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금세공기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최고의 보검
동아시아의 유일무이한 유물이다. AD 4세기 무렵부터 한반도 동쪽나라 신라에서 갑자기 금문화가 극성기를 이룬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8세기대에 찬술한 일본서기가 신라를 “눈부신 금은채색의 나라”로 표현했을까. 이는 고구려·백제와는 사뭇 다른 양상. 왜 유독 신라에서만 황금문화가 번성했을까 하는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權寧弼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금제품에서는 스키타이-흉노 문화와의 연결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1973년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길이 30cm의 황금 장식 보검은 칼과 칼집을 모두 금테로 장식하고 칼자루에 紅瑪瑙(홍마노)를 嵌入(감입)한 세계적 명품입니다. 이런 모양의 보검은 훈族의 아틸라王이 활약하던 5세기에 그리스, 로마, 이집트, 西아시아에서 유행했다고 합니다. 東아시아에서는 경주에서만 발견되었는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근처의 보로워에 지방에서 몇 점의 발굴 사례를 보이고, 그밖에는 실크로드上의 키질 벽화에 묘사되어 있을 뿐입니다.
李仁淑 요시미즈씨는 트라키아 王이 금세공기술자를 신라에 보내면서 호위병으로서 흉노족을 썼을지 모른다고 추리했습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그 금세공기술자는 그리스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금세공에 관한 한 그리스인들이 탁월했으니까요. 그리크 골드(Greek Gold)로 유명한 그리스에는 원래 금이 많이 산출되지 않아서 그리스인들은 실제로 금을 풍부하게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카자흐스탄 지역인 알타이 산맥의 금産地까지 와서 금을 구해 갔음은 헤로도투스가 저술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도 금의 공급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종 목 :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이란 초기철기시대에 나타난 청동으로 된 거울로 잔무늬거울이라고 한다. 잔무늬거울의 뒷면에는 거울을 멜 때 사용하는 고리인 뉴가 2∼3개가 있다. 또한 전(前) 시대에 있던 거칠게 무늬를 새긴 거울(거친무늬거울)에 비해, 작은 삼각형을 기본으로 하여 기하학적 무늬를 세밀하게 새긴 것이 특징이다. 숭실대에서 소장하고 있는 다뉴세문경은 지름 21.2㎝로 뉴가 2개이며 내구(內區), 중구(中區), 외구(外區)로 3등분 되어있다. 각 구마다 작은 삼각형 무늬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세밀하게 장식하였다.
강원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이 거울은 현존하는 잔무늬거울 가운데 가장 크며, 동질(銅質)·주조(鑄造)·문양 등의 면에서 세문경(細紋鏡)으로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다뉴세문경은 대개 방울과 함께 발굴된다. 거울[鏡]은 빛, 방울은 소리를 상징한다. 다뉴세문경이 얼굴을 비추는 거울보다는 제사장의 무구(巫具)라 짐작되는 이유다.
과학자 이종호박사는 '한국7대불가사의'에서 "거울안에 0.3mm 간격으로 가는 선 13,000개를 기하학적 규칙성을 고려해 화려하게 새겨 넣었다. 확대경과 정밀한 제도 기구를 갖춘 현대의 주조기술로도 만들기 어렵다"며 다뉴세문경을 '불가사의'로 손꼽기도 했다. 당시 다뉴세문경처럼 뛰어난 수준의 청동 주조물은 세계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20cm가 안되는 원내에 깊이 0.7mm 폭 0.22mm로 구성된 13,300개의 원과 직선이 새겨져 있는데, 선의 굵기는 머리카락 같다. 현대의 컴퓨터 기술로도 재현이 불가능한 이 런 청동거울을 기원전 4세기경에 어떻게 만들었는지 여전히 수수깨끼다.
사마천의 '사기'는 동이족의 수령인 치우집단이 "머리는 동(구리)이고 이마는 철(쇠)"인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고 전하는데, 이는 이미 금속문명기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사기에서 동이족이 화하족보다 빨리 금속문명을 사용했다고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중국보다 문명이 낮았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커다란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이 발견됐다. 숭실대박물관이 소장한 직경 212㎜짜리(국보 제141호)에 비해 60㎜ 가까이 더 크다.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29일 이 다뉴세문경을 공개한 김수영(64·천기도선 대종선사)씨는 “전문가 2인에게 자문한 결과, 아직까지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문화재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출토 장소와 입수 경로 등은 공개하지 않았다.
최근 호남문화재연구원도 전북 완주 갈동유적 5호 토광묘에서 146㎜ 다뉴세문경 2점을 출토했다. 존재가 드러난 다뉴세문경은 30점 남짓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다뉴세문경은 당대 지배계급의 부장품, 즉 매장문화재”라며 확인되지 않은 개인 소장 다뉴세문경이 더 있을 수 있다고 인정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측은 “다뉴세문경은 현대기술로도 복제가 어렵다고 알려졌지만 2003년 전후로 복제품이 나돈 적이 있다”며 판단을 유보했다.
