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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스승인 예수님(1970.2016.5.15.스승의날) 히13:7-8, 17.
할렐루야 오늘은 스승의 날이면서 스승의 주일입니다.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은 가정의 달이라 그래도 어느 정도 실감도 나고 약간은 피부에 와 닿는데 스승의 주일은 별로 느낌이 없으시지는 않습니까? 또 어떤 분은 이 가정의 달에 스승의 주일을 구태여 지킬 필요가 있는가 하는 분도 계실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이 영적 질서를 세우고 또 행복해 지려면 그리고 우리 자녀들을 바르게 키우려면 스승을 통해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옛날에 어린이들이 읽었던 소학에 보면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왕과 스승과 부모’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부모와 스승을 왕같이 받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만큼 선생님이 존경받는 나라도 드뭅니다. 물론 최근에는 학교 교육이 아주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학부모가 학교에 와서 학생들 보는 앞에서 선생님을 폭행하고 학생이 교사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국가 위기 중에 가장 무섭고 심각한 위기는 교육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 날은 스승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교육적으로 의미있는 여러 가지 행사를 각급 기관 및 단체별로 실시하고 있으며 교육 유공자 포상과 음악회, 체육대회 등이 열립니다. 정부에서는 교육부 직원뿐 아니라 중앙지방 행정기관의 공직자, 국영기업체, 정부투자기관, 사회단체, 일반기업체 임직원 등이 스승 찾아뵙기, 안부편지 보내기, 모교 및 자녀학교 방문하기 등의 운동에 참여하도록 권장했습니다.
한편, 교육에 헌신 전념하는 우수 교원을 발굴하고, 교원의 사기 진작과 스승에 대한 존경 풍토를 조성할 목적으로 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이 큰 교원들에게 훈장, 포장 및 대통령, 교육부장관 표창 등을 수여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전국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스승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경건한 뜻을 표하며, 불우한 퇴직 은사나 와병 중인 교사를 방문해 위문품을 전달하고 위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아름다운 스승의 날에 대한 유래에 비해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 시대에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도 별로인 것 같고 이 날에 대한 취지와 이미지도 많이 퇴색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아무리 바뀐다 할지라도 잃어버린 우리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과 스승의 은혜는 다시 회복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것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이 나라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교육의 장래는 너무나 어두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결코 올바르게 키울 수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오늘 이 시대야말로 정말 그리운 선생님 즉 존경받을 만한 스승이 그리워지는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요사이는 정말로 영혼의 스승, 진정한 스승이 그리운 시절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우수한 민족이 유대인이라 합니다. 노벨 수상자의 22%(480명중 93명)가 유대인입니다. 세계 200대 재벌의 15%, 미국 변호사의 30%, 미국 법대 교수의 50%, 의대교수의 50%, 정치, 언론, 예술, 과학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민족이 유대 민족입니다. 어떻게 소수민족인 유대인들이 이처럼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교육입니다. 유대인은 부모님의 인격교육, 선생님의 전문가 교육, 랍비의 신앙 교육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교육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부모, 선생님, 랍비들이 삼위일체가 되어 각자의 위치에서 자녀들을 가르칩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세계 최고의 인재로 키워지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신앙교육 선생님인 랍비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랍비’라는 말은 ‘나의 크신 분’,‘내 주’ 라는 뜻입니다. 그 랍비들의 가르침을 묶어놓은 책이 ‘탈무드’ 입니다. 이 탈무드는 자녀를 가르치는 교과서이고 인생 상담서입니다. 이 책이 유대인들을 세계 최고가 되게 했습니다. 이 탈무드에는 나오는 이야깁니다.
