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김정식 로제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삐에르
*격월간 <공동선> 2014년 3~4월호에 실린 글
나는 행복한 브리꼴레르(bricoleur)
재봉틀을 사용하여 막내 이랑이의 노트북 파우치(pouch/작은 주머니)를 만들어 주고 있는 내게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이 시대의 진정한 브리꼴레르야”
“그래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평생 동안 인문학(철학/신학/교육학/심리학)을 두루 공부하고 있고, 따로 배우지 않고서도 음악 작곡과 악기연주가 가능하며, 미술 감각 또한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데다, 운동이나 잡기에도 두루 능하기에 스스로 인정하고 싶어. '브리꼴레르'라고 불러줘~~. 자뻑(자기 스스로에게 반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표현 - 국어사전)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난 이 시대의 진정한 ‘브리꼴레르' 지식인이야. 그러기에 ‘한국 휴먼네트워크’라는 시민단체에서 ‘생활 속의 신지식인 30명’으로 선정해서 인증서까지 받았잖아.”
그렇다. 어제도 운전면허증 갱신에 필요하다는 아들의 증명사진을 집에서 만들어 주었다. 남의 도움없이 내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 포토샵을 거친 뒤, 미리 준비해 놓은 사진전용 인화지에 컬러프린터를 이용해서 뽑는 데 까지 5분 걸렸다. 굳이 사진관에 가지 않아도 되니 비용절약에 시간절약, 그리고 내 맘에 드는 사진을 골라 갈 수 있으니 일석삼조요 일타삼피(?)가 아닐 수 없다. 누군가 쓸 일 없어 버린 가재도구를 주워 와서 우리 집 구조에 맞게 개조하여 사용하거나, 필요하면 용도에 맞게 새로 만드는 일 까지 사람 사는 데 소용되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나 못 하는 일은 따로 없다. 그래서 백 평 남짓한 대지에 이층으로 지어 대가족이 함께 사는 우리 집은 집안과 마당 그리고 창고에 이르기까지 내 손길이 닿지 않은 물건은 거의 없다. 또한 가까운 이웃이나 친지들 그리고 친구들은 대부분 몇 차례씩 경험했을 것이다. 이사 때나 집안 대소사 때 혹은 함께 여행을 하면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불가사의하게 일을 처리해 내는 내 모습을 지켜보면서 감탄사를 연발하다가 대부분 인정을 하게 된다. ‘천재’ 혹은 ‘맥가이버’라고. 시인이신 이해인 수녀님과 함께 북미 초청강의에 갔다가 캐나다의 로키와 미국의 그랜드캐년 여행을 하게 되었을 때, 동행했던 교포 의사께서 붙여준 별명이 하나 더 있는데 ‘로짜르트’다. 가톨릭세례명 로제에 천재적 작곡가 모짜르트를 합성한 이 이름을 수녀님께서는 자주 들먹이신다. ‘구름새(흰구름을 좋아하는 시인과 노래하는 로제 새의 합성어)’라는 이름으로 시노래 콘서트나 문화영성 강좌를 자주 다니면서 깜짝 놀랄만한 경험을 가장 많이 하셨기 때문이다.
'브리꼴레르(bricoleur)'란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쓴 《야생의 사고》에서 유래되었는데 우리말로는 ‘손 재주꾼’이라는 뜻이다. 맥가이버처럼 활용 가능한 도구나 자원을 자유자재로 이용해 위기상황을 탈출하거나 기존 지식을 자유롭게 융합해서 주어진 문제 상황을 벗어나는 문제해결의 귀재를 일컫는다.
'브리꼴레르'란 도전과 야성적 사고로 무장한 맥가이버형 인재이다. 이들은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묘안을 찾아내며, 과감한 시도와 역발상으로 불가능에 도전하고 역경을 헤쳐 나가는 사람들이다. 자기 분야를 깊이 파면서도 지식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색다른 도전을 즐기는 모험가적 전문가이고, 다른 분야도 인정하면서 내가 갖고 있지 않은 전문성은 다른 분야의 전문성과 융합하여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융합형 전문가이다. 또한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스스로 알아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실천적 지식인이고, 나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치유하는데 활용하는 가슴이 따뜻한 전문가이기도 하다.