<국보 다뉴세문경 제작비밀 풀렸다>구리와 주석 비율 66:34..'砂型' 거푸집 활용
갈동유적 다뉴세문경 등 청동유물 다수 출토
초기철기시대 토광묘만 13기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전북 완주 갈동유적에서 다뉴세문경을 비롯한 초기철기시대 청동기 유물이 다량으로 나왔다. 호남문화재연구원(원장 윤덕향)은 지난달 17일 이후 전주 국도 대체 우회도로부지(이서-용정간)에 포함된 완주군 이서면 반교리 갈동유적을 발굴조사한 결과 초기철기시대에 조성된 토광묘(土壙墓) 13기를 확인했으며 토기류와 철기류, 옥류(玉類) 외에 청동기 유물 다수를 수습했다고 8일 밝혔다. 청동유물로는 동경(銅鏡)의 일종인 다뉴세문경 2점을 비롯해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하는 세형동검(細形銅劍), 동모(銅모<金+牟>. 창의 일종), 동부(銅斧. 도끼), 동사(새기개의 일종) 등이 있다. 이 중 5호묘 출토 동경은 지름 14.6cm에 무게 447g였다. 형상을 비추는 앞면은 오목 렌즈 모양이며 테두리 단면은 반원형에 가깝다. 뒷면에는 뉴(고리의 일종) 2개가 나란히 부착돼 있다. 조사단은 이런 동경이 함평 초포리(세문경b)ㆍ경주 입실리ㆍ횡성 강림리 유적 출토품과 비교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일본 후쿠오카현 오구리시 와카야마 유적 출토품과는 하나의 틀에서 찍었다고 할 만큼 흡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7호묘 동경(지름 9.2cm, 무게 141g)은 전체적으로 5호묘 출토품과 비슷하나 세부적인 차이를 보인다. 이런 다뉴세문경은 함평 초포리(세문경c)ㆍ장수 남양리(4호)ㆍ함흥 이화동ㆍ금야 용산리(제2지점) 유적과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 가지구리하마(梶栗浜) 유적 등지에서 출토사례가 보고됐다. 이밖에 동모 1점(길이 26cm, 최대너비 5cm, 무게 308g)이 8호 토광묘 우측벽 중앙부에서 출토됐으며, 9호 토광묘에서 동사(잔존길이 12cm, 최대너비 2.1cm, 무게 25g)와 동부 편(잔존길이 2.5cm, 전존너비 2.7cm)이 함께 수습됐다. 앞서 2003년 같은 갈동유적에 대한 조사에서는 세형동검 거푸집과 청동화살촉 3점 등이 나온 적이 있다. 이번 다뉴세문경 등의 청동유물은 제작시기가 대체로 기원전 3-2세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사결과 토광묘는 장방형 또는 타원형으로 묘광을 굴착한 뒤 점토로 벽면을 보강하고 내부에는 목관 혹은 통나무관을 이용해 시신을 안치한 것으로 확인됐다. 묘광 기준 규모는 큰 것이 길이 302cm, 작은 것이 143cm인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길이 200~300cm에 속했다. 따라서 종래 조사까지 합친다면 갈동유적에서는 총 17기에 이르는 초기철기시대 토광묘가 드러나고 출토 유물 또한 홍도ㆍ무문토기 장경호ㆍ원형점토대토기ㆍ흑도장경호 등의 토기류와 청동기류, 철기류, 옥류 등이 비교적 풍부하게 나타났다.
개마란 기병이 타는 말에 갑옷을 입힌 것을 말하며 개마에 탄 중무장한 기병을 개마무사라고 한다. 고구려벽화에 개마무사가 그려져 있어 우리나라는 5세기에 이미 개마무사가 있었다는걸 인정받는다.
서양에서는 개마가 13세기에 나온다. 1221년 페르시아의 우르겐치에서 몽골족과 전투를 벌이는데 이때 개마기록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개마무사는 서양보다 846년 앞선다.
『700년 고구려 역사를 지켜 온 불패의 상징』
당대 최강의 철 제조술과 막강한 구사력을 지녔다는걸 보여주는 개마무사
한국의 역사가 항상 외적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태조왕과 동천왕은 중국을 수시로 선공하여 기선을 제압했고 차대왕은 중국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할 정도였다.
