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유배길을 따라
01-솔치재
조선의 국왕 단종, 영월 땅에 그 첫걸음을 내 딛다.
영월부로 진입하는 첫 번째 장소로 , 원주 신림의 황둔과 영월 주천을 가르는 재에는 소나무가 무성하여 솔치재라 하였다.
단종임금의 유배 행렬이 한양을 떠난 지 엿새 만에 도착한 곳이다.
옛날 옛날에 조선국의 임금이 걸으셨던 길을 걸으면서,
당대를 함께 살았던 역사의 인물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던가를 되돌아보면서,
단종임금과 영월, 인연으로 이어진 동행의 길, 마땅히 걸어야 할 사람의 길을 묻고자 한다.
01-솔치재 이야기
영월로의 유배길, 한양을 떠나 엿새 만에 도착하다
단종대왕(1441~1455. 노산, 홍위)은, 아버지 문종의 뒤를 이어 1452년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1453년, 숙부인 수양대군은 ‘어린 임금을 보필하는 신하들의 권세가 극에 달하다 못해 역모에 이르게 된 것 같으니 이들을 제거하여 임금을 편히 모시고자 한다.’ 면서, 단종의 보필 신하들을 살생하는 계유정난(癸酉靖難.1453.10.10)이 발생하게 된다.
이후,
조정에는 수양대군을 따르는 이들이 요직에 오르게 되니 국사의 결정과 집행은 단종임금이 아닌 수양대군이 행사하게 되었다.
1455년 윤6월11일, 허울뿐인 임금의 자리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수양대군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의 신분으로 창덕궁에 물러나 앉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스스로 임금의 자리를 선위(禪位)하였다’ 한다.
1456년 6월2일, 단종을 재 옹립하려는 상왕복위계획이 고변되어 연루자 모두가 능지처참을 당하는 사육신 사건이 발생, 세조의 신하들은 상왕이 연루되었으니 사사시켜야 한다고 끊임없이 상소를 올렸다.
1457년 6월21일, 세조는 “상왕(上王)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궁에서 내보내 영월(寧越)에 거주시키니, 의식(衣食)을 후(厚)하게 봉공(奉供)하여 종시(終始) 목숨을 보존하여서 나라의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하라”면서 영월 땅에 유배를 결정하였다.
이튿날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어득해(魚得海)가 군사 50명을 거느리고 호송(護送)하니, 영월로의 유배길 을 떠나게 된다. 이곳 솔치재에는 궁궐을 떠난 지 엿새만인 6월27일 도착하였다.
02-어음정(御飮井)
영월로의 유배, 목마름으로 길에서 만난 샘물을 드시다.
목을 축인 곳이라 하여 ‘물미’ 라 하였으며, 임금이 드신 샘물이라 ‘어음정’이라 하였다.
산자락 바위틈
파란 하늘 옹달샘에 담겼으니
샘솟는 방울방울 생명이었어라.
03-역골과 공순원
조선시대 역(공순원)이 있었던 곳에서 가까운 골짜기라는 뜻
공순원(公順院)
임금께서는 노산군되어 죄인의 몸이라 하여 주천 신흥역 공순원에서 주무시지 못하고
주막에서 하룻밤 유숙(留宿)한 곳이다.
*公 공변될 공. 공변되다. 사(私)가 없이 공평함. 順 순할 순 . 도리를 따르다. 院 원집 원. 관청
*留 머무를 류, 기다릴 류 .宿 묵을 숙
04-주천 3층 석탑
득도와 유배의 갈림길에 서다.
술이 샘솟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주천 나루터를 건너고, 3층 석탑이 있는 탑거리를 지났다.
3층 석탑은,
수주면 무릉리에 있는 3층 석탑과 함께 9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흥령사(현 법흥사) 길안내를 위한 탑이었다고 한다.
주천강 배터거리 나룻배 건넜어라
냇가에 3층 석탑 임금을 반기는 듯
손짓하는 탑신은
사자산 흥령선원 산문으로 가라 하네
승(僧)은 도 찾아 산사길 가건만
임금은 어이하여 유배길 가는가?
건너서는 아니 될 강이었던가?
갈림길 석탑은 삼세번 붙잡네.
05-쉼터
밀려오는 회한(悔恨)에 걸음을 멈추다
이레째 유배지로 향하던 임금은 밀려오는 회한에 길을 걷지 못하고 느티나무 아래 주저앉아 자신을 돌아보던 자리이다.
