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을 만든 분들은 무엇을 우리에게 전하려 하셨을까?
화엄경은 다들 잘 아시다시피 단일 경전은 아닙니다. 화엄경(?)이 유행할 무렵, 화엄 사상을 담은 여러 경전들이 따로 단행본 형태로 유행했는데(물론 이때는 경전 이름이 화엄경이 아니라 다른 이름. 예:도사경, 보살본업경, 점비경...이들을 총칭하여 '화엄경류 경전'이라 부름) 이렇게 따로 유행하던 경들을 화엄편집자들이 모아서 만든 하나의 경전이 우리가 지금 보는 화엄경(60권 화엄, 80권 화엄)인 것입니다.
화엄을 처음 접할 때 대개 우리는 화엄경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먼저 화엄교학부터 배웁니다. 그리고 이후 화엄경을 보는데, 문제는 화엄교학이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학에서 지레 겁을 먹고 화엄경은 읽을 생각은 엄두도 못내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저는 화엄경의 편찬 과정을 보며, 화엄경 계통의 경전을 만든 분들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화엄교학’은 화려하고 복잡하지만, ‘화엄경전’이 전하는 전반적인 가르침은 의외로 소박합니다. 이 세상은 숱한 차별이 있지만 사실은 차별이 ‘평등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부처와 중생이 다르고 찰나와 영원이 다르고 하나와 여럿이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같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별로 존재하지만 다르지 않기에 찰나가 영원 속에 들어가고(相入) 하나가 여럿이 되기도 하고 여럿이 하나 속에 들어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차별이 난무하는 이 세계가, 사실은 ‘절대 평등의 세계’, ‘모두가 하나인 진리의 세계(一眞法界)’라는 것이 화엄이 전하는 주요 소식 중 하나입니다(차별 속의 평등, 평등 속의 차별). 겉모습이 다르고 있는 위치는 다르지만(사람은 사람으로, 축생은 축생으로, 하늘 구름 물 등은 또한 그런 모습과 위치로), 모두가 존엄하고 모두가 소중한 존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주어진 공간만큼 이 세상을 절대 평등의 자리에서 모두가 하나의 세계로 장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차별은 자꾸 우리가 쓸데없는 생각(想, 다른 불교 용어로는 分別)을 일으키기에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찰나와 영원이 다르지 않는데 다르다고 생각하고, 하나와 여럿이 다르지 않은데 하나는 싫어하고 여럿을 좋아하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시기, 대립, 갈등이 생겨 마침내 이 고요하던 세계는 천차만별의 세계로 잠시도 바람잘 날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이런 것을 화엄교학에서는 법계연기, 상즉상입, 육상원융, 십현문 등으로 말함). 좋아할 이유도 없는데 괜히 한 생각 좋아하는 생각 일으키고, 미워할 이유도 없는데 괜스리 미움과 분노, 원망을 일으켜 이 아름다운 세계가 그만 엉망이 되고 무질서해지고 괴롭고 험하고 거친 세계로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화엄경을 배경으로 일관되게 흐르는(마치 영화에서 영화 주제곡이 그러하듯) 주제 하나가 ‘사랑과 연민(慈悲)’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서 이렇게도 아름다운 우리 모습(本性, 佛性, 如來藏, 一心)을 보질 못하고(不見), 괜히 성내고 미워하고 원망하여 스스로를 고통에 빠뜨리고 남들도 고통에 빠지게 하는 어리석은 우리 중생들. 이런 중생을 가엽고 안타까이 여기는 마음이 화엄경 전반을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화엄경은 ‘부처님은 우리를 가엾이 여기셔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목놓아 노래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화엄경의 최고 주요 목표가 ‘이익중생(利益衆生,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안 되겠다, 나라도 저들을 망상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야겠다’, 하는 맹세(願)를 일으켜(發願) 깨치든 못 깨치든 깨쳤던 못 깨쳤던 오로지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공경과 찬탄, 섬김으로 중생을 향해 나아가는 것(行)을 ‘보현행원’이라 합니다. 망상을 깨고 고통을 벗어나는 방법이 화엄경에서는 ‘보현행원’인 것입니다. 그리고 보현행원을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 아름다운 본래 우리 모습을 찾게 되고, 또한 보현행원을 하지 않더라도 보현행원을 하는 분들에 의해 다른 분들도 거친 모습을 거두고 본래 찬란했던 진짜 모습을 찾게 됩니다(남이 먼저 공경하고 찬탄, 섬기면 공경 찬탄 섬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알지도 해보지도 못하던 이들도 공경 찬탄 섬김에 눈을 뜨게 됨).