우리 주변에 보면 매뉴얼과 규율에 얽매여 살면서, 상황의 특수성과 융통성을 반영하는 의사결정과 도덕적 판단력을 상실한 멍청한 전문가, 자기 분야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외골수의 답답한 전문가, 전문가도 아니면서 전문가 행세를 하는 무늬만 전문가, 머리는 좋지만 가슴이 따뜻하지 않아 왠지 밥맛이 없어 보이는 재수 없는 전문가, 전문성을 악용해 타인을 무시하고 짓밟는 싸가지 없는 전문가들이 많고, 이들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가 다분화되고 전문화될수록 '브리꼴레르' 지식인이 꼭 필요하고, 21세기를 이끌어갈 바람직한 지식인은 다빈치의 두뇌와 맥가이버의 손발을 가진 '브리꼴레르'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다.
(유영만의「브리꼴레르」-‘세상을 지배할 지식인의 새 이름’에서 발췌)
왜 나는 나 스스로를 '브리꼴레르'라고 인정하는가?
네 살 때 한글을 익혀서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나는 결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삶으로 보답했다. 우등상과 개근상을 빼지 않고 받았던 것은 물론이고, 학력 경시대회에서는 늘 뛰어난 성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렇다고 특별히 공부에 집착을 하거나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이를테면 공부보다는 노는 일을 더 많이 했고, 해야 할 일 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더 우선으로 했다. 뇌기능이 특별하게 발달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부모, 특별히 아버지의 교육적 열망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교육에 필요한 것이라면 다 배려해주셨다. 심지어 밤이 늦도록 자지 않고 만화를 보고 있는데도 ‘만화를 많이 보면 글이 는다(문장력이 향상된다)’시며 나무라지 않으셨다. 이런 내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와 열망에 힘입어 모두가 어렵게 살았던 그 시절에 나는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내 인문학적 소양의 단단한 초석이 되었다.
학업성적으로 받은 상 말고도 군내 미술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고, 노래자랑에 나가 상을 받는 등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진 재능을 보였었다. 특히 사생대회에 나가서 풍경화와 정물화가 아닌 ‘구상 구성’ 작품으로 최고상을 받아 심사위원들을 놀라게 했기에, 한 동안 교무실 앞에 전시되었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인 ‘벌집’을 활용해 추상화처럼 보이는 기하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표현을 했던 것이다.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에 지루함을 느껴서 그랬겠지만 당시 심사평은 충격이었다. 어린 초등학생이 사물을 보고 그대로 그리는 것을 뛰어넘어 구성을 해내었으며, 그 표현방식이 ‘구상’과 ‘추상’, ‘구성’과 ‘비구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메타포의 활용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다 알아듣지도 못할 이 심사평 때문에 나도 자주 가서 심사평이 요약되어 적혀있는 내 그림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벌집을 조금 재미있게 그린 것에 불과했다. 이 작품은 내 머리에 스캔되어 언제라도 또렷이 재현할 수 있다.
한편 초등학교 때 양호실에 있던 풍금을 혼자 쳐 보았고, 삼촌이 불던 하모니카를 몰래 불어 보았으며, 밴드부에서 여러 악기를 배우지 않고서도 잘 연주할 수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났다고 여기는 분들이 많았지만 내 생각은 전혀 달랐다. 무엇이든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을 뿐이다. 내가 해낸 일에 대해 자주 칭찬을 받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칭찬에 기인한 이런 자신감은 뇌의 메카니즘을 생각할 때 뇌 활용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단초가 되어줄 수 있다고 본다. 19세기 심리학자인 윌리암 제임스가 제기한 것으로 추정되는 주장에 의하면 ‘보통사람은 평생 동안 뇌의 10%를 사용하는데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는 15~20%를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그 비율이 10%가 아니라 6%라고 수정했고, 1990년대에 와서는 1% 이하로 활용하고 있다고 했으며, 최근에는 인간의 두뇌 활용도가 단지 0.1%에 불과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렇지만 칭찬을 통한 자신감이 무궁무진한 뇌 활용을 얼마든지 극대화 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내 견해다.