선왕의 고명에 어떻게 하든지 편안하게 잘 모시려고 애쓰다 숨져간 보필신하들과 충정을 지키려다 능지처참된 사육신, 자신을 낳아주고 산고로 하루 만에 이승을 떠난 어머니 현덕왕후, 한양을 떠날 때 언덕배기 마루에서 눈물로서 이별 아닌 작별의 손을 흔들던 정순왕후가 떠올라 회한과 애절함에 이곳에서 마음을 가다듬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06-군등치
“노산군께서 오르시니 군등치(君登峙) 라 하옵지요”
층암절벽아래 주천강 굽이도는 물길 따라 험한 재를 오르니, 애달픔도 차오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휘돌아 오르면서 “이 고개는 무슨 고개인데 이다지도 험한고?” 하시니
수행하던 자가 “노산군께서 오르시니 군등치君登峙)라 하옵지요.” 하였으니, 훗날 ‘군등치’ 라 하였다.
07-방울재
재촉하는 유배길, 말에서 방울이 떨어지다.
험한 ‘군등치’를 지나 이곳에 다다른 유배행렬은 잠시 쉴 틈도 없이 길을 재촉해야 했다.
길길 멀다 하며 고삐 쥔 손 서두르니 말도 지쳤던가? 방울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훗날 ‘임금의 말에서 방울이 떨어졌다’ 하여 ‘방울재’ 라 부르게 되었다.
08-배일치마을
정겨운 산골마을, 백성을 만나다
산자락에 기대어 손바닥만 한 땅에도 곡식을 심고, 옹기종기 초가지붕아래 살고 있는 백성들을 만나다.
국왕의 자리를 물려주었음에도 유배의 몸이 된 임금을 친견한 백성들은 ‘예를 다하여 배알하니,
임금 또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09-배일치(拜日峙)재
해지는 서산을 넘어서면 한양에 궁궐이니, 종묘를 향해 큰절을 올리다.
굽이굽이 험한 고개 올라오니 어느덧 붉은 노을이 퍼지다.
이곳 고갯마루에서 석양을 바라보던 임금은, 승하하실 때까지 자신을 걱정하던 아버지 문종대왕과 자신을 지켜주려 애쓰다가 역적으로 몰려 숨져간 충신들의 얼굴을 떠올렸던가? 붉게 물든 노을에 눈물을 감추고 ‘종묘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하니, 후일 ‘배일치(拜日峙)’ 라 부르게 되었다.
10-옥녀봉
그리운 정인을 닮은 봉우리
모양이 동그랗고 두메산골의 수줍은 색시처럼 다소곳해 보이는 작은 산봉우리를 보니
아내 정순왕후의 어여쁘고 정갈한 모습이 떠올라 단종대왕이 그 이름을 ‘옥녀봉’이라 불렀다.
11. 청령포(淸泠浦)
조선국 제6대 단종대왕이 노산군되어 유배되었던 곳
1457년 6월21일, 세조의 조정은 상왕으로 물러나 있는 단종대왕에 대하여 ‘사육신 사건에 연루된 우두머리로서 그 죄가 크다’면서,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영월로의 유배를 결정하였다. 6월22일 궁궐을 떠난지 7일만 인 6월28일 늦은 저녁에 이곳 청령포(淸泠浦)에 도착하였다.
청령포,
단종대왕 유배지에 도착하다.
3면이 푸른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층암절벽으로 나룻배가 없이는 드나들 수 없는 천연감옥과도 같은 곳이다.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어 계시던 임금은, 큰 홍수로 어소가 잠겨 영월의 관아인 관풍헌 객사로 옮겨 유배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규루에 올라 세상사를 탓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던 임금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생명을 빼앗겨야만 하는 큰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순흥에 유배 중이던 숙부 금성대군이 단종대왕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고변으로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순흥고을 사건을 빌미로 ‘노산군이 살아 있는 한 역모는 계속될 것이니 이제는 사사(賜死)시켜야 합니다.’ 라는 세조의 보필 신하들의 상소가 이어지게 되었다. 세조는 ‘종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노산군이다’ 면서, 의금부도사 왕방연에게 사약집행을 명하니, 1457년 음력 10월24일 유시(오후5시~7시)에 관풍헌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임금의 시신을 이렇게 모셔라 는 어명이 없었으니, 영월관아의 군졸들도 어찌할 수 없어 관아에서 가까운 동강에 버리게 되었다. 영월호장 엄흥도는 ‘위선피화 오소감심(爲善被禍 吾所甘心)’의 신념으로 임금의 옥체를 수습하여 장릉에 모셨으니, 오늘날 충절의 상징으로 공경 받고 있다.
단종임금은 사후 241년만인 1698년 숙종임금의 지혜와 슬기로운 혜안으로 조선국 제6대 임금으로 복위되었다.
영월은, 조선국의 임금을 모시고 있는 성지이자 왕궁이기도 하다.
과거는 기록으로만 말을 하되 ‘부족하고 잘못된 일은 본을 받지 말고, 잘되고 바람직한 일은 유전자로라도 이어받아 복되고 아름다운 세상 만들어 다오’ 라는 염원을, 자연 속에 동화되어 있는 단종의 유배길과 유적은 말없는 말을 하고 있으니
‘예를 다하여 공경하면 복으로 화답’ 함을 알고 있는 만인의 성지순례길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