고구려의 마면갑
고구려가 이와 같이 중국을 공격하고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전쟁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은 없다. 비교적 단순한 전쟁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므로 전쟁 자체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벌인 수많은 전투에서 성공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당시에 고구려가 운용한 전쟁의 기본적인 요소부터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마총 총주착개마지상 (평양시 삼석구역 로산동) 그림 가운데를 보면 '총주착개마지상(塚主着鎧馬之像)'이란 한자가 보일 것이다. '무덤 주인이 개마(鎧馬)를 타고 있는 모습'이란 이란 뜻이다. 이 벽화를 통해 고구려에서도 말갑옷을 입은 말, 다시 말해 중장기병용 말을 개마(鎧馬)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목부분이 희미하여 확실하지 않지만 목갑옷(경갑,계항)은 장착하지 않은 듯하다. 가슴갑옷(흉갑,탕흉)은 사람에 가려서 몸통갑옷(복갑,마신갑)과 일체형인지 별도의 갑옷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엉덩이 윗덮개(마수면렴)과 엉덩이 갑옷(고갑, 탑후)는 몸통갑옷과 분리되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말갑옷 그림 중에 조립식 말 갑옷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엉덩이 윗 덮개 혹은 깃대꽂이(기생)에는 쌍영총 보다 더 요란한 장식물이 부착되어 있다. 장례용품인지 평상시 부착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구로는 안장과 등자가 선명하게 식별된다. 삼실총 (중국 집안현 통구 태왕향 우산촌) 4세기 말~ 5세기초로 추정 삼실총 벽화의 중장기병 그림은 희귀하게도 실제 전투시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벽화에는 두명의 중장기병이 등장하고 있는데 사람의 갑옷과 말 갑옷 모두 형태가 다르다. 일반적으로 오른쪽 중장기병이 고구려인으로, 왼쪽의 중장기병은 중국 혹은 신라나 백제의 중장기병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른쪽 중장기병의 말갑옷은 목 갑옷(경갑,계항)이 몸통 갑옷과 분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 가슴갑옷(흉갑, 탕흉)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오른쪽 중장기병 말갑옷의 뒷부분을 보면 몸통 갑옷과 분리된 갑옷을 식별할 수 있는데 말 엉덩이 덮개(마수면렴)를 표현한 것인지 엉덩이 갑옷(고갑, 탑후)을 그린 것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다. 여하간 기본적으로 조립식 말갑옷의 일종인 것 같다.
말과 사람 모두가 갑옷으로 중무장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기본 전력을 바탕으로 다른 국가가 구성할 수 없는 강력한 부대를 운용했기 때문이다. 바로 유명한 중장기병 개마무사이다. 사실상 고구려가 중국을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개마무사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장기병이란 말과 사람 모두 갑옷으로 중무장한 것을 말한다.
갑옷은 찰갑(札甲, 미늘갑옷)으로 가죽 편에 철판을 댄 미늘을 가죽끈으로 이어 붙였다. 투구, 목가리개,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덮은 갑옷을 입으면 노출되는 부위는 얼굴과 손뿐이다. 발에도 강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는다. 말에게도 얼굴에는 철판으로 만든 안면갑을 씌우고 말 갑옷은 거의 발목까지 내려온다.
개마무사의 주무기는 창이다. 이 창은 보병의 창보다 길고 무겁다. 기병용 창을 삭(?)이라 하는데 중국식 삭은 보통 4미터 정도인데 반하여 고구려군은 평균길이 5.4미터에 무게는 6?9킬로그램 정도 된다. 개마무사는 현대로 치면 탱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최강의 공격력과 장갑을 자랑하는 개마무사의 주 임무는 적진돌파와 대형 파괴다. 고구려의 개마무사가 5.4미터가 넘는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달려오는 탄력까지 모두 합하여 적에게 부딪히면 보병으로 구성된 적군의 대형은 무너지게 마련이다(물론 모든 창이 이처럼 길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
아! 고구려전시관의 사진
이와 같이 개마무사가 밀집대형 혹은 쐐기꼴(∧) 대형으로 긴 창을 앞으로 내밀고 돌격하여 적진을 허물면 대기하고 있던 보병 등이 신속하게 투입되어 전세를 장악하면 승패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전쟁은 항상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고구려가 개마무사 등 중장경기병을 활용하여 전투를 이겼다면 상대방은 곧바로 패전한 이유를 분석하여 이에 대적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마련이다.
효율적인 군편제 운용
개마무사의 약점은 말 갑옷의 무게가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몸무게(약60킬로그램)와 갑옷 무게를 합쳐서 80킬로그램, 기타 장비를 포함하면 적어도 130킬로그램 이상의 무게를 말이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른 말들에 비해 항상 두 명 이상의 장정이 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병력이 소규모일 때는 재빠른 전진도 가능하지만 대규모 부대가 격돌할 때의 중장기병은 밀집대형을 이루며 매우 둔하게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경우 보병이 오히려 기마병에게 효율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
전쟁의 기본이 보병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보병이란 한 사람에게 무기 하나씩 들려주는 정도로 기본적인 전투력을 갖추는 병과이다. 더구나 보병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일단 값이 싸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인적자원만 공급된다면 많은 숫자를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다.
