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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3권. 중세와 르네상스, Moyen Age et Renaissance 463-702
서양사 유일 무이 순교자: 브루노
제7장, 르네상스 La Renaissance 659-702.
11절, 플라톤주의: 포스텔 과 보댕 Le platonisme : Postel et Bodin 689 .
플라톤학파의 정신은 다른 모든 학파에게는 부족한 통일성의 요청에 있다. 그 요청은 르네상스시 시대를 닫는 거대한 체계들을 특징지운다. (689)
우선, 이론적인 만큼이나 실천적 특성으로서, 포스텔(Guillaume Postel, 1510-1581)의 노력은, 지상[지구]의 종교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De orbis terrae concordia, 1544) 동방언어들에 대한 그의 인식을 이용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는 이런 일치가 종교적 진리들의 추리적 특성 덕분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크리스트교의 통일성을 단절했던 프로테스탄트들에 적대적인 것 보다 적지 않게, 트랑뜨 공의회가 확립했던 카톨릭 당국에도 적대적인, 그는 모든 종교들로부터 망각된 기원으로 회귀에서만 구원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 망각된 기원이 이법이다. 그에게서는 무엇보다 파도바학자들에게 반대하여 무로부터(ex nihilo) 창조와 인격의 불멸성을 당황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반대하게 하는 것은 플라톤이다. 그가 말하기를 “왜냐하면 플라톤의 이데아들, 분리된 실체들, 일반적으로 완전히 창조된 지혜에 반대하기 위하여, 그들은[파도바학자들] 이로부터 신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신이 작동하는데 억압하는 것으로 표상되기 때문이다.” 더 보태야한다 포스텔의 추리적 종교(la religion rationnelle)는 르네상스 시대의 한 인간의 종교이며, 마르실 피생(1433-1499)과 미란돌라(1463–1494)처럼 종교를 그가 플라톤에서 반향을 발견한 전통에 결부시키기를 시도한 석학의 종교이며, 그러나 또한 퀴벨라 여사제들의 계시에서, 유대 카발라에서, 이탈리아반도의 에트뤼스크(Etrusques)민족들에서도 – 그는 이 민족들에 한 권을 책을 썼다 – 이는 [자연] 이법(Raison)으로부터 온 전통이며, 일단 추리하는 단순한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le Verbe)으로서, 로고스(le Logos)로서,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세계영혼으로서 생각된 것이다. (690)
법학자인 쟝 보댕(Jean Bodin, 1529-1596)은 공화국(République, 1576)의 저자이다. 이 책에서 그는 플라톤과 마키아벨리를 대립시키고, 선언하기를 국가의 권위는 자연권에 복종에 있다고, 그 권위는 예를 들어 개체적 특성[소유]을 제거할 수 없다고, 그리고 그 국가는 착한 인간의 주권이외에 다른 것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보편적 권리를 비교로부터 연역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 권리 속에 비교된 방법을 도입한다. 그의 저술 일곱 학자들의 학술대회(Colloquium heptaplomeres)의 근본적 생각은 일곱 학자들 사이의 학술대회인데, 카톨릭신자, 루터파신자, 칼빈파신자, 유대인, 뮈즐망 이탈자, 자연종교 옹호자, 회의주의자가 등장한다. 이런 생각은 륄(1232경-1315), 쿠자누스(1401-1464), 포스텔의 생각들을 상기시킨다. [그 근본적 생각은] 모든 종교들로부터 보편적 종교를 생성할 수 있는 공통적 내용을 분간해 내는 것이다. 보편적 종교란 “진실한 신을 향한 순수 정신의 시선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공통적 신앙은 극단에서 단순화된다. 왜냐하면 그 신앙은 유일한 신에 대한 주장만을 그리고 도덕적 덕목들의 훈련에 의한 신의 숭배에 대한 주장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실천에서 보댕은 관용에 도달하며, 그 관용은 무신론으로 고발당하지 않기 위해 또는 공화국의 평온을 뒤흔들 수 있는 항쟁자이기 위하여, 모든 종교들을 그에게 재인식하게 해준다. (691) (56ULF)