그러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 도시로 가 엄청나게 큰 씨네마스코프 영화관에서 단체관람으로 보았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내 음악적 감흥을 제대로 건드려 준 고마운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와서 하루 밤을 온통 지새우며 머릿속에 선율을 되새긴 나는 다음날 음악실에 가서 피아노 앞에 앉아 영화 속의 음악들을 어렵지 않게 재연할 수 있었다. 악보도 없이 연주하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신 음악선생님의 전폭적인 배려로 날마다 혼자 피아노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남학생이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이 매우 드문 일이었다. 참된 교육에 대한 안목이 빼어난 음악 선생님은 나를 가르치려 하지 않고 그냥 혼자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른이 되어 왜 그러셨는지 묻자 ‘좋은 음악성을 해치게 될까봐’라고 하셨다.
미술과 음악에서 보인 재능과는 달리 체력은 바닥이었다. 키가 너무 작아 항상 1번이었고, 연년생으로 태어난 동생 때문에 젖을 많이 못 먹고 자란 탓인지 체력이 약해 당시 일류학교 진학을 위해 꼭 필요했던 체력장에서 늘 어려움을 겪었었다. 그런 점을 보완하고 극복하기 위해 고교 때부터 시작한 것이 유도와 농구였다. 그러나 너무 열심히 하다가 복막염을 앓게 되어 아쉽게도 유도는 계속할 수 없었지만 다른 운동들은 꾸준히 하게 되어 ‘만능스포츠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육상종목과 구기 종목을 두루 잘 했기에 당시 도입된 대입 체력장에서는 동료들을 대신해 한 종목을 서너 번씩 뛰었는데, 초창기에 관리가 허술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훗날 중고등학교 동창들은 나를 생각하면 한쪽에는 피아노가 다른 한 쪽에는 농구공이 떠오른다고 했다. 이 밖에도 방향감각은 거의 백치 수준이고, 종류 불문하고 매뉴얼을 습득하는 일은 내겐 늘 암호 해독만큼 어렵다.
피아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느 날 갑자기 내 머릿속에 새로운 음악이 떠올랐다. 왜 떠오르며 어떻게 떠오르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한 번 떠오른 음악들은 그 순간의 주변 정황과 함께 입력되어 결코 지워지지 않았기에 자주 혼자 연주하거나 불렀다. 그러다 우연히 듣게 된 사람들로부터 ‘천재성으로 작곡을 한다’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들었지만 ‘천재’라는 말에 대한 호감은 별로 없었다. 돋보이려 하거나 꾸미는 일에 게을렀기에 천재성에 걸맞은 성과는 없었지만 나 스스로 좋아서 집중하면 어떤 일에서든 범상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 그런 결과로 학창 시절 음악과 운동에서 수많은 상을 받았지만 그 중 압권은 고교 때 마라톤 선수로 큰 대회에 나가 완주하여 준우승을 한 것과 내가 만든 노래로 학내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비롯해 세 번 입상한 것, 그리고 MBC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비롯하여 세 번 수상한 것이다. 그 가요제가 생긴 이래 한 사람의 작품이 세 번이나 입상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며, 두 번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외에도 가톨릭교회 안에서 ‘생활성가’라는 장르를 만들어 정착시켰으며, 가톨릭교회에서 공모한 창작성가제에서 수차례 입상하였고, 한겨레신문사에서 주최한 ‘겨레의 노래 찾기’에서 작곡가 중 유일하게 세 분야에 각각 한 곡씩 세 곡이 선정되었었다. 이 밖에도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주최 '양심수 석방을 위한 시민가요제'에서 수상을 하였고, 심장병과 백혈병 환우를 돕기 위한 거리공연을 비롯한 자선공연을 수없이 진행하였다. 새만금갯벌 살리기 운동과 부안 핵 폐기장 설치 반대 운동을 포함한 환경보호와 생태보전 운동, 양심수 석방과 사형제 폐지를 포함한 인권회복 운동 등, 교회와 사회를 넘나들면서 버림받고 소외받은 이웃과 소리 없는 자연의 입장을 대변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 했다.