보병의 약점은 보병 개개인의 경우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일정한 숫자를 확보하지 못하면 보병은 별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병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전제아래 대열을 유지하면서 움직인다. 보병이 대열을 지어 뭉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자신을 죽이려고 준비하는 적군이 몰려오거나 적에게 다가갈 때 누구나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 공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제대로 싸울 리 없으므로 지휘관은 이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경주한다. 병사들이 공포를 떨쳐버리고 자발적으로 전투에 임하도록 하는 것이 사기다. 그런데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건 생명체로서 본능이기 때문에 아무리 정신교육을 잘 시킨다 해도 쉽사리 떨쳐버릴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덕흥리 고분 행렬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 서기 408년, 5세기 초 덕흥리 고분 벽화의 말갑옷은 희미하긴 하지만 일체형 말갑옷 처럼 보인다. 말 엉덩이 윗덮개의 장식 혹은 깃대꽂이(기생)에 부착된 장식물은 쌍영총이나 개마총의 것보다 작고 간단한 편이다. 말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창을 들고 있는 것 처럼 보이나 확실하지는 않다. 병사들의 갑옷도 쉽게 식별되지 않는데, 색깔이 갈색인 점을 들어 가죽제 갑옷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대열 지어 장병들 심리적인 안정 유도
보병을 운용할 때 개인 활동을 금지하고 대열을 짓도록 하여 장병들이 심리적인 안정을 갖도록 유도한다.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같이 싸워줄 전우가 있다면 용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보병이 대형을 유지한다는 것도 제식훈련처럼 약간 떨어져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장병들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붙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밀집대형을 이루어 대열 전체가 하나의 기계와 같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무경총요(武經總要)는 증공량曾公亮, 정도丁度 등이 1040~1044년에 걸쳐 집필한 종합적인 병법서적이다. 특정 개인이 기획한 책은 아니며 송나라의 황제인 인종仁宗의 명령에 따라 집필한 것이므로 북송시대의 국가적 프로젝트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말갑옷의 상세한 그림과 세부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밀집대형이 전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고대 그리스군이 숫적으로 압도적인 페르시아와의 전투 결과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유명한 삼각밀집대형을 창안했다. 그리스(마케도니아)는 일개 중대를 160명으로 편성하여 한 줄에 20명씩 여덟 줄을 이루고 행진을 했다. 그들 모두 기다란 창과 방패를 갖고 밀집해서 행진을 했으며 적군을 만나면 삼각형으로 형태를 변형하여 수비 태세에 들어간다.
쌍영총 중장기병 (남포시 용강군 용강읍) 5세기 말(末)로 추정 쌍영총에 등장하는 말갑옷은 조립형 말갑옷에 가깝지만 무경총요의 말갑옷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목 갑옷(경갑,계항)과 가슴갑옷(흉갑, 탕흉)은 구분되지 않고 일체형으로 되어 있으나 목 갑옷과 몸통갑옷(복갑,마신갑)은 뚜렷하게 구분되는 별개의 갑옷으로 되어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엉덩이 윗덮개(마수면렴)와 엉덩이 갑옷(고갑,탑후)도 몸통갑옷과는 구별되는데, 그림이 희미해져서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일부러 구분되게 그린 것인지는 분명한 것 같지 않다. 엉덩이 윗덮개의 장식 혹은 깃대꽂이(기생 奇生)로 생각되는 그림이 기괴할 정도로 커다랗고 요란하게 그려져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쌍영총의 벽화는 현대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세련되고 사실적인 그림풍을 보여주므로 이 커다란 장식이 실제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천으로 된 깃발의 일종으로 생각된다. 마구로는 안장이 확인되나, 등자는 그림이 희미해져서 식별되지 않는다. 말에 타고 있는 사람의 투구는 이른바 '만곡종장판주(구부려진 가늘고 긴 판을 연결해서 만든 투구)'다. 투구의 볼가리개는 투구와 같은 재질로 된 금속제 처럼 보이지만 분명하지 않다. 투구의 복발 위에 장식용 술이 달려 있다. 투구 좌우 측면에 뿔 모양의 장식이 보이는데 단순히 얇은 판 형태의 장식인지 아니면 뿔모양의 장식품을 부착한 것인지는 잘 식별되지 않는다. 목에는 나팔 모양의 경갑이 뚜렷하게 식별된다. 몸통의 갑옷은 찰갑이다. 특이하게도 어깨에서부터 손목까지의 팔 전체가 찰갑편으로 쌓여있어 단순한 상박갑(上膊甲)이 아니라 통수개(筒袖鎧)처럼 팔의 소매 자체가 찰갑으로 만들어진 형태의 갑옷 같다. 허벅지에서부터 발목 부근 까지도 찰갑이 감싸고 있다. 복식사 전공자들은 유고형 갑옷(바지형태의 갑옷)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필자가 보기엔 상갑(치마갑옷)의 측면 모습인지 아니면 유고형 갑옷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울 것 같다. 무장은 창인데 모 혹은 삭의 일종으로 생각된다. 창에도 깃발이 부착되어 있다. 창 이외의 보조무장은 보이지 않는다.