아버지와 랍비(선생)가 노예시장에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찾아와 두 분 가운데 오직 한 분 만을 살 수 있는 돈밖에 없을 때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그런데 탈무드에서는 놀랍게도 랍비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부모는 아들의 생명을 이 땅에 가져온 자들이지만 랍비는 인간을 영원한 세계인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이 ‘사제’관계를 다른 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멘토링’이란 것입니다. ‘멘토링’이란 말은 ‘멘토’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나온 것입니다. 멘토(MENTOR)라는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왕의 친구였습니다. 왕이 전쟁에 출정하면서 그의 아들을 가장 믿을 만한 친구 멘토에 맡기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전쟁터에서 10년 동안 전쟁을 하고 승리하고 돌아와 보니 아들이 아주 훌륭하게 성장해 있었습니다. 그 원인을 알아보니 친구 ‘멘토’의 역할이 컸다는 것입니다. 그 멘토는 왕자에게 친구요, 선생이요, 상담자로, 그리고 때로는 아버지가 되어 그를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의 역할로 왕자는 훌륭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멘토’하면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스승’의 동의어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떤 멘토, 어떤 스승을 두고 살아갑니까? 스승하면 학교 선생님으로 연상됩니다. 그러나 비단 학교 선생님만 스승이 아닙니다. 제일 큰 스승은 부모님이고 두 번째는 친구가 스승일수 있고 직장의 선후배, 인생의 선배도 스승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빼 놓을 수 없는 스승은 영적 스승입니다. 그들은 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목회자를 말합니다. 이 목회자와 여러분과의 관계는 일생동안 계속되는 관계입니다.
성경에는 여기저기서 스승과 제자간의 아름다운 관계를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사람 몇 사람을 보면 모세와 여호수아 관계입니다. 여호수아는 자기 스승 모세가 가르쳐 준 말을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또 사무엘과 다윗의 관계,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요아스, 그리고 사도바울과 디모데의 관계입니다. 공통점은 스승은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하고 온전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에 철저히 순종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위대한 인물로 들어 쓰셨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봉독한 성경말씀도 보세요. 17절‘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스승의 주일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영적 지도자를 따라야 하는가? 어떻게 영적 지도자를 따라야 하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참다운 제자의 자세인가? 이런 문제를 살피면서 함께 은혜를 누리길 축원합니다.
1. 왜 우리는 영적 지도자를 따라야 하나요? 하나님이 세우셨기에 따라야 합니다.
해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이런 기도제목을 부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 새로 입학했는데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좋은 친구들도 만나게 해 주십시오. 또한 좋은 교회학교 선생님도 만나서 믿음이 아름답게 자라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입니다. 이런 기도제목을 보노라면 ‘참 지혜로운 분들이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교회에서 그들의 신앙을 지도하는 선생님과, 학교에서 그들의 삶의 지식을 지도하는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는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연결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녀들이 듣는 자리에서 교회를 비난한다거나, 목사를 비난한다거나, 아니면 선생님들, 혹은 교회 장로님이나 집사님들을 비난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훌륭한 어른들로 알았는데 그렇게 비난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녀들의 믿음이 바르게 자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정에서 부모님들은 교회의 목회자나 자기 자녀를 지도하시는 선생님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를 세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만한 마음의 상태를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왜 우리가 지도자를 따라야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사람을 세우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왕도 부모님도 세우시고 스승님도 세우신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여호수아를 세우신 하나님, 사무엘을 통해서 다윗을 세우신 하나님, 오늘 여러분의 스승을 통해 여러분을 세우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의 스승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믿으셔야 합니다. 그러기에 온전히 따라야 합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는 온전하지 못하고 스스로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스스로 자라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 배우고 성장합니다. 그러기에 인생의 성패는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스승의 훌륭한 가르침은 제자의 생각을 바뀌게 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을 변화시키고, 행동이 변하면 습관이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습관이 변하면 인격이 변하고, 인격이 변하면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니 좋은 영적 스승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중요한 것은 내 스승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에게 존경을 표하고 그의 권위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인 것입니다.
17절 상반 절‘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왜죠? 그들에게 하나님이 부여한 권위가 있고 지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권위를 무시하고 불순종하고 거역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그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왕이 버림받았나요?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 지도자 사무엘의 가르침을 거역합니다. 그를 무시합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그를 버리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라 하셨나요? 그의 스승의 말을 순종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시기질투로 자기를 죽이려 해도 절대로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기름 부어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었기에 복수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복수하지 않고 도망을 칩니다. 그러니 결국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시고 그를 왕의로 삼으십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지도자의 말과 행위가 이해 안 되어도 순종하세요. 순종과 복종을 함께 쓰신 이유가 뭘까요? 어떤 분이 제 설교카페에 질문을 올려 놓았어요. 순종과 복종의 차이가 뭔가요? 그래서 제가 답을 해주었습니다. 자원하여 하는 것이 순종이고 하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하는 것이 복종이라 정의했습니다. 군대에서 순종하라 하지 않습니다. 복종하라 합니다.