국립대학 전자공학과를 졸업하면서 중등교사 자격증과 1급 전기기사 자격증을 받았으며, 35살 때 초청유학으로 파리음악원에 가 그레고리안(초기 교회음악)과 지휘법 수료증을 받았다. 노래공연과 인문학강의를 접목한 새로운 형식의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국내외를 넘나들며 5,000여 차례의 초청일정을 진행하였다. 그러는 동안 어릴 때 잘 교육받지 못한 영어 때문에 표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전문기관의 도움을 얻어 <영어 훈련지도사> 자격증을 받기에 이르렀다.
오늘 날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 우익과 좌익, 도시와 시골, 부자와 가난한 이,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기득권자와 권리를 빼앗긴 사람, 동과 서, 남과 북, 남성과 여성, 어르신과 젊은이 등 계층과 종파로 인한 수많은 장벽으로 나뉘어 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지위나 정체성이 담보되는 경우도 적지 않으므로 덮어놓고 서로를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이해하고, 서로의 처지를 수용하는 입장에서 공감과 소통을 이루어갈 때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희망을 이룰 수 있다. 이런 사회상황 속에서 메이저리티(다수자/majority)와 마이너리티(소수자/minority) 사이를 오가면서 화합을 위해 대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나는 진정한 '브리꼴레르'임에 틀림없다.
어떤 시각으로 보아도 자뻑에 해당하는 자기자랑을 늘어놓으면서 나는 진정으로 자랑스러웠다. 부나 명예를 얻은 것도 괜찮은 지위에 오른 것도 아니지만, 주어진 현실에 만족함으로써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꾸미거나 돋보이려는 노력 없이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편안하고 쾌적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확보하기보다 어떤 고난과 역경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전문성을 두루 갖추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지녔다는 것이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또한 재능처럼 내게 간직된 다방면에서의 전문성을 십분 활용하여 자신은 물론 이웃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이런 자랑이 꼭 필요한 이유는 '김정식은 진정한 브리꼴레르'라는 명제에 대한 논리적 뒷받침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다방면의 전문성을 두루 갖춘 '브리꼴레르'를 누가 만들었을까? 바로 내 부모와 형제, 친구와 이웃 그리고 자연을 비롯한 수많은 스승들이다. ‘어떻게?’ 너무나 싱겁게도 '그냥 내버려 둠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다. 굳이 플라톤의 ‘상기설(想起說)’에 기대지 않더라도 늘 다른 시각과 튀는 발상으로 엉뚱한 제안을 하는 사람을 그냥 그러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렇다면 왜 그냥 내버려 두었을까?’ 아는 것이 많고 잘 하는 것이 많으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좋게 표현하면 내재된 인문학적 소양과 자유의지가 강했다는 뜻이다. ‘왜 아는 것이 많을까?’ 답은 명료하다. 책 읽는 것을 노는 것만큼 좋아했기 때문이다. 체험을 통한 직접경험도 소중하지만 책을 통한 간접경험도 매우 중요하다. 또한 이 간접경험은 다른 사람의 입장과 대처방식까지 섭렵할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내 안에 내재된 인문학적 감흥과 소양은 사실 부모로부터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은 못 배웠으므로 자식만큼은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든 일에 우선하여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지원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부모님의 이런 막무가내식 교육열망을 지식이나 정보의 스펙 쌓기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문학적 소양을 넓히는 방식으로 받아 들여 예술과 문학에 심취할 수 있었다는 선택은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다. 어린 날, 내가 살았던 시골의 산과 들 그리고 강가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자연에서 자양분처럼 섭취한 서정과 정서 때문이라고 본다.
