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월 중순(10수)
하루시조 223
08 11
인간이 살자 하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인간(人間)이 살자 하니 이별(離別) 설워 못 살로다
수루룩 솟아올라 천상(天上)으로 가자 하니
거기도 직녀(織女) 있으니 어이 할꼬 하노라
하늘의 별자리가 강물처럼 흘러가는 은하수(銀河水) 이쪽과 저쪽에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산다는데, 이들 둘 사이가 상제(上帝)가 내린 벌로 인해 떨어져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의 저자도 하늘로 올라갈까 싶다가도 직녀 탓을 하며 선뜻 가지는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별의 아이콘으로 직녀를 거론했다는 점에서 새삼스럽습니다. 하늘나라, 얼핏 생각키에는 이별이 없는 평화로운 곳일진대 거기도 이별이 존재한다면 그다지 좋지만은 않습니다. 특별히 ‘이별’에 데인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의태어 의성어로 ‘수루룩’이 등장하는군요. 국어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24
08 12
천분이 이러한가
무명씨(無名氏) 지음
천분(天分)이 이러한가 단표(簞瓢)도 자로 빈다
경운조월(耕雲釣月)을 쉰 적도 없건마는
두어라 낙부천명(樂夫天命)이니 다시 어이 하리오
천분(天分) - 타고난 재능이나 복.
단표(簞瓢) - 단사표음(簞食瓢飮)의 준말. 도시락 밥과 표주박의 물. 아주 소박한 식생활을 비유함.
자로 – 자주.
경운조월(耕雲釣月) - 구름을 갈고 달을 낚다.
경운조월이 무슨 말인고 했더니, 종장에 낙부가 나오는군요. 세월 가는대로 낙천적으로 사는 사내이기에 구름을 뒤집고 달을 낚는 게 일이었습니다. 종장 끝구의 ‘다시 어이 하리오’는 힘이 안 닿으니 어쩔 수 없다는 포기(抛棄)의 뜻보다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돌아나가는 지천명(知天命)에 대한 순응(順應)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25
08 13
천세를 누리소서
무명씨(無名氏) 지음
천세(千歲)를 누리소서 만세(萬歲)를 누리소서
무쇠 기둥에 꽃 피어 여름 열어 따 들이도록
그제야 억만세(億萬歲)밖에 또 만세(萬歲)를 누리소서
천세(千歲), 만세(萬歲) - 천년, 만년. 오랜 시간. 길이길이 사시라는 축원의 말이기도 합니다.
여름 – 열매.
축원(祝願)이며 축수(祝壽)커늘 천세면 어떻고 또 만세면 어떻겠습니까. ‘누리소서’가 거듭되니 한편으로는 ‘너 날 놀려’하는 느낌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만세도 천세의 열 곱이나 되거늘 무쇠 기둥에 꽃도 피고 열매도 맺고 하다가, 다시 만세의 억 배인 억만세를 누리라니 그때서야 비유가 곧 하대(下待)요, 진실성이 담보되지 않은 헛 노래구나 싶습니다.
천세는 제후국의 축수요, 황제국만이 만세라 한다하여, 1897년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고 만세를 비로소 맘 놓고 불러댔다는 옛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천이건 만이건 아무려면 어떠냐, 어차피 인간은 100년이면 끝인데. 요즘 우리는 너무 편하게 삽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26
08 14
천하에 쌓인 곡식
무명씨(無名氏) 지음
천하(天下)에 쌓인 곡식(穀食) 일시(一時)에 흩어내어
억만만창생(億萬萬蒼生)을 다 살려 내고라자
그제야 함포고복(含哺鼓腹)하여 동락태평(同樂太平) 하리라
곡식(穀食) - 식량(食糧). 사람의 식량이 되는 쌀, 보리, 콩, 조, 기장, 수수, 밀, 옥수수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곡물.
일시(一時)에 – 한꺼번에.
억만만창생(億萬萬蒼生) - 억조창생(億兆蒼生). 수 많은 백성.
내고라자 – 내자꾸나.
