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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카페 게시글
▣ 안동문화 스크랩 동암 이영도선생
혜명 추천 0 조회 29 11.06.01 01: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영도(李詠道 ; 1559∼16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성여(聖與), 호는 동암(東巖). 할아버지는 퇴계 황(滉)이고, 아버지는 군기시첨정 준(寯)이며, 어머니는 훈도 금신(琴梓)의 딸이다.
음보(蔭補)로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을 거쳐 제용감봉사(濟用監奉事)를 역임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안동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웠다. 이듬해 연원도찰방으로 나가 전쟁의 재해를 입은 백성들의 구호와 군량미를 조달하여 명관으로 이름을 떨쳤고, 1594년 충청도판관을 겸직, 피난민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여 전란중에서도 수만 석의 양곡을 생산하였다.
1596년 한때 좌천당하였다가 유성룡(柳成龍)의 상소로 복직된 뒤, 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사를 따라 많은 군량미를 조달, 수송하여, 그 공으로 1597년 호조좌랑이 되고 다시 호조정랑이 되어 남정양향사(南征糧餉使)로서 상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현풍현감이 되어 치적이 뛰어나서 표리(表裏 : 옷감의 안팎감)가 하사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김제군수에 승진되고, 4년 후에는 청송부사에 승진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사복시첨정·군기시부정·영천군수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익산군수를 거쳐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내섬시정·원주목사를 역임하고, 1636년 군기감정에 올랐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록되었으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행장

 