12절, 이탈리아 플라톤주의: 텔레시오 Le platonisme italien : Telesio 691
사회적 여러 걱정거리들이 포스텔과 보댕의 사유를 지배했다. 우리가 곧 말하게 될 이탈리아의 사색가들은 많이 다르다. 사색가들 모두는, 우리가 이미 파도바학자들에게서 만났던 살아있는 우주의 이론, 즉 보편적 아니미즘(animiame 생명주의)를 지지했다. 이들을 파도바학자들과 구별하는 것, 그것은 처음에는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적대적이라는 점이고,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자신들의 학설을 마치 자족적이고, 또한 신앙과는 단순하게 병치되지 않는, 실재성의 전체적 통찰처럼 간주했다. (691)
우선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의 말에 따르면, 텔레시오(Bernardino Telesio, 1509-1588)는 근대인들 중에서 첫째 근대인(novorum hominum primum)이라 한다. 그는 스토아학파의 아니미즘을 되살아나게 했다. 이 아니미즘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세네카, 키케로 등에 의해서 그에게 알려졌다. 그는 두 가지 원리와 더불어 동역학을 인정했다: 즉 능동적 힘과 완전히 타성적이고 수동적인 물질. 그런데 이런 운동적 힘은 [한편] 열(熱) 또는 확장적 힘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 냉(冷) 또는 수축의 힘으로 이중화되어 있다. 확장과 수축은 이것들 여러 정도의 차이를 통해서 존재들의 모든 질적인 차이들을 설명한다. 이런 능동적인 힘이 한 형체(un corps)이다. 살아있는 것의 영혼은 그것의 일부분이고 마찬가지로 한 형체(un corps)이며, 숨결(un souffle ou pneuma [정령])이다. 숨결은 두뇌의 구멍들과 신경들을 관통해서 퍼져있다. 이런 영혼에 대한 개념작업은 동물 정령들의 통상적인 이론 속에 통속화되어 있을 것이다. 그 개념작업은 인식의 자연[본성]에 관해서 스토아학자들의 주제와 유비적인 주제를 포함한다. 감각작용은 접촉이며, 접속에서 대상은 숨결 도는 정령을 변형시키고, 숨결은 보존의 고유한 활동성에 의해서 반작용한다. 이런 보존의 활동성은(텔레시오는 여기서 키케로의 선들과 잘못들의 극한들(De finibus bonorum et malorum, 전 45)의 3권을 따랐다), 인간이 자기 보존을 타인 보존과 함께 연대한다는 인식 덕분에 도덕을 태어나게 한다. 사회적 중요한 덕목은, 마치 키케로의 의무론(De officiis, 전44)에서처럼, 인류성이다. 반면에 내부의 덕목은 덕목에서 행복을 발견하게 하는 숭고성이다. 기억과 사유 같은 지적 인식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 지적 인식은, 감관들이 우리에게 부족할 때, 감관들을 보충할 수 있는 감각작용들을 보존하는데 있다. 게다가 감각작용과 의식작용은 인간들에게서와 동물들에게서 서로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자연의 각 존재에서도 서로 도움이 된다. 자연의 공감 전체가 동물적[생명적] 우주를 형성한다. (692)
진실로 텔레시오는 비물질적 영혼의 주제를 주장하였다. 그 주제는 다른 주제에 덧붙여졌고, 또한 그 주제는 초자연적 숙명과 더불어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더하기 속에서 교회의 권능에 비추어서 신중함의 조치와 다른 것을 보기를 주저한다.
(692) (56ULF)
13절, 이탈리아 플라톤주의(연속): 죠르다노 브루노
Le platonisme italien(suite): Giodarno Bruno 692
죠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쉰둘]는 파트리찌(Francesco Patrizi, 1529-1597)와 동시대인이다. 파트리찌는 페라라 대학 교수였으며, 비의적 플라톤주의를, 말하자면 대화편들의 관념들 사이에 종합주의를, 그리고 거짓-해석학적 책들의 신비학을, 칼데 지방의 신탁들을 퍼트리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의 체계는 보다 개인적이라고 할지라도, 브루노가 이렇게 썼다.