화엄경 계통의 경전을 유통시켰던 분들은 이런 화엄의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그렇게 많은 화엄경류(類)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간절한 마음이 마침내 이런 화엄의 노래를 모아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본(大本)화엄경을 탄생시켰을 것입니다.
*화엄종 사람들이 이런 것을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파불교가 난무하고 특히 당시 천태지의대사의 천태교학이 최우위를 달리고 있던 상황에서 화엄종 사람들이 이런 가르침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론을 성립하는 것이 급선무였을 것이고, 그 결과 누구도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지금과 같은 찬란한 화엄이론이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었으리라 봅니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 찰나와 영원이 다르지 않다, 이런 이론은 오늘날 현대과학의 양자역학과 많이 닮았습니다. 양자역학은 파동과 입자가 다르지 않은 것을 발견한 이후 양자 얽힘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 역시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줄 알았던 모든 세계관을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화엄수행법으로서 통현장자는 불광관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 불광관이 우리 광덕스님의 '마하반야바라밀 수행법'과 굉장히 닮았습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는데,큰스님께서 새로운 결사 운동 이름을 '불광'이라 이름붙인 것도 우연인 줄 알았는데 이통현장자의 불광관 수행법을 보고나서 또한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에 갈매리 보현사에서 큰스님 모시고 학교를 다녔던 저의 서울대 불교학생회 3년 선배님이신 조화제형님께서 이때 일화를 잠시 올린 적이 있는데,그때 새 결사 운동 이름을 어떻게 지으면 좋겠는가 하고 큰스님께서 선배님께 상의를 하셨던 모양입니다.
선배님은 한글로 부처님 빛(?)이라 이름 짓자 건의드렸는데, 큰스님께서는 고민 끝에 아무래도 佛光이 낫겠다며 불광으로 이름 지으셨다 합니다.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법문에서 제가 과문한 탓인지 이통현장자를 인용하신 적은 없는 걸로 아는데, 그렇다면 다른 큰스승님들처럼 정통 절집 공부는 하지 못하시고 늦깍이로 혼자 한문과 경전을 독학하셨던 큰스님이 이통현장자의 신화엄론은 못 보신 걸로 추측되는데, 어떻게 佛光이란 이름을 지으셨는지...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불광관과 광덕스님의 ‘마하반야바라밀 수행법’의 관계는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빈 말씀이 아니라, 정말 ‘굉장히’ 닮았습니다.
*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는가?
초기불교에서 는 '12인연을 깨달았다', 고 말합니다(순관, 역관).
그런데 대승불교, 특히 화엄에서는 '일체중생이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여래출현품 참조).
그리고 이런 사상은 '본래성불'로 대승에서는 크게 발전합니다.
신만성불의 신, 믿음은 무엇인가?
초기불교에는 4성제를 믿는 것, 이라고 말하지요(정견)
대승에서는 내가 부처님임을 믿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화엄 역시 마찬가지.
선도 마찬가지.