行狀

 공의 휘는 영도이고 자는 성여이며 호는 동암인데 문순공 퇴도선생 휘 황의 손자이시다. 그의 계보는 진보이며 고조의 휘는 계양인데 진사로서 천광경天官卿을 증직 받았고 증조이 휘는 식인데 진사로서 좌찬성을 증직 받았고 고의 휘는 준인데 군기시첨정이다. 어머니는 봉화금씨 사도시첨정 치심의 손녀로서 훈도 제의 따님이다. 명존 14년 기미 9월 11일에 출생하신 공은 어려서부터 티 없이 준수하고 국량이 넓어 문순공께서 심히 사랑하시고 아명을 아경阿慶이라고 부르게 하시었다. 다른 아이들 보다 달리 교훈하시고 잠시라도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시고 계상을 출입 하실 때는 반드시 함께 따르게 하여 사물을 가르쳐 물으면 곧 이해하고 대답하는지라 그의 재능이 일찍 발달 되어 감을 기뻐하시었다. 경자년 겨울에 문순공께서 돌아가시고 그 이듬해 봄에 모부인께서 또 돌아가시니 공의 나이 불과 12·13세인데 애통하게 울고 집상하는 범절이 어른과 같더라. 계미년 가을에 첨정공이 의성 현감으로 계시다가 관아에서 돌아가시니 장사 지낸 뒤에 두 형마저 상을 이기지 못하여 삼년 안에 돌아가심에 공은 홀로 혈혈히 여막을 지키시니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이 여위고 초최 하여 거의 몸을 보전치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宋壺峯 言愼이 이때 영남지방의 재해를 살피기 위하여 이 지방에 왔다가 공을 위문하고 돌아가 나라에 복명을 할 때 임금께서 영남지방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하문이 있어 이에 응답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이황의 손자 영도가 그 부형과 더불어 두 형을 잃고 산곡에서 여막을 지키고 있으나 그의 파리하고 여윈 모습은 차마 볼 수 없더라」고 아뢰니 국왕께서 측은히 여기는 얼굴을 지으며 「그가 상을 마치거든 등용의 절차에 관계없이 적당한 자리에 임용토록 하라」는 명령이 있어 을유 9월에 삼년상을 마침에 전조에서 국왕께 고하여 군자감 참봉을 제수하고 정해년 6월에 소격서 참봉으로 바꾸었으며 기축년 12월에 제용감봉사로 승진되었다. 임진년에 왜군이 대거 침입하였을 때 공은 마침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계시었는데 즉일 행장을 수습하여 나라에 문안차 가는 길에 충주를 지나다가 순변사 신립이 탄금대에서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 말씀하시기를 「조령은 천험지대이므로 한명의 군사가 천명의 적을 막을 수 있는 이곳을 버리고 어찌하여 이와 같은 넓은 평야에서 적군을 막으려 하느냐. 이것은 반드시 패할 원인이 될 것이니 시급히 군사를 요새지로 옮겨 진을 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수천의 군사를 파견하여 파수라도 보게 하도록 하라」하니 신립이 이 말을 듣지 아니하다가 과연 이삼일 후에 대패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하였다. 급기야 조정에 들어가니 임금의 행차는 이미 서쪽을 향해 떠났다. 백관이 호종하여 파주에 이르니 임금께서 특명으로 시종관 이외는 따르지 말라고 하심으로 공은 남쪽으로 내려와서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우셨다. 계사년 9월에 연원찰방으로 계실 때 충주목사가 결해있어 공이 잠시 겸임하여 잘 다스리니 주민들이 크게 기뻐하더라. 감사가 나라에 계청하여 충주판관으로 승진시켜 우목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때 이 고을에 새로 군사를 모집하였는데  흉년이 거듭 들어 군량을 조달하고 백성을 구제할 계책이 막연하였다. 공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진궤 하는 곳을 만들어 인근 고을에서 골고루 곡식을 모아 군량을 조달하고 백성을 모집하여 수천 두락의 황무지를 개간하니 그해 풍년이 들어 수 만석을 추수하여 각 고을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차게 하니 백성들이 크게 감탄하더라. 그 후에 공이 서울 내왕길이 있으면 이 지방 사람들이 강을 건널 때는 배를 빌려주고 육로에는 말을 내어주고 늙은 서리들은 술병을 차고와 전별하더라. 이 뒤로 공의 자손이 이 고을을 지나는 것을 보면 혹은 옛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더라. 병신 3월 익위사 익찬에 제수되고 이해 겨울에 비변사랑청備邊司郞廳에 제수되어 이듬해 봄에 위솔衛率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이해 5월에 조정 의론이 일 많은 호조에 적격자를 물색하던 중 국왕의 특명으로 공을 좌랑으로 임명하였다. 이해 8월에 명나라 양경리 호鎬가 군사를 거느리고 용만龍灣에 이르러 비국備局(준비를 맡아 보는 기관)에서 「이영도가 아니면 능히 답변하지 못할 것이라」하고 국왕께 공을 보낼 것을 주청하였다. 공이 말을 타고 달려가서 조리정연하게 설명하니 하나도 차착없이 맞으니 양경리가 매우 현명하다고 칭찬하고 「재상의 기국이니 국왕을 만나면 크게 쓸 것을 주달 하겠다」고 하였다. 접반사 한음 문익공 덕형이 이 말을 듣고 나라에 상주하자 9월에 정랑으로 승진되어 복명함에 국왕께서 노고를 위로하고 술을 내리는 은총을 힘입었다. 얼마 후에 많은 관군이 남쪽으로 내려감에 조정의 공론인즉 공이 모든 계획 수립에 능숙하니 미리 보내 군량준비를 하도록 나라에 주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셨다. 