“그는 야망을 지닌 인간이며, 오만하고 건방지고 시샘 많은 두뇌의 소유자이며, 자신이 자연의 인식에 탐구와 접근의 유일한 길을 가졌다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원하는 인간이다…. 따라서 가장 한결같고 굳건한 길, 가장 관조적이고 구별된 길이면서, 가장 고양된 반성의 양태(le mode)는 항상 선호되어야 하고, 보다 존경받고 교양 있어야 할지라도, 그럼에도 좋은 결실들이 없지 않은, - 그 열매들이 동일한 나무의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 그러한 다른 방식(manière)을 비난하지 않아야 한다…. 에피쿠로스 학자들은 정확한 관념들을 많이 표현했다. 비록 그들이 물질적 성질들 보다 그 위로 고양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에게 수많은 탁월한 관념들을 알려주었다. 비록 그가 영혼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낙사고라스는 자연의 관찰로부터 이익을 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자연 속에 뿐만이 아니라 또한 자연 밖에서와 자연 그 위에서도 그는[파트리찌?]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트리스메기스트(Trismégiste), 우리 신학자들 등이 똑같이 신이라 불렀던 예지(un intellect)를 인정했다.” (692)
어떠한 구절도 브루노의 절충주의와 그의 철학 전반에 대한 야망을 보다 잘 표현할 수 없다. 그는 단 하나의 적을 가졌고, 그 적은 아리스토텔레스이며, 그 인간은 “무례하고 야망적이며, 모든 다른 철학자들의 견해를 그들의 철학하는 방식과 함께 평가 절하하고자 했다.” (693)
한 철학자에게서 보아 사유의 이런 풍부함 또는 오히려 과잉이었다. 그 철학자는 마치 나중에 라이프니츠가 행한 것처럼, 과거의 사변활동들의 어느 것도 잃어버리기를 원치 않았고, 브루노 학설로부터 체계적인 진술을 시도하고자 원했던 자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실재성들의 위계질서(신, 온지성, 영혼, 물질)는 플로티노스를 반대하는 수많은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가끔 신플라톤주의의 위격들(hypostases)을 환기시킨다: [신] 태양중심설은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것이지만 무한한 세계의 가설에 의해 교정된 것이고; [온지성] 동일성은 파르메니데스(전510경-전450경)의 것이고; [영혼?]; 원자론은 데모크리토스의 것이며 미립자 물리학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브루노의 중요한 주제들이다. 브루노는 일체를 발견하는데 전혀 익수하지 않았다. 플로티노스주의는 내밀하게 지구중심주의에 연결되어 있었고, 이 지구중심주의만이 통일성의 감각적 이미지를 그[플로티노스주의자]에게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플로티노스(205-270)는 생명의 연속성을 기계적 혼성에 의해 대체하려고 했던 원자론를 단죄했다. 따라서 브루노에게서 일련의 계속적인 체계들을, 즉 1582년에서 1592년 사이, 서른넷에서 마흔넷 사이의 10년 시기에 그가 구성했던 작품들 속에서 불가능할 것 같이 보이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될 것인가? 브루노가 1576년[스물여덟]에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포기했던 작품들 속에서, 그리고 그는 루터파들에게도 캘빈파들에게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의심받고, 그리고 교황청의 감옥들 속에서 – 그는 거기에서 1600년에 단지 산채로 화형당하기 위해서만 나올 수 있었다 - 8년을 갇혀 있었으면서, 흔들렸던 생애에서도 썼던 작품들 속에서, 모순들의 가닥을 보기를 우리가 더 좋아할 것인가? 확실히 그에게는, 마치 선들을 점들로 구성하는 특이한 수학적 원자론처럼, 많은 미결사항들과 심지어는 부조리들이 있다. 