이를 유명한 삼각형밀집방형진이라고 부른다. 전면에 있는 군인이 부상당하면 바로 그 자리를 뒤에 있던 장병이 채우도록 하여 대형 전체는 항상 삼각형으로 유지되었다. 환타생이라고 불린 이 삼각형밀집방형진은 고대 전투 사상 양 측의 병력이 직접 충돌하는 평지의 보병전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대형이다.
그러므로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침략했을 때 그리스인들의 이 같은 진형을 정공법으로는 격파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직접 전투를 피하고 포위한 후 화살을 쏘거나 갈증과 허기로 지쳐 쓰러지게 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로마군이 주변국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밀집대형으로 군 체제를 운용했기 때문이다. 로마가 운용하는 밀집대형의 위력을 잘 아는 국가는 로마군의 대형을 먼저 허물어뜨리거나 허물어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도록 유도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즉 아군이 적의 대형을 뚫고 들어가 적의 후면이나 측면을 먼저 포위하는 방식을 구사했다. 보병의 대형이 허물어진다면 승패는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대열을 만들 때의 또 다른 장점은 대열에 묶여 있는 병사들이 개인행동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열 중에 있는 병사가 도망가려면 주변 전우들의 행동과 반대로 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열에서 한 두 명이 이탈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곧바로 명령불복종이나 탈영자 등으로 낙인을 찍혀 현장에서 곧바로 처형되기 일쑤다.
지휘관들이 탈영자들이 생길 경우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본보기로 처단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보병의 중요성은 보병 개개인은 전투력과 기동력에서 기병보다 떨어지지만 산악지형에 취약한 기병과는 달리 어떤 지형에서든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보병은 기병과 달리 무장과 무기의 종류가 다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보병의 역할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될 수 있기 때문으로 일반적으로 경보병과 중장보병으로 분류한다. 경보병대의 주력은 도끼를 맨 도부수이다. 도끼는 내려치는 힘이 매우 강해 투구를 쪼개고 갑옷을 찢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갑옷은 창과 화살같이 찌르는 힘에는 강하지만 베거나 도끼와 같은 강한 충격을 동반한 공격에는 취약하다.
중장보병은 기병과 같이 갑옷을 입고 창과 길쭉한 방패를 들었다. 이들이 최정예군으로 경보병처럼 밀집대형을 이루며 보병대열의 최전방에 배치되는 것이 기본이다. 특히 이들이 사용하는 갈고리 창은 기병을 말에서 떨어뜨리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임용한 박사는 적었다. 보병이 중장기병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기병은 말이라는 동물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말은 장애물을 싫어하고 겁이 많은 동물이라는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말은 아무리 기수가 명령을 해도 자신을 겨누고 있는 창날이나 장애물 앞으로 무모하게 돌격하지 않는다. 또한 말은 일반적으로 자신에 의해 인명이 살상될 경우 전진하지 않으려고 한다.
영화 「간디」에서 인도의 무저항시민들이 영국의 기병이 돌격하자 말들은 절대로 사람을 밟고 넘어가지 않는다며 대형을 흐트러뜨리지 말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 것도 말의 특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력한 개마무사들이 돌진돌진하면서 적진을 돌파하려해도 수비군이 밀집중장병대로 구성되어 개마무사의 공격에 대항한다면 기병의 특성상 오히려 개마무사가 역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고대 전투에서 보병이 기병을 격파하는 경우가 자주 생기는 이유이다. 더구나 지형에 따라서는 기병의 활약이 크게 제한되므로 오히려 보병이 전투를 주도하기도 한다. 고구려는 개마무사의 이런 약점을 경기병이라는 또 다른 기병을 투입하여 보완했다.
경기병의 활약 보병과 중장기병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경기병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은 고대 전투에서 현대의 고사포를 발사하는 역할의 궁수가 큰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궁수는 보병과 기병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보병과 기병은 양 군이 접근하기 전까지는 적에게 아무런 타격도 가하지 못한다. 반면에 궁수는 적에게 접근하지 않고도 화살을 발사하여 공격할 수 있다. 즉 궁수는 보병과 기병만으로 구성된 적의 부대를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궁수는 공격 때 아군을 엄호하고 수비 때는 돌격해 오는 적군을 공격하는 임무를 갖는다. 고구려 군이 원거리에 있을 때는 진형의 전열에 서거나 또는 중장보병의 엄호를 받으면서 사격하고 고구려 군이 접근하면 이선으로 후퇴하면서 사격한다. 영화에서 보병이나 기병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자주 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사실상 개마무사의 약점은 개마의 무게 때문에 밀집대형을 이루면서 천천히 진격해야 한다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중국은 이러한 개마무사의 약점을 파악하고 밀집한 궁수들로 하여금 무차별로 화살을 발사토록 했다. 간단하게 말하여 개마무사들은 진군속도가 느리므로 반드시 집중 공격을 당할 것을 예상하고 궁수들이 발사하는 집중 화망을 뚫고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개마무사가 태어난 것도 기병의 약점 때문이다. 기병은 사람보다 훨씬 체구가 큰 말을 동반해야 하므로 화살의 집중 화망을 뚫을 때 말이 사람보다 화살을 더 많이 받게 된다. 군마의 부상은 기병에 치명상을 주므로 고구려가 개마로 말의 외부를 감싸도록 하여 부상을 방지토록 한 것이다. 더구나 아무리 많은 궁수를 동원하더라도 활의 공격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개마무사의 장점이다.
