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장로교는 1982년 1월 테이트와 테이트의 동생인 매티 테이트(Miss Mattie Tate, 최마태), 전킨과 전킨의 부인 레이번(Mary Leyburn), 레이놀즈와 레이놀즈의 부인 볼링(Patsy Bolling)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양 등 7명을 초대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역사는 이들을 '7인의 선발대(Seven Pioneers)'라고 부른다. 이들 중 데이비스 양은 1892년 10월 18일 제물포에 도착했고, 나머지 6인도 11월 3일에 제물포에 도착함으로써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들이 이후 10개월 동안 한국 생활에 적응훈련을 하고 언어를 습득하는 동안 1893년 1월 28일 북장로교 선교사 빈톤(Dr. Vinton)의 집에서 한국에 주재하는 장로교파 선교사들이 참석하여 「장로교 미꽅 공의회」를 조직하고 예양협정(禮讓協定 : Commity Agreements)을 의결하였고 이에 따라 전라도는 자연히 남장로교의 선교 영역이 되었다.
1893년 2월 남장로교 선교회는 호남에 선교사를 직접 파송하는 것은 이르다고 판단하여 당시 레이놀즈 선교사의 어학선생이었던 정해원을 선교사들을 위한 대지 구입과 정세판단을 위해서 전주에 보낸다.
호남 최초의 은송리 예배당
1893년 6월 정해원이 완산 밑 은송리에 초가 1동을 예배처소로 마련하고 복음을 전파한 것이 전주교회의 시작이고 호남최초의 교회가 된다.
그해 9월 테이트 선교사와 전킨 선교사가 처음으로 전주에 와 2주간 머물렀다. 1894년 3월 테이트 선교사와 그의 누이동생 테이트가 전주에 도착하여 이전에 구입해 둔 은송리(현 완산동) 초가집에 머무르면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1894년 5월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그들은 서울로 철수했다가 동학운동이 끝난 1895년 2월 레이놀즈 목사와 테이트 목사가 전주에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전에 테이트 목사 남매가 거주했던 완산 언덕에서 약간 높은 위치에 있는 대지와 2개의 초가집을 매입하였고, 그해 12월 말경 테이트 목사의 남매가 이곳에 이사하여 상주하게 되었다.
1897년 3월 6일, 토요일에는 선교사들이 모여서 정식으로 전주 선교부 출범 예배를 드렸다. 해리슨은 군산에서 말을 타고 전주로 완전히 이사 오게 되었다. 그는 전주에 도착하자 맨 처음 구입했던 은송리 집에 거처를 정하고 약방을 차려 환자들을 위한 간단한 의료시술을 하면서 의료 선교의 길을 터놓았다.
레이놀즈 선교사
레이놀즈 목사는 성서번역과 부인의 건강 때문에 1897년 6월에 전주에 도착하여 테이트 목사 남매의 선교활동에 가담하였다. 2. 호남 최초의 세례교인들
1897년 7월17일 레이놀즈 목사의 설교와 집례로 5명의 신자가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김창국, 김내윤(테이트의 사환), 유성안(柳聖安) 씨의 부인 김성희씨 , 김제원(金濟元) 씨의 부인인 진주 강씨(김창국의 모친), 함성칠 씨의 부인 되는 임씨였다. 이로써 ‘전주 교회(교회 명칭)’가 한국인 세례교인이 있는 교회로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호남 최초의 세례 교인 김성희와 김창국
또한 김창국의 조모와 모친은 테이트 양의 전도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전주 최초의 신자들이기도 하였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교회의 지도자를 훈련시킬 필요성을 느껴 성경학교를 열었는데, 이 성경학교는 1899년에 14명의 남자들이 입학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성경학교를 열었던 이듬해인 1900년 9월 9일 서문밖 완산 북림 기슭에 있는 레이놀즈 목사의 사랑에서 한 소년을 대상으로 하여 근대식 교육이 시작되었으니 이것이 전주에서 시작된 최초의 근대교육이요, 신흥학교의 출발이다. 이 최초의 근대식 교육을 받은 사람은 당시 만 16세의 소년인 김창국(金昶國) 이었다.