히11장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을 살펴보게 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행동으로 순종하였으며 즐거이 복종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순종으로 방주를 예비하였으며,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좋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즐거이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였습니다. 히11:38절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순종하되 즐거이 복종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즐거이 하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2.어떻게 지도자를 따라야 하나요? 말씀을 통해 따라야 합니다.
좋은 것을 같이 한다는 것은 일체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내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이 있을 때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는 일체감이 있어야 교육은 진실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교육이란 일정한 것을 주고받는 거래행위가 아닙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은 더욱더 그러합니다. 이것은 인격의 공유를 통한 사랑의 합성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좋은 것을 함께 한다는 것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무엇이든 나누고 싶은 일체감이 있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가르침은 배우는 사람이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고 배운 바대로 살겠다고 각오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기쁨이 있을 때, 가슴 설레는 감동과 감사가 있을 때 그것을 함께하고 싶은 것입니다. 좋은 것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내 마음에 겸허히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나 교사들이 성도와 학생들을 위하여 기도하듯이 성도님들과 학생들도 목회자와 교사를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체감이요, 은혜요 좋은 것을 나누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좋은 것이 있을 때 항상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생각하며 그 기쁨을 전해 줄 수 있는 이와 같은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히13:7절‘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누가 영적인 지도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는 사람이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영적인 지도자를 따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지도자는 엄밀히 말하면 영적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본받아야 합니다. 그래 영적인 지도자는 아무나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먼저 말씀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때 그 말씀에 의한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아야 합니다. 말로만 하지 않고 하나님이 명령한대로 하고 사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지도자가 말씀과 행실이 일치하지 않으면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책망하는 외식하는 자들이고 그들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는 지도자를 가까이 하고 그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사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면을 보지 마세요. 겉으로 박사학위가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고 경력이 아무리 화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명령과 반응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는가를 보셔야합니다.
주님이 맡겨준 사명에 목숨 걸고 그 일을 위해 충성하고 사는가? 그 행위의 결말에 어떤 열매가 있는가를 보셔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믿음은 말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믿음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의 권위는 형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지도자의 권위는 외모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 지도자의 권위는 말씀에서 나오고 말씀으로 말미암고 말씀으로 성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를 따르고 그를 순종하면 하나님이 세우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는 ‘보고 들은 것을 따라 가는 자’입니다.
영어로 제자란 ‘disciple’,‘follower’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따른다는 것입니다. 뭘 따릅니까? 스승이 하는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스승의 행동, 스승의 언행,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를 그대로 따르는 제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지 말라 나는 자격이 없으니 저 사람을 따르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고전4:16절에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말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의 말, 여러분의 행동 하나가 제자를 만들기도 하고 마귀의 자식을 만들기도 합니다.
3.어떻게 따라야 할까요? 즐겁게 일하도록 따라야 합니다.
17절‘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누군가 누군가를 지도하고 이끌어 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별히 영적 지도자는 영혼의 문제를 책임져야 할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처럼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했습니다. 영적인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이기에 영적인 책임이 무겁습니다. 그러기에 그 무거운 짐을 질 때 즐거움으로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영적인 지도자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즐겁게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① 믿음이 성장하지 않으면 근심케 됩니다.
신앙은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래야만 영적인 분별력이 생기고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세월이 흐르는데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성도가 많습니다. 도대체 성장이 없습니다. 그러니 삶이 변화되지도 않고 복을 누리지도 못합니다. 그러기에 주님도 안타깝고 목사도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주일이 뭔 날인지도 분별이 안 됩니다. 그뿐 아니라 중직을 맡은 사람이 하나님 것 내 것을 분별하지도 못하여 하나님을 상대로 도적질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복을 누리겠습니까? 그러니 근심하진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목회자만 근심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고 계십니다.