이 수학적 원자론은 플라톤의 앞선 시대에 있었을 것인데, 그 시대에 비추론가들(les irrationnelles, [비합리론자들])이 아직은 발견하지 못했을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나머지의 것에 관해서, 브루노는 반대로 플라톤주의를 타협적인 연대성들로부터 구별해낼 수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플라톤주의가 기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처럼 지구중심주의에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몇몇 플라톤주의자들은 퓌타고라스주의자들의 태양중심주의를 선호했다는 것을, 플라톤 그 자신은 티마이오스편에서, 세계에 대해 마치 생명체와 그것의 영혼에 대해 말하듯이 한 후에 구체들 속에서 묘사할 수 있는 규칙적으로 단단한 소립자의 세계를 구성하는 원자론을 제시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그런데 브루노가 다음 원전에서 참조하였던 것은 플라톤의 원자론이다(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 아니다): “퓌타고라스에게서 제1원리들은 모나드들과 수들이다. 플라톤에서는 원자들, 선들, 표면들이다.” 모든 원자들에게 구의 도형을 부여할 생각[관념]을 그에게 암시하는 자는 에피쿠로스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브루노는 진실로 직관적이어서, 수세기의 관념들의 연합들을 이렇게 단절했다. 통속적 플라톤주의자들은 그래도 일상적 관조(contemplatio ordinis)에, 즉 사물들의 위계적 질서의 인식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 [일상적] 인식은, 층계의 넷째 단계일 뿐이고, 그 층계는 열다섯 단계를 허용하며, 그 중에서 마지막 두 단계는 “사물 안에서 변형작용 자체이며 또한 사물 그 자체의 변형작용이다.” 인식의 모든 찰나들 사이에서, 게다가 브루노는 완전한 침투를 본다. 그가 쓰기를 “사람들은, 감관 속에 지성의 참여[활동]이 있다면, 감관은 지성 그 자체가 될 것이라고, 증명할 수 있다.” 의미있는 원문이다. 여기서 감관들과 예지의 대립은 사라진다. 이 대립은 통속적 플라톤주의에서 가장 소중한 대립들 중의 하나이며, 그대립은 브루노의 변함없는 경향성을 잘 보여준다. 그것[경향성]은 참여로부터 동일성으로, 즉 감관과 예지에서도 또는 감각할 있는 것과 인식할 수 있는 것에서도 동일성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데 있다. (694)
이것이 바로 세계에 대한 그의 통찰의 중요한 특성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에게서 모든 위격들, 즉 신, 온지성, 세계의 영혼, 물질은 하나의 위격으로 환원된다. 하나의 위격은 온생명이며, 하나이자 동시에 여럿인 우주의 온생명이며, “성스럽고, 축성받고, 존경받는 동물”이다. 특히 그는 비존재일 뿐이며, 모든 씨앗 이법들을 이미 포함하지 않는, 물질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믿는 것보다 적게 플로티노스와 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가지적인 물질의 이름 하에서 플로티노스는 진실하고 신적인 실재성을 정확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개별자들은 그에게서는 단지 유일한 실체의 양태들일 수 있을 뿐이며, 모든 개별자들은, 마치 수들이 통일성[단위]에 속하듯이, 실체에 속한다. 또는 마치 수들을 구성하는 통일성들이, 수들의 조건이 되는 원초적 통일성[단위]에 속하는 것처럼 말이다. 신은 모나드들 중의 모나드이며, 존재들 중의 본징(l’entité)이며, 실체들 중의 실체이며, 또는 무한에 대하여(De immenso)(1591)이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rerum facies dum tantum fluctat extra,.
Intimius cunctis, quam sint sibi quaeque, vigens est,.