공은 명을 받들어 영남으로 내려옴에 집이 불과 삼사 십리 지점에 있으나 들리지 아니하고 바로 안동으로 들어가서 각 고을에 비축한 곡식을 모아 보급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그 당시 군량 보급책을 맡은 관원이 시행 부실로 명군에게 구타당하지 않은 관원이 없었다. 그러나 공만은 명군들이 만날 때마다 쭉 늘어서서 절하며 칭찬하기를 「우리를 먹여주는 나으리」라고 부르더라. 또한 공이 명령을 받들어 흩어진 백성을 안착시키고 휴폐된 땅을 갈아서 농량과 소를 주어 농사를 짓게 하니 도적에 붙어 다니는 사람도 듣고 서로 다투어 와서 농사에 힘쓰더라. 기해년 8월에 본도 재상 경차관으로 특선되어 훌륭한 업적을 남기니 또한 칭송이 대단하더라. 경자년 9월에 현풍현감에 임명되니 부임한지 2년 미만에 명관이란 말을 듣고 흩어진 백성이 사방에서 많이 모여 들더라. 우리 선조 문장공 경세께서 공의 치적이 거룩함을 글로써 하례하였고 李公 時發이 나라에 주청하여 표상케 하였다. 계묘년에 금제군수로 승진되시었고 병오년에 청송부사로 승진되었는데 가는 고을마다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임자년에 선혜랑에 제수되고 계축년 봄에 태복첨정에 제수되어 이해 가을에 군기시부정으로 옮겼는데 별안간 영천군수로 배명되니 군내에는 인아친척과 구관이 많아 어떤 사람은 치정하기가 어렵지 않겠느냐고 의심하였는데 공은 이러한 것에 구애치 않고 태연하게 처리하였다. 이 고을은 집이 가까웠으나 사사로움에 얽매여지지 아니하였다. 이때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사가 놀랄 만큼 커져가는 것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돌아와 탄식하시기를 「삼강이 끊어지는 구나」라고 하시었다. 그때 광해군 난정에 참여한 자가 찾아와서 뵈옵고 청하거늘 공은 문을 굳게 닫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정사년 7월에 선혜랑청과 10월에 훈련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계해년 인조반정하는 5월에 익산군수로 제수되었다. 갑자년에 이괄의 변란이 있어 서군을 거느리고 연산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그해 들어온 군포를 전관이 다 써버려 변상하지 못하고 파직되었다. 기사년에 선공첨정이 되었으나 사은숙배하고 돌아왔다. 경오년에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배수되어 입시하여 시내사정을 주달하니 깨우침이 있다하여 받아들여지니 조정공론이 공을 은대銀臺에 선임하고자 하였으나 그해 겨울에 원주목사가 되었다. 그때 높은 벼슬아치들 간에 묘지 다툼이 있었는데 공은 이에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고 법대로 처리하니 어느 고관은 대간에 사주하여 파직시키고자 하였다. 그 후 대간이, 사주한 고관이 사사로운 미움으로 된 것을 알고 깊이 뉘우쳐 부끄러워하더라. 병자년 가을에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이해 겨울에 淸人에게 서울이 함락 당하자 각도의 군사도 연이어 패전하였다. 공은 연세가 높아서 몸소 싸움에 나갈 수 없었으며 국왕께서 창의를 호소함으로 고을 사람을 격려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하시고 자제들에게 가산을 팔아서 의병을 도우라 하시었다. 이듬해 2월에 인조대왕께서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항복하였다는 말을 듣고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다가 이로 인하여 질병이 되어 돌아가시니 2월 26일이라. 향년이 79세이고 10월에 묘지동 오좌에 장사하니 선무원종신宣武原從臣으로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으로 증직되시었다. 공은 영특한 지질과 온후한 기질로서 문순공 곁에서 뫼시고 자랐기에 지대하신 교훈은 덕성이 아닌 것이 없었은즉 그 성취하는바 이에 힘입어 처세에 큰 허물이 없었다. 비록 문순공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항상 친히 뫼시고 있는 것처럼 평일의 교훈을 역력히 기술하여 둔 것같이 보고 마음속에 간직하여 모실 때와 같이 몸가짐에 법도 있고 근엄하게 하며 언행은 모나지 않고 방정하며 남을 대할 때는 겸허하여 언제나 화기로운 봄날과 같으니 세상 사람들이 대현의 손자답다고 칭찬하더라. 일에 임해서는 사정에 끌리지  아니하고 후덕하게 중간을 좇찾고 나라일이나 집일을 원대한 계획으로 경영하니 모든일이 크게 이루어지더라. 이러한고로 문순공께서 일찍이 원대한 기대가 된다고 하시었다. 이는 공의 백씨 몽제공이 생원급제하여 잔치를 베풀었을때 문순공께서 좌중 손님을 돌아보시고 「나의 뒷 세상을 이을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로다」라고 하시었다.몽재공께서 일찍이 돌아가심에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문순공의 문하 제현들이 공으로 하여금 종사를 잇는것이 옳다고 하였으나 공은 백씨공이 후사 없음을 차마 볼 수 없어서 30여년을 종사를 대행하시고 벼슬자리에 계실때는 제수를 봉하여 형수에게 보내고 둘째 자제로 백씨의 뒤를 잇게 하시었다. 이러한 일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무릇 문순공이 남기신 글과 묵첩은 물론이고 적고 조각진 것이라도 반드시 보화같이 간직하고 문집과 연보를 간행하는데 모든 정성과 힘을 다하시었다. 