 내가 지겨운지 갈아입을 속옷만 전해주고 쏜살같이 펜션으로 돌아갔다. 나는 오롯이 홀로 병실에 갇혀 옛 기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날 병원에서 저녁을 먹고 창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을 때였다. 201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뭐?”
“지금 그리로 갈 거야.”
“남편과 함께 왔어?”
“아니, 혼자야.”
나는 그만 들고 있던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가 왔다고 했다. 함께 사고를 당했지만, 그녀는 내 상태를 잘 몰랐던 모양이었다. 내가 당연히 펜션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창밖으로 여름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병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 그만 병원 로비로 향했다. 로비엔 원무과 야간 당직자만 있을 뿐 아무도 다니지 않았다. 간단한 눈인사를 건넨 나는 아예 병원 정문으로 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호흡은 거칠었다.
잠시 후, 입구 주차장에 차를 댄 그녀가 승용차에 내리면서 우산을 펼쳤다. 나는 우산을 보자마자 그녀와의 옛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그녀는 아직 날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낮엔 몹시 더웠지만 비와 함께 기온은 조금 내려가 있었다. 그녀는 원피스에 노란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유희?”
입구에서 우산을 접던 그녀는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많이 다쳤어요?”
그녀는 우선 내 몸 상태를 살폈다.
“아니, 아니. 그런데 웬일이야? 남편은 알고 있어?”
하지만 그녀는 내 질문엔 아랑곳없었다.
“어디 봐요. 팔, 다리 그리고 얼굴, 모두 상처투성이네요. 정말 미안해요. 전 제가 별로 다치지 않아 아저씨도 괜찮은 줄 생각했어요. 펜션의 그분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날 아저씨가 날 보호하려고 하다 이런 상처를 입었다고 하더군요. 정말, 미안해요. 이런 줄 모르고 난 서울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았어요.”
“괜찮아.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뭘. 그건 그렇고 뭐 좀 먹었어? 일단 안으로 들어가. 자판기 커피라도 한잔하게.”
나는 목발을 짚고 그날처럼 그녀 앞에 나섰다. 자판기에서 뜨거운 커피 두 잔을 놓고 우리는 원무과 앞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그런데 어쩐 일로?”
“기억나요? 예전 제 친구, 미란이 말이에요.”
그녀에게 그 이름을 듣자 나는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녀와 한참 사랑에 빠졌을 때, 나는 낯선 여자에게 전화를 받고 약속장소로 나간 적이 있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온 유희의 친구라고 했다. 커피숍에서 만난 그녀는 다짜고짜 나더러 유희와 헤어지라고 당돌하게 말했다. 나는 그때 몹시 민망했고 당황스러웠다. 잠시 뒤, 놀란 유희가 와서 상황을 수습해서 그렇지 안 그랬으면 나는 몹시 곤란스러운 상황에 직면할 뻔하였다.
“기억나지.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우리 사이를 방해했잖아”
“호호. 그 애가 그랬던가요?”
“그런데 미란이 왜?”
“독신주의자던 그 친구가 결국 결혼했거든요. 신랑이 여기서 멀지 않은 광양제철소 직원이래요. 결혼식 때문에 왔다가 잠시 들렀어요.”
“그렇구나.”
빗소리를 들으면서 마시는 커피는 아무리 싸구려라도 맛이 있었다. 만나면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나는 그녀 앞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병원로비를 감쌌다. 그래도 뭔가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날 남편과는 괜찮았어? 쓸데없는 오해가 생겼을까 봐, 사실은 걱정했어.”
그녀는 내 말에 침묵을 지켰다. 그건 남편과의 사이에 이미 오해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별달리 해결할 방법은 없으니 그건 내 소관을 벗어난 문제였다.
“예전에 남편과 한 번 본 적이 있죠?”
그녀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았다.
“그런 일이 있었지.”
기억이 났다. 우리 사이가 거의 막바지로 이르렀을 때, 그녀는 그와 함께 있었다. 둘은 곧 결혼한다고 했다. 나는 그날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그녀를 찾아 헤맸다, 그 장소에서 그와 그녀를 보았다. 나는 그녀보다 그를 보는 순간, 이성을 잃어버렸다. 놀란 그녀가 그의 뒤에 숨자마자 나는 주먹이 나갔다. 그의 안경이 저만치 날아갔고 그는 내게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마침내 경찰이 왔고 나는 그녀를 뒤로한 채 파출소로 갔다.
“그래도 내 얼굴은 잘 모를걸? 갑작스럽게 내가 등장하여 맞는 과정에 안경까지 날아가 버렸으니 아마 보진 못했을 거야.”
“아뇨. 그 사람은 기억해냈어요.”
그리고 그녀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창밖만 뚫어지게 보았다.
“우리가 그때, 아니 그때 제가 아저씨를 끝까지 기다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계속 컵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다 지나간 일이야.”
“그렇겠죠. 그래도 만약.”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건 지금 그녀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갑자기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자꾸 날 의심해요.”
“때리기도 해?”
“가끔은요.”
나는 한숨이 나왔다.
“제 탓도 있어요. 남편은 처음부터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었어요. 저 때문에 계속 술을 마시게 되었어요. 전, 이런 내가 정말 미울 만큼 싫어요.”
“원인이 뭔데?”
“뭐가요?”
“남편과 틀어진 이유 말이야.”
그러자 놀랍게도 그녀는 무엇인가 결정적인 말을 할 사람처럼 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끝내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표정에서 아마 나와 연관된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이 되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나는 그날 폭행사고 이후에 깨끗이 그녀 곁을 떠나 주었고 빈털터리가 되어 집에서도 쫓겨났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와 남편의 불행한 결혼생활의 직접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다음에 기회 되면 말할게요.”
그리고는 한참이나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시간은 흐르고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동안 숨겨놓았던 내 감정을 이야기해야 했다. 몇 번이나 기회를 노렸지만, 그녀에게는 틈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무한정 있는 게 아니었다.
“그날, 폭우 속에서 말이야. 그때 그대는 내게 서울로 가지 않겠다고 말했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지금 듣고 싶은데.”
내 말에 그녀는 오랜만에 따뜻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정말 그러고 싶었어요.”
“뭐가?”
“서울에 가지 않고 아저씨랑 그 펜션에서 살고 싶었다고요.”
그녀의 말에 나는 또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그게 가능할까?”
“뭐가 문제예요? 아저씬 이제 혼자이잖아요.”
“아니, 아니. 내 문제가 아니라.”
“맞아요. 제가 문제죠.”
나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가만히 있으면 가슴이 벌렁거리고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의 휴대전화에 벨이 울렸다.
“알았어. 지금 올라가. 아빠랑 밥 먹고 T.V 보고 있어. 빨리 갈게”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딸인가 봐?”
“네.”
그녀는 휴대전화를 핸드백에 넣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드러나는 그녀의 목덜미는 여전히 매끄럽고 예뻤다. 예전, 나와 대화를 나눌 때 곤란할 때면 하는 버릇이었다. 나는 이만 그녀를 놔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인제 그만 올라가. 아이에겐 엄마가 최고야.”
그녀는 내 말에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갈게요. 다음에.”
“그래.”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내게 전해졌다.
첫댓글 "오선지에 감춰진 슬픔" 감동을 울리는 글을 접합니다
이인규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