Entis principium. cunctarum fons specierum,
Mens, Deus, Ens, Unum, Verum, Fatum, Ratio, Ordo
“사물들의 표면이 흔들리고 있는 한, [일자는] 사물들이 자기 자체들에 내밀하기보다 모든 사물들에게 훨씬 더 내밀하다. [그 일자는] 존재의 살아있는 원리이며, 모든 형상들의 기원이며, 정령[온정신], 신, 존재, 일자, 진리, 운명, 이법, 질서 이다.” 몇몇 진수들에서 이런 정령[온정신]은 여러 다른 정도들로 된 실재성들로 해체된다. 전체 또는 신 보다 상위인 온정신[정령], 모든 사물들과 온자연에도 개입된 온정신은 모든 사물들 또는 온이법을 관통한다. 다른 말로 하면, 유일한 실재성만이 중요하다. 차이들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 차이들은, 브루노가 초월성의 찬성자인지 내재성의 찬성자인지를 찾고자 원하는 자들에게서만 값진 것이다. 그런데 질문은 다음 경우에서 의미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신과 자연을 가지고 정태적이고 병치적인 실재성들을 만들 경우에만 의미 있고,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있고 움직이는 힘을 고려하는 브루노의 동력학을 받아들일 경우는 아니다. (695)
이렇게 우주의 무한성에 대한 주제가 설명된다. 왜냐하면 신적 무한은, 동등하게 무한한 우주 속에서만, 그리고 명백한 파라독사일지라도, 사람들이 더 알맞게 단자론이라 부를 수 있을 원자론에서만, 설명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브루노는 마치 나중에 라이프니츠처럼, 단순성을 가지고 실체의 특성적인 것을 만든다:
Compositum porro nullum substantia vera est. (695)
만일 이런 이유(cette raison)에서, 그가 원자들을 받아들인다면, 그것들은 데모크리토스의 “불경건한 요소들”이 아니다. 브루노의 자연학[물리학]은 어떠한 역학도 아니다. 원자들 바깥에는, 에테르가, 즉 “세계가 그 속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거대한 영역”이 있다. 즉 공간을 채우는 터전이 있고, 원자들을 혼성하고 조합하는 세계영혼의 형체가 있으며, 그 각각 개체에서는 원자들이 중심 주위에 서로 모여서 정돈되듯이 그 중심과 같은 영혼이 있다. 따라서 브루노는 마치 전체의 이미지와 소유주처럼 플로티노스의 개체(l’individu)의 개념작업과 동시적으로 마치 혼성하는 단위[통일성]처럼 데모크리토스의 불가분성인 것(l’indivisible)의 개념작업을 간직했다. (695)
자신의 체계에서 브루노는 마치 플라톤주의의 피생(Ficin)처럼 종교적인 진실한 통일성[단위]를 희망했다. 그는 이 통일성을 종교개혁가들의 통일성에, 즉 도처에 불협화음을 심는 인간혐오자들의 정신들의 통일성에 대립시켰다. 또한 환상적이고 비관적이고 자연에 적대적인 카톨릭교리의 통일성에, 또한 질투하며 피튀기는 신을 지닌 유대교의 통일성에 대립시켰다. 그가 이집트 종교에 결합시킨 통일성이며, 말하자면 유사-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트의 종교적 플라톤주의에 결합시킨 통일성이다. 이 종교는 신지학(une gnose)이다. 또한 “신은 자신으로부터, 자신과 더불어, 그 자신이 내부에 있을 수 있는 것 보다 더 자신의 내부에 있는, 통찰(vision)이라”는 것이, 그 인간[신지학자]을 위한 인식이다. (696)
바니니(Lucilio Vanini, 본명 Giulio Cesare Vanini, 1585-1619)의 사유는 브루노의 사유의 엄격함과 확장에 비해 매우 멀리 있다. 자기의 박해자들에 대항하여 도처에서 피난처를 찾았으며, 결국에서 종교재판의 희생자였던 그는 특히 파도바학파의 주제들에 대해 전파자이며 세속화하는 자였다. (696) (56ULH)
14절, 이탈리아 플라톤주의(연속): 캄파넬라 Le platonisme italien(suite): Campanella 696