*이렇게 보면 화엄은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보편적인 가르침 입니다. 화엄교학이 새로운 용어를 만들고 어려운 개념을 써서 그렇지 내용은 지극히 간단 소박 합니다. 기독교는 피조물과 창조주가 다르고 천사와 사탄 선인과 악인이 다르다고 말하지만 화엄은 똑 같습니다. 성인 범부 천사 사탄이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성철스님이 부처님 오신 날 내린 법어에 사탄이여 어서 오시라 나는 당신을 존경한다 고 하신 말씀참조). 심지어 창조주와 피조물조차 동등 합니다(이걸 화엄경 및 대승에서는 우리 모두가 부처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화엄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심지어 깨친 부처나 못깨친 중생이나 똑같다고 합니다. 굶으면 괴롭고 병들면 힘든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걸 알지 못하기에 오해가 발생하고 이 아름다운 세계가 지금과 같은 슬픔이 발생하고 우리는 끝날줄 모르는 아픔을 서로에게 주고 받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걸 끊는 방법은 다른 게 없습니다. 내가 먼저 공경할줄 모르는 이에게 공경을 보이고 내가 먼저 찬탄할줄 모르는 이들에게 찬탄을 보이며 내가 먼저 섬길 줄 모르는 이들을 섬김으로써 나는 못나고 욕먹고 천대 받아 마땅한 이가 아니라 존중받고 대접 받고 찬탄 받아야 할 고귀한 생명 진리 생명 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화엄에서는 보.현.행.원.이라 부릅니다. 공경 없는 곳에 내가 공경의 물결 일으키고, 찬탄 없는 곳에 내가 찬탄의 물결 일으키고, 섬김 없는 곳에 내가 먼저 섬겨 섬김의 물결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현행원을 통해서 스스로 못난이가 아니라 창조주가 부여한 은총 충만한 진리 생명이며 부처가 될 부처 그 자체이며(如來藏) 비천해 보이는 모든 중생이 우리와 똑같은 무한 축복을 간직한 진리 생명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내 생명 끝없는 무한 진리 생명
나는 보현행원으로 이 무한 진리 세상을 밝힐 것입니다
-2023.9.4
https://www.youtube.com/watch?v=SR9nBvN0Ulk
첫댓글 화엄, 보현행원의 소식, 위대하지요?
화엄수행법으로서 통현장자는 불광관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 불광관이 우리 광덕스님의 '마하반야바라밀 수행법'과 굉장히 닮았습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는데,
큰스님께서 새로운 결사 운동 이름을 '불광'이라 이름붙인 것도 우연인 줄 알았는데 이통현장자의 불광관 수행법을 보고나서 또한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에 갈매리 보현사에서 큰스님 모시고 학교를 다녔던 저의 서울대 불교학생회 3년 선배님이신 조화제형님께서 이때 일화를 잠시 올린 적이 있는데,
그때 새 결사 운동 이름을 어떻게 지으면 좋겠는가 하고 큰스님께서 선배님께 상의를 하셨던 모양입니다.
선배님은 한글로 부처님 빛(?)이라 이름 짓자 건의드렸는데,
큰스님께서는 고민 끝에 아무래도 佛光이 낫겠다며 불광으로 이름 지으셨다 합니다.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법문에서 제가 과문한 탓인지 이통현장자를 인용하신 적은 없는 걸로 아는데,
그렇다면 다른 큰스승님들처럼 정통 절집 공부는 하지 못하시고 늦깍이로 혼자 한문과 경전을 독학하셨던 큰스님이 이통형장자의 신화엄론은 못 보신 걸로 추측되는데,
어떻게 佛光이란 이름을 지으셨는지...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불광관과 마하반야 관계는 다음에
깊고 높은 법문에 감사드립니다.
승속을 막론하고 깨달음 지상주의에 목맨 우리 불교현실에서 참으로 귀한 법문이고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법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는가?
초기불교에서 는 '12인연을 깨달았다', 고 말합니다(순관, 역관).
그런데 대승불교, 특히 화엄에서는 '일체중생이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여래출현품 참조).
그리고 이런 사상은 '본래성불'로 대승에서는 크게 발전합니다.
신만성불의 신, 믿음은 무엇인가?
초기불교에는 4성제를 믿는 것, 이라고 말하지요(정견)
대승에서는 내가 부처님임을 믿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화엄 역시 마찬가지(不動智佛).
禪도 마찬가지.
모두가 존엄하고 모두가 소중한 존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주어진 공간만큼 이 세상을 절대 평등의 자리에서 모두가 하나의 세계로 장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 서이초 교사 추모 경남 문화재에 와 있습니다. 이 슬픔이 부디 모두가 귀한 존재임을 아는 , 그런 문화가 조성되는 작은 발걸음이 되기를 ... 우리 대한민국 만만세 무궁한 나라되기를 발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공경 없는 곳에 내가 공경의 물결 일으키고,
찬탄 없는 곳에 내가 찬탄의 물결 일으키고,
섬김 없는 곳에 내가 먼저 섬겨 섬김의 물결 일으키는 게 보현행원.
화엄경을 이렇게 쉽게 말씀 하시니 머리에 쏙 들어옵니다.
공경과 찬탄으로 부처님으로 모신다는 말씀이 오늘따라 더 와닿습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