개마의 효용성은 궁수가 쏜 화살이 갑옷을 뚫고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유효 살상거리는 약 50미터이고 절대 살상거리는 30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일단 화살의 유효 살상 거리 안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의 화망을 뚫기만 하면 궁수들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중국의 궁수들이 개마무사들에게 집중하여 화살로 공격하더라도 한두 번밖에 화살을 발사할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다. 더구나 기병은 5미터나 되는 창을 갖고 있으므로 궁수나 보병과의 간격이 20?30미터 거리로 좁혀지면 기병의 포위망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개마무사가 화살을 피하는 순간 이미 궁수에게 다가와 창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물론 중국군도 이런 상황을 예측하여 또 다른 방비책을 준비했다.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장면이지만 화살망을 뚫고 중장기병이 공격해 오면 20?30미터 정도의 저지선에 각종 장애물을 설치하여 함정에 빠지도록 한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영국의 중장갑기병이 돌진하자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순간에 기다란 목창을 들어 중장갑기병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도 중장갑기병의 약점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대비했기 때문이다.
진격 저지되면 곧바로 보병 · 기병이 나서다 중장기병의 경우 장갑력은 강하지만 보병에 비해 대형이 쉽게 허물어진다는 약점이 있으므로 진격이 저지되면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보병이나 준비된 기병들이 역으로 공격에 나선다. 중장기병이 육박전에 휘말리게 되면 오히려 패배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개마무사에 대한 중국의 대비책을 무산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경기병 제도를 도입했다. 경기병은 대체로 중무장하지 않고 말의 기동력과 활솜씨로 중장기병의 돌격을 엄호하고 적진을 초토화하는 임무를 갖는다. 물론 이들이 연합하더라도 보병 밀집 대형의 중앙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 또는 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경기병대는 주로 맥궁으로 무장한 후 적군의 궁수와 보병을 상대로 활을 발사하여 적진을 혼란에 빠지도록 하는 임무를 갖는다. 맥궁의 사정거리가 중국활보다 긴 것은 물론 파르티안 기사법으로 무장했으므로 어느 장소에서건 재빠르게 화살을 발사하고 빠지는데 적격이다.
전투력이 강한 군대라 할지라도 경기병대가 공격해오면 이들과 대항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다 체력을 소모해야 하므로 대형이 흐트러지기 십상이다. 만약 적진이 완강하여 대형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경기병대는 무리하게 충돌하지 않는다. 이럴 때 고의적으로 후퇴하는 위장술을 겸용하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 집요하게 계속적으로 공격하여 한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가랑비에 옷이 젖고 집요한 매에 당해 낼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수비군의 전투력이 떨어지면서 약점을 보이면 준비된 개마무사가 출동하여 승부를 결정짓는다.
시대는 약간 후대이지만 이들 전술은 칭기스칸이 세계를 정복할 때 사용한 방법과 유사할 것으로 추정한다. 김상운의 글에서 주로 인용한다.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칭기스칸은 1223년, 제베와 수베데이로 하여금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러시아를 공략하도록 했다. 몽골군은 2만 명, 러시아군은 8만 명, 이 당시 러시아군들은 갑옷과 투구로 완벽하게 무장한 기사들이다(중세시대 영화에 자주 나오는 장갑병을 뜻함).
몽골군은 러시아군과 교전하다가 힘이 부치듯 이내 달아나기 시작했고 잡힐 듯하면 달아나고 잡힐 듯하면 달아나고, 무려 일주일간 달아나기만 했다. 러시아군의 추격 작전은 계속되고 행렬은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고 장병과 말이 지칠대로 지쳤다. 갑자기 몽골군이 일제히 멈추더니 모두 새로운 말로 갈아탔다. 공격의 선봉에는 경기마대가 전투대형을 갖춘 일급 궁수들이었다. 이들은 일제히 활을 쏘며 길게 늘어진 러시아군 대열을 휘젓고 돌아다녔고 러시아 진영은 눈깜짝할 사이에 흐트러졌다. 그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경기병대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중무장한 중기마대가 나타났다.
중기마대는 가볍게 무장한 경기병과는 달리 쇠미늘 갑옷에 흉갑을 두르고 전투용 도끼와 활 2개를 갖고 다녔다. 3.6미터에 달하는 긴 창을 마치 장난감을 갖고 놀듯 자유자재로 내질렀다. 러시아군 선봉대가 무너지자 잠시 사라졌던 경기마대가 다시 나타나 러시아군 본진에 비 오듯 화살을 쏘았다. 러시아군이 우왕좌왕 아수라장으로 변하자 경기마대는 다시 중기마대에 전투를 넘기고 러시아군 후방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퇴로마저 차단당한 러시아군은 추풍낙엽으로 몽고군의 창칼에 맥없이 쓰러져 갔다. 몽골군과 고구려군의 전투가 다소 다르기는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북방기마민족의 전투방법을 잘 예시해주고 있다.