이런 영혼론적[생명론적] 흐름의 귀결점은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 1568-1639)의 체계이다. 이 체계가 그의 살았던 시기(1568-1639)에 비해서, 그는 르네상스의 인물로 남아있다. 가장 중요한 그의 작품, 감각적 사물과 마술(De sensu rerum et magia, 1620)은 1604년에 작성되었고 1620년에 출간되었으며, “비밀스런(occulte) 철학의 찬탄할 만한 부분”과 같은 부제로 나왔는데, “이 철학에서, 세계가 살아있고 인식하는 신의 조각상이라는 것이, 그리고 신의 모든 부분들과 이 부분들의 부분들이 다소 분명 또는 흐릿한 감관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그만큼이나 신이 자신의 관찰과 전체의 관찰로서 충분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사람들은 브루노와 텔레시오의 범영혼주의를 인정했다. 세계가 느끼는 존재이라고 증명하기 위한 중요한 논증들 중의 두 가지 논증은 스토아학파의 기원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세계는 느낀다. 왜냐하면 세계의 부분들의 몇 부분들 과 부분들 속에 있는 것[사물들]은 하물며(a fortiori) 전체 속에 있기 때문이다. 키케로(전106-43)의 신의 자연(De Natura deorum)에서 나온 크뤼시포스(전281-205)의 논증이다. 모든 부분들이 느낀다. 왜냐하면 모든 부분들은 감각들을 함축하는 본능들과 충동들을 갖기 때문이다. 이 논증은 키케로의 최고선 최고악(De Finibus bonorum et malorum)의 이론을 사용한다. 그러나 스토아학자들은 단지 동물들에게 대해 말한 것을, 마치 플로티노스가 그렇게 했듯이, 자연의 모든 존재들에게 확장하면서, 키케로의 이론을 사용한다. 캄파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학자들의 위계질서를, 즉 동물, 식물, 생명 없는 존재 등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거기서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처럼 단지 정도들[차이들]만을 보았다. 영양의 능력은 이미 감각적 능력을 가정하고 있다. 예지[지적 능력]은 감관과 동일하다. 동물은 이미 생각하고 있고, 일종의 추론적 이치(raison discursif, discursus univeralis)를 가지고 있다. 세계에 대한 이런 개념작업에 자연적 마술이 결합되어 있으며, 그 자연적 마술은 플로티노스가 엔네아데스 4권에서 세계의 개념작업을 마치 비밀스런(occulte) 힘들을 사용하는 긍정적 예기(un art)처럼 고려했던 방식으로 생각되었다. 그 비밀스런 힘들은 별들로부터 또는 의지의 단순한 긴장으로부터 발산한다. 이런 마술적 작용은 자연적 작용의 전형이며, 전적으로 메카니즘의 반대물이다. 그 메카니즘의 승리는 매우 가까이 있었다. (697)
이런 자연주의 위에, 플로티노스 체계의 원리를 발전시킨 형이상학이 구축되었다. 감각적 세계 속에서 공감한다는 것은 가지적 실재성 속에서 내밀한 통합이며 동일성이다. 감각적 인식은 주체와 대상의 접촉일 뿐이다. 그 인식은 우리에게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것[주체]이 느껴지는 것[대상]과 동일시 될 수 있다는 국면을 폭로[계시]할 뿐이다. 그러나 지적인 인식의 전형은 영혼의 자체에 의한 인식이다. 그런데 모든 인식은 자체의 인식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사물들을 인식하면서 “영혼은 스스로 안다. 왜냐하면 영혼은 있는 그대로 이기 때문이다. 영혼 다른 사물들인데, 그 찰나에서 영혼은 사물들 속에서 변화되어 스스로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화는 아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아는 것의 원인 또는 기회이다.” 이런 동일한 원리에 따라서, 사물들과 연결되어 있는 공통적이고 비슷한 성질들은 영혼에게 이데아들을 관조할 기회를 준다. 알려진 것[대상]과 아는 것[주체]의 동화작용은 우리의 일반적 개념들 속에서 불완전하게 실현되었지만, 이데아 속에서 완전하게 실현된다. 영혼과 자연은 캄파넬라를, 소수들(primalités 素數)과 같은 권능, 지혜, 사랑, 우리 영혼의 모델, 모든 사물들의 모델 등을 포함하는 신에게까지 인도한다. 이런 우주적 유비(analogie)는 감각주의자에게(그는 게다가 매우 정통적인 신학적 논저들을 썼다) 감각적인 것에서 가지적인 것으로 올라가는 것을 허용한다. (697)
