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배고픔을 겪어보지 못하고 자라 온 오늘 날 어린이들에게 내가 어린 시절에 겪은 보릿고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구순의 할아버지가 ‘보릿고개 세대’ 추억나들이를 떠납니다.
우리가 먹고사는 대표적인 곡식이 벼와 보리인데 벼는 늦은 봄에 보리수확을 한 논에 심어서 여름을 지나 가을에 수확을 하고, 보리는 벼를 수확한 논이나 다른 곡식을 심어 거둬들이고 난 밭 등에 가을에 씨를 뿌려 긴 겨울을 지난 후 늦은 봄에 수확을 하지요.
농사를 짓는 집 들을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자기 논밭이 많아서 집안사람들만으로는 힘들어서 머슴이라고 부르는 일꾼을 사서 농사를 짓는 부자농가가 있고, 자기 논밭으로 직접 농사를 짓는 자작농과 남의 논밭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 있었지요. 자기 논밭만으로는 땅이 모자라서 남의 논밭을 빌려서 자작과 소작을 겸해서 노사를 짓는 집도 있었답니다.
그 때는 식구들이 많았어요. 요즘처럼 소가족제도가 아니고,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등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제도 있고, 아이들을 많이 낳아서 네다섯은 기본이고 열사람까지 낳는 경우도 있었다니까요.
긴 겨울을 지나고 늦은 봄, 보리가 익을 무렵이면 양식이 떨어지는 집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보리가 익을 무렵을 높은 산 고개를 넘기가 힘든 것처럼 살기가 힘든 때라고 ‘보릿고개’라고 불렀고, 이 시대를 견디며 살아 온 사람들을 ‘보릿고개 세대’라고 불렀답니다.
추수의 계절 가을, 식이 할베 벼를 수학하는 타작마당입니다. 벼를 타작하는 날은 기쁜 날이지요. 그런데 왠지 기쁨 보다는 걱정아 많습니다. 추수한 벼를 가마니에 담습니다. 제일 먼저 지난 봄 보릿고개 때 빌린 ‘장리곡’을 담습니다. 장리곡은 빌린 곡식의 두 배를 주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일본 식민지 아래에서 ‘공출’이라는 이름의 세금을 바쳐야 하는 공출미를 담습니다.
그 다음은 빌린 논의 대가로 주는 ‘소작료’를 담았습니다.
가뜩이나 흉년이라 수확량이 기대보다 적은데 장리 공출 소작료를 제하고 남은 벼를 보니 올 겨울 나기에도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쁨보다 한숨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밭곡식으로 조, 메밀, 고구마와 감자 같은 잡곡이 조금씩 있긴 하지만 내년 봄 보리수확 할 때까지 먹고 살기엔 턱없이 부족 할 것 같아서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힘든 보릿고개를 어떻게 넘기는 지 알아 볼까요?
먼저 양식을 적게 먹어야지요. 양식을 아끼는 방법으로 적게 먹고 늘려 먹는 방법이 있지요. 음식은 크게 밥과 죽이 있는 데 밥은 죽보다 양식이 많이 드니까 자연스레 죽을 많이 끓여 먹습니다. ‘아침 밥 저녁 죽’은 기본이고 점심도 죽을 많이 해 먹었어요. 밥을 지을 때 좁쌀이나 콩 등을 섞어서 잡곡밥을 지어 먹거나, 콩나물 채소 같은 것을 섞어서 나물밥을 지어먹기도 하여 곡식을 아꼈습니다. 밥보다 죽을 많이 먹었는데 죽에도 나물 등을 많이 넣어 양도 늘리고 곡식도 아꼈습니다.
밥과 죽 외에 밀가루를 이용해 국수나 수재비가 있었고, 메밀로 빚은 메밀묵과 도토리를 주워 만든 도토리묵 등을 간혹 해 먹었는데 이는 곡식을 아끼기도 했지만 별미이기도 했답니다.
감자나 고구마 등은 한 끼 음식을 대신하기도 하고, 밥 죽 수재비 등에 넣어 양을 늘려 먹기도 했습니다.
오죽하면 ‘밥 한번 실컷 먹어 봤으면 원이 없겠다’라는 말이 있었는가 하면, ‘밥 먹었어, 아침 먹었나’ 라고 하는 것이 통상 하는 인사말이 되기도 하였을 까요?
이렇게 아껴 먹고 늘려 먹었는데도 긴 겨울을 지내고 봄이 오면 양식이 떨어지는 집이 많았습니다. 아직 보리가 익을 때 까지는 많은 날이 남았습니다. 보릿고개를 만난 것이지요.. 힘든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썼답니다.