군의 체계따라 중장기병 · 경기병대 숫자 조정 위에서 설명된 것과 같이 중장기병대와 경기병대는 상호 보완하면서 함께 출동해야만 전투 효과가 배가되므로 군의 체계에 따라 중장기병과 경기병대 숫자를 조정했다. 고구려보다 후대이기는 하지만 금나라는 아예 기병대 자체를 20명의 중장기병과 30명의 활로 무장한 경기병으로 섞어 편제했다.
고구려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이와 유사한 형태를 운용했을 것으로 임용한 박사는 추정했다. 중장기병대는 다른 병종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선발된다. 말과 갑옷이 매우 비싼 장비였고 기마술은 상당히 전문적이고 오랜 훈련을 요구하기 때문에 지배층이 아니면 중장기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군마는 소처럼 여물을 먹이지 않고 반드시 생초나 곡물을 먹여야 한다. 더구나 기마술을 익히려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러므로 중장기병은 전쟁에 나갈 때에도 종자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개마무사의 장점은 철이지만 철의 약점은 녹이 잘 쓰므로 갑옷을 매일 닦아주고 기름 치고 조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당연히 중장기병대는 보병에 비해 숫자가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3 대 1 정도이며 또한 중장기병을 전체 기병의 40퍼센트(금나라를 계상) 정도로 설정한다면 전체 병력의 10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고구려는 기병과 보병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했다. 고구려가 연전연승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무모하게 개마무사 등 최정예 부대들을 운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고구려가 당대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력부대를 개마무사로 무장할 만큼 최첨단 군수품으로 무장했고 적절한 작전을 구사하는 유능한 지휘관이 있었으며 당연한 일이지만 장병들의 전투력 즉 사기가 높았다는 것을 뜻한다.
개마무사는 고구려만 운용했던 것은 아니다. 부산 복천동 10호분에서 벽화에 표현된 말 얼굴 가리개인 마주가 발견됐다. 말의 몸 전체를 보호하는 찰갑형 마갑도 경남 함안 도항리 마갑총에서 부위에 따라 크기가 다른 찰갑으로 겹겹이 쌓인 채 발견되었다. 가야도 고구려와 유사한 철기군을 운영했음을 보여준다고 이 태호 교수는 적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无垢淨光大陀羅尼經)
1967년 9월 16일 국보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두루마리 1축(軸)으로 너비 약 8㎝, 전체길이 약 620㎝(다라니경은 너비 8센티미터, 길이 52센티미터 정도의 종이 열두 장을 이어붙여 두루마리로 둥글게 말았는데)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목판(木板)으로 인쇄된 이 경문은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의 해체·복원공사가 진행되던 1966년 10월 13일 탑신부(塔身部) 제2층에 안치된 사리함(舍利函) 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이때 석탑 내부에서 함께 발견된 총 28점의 일괄유물이 1967년 9월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경문은 한 폭(幅)에 55∼63행, 한 행에 7∼9자씩으로 되어 있으며, 상하(上下)는 단선(單線)이고, 필체는 힘찬 해서(楷書)로서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 특히 북위(北魏)의 서법(書法)을 연상하게 한다. 이 《다라니경》의 출간연대 상·하한(上下限)은 700년대 초에서 751년 사이로 추정하는데, 그 까닭은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집권한 15년 동안에만 주로 통용되고 그후에는 자취를 감춘 신제자(新制字) 4자(注[證]·澍[地]·全[授]·葺[初])를 이 경문 속에서 발견할 수 있고, 또 최소한 석가탑의 건립연대인 751년을 그 하한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인경(印經)으로 알려진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770년 인쇄)보다 20년이 앞서는 셈이고, 지질(紙質)이나 인경의 형태를 보더라도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신라에서 조판(雕板)되었음이 확실하므로, 한국 고인쇄문화(古印刷文化)의 높은 수준을 증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다라니경에 대해 중국 학자들은 당나라에서 인쇄하여 신라에 보낸 불경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의 근거로 다라니경 마지막 부분에 당의 측천무후때 새로 만든 몇 글자가 인쇄 글자로 사용된 사실을 들고 있다. 영국의 학자 니덤도 중국이 세계 최초로 인쇄술과 나침반과 화약을 발명했다고 주장하면서 다라니경에 대해 중국측 학자의 견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 측천무후때 만들어진 글자들은 다라니경의 인쇄 시기보다 약 50년 정도 앞선다. 따라서 신라의 승려나 학자들이 새 글자를 익혀서 다라니경 인쇄에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신라는 종이 제작 기술이 뛰어났다. '백추지'라 불렸는데, 섬유질이 풍부하여 질기고 먹발이 잘 받으며 색깔이 하얀 만큼 글씨도 선명하였다. 당나라 사람들은 이 종이를 선호하여 비싼 값에 거래했다. 일본의 종이 전문가들이 다라니경 인쇄에 쓰인 종이를 연구한 결과 신라의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1997년 6월, 학계에서는 다라니경의 종이들이 신라의 것이라는 판정을 내렸고, 그 시기도 8세기초의 것으로 결론지었다. 따라서 다라니경은 우리나라가 제작하고 보유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것이다.