② 내가 성장하여 제자를 만들면 스승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영적 스승은 스승으로서의 삶 자체에 보람과 만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 스승은 고차원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께 영광입니다. 내 돈벌이, 내 보람, 내 만족이 목표라면 그것은 포기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스승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 그리고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성장하려면 열심히 성경보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전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낳아서 가르치고 양육해야합니다. 그것을 통해 영적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였습니다. 마28:19-20절‘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제자 삼는 첫 걸음은 전도요, 선교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전도안하고 남이 전도해 놓은 성도를 제자 삼는 것은 애도 안 낳아보고 애를 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전도하여 그 사람을 구원하여 복음으로 낳아야 합니다. 그러면 영적인 아버지도 되고 스승도 되는 것입니다. 영적 스승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영적으로 낳았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스승입니다. 그러나 또한 디모데도 많은 성도를 영적으로 낳았습니다. 그래서 스승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스승은 과거 누군가의 제자입니다. 그들이 온전한 제자로 스승을 좇았기에 지금 누군가에 스승이 되었던 것입니다. 쉬운 예로, 여기 서있는 최목사도 예전에 많은 스승의 제자였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였더니 이제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적 스승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제자로 머물러 있지 말고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먼저 스승을 따르고 순종하셔야 합니다. 순종하고 복종하되 근심으로 하게 말고 즐거움으로 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4.영원한 스승,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를 가르치고 키워주는 다섯 분의 선생님을 만납니다. 첫 번째는 태어나면서 만나는 부모님이고, 두 번째는 교회에서 만나는 교회학교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학교에서 만나는 학교 선생님, 네 번째는 사회에서 만나는 사회 선생님이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우리 영혼의 영원한 스승이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참된 선생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만인이 우러러 숭모하는 인류의 참 스승,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신 최고의 스승입니다. 그분은 우리 인생에게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 진리의 스승이시며 인생의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생명의 스승이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시며 풍성하게 하시는 영혼의 스승이 되시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배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스승을 바로 만나야 하고 잘 만나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좋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좋은 스승으로서 예수님은 우리를 좋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기 위하여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시는가에 대하여 생각하고 깨우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분 선생님이신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아니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생들을 향하여 내게 와서 배우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에게 늘 와서 배워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배운 대로 산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배우되 참된 것을 배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된 것을 배우지 않기 때문에 바른 인격자가 되지 못합니다. 참된 것 바른 것을 배우지 않게 때문에 바른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바른 것을 배워야 합니다. 바르게 배워야하고 온전하게 배워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스승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 마11:29절‘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참다운 쉼과 인생의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 뒤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배고프고 소외된 백성들, 로마의 학정에 시달리는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고 뒤를 따랐습니다. 또 하나는 소수의 사람인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님에게서 무엇인가 배우도록 초청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께로 왔다면 주님의 가르치심대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배운 대로 성격도, 인간성도, 체질도, 기질도 다 형성되었습니다. 부모의 운명을 대물림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상 때부터 우리 사회에 물려진 습관과 문화가 오늘의 사회를 형성해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배움에 따라서 운명을 결정하는데 잘 배우면 잘 배운 대로 성공하고, 행복하고, 잘못 배우면 잘못 배운 대로 인간은 불행하고 굴절된 인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성격도 배운 대로 됩니다. 부모로부터 상처 나고 부모로부터 받은 그대로 또 배운 대로 형성이 됩니다. 부모에게서 자기도 모르게 그대로 배운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식에게, 아내에게, 사회 속에 그대로 표출하면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거의 배운 대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교에서만 배우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친구를 사귀면서도 배우고, 가정에서도 배우고, 사회에서도 배웁니다. 그러면서 배운 대로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부모에게서 배웠든, 친구에게서 배웠든, 사회에서 배웠든 그대로 하나의 인간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배우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다시 배우라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주신 말씀으로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께서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지식을 배우고, 기술을 배우고, 학식을 배우고, 많은 정보를 배우지만 마음을 배우라고 초청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배워야 할 것 가운데 최고의 배움은 바로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특별한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우리에게 마음을 가르치는 특별한 스승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옛 선비들은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을 일생의 복으로 여겼습니다. 