아버님이나 삼촌 등 일을 할 수 있는 남자들은 일거리를 찾아 나섰지만 요즘처럼 일거리가 없었어요. 산에 가서 땔감 나무를 해 시장에 팔아서 양식을 조금 사 오거나 간혹 이웃 마을에 저수지를 만드는 등 일거리가 있으면 세벽 일찍 도시락을 싸들고 가곤 했지요. 요즘은 불도저 같은 기계가 하는 일 들을 그 때는 괭이나 삽 등으로 사람들이 다 했으니까요.
어머니나 숙모 등 여자들은 마을 부잣집을 찾아다니며 바느질이나 집안일을 도와주고 곡식을 조금이라도 받아 오기도 하고, 잔칫집 제삿집 등에 가서 일을 도와주고 음식을 얻어오기도 했답니다.
아이들은 산이나 들로 다니며 나물을 뜯고, 군것질 거리를 찾기도 했어요. 산에서는 도라지 잔디 등의 뿌리를 캐기도 하고, 고사리 참나물 등 산나물을 뜯기도 했으며, 들에 가서는 달래 냉이 썸바퀴 쑥과 같은 나물을 캐거나 뜯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 들은 밥반찬을 만드는 재료가 될 뿐 아니라 밥이나 죽 등 음식을 만드는 데에 넣어 양을 늘리는 데 썼거든요.
산과 들을 뛰어다니느라 배가 고프면 진달래꽃이나 머루 다래 등을 따 먹기도 하고 찔래순이나 소나무 순 등을 꺾어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힘들게 살면서도 아이들은 요즘 아이들처럼 숙제나 과외공부 학원에 시달리는 것 보다 마음껏 뛰놀며 즐겁게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들은 부잣집을 찾아다니며 애걸복걸하여 장리곡을 빌려 옵니다. 장리곡을 빌려온 날은 푸짐한 밥상이 차려 집니다. 콩을 섞어 쌀밥을 하여 한 그릇 씩 가득 담아내는 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한 숟갈 씩 들어 손주 들을 주며 ‘많이 먹어’라고 하는가하면, 아버지는 밥을 몇 숟갈 남겨 주며 ‘너희들 더 먹어’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한 숟갈 씩 나눠 먹습니다. 어머니는 쌀 씻은 물로 구수한 숭늉을 끓여 한 양푼이 퍼 와서 밥 먹은 그릇에 퍼 먹으라고 합니다. 구수한 숭늉을 마음껏 퍼 먹고 나니 배가 불러서 일어나기가 불편 할 정도입니다.
이런 가난한 가운데서도 가족 들은 희희낙락 웃음꽃이 가득 합니다.
이런 가난은 일제의 약탈, 6.25의 전쟁, 인구의 급증 등이 원인이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힘든 보릿고개를 벗어 난 때는 언제 쯤 이었을까요?
8.15 광복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져 안정된 삶이 시작 될 무렵인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어요. 3 년 동안의 전쟁이 유엔과 미국의 주선으로 휴전이 되긴 했지만 전쟁의 피해는 너무나 컸습니다. 대구와 부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방 일부와 제주도를 제외 한 온 나라가 북한에 빼앗기고 수도 서울이 두 번이나 적의 손에 들어갔으니 그 피해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을 재건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여야 했고, 국민의 살림살이는 가난에 쪼들려 세계에서 가장 가난 한 나라가 되었답니다.
요즘 광고에서 볼 수 있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굶주린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였답니다.
60년대 들어 5,16 혁명이 일어나 가난에서 벗어나 잘 살아보자는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면서 국민 생활이 조금 씩 나아지기 시작 했어요. 농촌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마을회관에서는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손으로 가꾸세‘
라는 새마을 운동 노래가 흘러 나왔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국민이 참여하는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서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기와지붕으로 바꾸고
꼬불꼬불 마을길을 곧고 넓게 만들고
하천과 산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넓히고
경지정리도 농사짓기 좋은 반듯한 논으로 고치고
양수장 저수지를 만들어 가뭄에도 농사를 짓고
통일벼 등 씨앗을 개량해서 생산량을 늘렸지요.
이러한 새마을 운동의 효과로 국민 생활이 차차 나아져 보릿고개라는 말이 이 땅에서 살아졌답니다.
보릿고개를 이겨 낸 ‘보릿고개 세대’ 할아버지 세대들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조국 대한민국을 세계가 인정하는 10대 경제대국, 문화강국으로 이뤄 낸 주역 들이 되었으니 참으로 장하고도 자랑스러운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