가법에 지차집 아들이 벼슬하면 제사를 받을 수 없으므로 되도록 가까운 고을로 갈 수 있도록 방백에게 청을하여 초하루 보름에는 반드시 참배하시었다. 가묘가 집에서 몇 십리 거리라도 명절 차례때는 반드시 참여하시고 풍우한서를 불구하고 근력쇠진하여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시었다. 그리고 보첩을 비단보로 싸서 도산서원에 보관하여 길이 보존토록하시고 친척이나 이웃간을 한 집안으로 여기시고 정을 나누는데 질병이 있으면 약을보내 위문하고 흉사가 있으면 더욱더 도우니 가히 알지라. 그리고 찾아오는 손님을 좋아하시고 관직에 계실때는 비록 문서 처리에 여가가 없었으나 궤연에 이르러서는 미루지 아니하고 처리하셨다. 집에 계실 때에는 좋을 때를 가려서 손님을 초대하여 술자리를 베풀어 즐겁게 노시니 향리 사람들이 부러워하더라. 더욱이 선현을 존봉하는데 힘을 다하여 서원 규제는 문순공 가르침을 따르셨으니 도산서원을 더욱 확장 증축하시었다. 이러므로써 사림에게 더욱더 두려워하고 의지하더라도 끊어진 대를 잇는것을 그 당시의 형망제급兄亡弟及이 통례인데 문도들의 공론도 그러하였건만 공은 시종일관 고사하고 피하시어 정에 맞도록 처치하여 천리 인정에 터럭만한 사리도 없이하니 공의 지성과 덕은 이로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것이다. 종통의 대를 이어 종사를 소중히 여기는 의리는 후세에 까지도 족히 법으로 될만한 일이다. 대저 그 근본 요령이 이와 같으시니 그 세심한 행실과 소박한 절의가 일상생활에 나타나니 맑고 구체적이고 짜임새 있는것은 어느 누구도 본 받을수 없을 것이다. 모름지기 고을을 다스릴 때에는 자기는 검약하고 백성은 넉넉하도록 힘쓰시고 부채 한 자루 값이 많지 않은데도 익산 군수로 계실 때 자제들이 부채를 가지고자 함에 오래되어 낡고 떨어진 것을 손수 손질하여 주시었다. 관아의 마구간과 창고가 기울어지고 헝어진 것을 보수하는데 민원이 없게하니 계시던 고을마다 떠나신 후에도 백성들이 검약하고 중후한 기풍을 사모하여 본받더라. 특히 충원과 용만 동도(경주)에 계실때에 쌓은 치적과 공덕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바 있고 전란을 당할 때는 무엇보다도 군량이 가장 중요함으로 차질이 없게하는데 몸과 지혜를 다하여 임시로 변통하는 책략을 쓰지 아니하고 훗날 수복하는데 안전한 터전이 되고 또한 모든 일에 있어 책임을 완수하니 화살과 총칼을 가지고 싸움터에 나간것과 비교할 때 누가 공이 더 많다고 하기 어렵다. 더욱 존경할 것은 계방(桂坊, 세자익위사)과 같은 맑은 벼슬 자리는 다른 관서에 비교하면 범상한 곳이 아니었는데 이때가 광해군이 동궁으로 있을 때였다. 그후 광해군이 왕이되어 여러번 높은 관직을 제수했으나 다 응하지 아니하였다. 급기야 정사가 어두워지니 벼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오시어 수십년동안 지조를 지키셨다. 정사년 이후로 인륜을 끊으려는 학정에 당시의 어진 선비들이 상소하여 정의를 붙들고자 하는사람이 적지 아니하였다. 공은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3년전에 물러 나오신 분은 오직 공 한 분 뿐일너라. 주역에 개우석불종일정길介于石不終日貞吉이란 말이 있는데 진실로 공을두고 이름함이 아닌가. 공이 벼슬에서 물러나시던 때에 맏 자제 기가 과거보는 자리에 나가지 아니하고 그로 인하여 벼슬과는 담을 쌓게됨에 세상사람들이 절의가 한 집안에서 지켜짐을 부러워하더라. 소위 북당에 속하는 인물들이 벼슬자리에 오르도록 하기위하여 찾아왔으나 문을 굳게 닫고 준엄하게 거절하니 이또한 악을 꺾는데 숨은 힘이 되니 이 천지간에 강상의 중한것을 우러러 보게하니 비록 호강후胡康侯의 송백같은 절개인들 어찌 이에 더할까. 이 뒤로는 비록 본래부터 친분이 두터운 사람일 지라도 이러한 무리를 엄중히 배척치 못한자는 초하여 절교하겠다는 글을 보내니 공은 한 지방의 우뚝한 기둥과 주주가 되더라. 안으로는 문호를 더욱 빛나게하고 밖으로는 가깝고 먼데까지 이 기풍이 미치게되니 문순집의 세전하는 영향에서 얻어진 것이라하여 영남의 모든 고가들이 다투어 존경하고 본을 받게되니 공의 영향력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오호라 공은 비록 음보로 기용되어 그 자리에 나아가면 응용에 능하고 원활하여 막힘이 없었고 돈독하고 두텁고 넓고 깊어서 참으로 재상의 그릇이었으며 벼슬길 50년에 겨우 군수 목사에 그쳤으나 당시의 대각에서 입각론이 있었으며 돌아가신 후 증직의 예로서 그치고 말았으니 어찌 공을 존경하는 선비들이 개탄하여 슬퍼하지 않으라오. 향중 선비들이 서원을 세워 받들자는 공론이 있은지 오래되었으나 국법이 허용치 않아 이루지 못하였다. 숙부인淑夫人안동 권씨는 현감 동미의 따님으로 충정공 충재 권선생 벌의 손녀이시다. 이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기인데 공릉 참봉이고 다음은 억인데 사지서 참봉으로 백부 몽재에게 입후하시다. 측실 1남은 계요 3녀는 박이환 김종선 이간에게 각각 출가하다. 공릉 참봉은 2남을 두니 희철은 찰방으로 증직이 이조참의이고 다음은 극철인데 주부이고 3녀는 금삼달 금성휘는 참봉 임헌에게 각각 출가하고 사직서 참봉 억은4남을 두니 명철은 참봉이고 성철은 판관이요 신철 윤철이다. 3녀는 류경지 고이령 황석내에게 출가하고 찰방 자제는 회인데 증이조참판이고 이조참판자제 수약은 참봉으로 증 이조판서이고 증현손이하는 기재하지 못한다. 어느날 침낭군 야순이 공의 유사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행장을 부탁함으로 그가 세운 공훈은 백세에 교훈이 될만 하기에 그 대강을 서술하오니 후세의 병필가의 고증을 기다리는 바이다. ------通訓大夫 行司憲府掌令 鄭宗魯 謹撰                