좋은 스승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고 학문적 감화를 주고받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허준이라는 명의가 탄생한 것은 ‘유의태’라는 훌륭한 스승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또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삼중의 고통을 가진 헬렌 켈러가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셜리번이라는 스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스승의 훌륭한 가르침은 제자의 생각을 바뀌게 하고 생각이 바뀌면 행동을 변화시키고, 행동이 변하면 습관이 변하고, 습관이 변하면 인격이 변하고, 인격이 변하면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니 좋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겸손을 몸으로 행해 보이신 스승입니다. 예수님은 신분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동등 된 신분을 가지고 창세전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분이시지만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곳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천하고 천한 우리를 섬기시고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참 스승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참 스승은 섬기는 자이며 낮아지는 자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겸손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위선이고 외식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사랑이 있어야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렇습니다. 참 스승은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그 권위는 사랑을 통한 겸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주님이 천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오신 그 모습이 바로 사랑을 통한 겸손이고 그 분이 바로 참 스승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스승의 능력은 지식으로나, 지위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사랑을 입은 겸손이 있어야 됩니다. 주님이 어떻게 제자들 발을 씻기셨을까요? 우리 주님이 어떻게 손수 그 갈릴리 촌놈들의 발을 씻기셨을까요? 그곳이 사랑을 입은 겸손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영원한 우리의 스승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명에 생명을 거신 분이십니다. 우리 스승이신 예수님은 예수님이 받으신 구속사역, 십자가를 지시고 죄를 속하신 구원 사역에 생명을 걸고 나가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마지못해 십자가를 지신 분이 아니십니다. 자원하여 지셨고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고난당하시는 중에 한 번도 그것을 거부하거나 짜증내시거나 힘들다고 벗어버리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그것을 거부하시려 했다면 얼마든지 안지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이 뭐라 조롱하셨습니까? ‘저가 남은 구원하였는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였다’고 조롱합니다. 그때 주님이 얼마든지 그 십자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짠~ 하고 뛰어 내려 ‘내가 메시야다’ 하고 외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묵묵히 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왜요? 사명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부여 받은 사명을 생명보다 귀한 것으로 여기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명에 여러분의 목숨을 거시기를 축원합니다. 왜요? 그 사명 때문에 여러분이 이 땅에 보내어 졌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이 없었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이 세상에 때어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외쳤던 사도 바울이 그토록 위대하게 쓰임 받은 이유가 여기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이라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누군가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사명을 주어 보냈는데 그 사람이 그 사명은 헌신짝처럼 버리고 세상일에 재미 보며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축구 감독이라면 선수를 운동장에 들여보냈는데 차라는 공은 안차고 카메라만 의식하고 있다면 그 선수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뻔~ 하지요, 멤버 체인지입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하나님이 부여한 직분, 하나님이 부여한 사명을 단순히 재미삼하 하지마시기를 축원합니다. 거기에 목숨을 거시기를 축원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죽을 만큼 하라는 것입니다. 시간나면 하고 형편 되면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거기다 걸고 온 힘을 다해 죽을 만큼 하면 하나님이 생명의 면류관으로 보상한다는 것입니다. 교역자들도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에 목숨 건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찌 그냥 계시겠습니까?
성경을 가만히 보세요. 하나님이 쓰신 사람은 전부 목숨 걸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도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김 사람이고 모세도, 요셉도, 그리고 다윗도 전부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진정한 스승은 부여받은 사명에 목숨을 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그렇게 살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하늘로 높이신 영원한 스승이십니다. 우리 스승이신 주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다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곳 무덤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낮아지신 주님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셔서 영원한 하늘 주님의 보좌에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영원한 구주라는 칭호를 부여하시고 모든 사람들의 입으로 주님이라고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 스승이신 예수님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회에서도 사람을 키우고 가르치는 선생님이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교회 안은 세상과는 달리 영적인 권위와 힘이 주어지지 않으면 모든 가르침의 구속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과 존경 속에서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할 때에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 안에서도 가르치는 자도 행복하고, 배우는 자도 행복한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고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멋있는 제자, 멋있는 스승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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