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 고려말 충신 율은(栗隱) 김저(金佇)-김해김씨 율은공파 입향조(예천)
지난 11월 11일 보문면 미호리(분동골)에서 고려충신 오은(五隱: 포은(圃隱) 정몽주, 대은(大隱) 변안열, 율은(栗隱) 김저, 목은(牧隱) 이색, 야은(冶隱) 길재) 가운데 한분인 대호군 율은(栗隱) 김저(金佇)공 (김해김씨 율은공파파조(栗隱公波祖)의 종중시제(회전제)가 봉행되었다.
이날 율은공파 종중의 최대 행사에 전국 각지에서 율은 공의 후예들이 참례하여 자랑스러운 율은 선조의 의(義)와 (忠)에 살며 민족과 후손에게 빛을 남긴 선조를 추모했다.
율은공파 대종회장 김시우(63·전 독립기념관 사무처장) 씨는 “후손들이 같은 핏줄임을 확인하며 서로 화합하고, 자긍심을 기르며, 뿌리없이 방황하는 유랑아가 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문중시제의 의미라고 말 했다.
● 김해김씨 시조와 유래
김해김씨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은 김해 구지봉(龜旨峯)에서 탄강하여 AD 42년 가락국(駕洛國)을 세우고 500년 왕업의 기초를 닦았다.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후로 맞이하여 왕자 10형제와 공주 자매를 두었다. 수로왕은 애민정치(愛民政治)를 펼친 성군으로 199년 3월23일 승하했다. 능묘는 김해시 서상동에 안장되어 있으며 가락중앙종친회(회장 김문석: 82·전 국회의원) 주관으로 매년 봄(3월15일) 가을(9월15일) 가락후예(김해김씨·인천이씨·허씨)들이 엄숙하고 경건하게 제향을 모시고 있다.
● 중시조 김유신(金庾信) 장군은
가락국 마지막 왕 양왕(讓王)의 증손자로 김수로왕의 13세손이다. 15세에 화랑이 되고 17세에 삼한통일을 결심하고 무예를 익힌 진충보국의 용장으로 뚜렸한 국가관과 뛰어난 지략으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문무왕 12년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62년 후인 신라 흥덕왕 10년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되었다. 능묘는 경주시 충효동에 있으며 춘추로 향사를 모시고 있다.
● 김저 선생 충절기린 표절사(表節祠)는
1506년 폭군 연산을 몰아 낸 중종(中宗)은 유학(儒學)을 일으키며 연산군의 폐정을 바로잡고자 했다.
즉위 3년째인 1508년 왕명으로 고려충신 율은 김저의 높은 절의(節義)를 기리는 표절사(表節祠)를 공의 종가(宗家) 소재지인 예천군 보문면 미호동에 세우게 했다.
이로 인하여 율은 선생 사후 1백19년 만에 비로서 그 대의가 세상에 드러나고 충절의 넋을
위로하게 된 것이다. 표절사에는 율은 김저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 이며 1864년 화재로 인해 불타 없어진것을 1987년 후손들이 중건하여 1992년 완공하였다.
■ 율은공 유시(遺詩) - 공민왕 영전에 올린 만시(輓詩)
巍巍聖德繼先王
五百年來世道昌
早增太學招賢者
晩築氷城退賊羌
一生毓慶終無得
千古凶音遽不當
今日宮前輓素輦
퍝思追憶淚滂滂
높고 높은 성덕은 선왕을 이었고
오백년 내려오는 세도가 번창하였도다
일찍이 태학을 늘여 현자를 초빙했었고
만년에 빙성 쌓아 오랑캐 물리쳤네
일생동안 경사는 끝내 얻지 못하고
천고의 흉음이 웬말인가
오늘 궁전에서 흰연에 만장으로 곡하고
깊은 성은에 방울방울 눈물지네
〈■참고문헌: 고려사/ 고려사 절요/ 율은 선생의 생애와 사상/예천군지〉
■ 율은(栗隱) 선생의 생애
경북 예천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김해김씨 율은공파의 파조 김저(金佇)는 1304년 고려충렬왕 30년 경기도 고양시 장흥 벽계리에서 출생했다.
공의 휘(諱)는 저(佇)요 자(字)는 충국(忠國)이며 호(號)는 율은(栗隱)이다. 그 유명한 호두(虎頭)장군 최영(崔塋)의 생질이었으나 나이는 최영 장군 보다 12살이나 연상이었다.
18세에 생원과와 문과에 급제하였다. 홍건족의 난 때에는 수도 개성이 함락되었다. 이 때 공은 공민왕을 모시고 안동 예천 상주까지 호종(扈從)하였다.
어가를 모시고 공민왕 10년(1361년) 12월 중순 보주(甫州: 지금 예천)에서 공민왕이 친히 임석하여 쌓은 성 이라 하여 어림성(御臨城)을 용문면 선리에 축성하면서 예천과 인연을 맺게 된다. 지금도 용문면 성내에는 그 성터가 보인다.
그 후 1365년(공민왕14년) 공의 62세에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올랐고 이어 성균관대사성, 예문관, 대제학, 공조(工曺) 69세에 예조(禮曺) 이조(吏曺), 전서(典書) 등을 차례로 거친다. 75세(1378년)에 대호군(大護君)을 제수 받으므로 실로 문무를 겸비한 위대한 경세가였다.
그러나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퇴관을 청하니 조정에서는 풍성군(豊城君)에 봉했다.
벼슬을 버린 그는 하리면 은풍 사동에 은거하여 집주변에 밤나무를 심으며 스스로 율은거사(栗隱居士)라 칭하고 은둔생활을 했다.
예천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중 이성계가 고려의 충신들을 죽이며 임금을 폐하고 나라를 빼앗으려 하자, 개성으로 올라가 고려충신 변안열(邊安烈) 정득후(鄭得厚) 곽충보(郭忠輔) 등과 은밀히 접촉하면서 이성계일당을 제거키로 결심했다.
곽충보는 겉으로는 응낙하는 체하고 이성계에게 밀고하여 이성계의 순군(巡軍)들에게 체포되어 갖은 악형 끝에 폭사(暴死)하고 말았다.
이 때 공의 나이 86세라고 하니 참으로 빼어난 국가사랑과 초인간적인 용기가 아닐 수 없다. 화랑정신과 선비정신에 투철한 충절과 문무의 겸비가 아니고는 안될 살신성인의 수범이요, 의(義)의 실천이었다.
고려사에는 이를 `김저옥사사건'이라고 기술했다. 이때 연루된 사람이 무려 30여 명인데 변안열(원주변씨시조). 이색. 우현보 등 당대 선비와 무인들로 고려조 최대 왕권사수운동이었다.
</변철남 상임고문 / cnbyun365@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