따라서 김창국은 호남 최초의 세례교인이자 최초의 신흥인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그의 조모와 모친은 호남 최초의 신자들이기도 하다. 3. 김창국 목사의 생애
김창국(金昶國) 목사는 1884년 1월 28일 전주에서 한의원인 김제원(金濟元)씨의 二男으로 태어났다. 소년시절에는 9년간 사숙(私塾)에서 한문공부를 하였다. 그의 조모와 모친이 선교사 테이트양의 전도로 전주 최초의 신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도 일찍부터 기독교 교인이 되었다.
그는 당시 선교사인 테이트 목사의 사동(使童)으로 있으면서 주일날에는 해리슨 목사와 레이놀즈 목사의 부인이 경영하는 주일학교에 참석할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 책임을 맡아 봉사하였고,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소학교(최초의 신흥학교)에 출석하면서부터는 선교사들을 도와 장날마다 시장에 나가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등 전도활동에 힘썼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는 1897년 7월 17일 전주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5명의 신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그때 그의 나이 만 13세였다. 1900년 9월 9일에는 레이놀즈의 사랑방에서 전주에서 최초로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함으로써 그는 최초의 신흥인이 되었다. 그는 주로 해리슨 목사의 부인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선교사 테이트양은 그를 아주 훌륭한 아이(good child)라고 평하고 있다.
그 후 그는 해리슨 부인의 주선으로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1907년에 졸업을 하였다. 그 후 그는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평양 신학교에 진학하여 1915년에 졸업함으로써 호남 지방 최초의 신학교 졸업생이 되었으며, 그 해 목사가 되었다.
그는 목사가 되기 이전에 여러해 동안 교단에 서기도 하였는데 군산에 있는 영명학교(永明學校)에 3년간 근무 한 적이 있으며, 금산(金山)에 있는 심광학교(心光學校)에서도 3년 동안 근무하였다. 기전 학교에 졸업생이며, 중앙대학교의 설립자인 임영신(任永信)여사는 심광학교 재직중에 가르친 제자이다. 또한 그는 1910년부터 전북 익산시에서 4년간 전도사로 시무 하였으며, 1915년 목사가 된 후에도 익산시에서 네 교회를 맡아 2년간 봉직하였다.
1917년 제주도로 파송되어 6년동안 제주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였고 제주 내도리교회(濟州內都里敎會), 삼양리교회(三陽里敎會) 등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22년에는 광주 남문밖교회의 담임목사로 봉직하다가 1924년 광주 양림교회(楊林敎會)를 창설하여 25년간이나 이 교회에서 봉직하였다.
김창국 목사는 광주의 초대 YWCA회장을 역임한 부인 양응도 여사와의 사이에 6남매(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김현정(金顯晶)씨는 평양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서 일생을 마쳤고, 차남 김현승(金顯承)씨는 숭전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시인으로도 유명한 분이었다. 3남 김현택(金顯擇)씨는 신흥학교 지정 2회 졸업생으로 전북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미국에 살고있다. 4남인 김현구(金顯求)씨는 전남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맞았으며, 광주 중앙교회의 원로장로이다. 4. 김현승의 생애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리며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학창시절 가을만 되면 한구절씩 읊조렸을 만한 시귀절이다. 이 시 "가을의 기도"의 저자가 바로 김창국 목사의 아들 김현승 시인이다.
1913년 김현승은 평양에서 김창국목사의 차남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1975년 4월 11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수색동 119의 10 자택에서 조용히 62세의 일기를 마감하게 된다.