 

 

전국에서 유일하게 25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안동시 도산면 하계마을은 안동댐으로 수몰됐지만 이들 독립운동가의 빛나는 나라사랑의 정신과 행적은 '하계마을독립운동기적비'를 통해 후세에 전하고 있다.

하계마을은 퇴계(退溪) 손자,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의 후손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진성이씨의 450년 전통을 자랑하는 이 마을은 항일투쟁기에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했다.

하계마을독립운동기적비는 이들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04년 10월 7일 마을 옛터에 세워졌다.

하계마을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향산 이만도(李晩燾)와 동은 이중언(李中彦)은 1895년 선성(宣城, 예안)의병에 나섰다.

나라가 망하자 단식으로 나라의 녹을 먹었던 관리로서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 영향으로 하계마을에서는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한 이동흠(李東欽), 예안면과 도산면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동봉(李東鳳). 김락(金洛), 이비호(李丕鎬), 이기호(李琦鎬), 이용호(李用鎬), 이극호(李極鎬), 이호준(李鎬俊), 유림단의거(파리장서운동)를 주도한 이중업(李中業),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렸던 이동흠(李東欽)과 이종흠(李棕欽),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이원일(李源一), 창씨개명에 반대하여 자결한 이현구(李賢求) 등 20명이 넘는 독립운동 유공자가 배출됐다.

이 가운데는 향산 이만도 일가는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안동의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예안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자정순국의 길을 걸은 향산 이만도에 이어 그의 아들 이중업은 독립청원운동을 주도했다.

며느리 김락은 3ㆍ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체포돼 고문으로 실명을 당한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또한 손자 이종흠과 이동흠은 대한광복회와 제2차 유림단 의거를 주도했다.

이처럼 빛나는 역사를 가진 하계마을은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민족문제에 맞서 자신을 불사른 하계 사람들의 빛나는 행적과 역사를 되살려 역사적 교훈으로 삼자는 뜻에 따라, 마을 옛터에 이 기념비가 세워진 것이다. 하계마을 사람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위치에서 역사와 민족 앞에 책임을 다하고 목숨으로 책임을 졌다.

 

수졸당 및 재사(守拙堂 및 齋舍)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0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수졸당은 퇴계 이황의 손자인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 1559~1637)와 그의 아들 수졸당(守拙堂) 이기(李岐, 1591~1654)의 종택이다. 재사는 동암 이영도의 묘사를 지내는 곳이다. 이영도는 영특하고 포용력이 있어 퇴계의 후예답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뛰어남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수졸당 및 재사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수졸당은 이영도의 분가 때(17세기), 재사는 이영도의 사후(18세기)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수졸당은 ‘ㅁ'자형의 살림집과 그 오른쪽의 ’ㅡ '자형의 정자, 그리고 건물 뒤편의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재사는 수졸당의 오른쪽의 에 위치하며 ‘ㅁ'자형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집이다. 재사는 건립당시의 평면 구조와 구조양식의 변화 없이 옛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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