1599년에 캄파넬라는 [이탈리아 남단의] 칼라브리아(Calabria, fr. Calabre)에서 음모를 꾸몄다. 스스로 새로운 메시아로서 자하면서, 그는 나중에 쓴 태양의 도시(La Cité du Soleil, lat. Civitas Solis, 1604)와 같은 신정공화국을 실현하고자 원했던 것 같다. 그가 태양의 도시를 1602년에 썼고, 1623년에 출판했다. 이 유토피아의 중심 사상은 보다 더 많은 생산적인 조직화 덕분에 인류의 재탄생의 사상이었다. 그는 경제적 실재성들에 대해 큰 걱정을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사람들은 나폴리에서 7만명을 센다. 그리고 이 숫자에서 겨우 1만에서 1만 5천명의 노동자가 있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힘을 넘는 노동 때문에 소진하고 죽는다. 태양의 도시에서 노동들은 동일하게 분배되어 있어서, 각자는 하루에 4시간 이상 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결과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들 각각은 부자들의 계략에 의해 인도되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러 앞으로 돌진한다. 그러나 신은 거기서 그들을 훨씬 더 높은 목표 속으로 밀고 있다.” 하나가 된 인류의 이런 생각은 크리스트교의 충분히 가까운 자연 종교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것은 르네상스시기에 플라톤주의를 다시 살렸던 자들의 근본적인 생각이었다. (698) (56ULI)
15절, 스페인 신비주의 Le mysticisme espagnol 698
레오나르도의 실험적 방법이 우주의 형이상학적 구축을 포기하고, 사물들 속에서 이상적인 도식의 합리화가 아니라, 힘들의 찰나(순간)적이고 변화하는 균형들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스페인 신비학도 위와 동시적으로 신적 실재성의 구조 위에 사변[거울효과]들을 포기했다. 16세기의 신비가들은 지적인 겸손(l’humilité)을 실행했다. 쟝 들라 크르와(Jean de la Croix, 1542-1591)는 말하기를, “신이 원하지 않는 것, 그것은 우리가 그들에게(우리의 내밀하고 개인적인 계시작용[자]들에게) 전적으로 채무를 진다는 것인데, 그런 한에서 계시작용들은 인간의 입과 같은 인간적 통로를 통해서 결코 통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에게 복종은 충분하다. 그 동일한 쟝 들 라 크르와는, 정신을 감각적 세계로부터 신으로 이끌 수 있는 추리적 절차가 있었다고 하는 생각을 혐오한다. “어떠한 사유되지 않고 창조된 사물은 신에게 통합되기에 알맞은 수단을 오성에게 제공할 수 없다 오성이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신에게 결합되는 수단이라기보다 오히려 신에게 장애물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신과 통합 속에서 사물들의 본질의 계시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물음에 응답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보다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는 내재적 자유를, 그리고 모든 성창과 모든 추론으로 독립적인 무매개적 과학을 찾는다. 테레사(Sainte Thérèse d'Ávila, 1515-1582)의 증언에서, 신비가가 이해하지 못할 수 없는 내적인 신적 말투들은, 그의 영혼을 변형시키고, 또한 그 말투들은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어떠한 것도 그 말투들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신적 말투들은 영혼이 이 말투들을 이해할 수 없는 매 찰나들마다, 또한 이 말투들을 이해하는 어떠한 욕망에서 대답하지 않는 매 찰나들마다 영혼 속에서 스스로 생산한다. 신비가는 자신의 내적 완전함을 찾는다. 그리고 에리우게나(Jean Scot Erigène, Eriugena, 810경–877)처럼 우주의 원리들의 계시를 찾는 것은 아니다. 수 세기를 지속해왔던 종교적 삶과 지적 사유의 역사 사이에 접촉은 이러한 신비주의 속에서 국면을 변화시켰다. (699) (9:14, 56UL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