그는 270여 편의 시와 한 권의 산문집을 통하여 부끄럼없는 신앙인격의 소유자로 그의 견고하고 투명한 시를 통해 고독한 인간의 모습과 향기높은가을의 서정을 노래하여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를 우리에게 선물해주고 있다.
그는 7살 때 아버지가 제주도에서 광주 양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오면서 그의 제 2의 고향인 광주로 오게 된다. 그의 아버지 김창국목사는 1922년 부터 1947년까지 양림교회에서 시무하였고 김현승은 광주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우는 양림동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그는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를 다니다가 병을 얻어 도중에 중퇴하고 광주로 내려와 숭일학원에서 교편을 잡았고 후에 모교인 숭실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게 된다.
1934년 교지에 발표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이라는 시로 양주동선생의 인정을 받아 그 해에 동아일보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1937년에는 양림교회의 청년들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이다 재판에 회부되고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당시에 썼던 시가 "새벽"이다. 나는 너를 보고 내일을 믿는다 더 힘있게 내일을 사랑한다 그리하여 힘있게 오늘과 싸운다
<새벽>중에서
그는 그토록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그의 신앙소신에 따라 평생을 살아온 분이었다. 그는 일제치하에서는 더이상 시작활동을 하지 않고 광복후에 다시 재활동하게 된다.
그의 시는 초기에는 자연예찬과 감상어린 서정시가 주류를 이루었다. 대표적인 시가 가을의 기도이다. 이 시는 가을의 계절감을 통한 경건한 삶의 가치를 추구한 시이다.
후기에는 존재의 고독과 구원을 노래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시가 눈물이다. 눈 물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1957
이 시는 그가 어린 아들을 잃고 그 슬픔을 기독교 신앙으로 극복하면서 쓴 것이다. 이 외에도 플라타나스, 아버지의 마음, 견고한 고독, 슬픈 아버지, 절대고독 등이 있다. 그의 신앙을 노래한 것이 바로 그의 시일 정도로 그는 평생을 신앙속에서 경건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우리는 그를 `가을의 시인'혹은 `고독의 시인'이라고 한다. 그가 `가을'에 대한 시편과 `고독'을 탐구한 시편들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그의 집에서 차 끓이는 냄새가 동네 어귀까지 난다고 해서 호가 다형(茶兄)인 김현승. 커피와 커피향기 그리고 가을과 고독을 좋아했던 그를 우리는 견고한 믿음의 시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가 뛰어놀았을 양림동산. 양림교회의 청년면려회활동을 열심히 했을 그의 그림이 그려진다.
바로 앞의 선교사 유적지에도 그의 사택이 있기 때문에 아마 그의 어렸을 적 놀이터였을 것이다.
이 곳에서 그는 평생을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순교자의 신앙이 그의 마음속에 심겨졌을 것이다.
무등산 원효사 입구에 있는 시비
산수동, 제 4수원지, 청풍쉼터, 충민사, 충장사를 거쳐서 무등산장에 거의 다가서 급커브로 회전하는 산기슭에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자칫 놓치기 쉬우니 무등산장 주차장에서 100m 정도 못미쳐 있다고 생각하시면 된다. 1977년 그의 제자들과 후배문인들이 그의 시정신을 기려 세운 것이다. 그 시비에는 눈물이 조각되어져 있었다.
그의 모교 숭실대학교에도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시비에는 가을의 기도가 새겨져 있다.
양림동 호신대 교정에 있는 시비
양림동 호남신학대학교 교정에도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양림동과 양림동 주민자치위원회에서 다형 김현승 시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다형 선생을 기리기 위해 2005년도 마을공동체시범사업으로 시작하여 2년에 걸친 공사 끝에 2007년 1월 30일 호남신학대학교 내 김현승 시비 동산에서 제막식을 가졌다. 김현승 시비는 펜촉형 시비, 연혁비, 책모형 시비 총 3개의 비로 되어 있는데 책모형 시비에는 선생의 대표적 시 “가을의 기도”를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