무구정광다라니경 통일신라시대 작품 (서울=연합뉴스 2007년 03월 09일(금) 오후 07:28 ) 김태식 기자 = 세계 최고 목판인쇄물로 알려진 불국사 석가탑 출토 무구정광대다라니경(无垢淨光大陀羅尼經)이 불국사 창건 무렵에 신라인들이 만들어 넣은 불경인 것으로 확인됐다.
무구다라니’ 세계최고 목판인쇄물 아닐수도
최무선(崔茂宣)은 고려 말에 화약 무기를 개발해 왜구를 물리치고 우리 나라 전쟁사에 있어 군사무기의 역사를 바꾼 과학자요, 무장이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화약 무기의 아버지'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그가 출전한 것은 오늘의 전북 군산 앞바다로 추정되는 금강 하구 진포(鎭浦)에서 왜구를 섬멸한 싸움 단 한번뿐이지만, 고려군은 그가 발명한 화약과 새로 개발한 화포 등 신무기로 거의 해마다 쳐들어와 노략질을 벌이는 왜구(倭寇)의 무리를 격퇴시킬 수 있었다.
최무선은 고려 말에 화약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가 이후 계속해서 화포를 만들고 이를 고려 수군의 전함에 정착하여 왜구를 상대로 진포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대마도 정벌에도 나섰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진포해전은 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서양 역사에서 레판토 해전 이후 함포가 장착된 함대로 해상권을 장악한 국가가 세계를 정복하게 되며, 역사의 주도권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간다. 서양이 동양에 대해 우위에 서게 되는 지리상의 발견과 식민지 침탈의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함포 외교이다. 그런데 레판토 해전보다 무려 190년이나 앞서, 최무선은 화포를 선박에 장착하여 적선을 격파하는 함포 해전을 세계 최초로 선보인다. 200년 후 최무선의 화약 무기와 함포 전술을 그대로 계승한 조선의 수군이 임진왜란에서 왜군을 맞아 대승을 거둔 것을 보면 당대에 최무선이 창안한 함포 전술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배가 세계 조선사(造船史)에 있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선형과 구조가 특이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재래식 배는 그 선종과 연대 여하를 막론하고 동일한 구조 방식 즉 두껍고 평탄한 저판을 밑에 깔고 외판을 붙이고 가룡목을 설치한 방식으로 건조되어 있다.
다른 나라 배들은 용골이라는 배의 등뼈를 기준으로 판자를 붙여 배의 아래가 역삼각형으로 좁혀지지만 우리나라 배는 용골이 없고 밑이 편평한 사각통 모양이다. 이와 같은 선형과 구조를 평저선구조(平底船構造)라고 하는데 김재근 박사는 이런 구조를 가진 배를 통털어 ‘한선(韓船)’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와는 다른 독특한 조선 기술이 태어난 것은 삼 면이 바다로 둘려 싸여 있기 때문이다. 평저선은 해안선이 길고 갯벌이 많은 서남해안에 출입하는데 적합한 구조이다. 썰물 때 배를 갯벌 위에 올려놓고 작업을 할 수 있으며 항구가 아니더라도 어디에나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 해상활동이 활발히 벌어지자 조선과 항해 기술이 크게 발달했다. 고려시대의 배들은 전투용 군함과 무역 및 대외 활동을 위한 무역선과 조세나 공물을 운반하는 조운선으로 나뉘었다. 고려 군선의 우수성은 1268년 원나라와 함께 일본을 원정할 때 증명된다. 『원사』에 원나라의 왕운이 해전에서의 실패에 대해 “태풍을 만나 파도 때문에 서로 부딪쳐 크고 작은 많은 우리 함선들은 파괴되었으나 오직 고려의 군함만은 견고하여 정상적으로 전투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라는 기록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KBS역사스페셜팀〉은 닻돌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적색 응회암으로 이 돌의 성분은 전라남도 장흥군 천관산의 돌과 일치했다고 발표했다. 이 배는 천관산의 나무와 돌로 만든 것이다.
옛날 수군이 해전을 하는 데는 세 가지 전술이 있었다.
학자들은 커다란 통나무를 대고 그 앞에 철로 쇠를 덧씌워 뿔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와 같은 전술은 동양에서는 고려가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이후 거북선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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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三流人生 원문보기 글쓴이: 醉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