내 안에 담긴 인문학적 소양에 시너지 역할을 해 준 것은 헤르만 헤세의 문학작품이었다. 근원적인 슬픔으로 방황하던 내 영혼은 그의 작품을 통해 치유되었고, 그 치유는 또 다른 창작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하여 나온 음악창작과 연주 그리고 글들은 수많은 이웃들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위로와 쉼을 주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그 공은 오롯이 헤세의 작품을 통한 인문학적 치유라고 확신한다. 평생을 기독교 안에서 살았지만 내 삶의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헤르만 헤세의 작품에 의해서이다. 물론 예수의 삶이 좋아 따라 살고 싶은 열망을 평생 간직하고 있고, 성경에 적힌 단순한 가르침에 매료되었던 적이 무척 많았기에,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종교는 내게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매혹적이지도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나에게 있어 치유는 기독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문학에 의한 것이었다. 그 치유를 통해 음악이 나왔고 그 음악이 또 다른 치유를 가져오니 인문학의 감흥을 느끼게 해 주고 영감을 틔워주는 것이 이 시대 최고의 힐링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어려움은 무엇인가? 산업혁명 이후로 과학기술이 발달하였고, 그 결과로 급격한 사회발전 및 정보와 통신의 발달을 가져왔지만 ‘본질적인 삶의 질이 나아졌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른바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기술인 적정기술에 관한 통제가 없기 때문이다. 딸기 맛 아이스크림 만드는 화학기술이나 핵무기 만드는 기술이 아닌, 사회에 기여할 수 있고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기술만을 보급했어야 한다. 그런데 알아낸 기술 활용 포기를 못한 결과로, 오히려 자연과의 조화를 거부하고 기쁨보다는 쾌락을 추구하는 데 그 기술을 활용하고 만 셈이 되는 것이다. 예전 서양에서는 교회가 위험한 과학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는데, 교회가 과학발전을 저해했다는 과학 숭배론자 들의 비판의 결과가 오늘날의 모습이다. ‘오래된 미래’라는 책에서 스페인의 언어학자이고 사회학자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여사는 인도의 오지 라다크 마을(티벳 불교를 믿는)에서 적정기술을 보급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선택이 미래를 바꿀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나아갈 길은 ‘나만 편하게 살면 된다’라고 생각하기보다 공동선을 이루기 위한 공공성 함양을 일상화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진정한 전문인인 '브리꼴레르'가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길을 잃고 표류하는 현생인류는 참된 삶을 향한 정상궤도로의 재진입이 가능 해질 수 있다. 또한 그런 열망을 이루어 가는데 인문학을 통한 치유와 위로는 가장 효율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시대의 진정한 '브리꼴레르'라고 자처하는 나, 김정식이 좋은 예이다.
해외 방문학생 일정을 계획하고 있는 막내 이랑이는, 숙고 끝에 꼭 필요하다는 판단 후 노트북을 사기로 했다. 그러나 거품을 다 걷어내고 필요한 기능만을 탑재한 결과, 최신 울트라 북을 거의 반값으로 샀다. 그런 고마움에 대한 선물로 파우치(주머니)를 만들어 주기로 했고, 평생 함께 해 온 내 전용 재봉틀로 초벌 박음을 하고 다시 손바느질로 마무리를 한 후 미싱자수로 희망을 표현하는 나무 네 그루를 넣어주었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파우치라고 좋아하고 있는 우리에게 언니 이슬이가 다가와 헤진 윗도리를 꿰매어 달라면서 던진 한 마디가 이랬다.
“이게 말이 되나? 60이 다 된 아빠에게 딸들이 바느질을 시키다니...”“왜 말이 안 돼? 아빠가 늘 말했잖아. ‘아빠는 예스맨’이라고. 하고 싶은 일이라거나 모두 다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Yes'를 하는 것이 아니야. 대답을 해 놓고 가능한 일이 되도록 최선을 다 해보고 싶고, 정 안 되면 그 때 아니라고 해도 늦지 않아. 물론 시간적으로 봐서 그래야 될 일과 그러면 안 되는 일을 가늠하는 센스는 기본이구. 무엇보다 기쁜 것은 너희가 헤진 옷을 꿰매어 입겠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야,”
어린 시절, 가끔씩 생뚱맞고 엉뚱한 발상으로 주위 사람과 마찰이 일어날 때면, 내 어머니는 겸양을 잃지 않은 채 그러나 단호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저 아이의 말이 다 맞더라구요.’
교육적인 열망에 못지않게 늘 아들을 지지하고 아들의 편이 되어주셨던 내 어머니. 다가올 새 시대에 진정한 '브리꼴레르'가 될 거라고 확신하며 예언을 불사하셨던 내 어머니를 생각하니 <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을 비는 기도’가 떠오른다.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