함포고복(含哺鼓腹) - 잔뜩 먹고 배를 두드린다는 뜻으로, 먹을 것이 풍족하여 즐겁게 지냄을 이르는 말.
동락태평(同樂太平) - 태평함을 함께 즐김.
한자투성이인지라 별 뜻이 있겠냐 싶었는데, 가상하게도 함께 배불러야지 혼자만 배부르면 뭐한다냐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무릇 지도층은 스스로 검약할 줄 알아야 하고, 나눔과 베품이 사회 전반에 만연하여 곯는 이가 없어야 좋은 사회입니다. 이상론(理想論)이 되고 말지라도 공복(公僕)부터 마음을 그리 먹어야 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27
08 15
청강상 백구들아
무명씨(無名氏) 지음
청강상(淸江上) 백구(白鷗)들아 너더러 물어 보자
네 몸이 본디 희냐 청강(淸江)에 씻어 희냐
우리도 묻은 진루(塵累)를 씻어 볼까 하노라
진루(塵累) - 티끌들. 세상살이에 연관된 너저분한 일. 속루.
갈매기들의 온몸이 희디 흰 깃으로 싸여 있음을 보고 알긴 했거늘, 이 작품에서처럼 사람들 몸에 쌓인 진루를 그토록 희게 씻고 싶다는 생각은 못 했습니다. 청강상(淸江上). 청강의 위. 맑은 물이 흐르는 강의 위. 요즘은 강이면 모두 강변을 개발해 놓아서 깨끗함보다는 편리함이 먼저 생각납니다. 백구들이 또한 온갖 생명들이 서식하는 공간은 같을지라도 불과 반백 년 기억과는 사뭇 다릅니다.
작품은 다소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너를 자주 부르고, 묻자 하고 묻고 해서 느슨하지만, 그 진의(眞意)만은 가상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28
08 16
청강청혜 백구백이요
무명씨(無名氏) 지음
청강청혜(淸江淸兮) 백구백(白鷗白)이요 백구백혜(白鷗白兮) 청강청(淸江淸)을
청강(淸江)이 불염백구백(不厭白鷗白)하니 백구장재(白鷗長在) 청강청(淸江淸)이라
세상(世上)에 청백(淸白)을 알진대 이뿐인가 하노라
옛사람 특히 먹물 든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언어유희(言語遊戲)하며 즐거웠던 모양입니다.
우리말로 한 번 풀어볼까요.
맑은 강이 맑음이라 갈매기가 하얗고
갈매기가 하양이라 맑은 강이 맑은 것을
맑은 강이 갈매기의 하양을 싫어하지 않으니
갈매기가 오래 있어 맑은 강도 맑음이라
세상 이치에 맑음과 하양을 알겠거늘
이런 이치뿐인가 하노라
결론은, 청백(淸白)은 청과 백이 서로 의지하고 추켜세우기에 더욱 빛난다는 것입니다. 청백은 청백전(靑白戰)의 청백이 아니라 청백리(淸白吏)의 청백으로 곧 아주 깨끗하고 또 깨끗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29
08 17
청산도 내 벗이요
무명씨(無名氏) 지음
청산(靑山)도 내 벗이요 녹수(綠水)도 내 벗이라
청산녹수간(靑山綠水間)에 풍월(風月)도 내 벗이라
평생(平生)에 사미(四美)로 더불어 함께 늙자 하노라
풍월(風月) - 청풍명월(淸風明月).
네 아름다운 벗이 나옵니다. 청산, 녹수, 청풍, 명월이 그 네 아름다운 벗이군요. 내 벗이라는 말이 거듭되어 긴장도가 약해졌으나, 청풍과 명월을 줄여 풍월이라 했으니 상쇄(相殺)가 됩니다. 오우가(五友歌)가 있을진대 이 작품은 따로 사미가(四美歌)라 해도 되겠습니다. 종장은 자신이 자신에게 청(請)하고 권(勸)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30
08 18
청산이 적요한데
무명씨(無名氏) 지음
청산(靑山)이 적요(寂寥)한데 미록(麋鹿)이 벗이로다
약초(藥草)에 맛들이니 세미(世味)를 잊을로다
벽파(碧波)로 낚싯대 둘러 메고 어흥(漁興) 겨워 하노라
적요(寂寥) - 적적하고 고요함.
미록(麋鹿) - 고라니.
세미(世味) - 세상 맛.
벽파(碧波) - 푸른 파도, 푸른 물결.
어흥(漁興) - 고기 잡는 흥겨움.
겹다 - 정도나 양이 지나쳐 참거나 견뎌 내기 어렵다.
고라니, 야생의 그놈과 순식간에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서로 놀라 외면한 후 멀어져 가는 그놈의 앙증맞은 궁뎅이가 착하고 순하게 보였습니다. 그 선한 눈매는 또한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미록과 벗한다니 말 안 해도 얼마나 적요하고 청빈할는지 알 것 같습니다.
세미와 바꾼 어흥에 방점을 찍으며 자연인으로 돌아간 작자의 행복한 노후를 축원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31
08 19
청천 구름 밖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청천(靑天) 구름 밖에 높이 떴는 저 기럭아
도량(稻粱)을 탐(貪)하다가 망라(網羅)에 안지 마라
녹수(綠水)에 이끼만 먹고 살 못 찐들 어떠리
청천(靑天) - 푸른 하늘. 청공(靑空).
떴는 - 떠 있는.
도량(稻粱) - 벼와 기장. 쌀과 조.
망라(網羅) - 새 그물.
안지 - 앉지.
녹수(綠水) - 초록빛 물. 맑은 강물.
기러기가 행여 새그물에 잡혀 제 명에 못 죽을까 걱정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새를 그물로 잡았다는 것에 놀라웠던 기억이 납니다. 라(羅) 자를 비단 라로 새겼으니 더욱, 새그물 라로 다시 새겼던 기억도 납니다. 그물이라는 것이 미리 쳐 놓고 잡혀들기를 바라는 것이니, 저 기럭아 행여 그물에 앉은 줄도 모른 채 벼와 조 이삭에 빠져들지 말거라.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이것은 기러기가 아닌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어디 마른 체격이라도 이끼만으로 버텨질 일이던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32
08 20
청천에 떴는 매가
무명씨(無名氏) 지음
청천(靑天)에 떴는 매가 우리 님의 매도 같다
단장고 빼깃에 방울소리 더욱 같다
우리 님 주색(酒色)에 잠겨 매 떴는 줄 모르는고
떴는 – 떠 있는. 뜬.
매도 – 매인 것도. 불확실성이 포함된 추측.
단장고 - 사냥하는 매의 몸에 하는 치장.
빼깃 - 매의 꽁지 위에 표를 하려고 덧꽂아 맨 새의 깃. 표령(飄翎).
주색(酒色) - 술과 여자. 주음(酒淫).
매. 우리 선조님들이 매를 사냥의 도구로 썼음은 참 영리한 바가 있습니다. 산 생령으로 또다른 고깃감을 싱싱히게 잡았으니까요. 매사냥, 이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습니다. 북한과 몽골 3개국 공동명의랍니다.
이 시조를 통하여 사냥매 치장(治粧)의 일부를 봅니다. 일단 방울을 달았다는 점, 꼬리깃에 덧달아 표식(標識)으로 삼았다는 점.
이 시조의 작가는 매 주인의 친한 여친인가 싶습니다. 매의 외양이나 방울소리까지 꿰고 있으니 한두 번 본 사이가 아닐 것입니다. 아니면 본처(本妻)일까요. 자기 님은 매 떠 있는 줄도 모른 채 주색에 잠기기를 자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요. ‘빠져’보다 ‘잠겨’라 표현하니 조금은 상대를 이해 또는 포기한 기분이 난다고 느껴지는 게 저만의 것일까요.
사냥은 뒷전이요, 매가 떴든 말든 막걸리 한 잔에 잠겨 있는 그 낭군이 내 뒷모습을 닮았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요즘 젊은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 한자어휘에 자신이 없습니다. 옛문헌이 분명 우리 조상들의 지적 탐구 결과물인데도 직접 전달받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이 자료에서도 한자어휘 풀이에 상당한 노력을 들일 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