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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그락지구마을프로젝트와 네팔 탐사대의 시작
달그락에서 인턴으로서 활동을 시작하고 첫 청소년위원회 회의에 참여했다. 달그락에는 청소년뿐만아니라 청소년들의 활동을 지지하고 뜻을 함께하는 지역 성인들이 있다. 함께하는 성인분들 중 위원회를 구성하여 한달에 한번씩 회의를 통해 달그락 활동을 가까이 하신다. 청소년위원회는 지역의 다양한 전문성을 가진 성인들이 모여 청소년활동에 대해 논의를 5년째 이어가고 있다.
청소년위원회 회의에 처음 참여하게 되었을 때, 가장 큰 논의 거리는 다문화 청소년에 대한 지원이었다. 청소년위원회의 이강휴 위원장님을 중심으로 군산의 다문화 가정 수와 그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다문화 청소년들을 직접 만나거나 달그락에서 함께 활동할 수 있는 방안 등 꽤 구체적인 지원방법을 이야기하다 다문화 가정의 청소년들이 겪는 사회적인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 논의로 확장되었다. 그들을 대상하여 지원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보다 모든 청소년, 성인들의 차별적 인식을 바꿔 차별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논의까지 이르렀다.
본 프로젝트의 활동가로서 프로젝트의 도달점은 잘사는 나라, 못사는 나라로 구분하는 것에서 벗어나, 함께 지구라는 큰 마을에 사는 사람으로 존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존중해야한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하나 알 수 없는 우월감에 빠져 사람을 높고 낮음으로 판단하는 문화는 공기처럼 만연하다. 청소년위원회 위원님들은 달그락 활동을 통해 그 공기를 바꾸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바람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어디서든 같이 살아가기 위해 청소년위원회 위원님들은 다양한 국가의 청소년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느끼며 이를 지역사회에 알려 공감대를 형성하는 프로젝트의 뼈대를 세웠다.
#각기 다른 목표와 태도를 보이다.
시민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지구마을을 만들자는 포부로 달그락 네팔 탐사대가 결성되었다. 탐사대는 달그락 지구마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달그락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공동체 중심의 마을을 꿈꾸며 네팔로 떠나기로 했다. 네팔 탐사대는 네팔에서 자신의 삶을 연구하고 이를 글로 쓰는 청소년연구원들과 만남, 바글롱이라는 도시에 위치한 홀리차일드스쿨에 달그락이 지향하는 공동체와 청소년들의 활동을 진행하기 위해 살펴보기로 했다. 그들의 삶은 한 번의 시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에 동의하며 흔쾌히 네팔행에 올라 탐사대를 꾸린 위원님들, 자원활동가님들, 달그락 지기님까지 다양한 분들이 모였다.
탐사대의 포부는 네팔 달그락을 꿈꾸는 것이었지만 각 대원분들은 모두 제각기의 목표가 있어 보였다. 네팔로 떠나 청소년들을 만나고 와보자는 소장님의 계획에 “좋죠.”라고 말씀하시며 네팔 탐사대 활동 초기 시작점이 되어주신 김효주 위원님은 네팔 활동에 대해 여유를 보이셨다. 1년 전 네팔에 먼저 다녀오신 경험이 있는 소장님은 네팔 시설의 열악함에서 느낄 수 있는 약간의 불편한 점을 안내해주셨다. 그때마다 김효주 위원님은 표정에 큰 변화 없이 미소를 지으실 뿐이었다. 네팔에 가져갈 배낭도 구매하셨다며 네팔 탐사대 활동에 대한 기대감을 보이기도 하셨다. 네팔탐사대 첫 모임에 대장으로 취임하신 이강휴 대장님은 청소년위원회 내 작은 논의가 네팔까지 가게 되어 놀랍다고 하셨다. “제 여름휴가를 네팔 탐사대 활동에 쓰는 것이니 만큼 저에게 힘을 불러오는 활동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라며 네팔행에 함께 하기로 결심한 바람을 말씀해주시기도 했다.
이강휴 대장님의 지인이자 달그락지기이신 이주형 대원님도 네팔에 함께 가시기로 했다. 평소 여행을 좋아하시고 사진 촬영도 좋아하셔서 네팔로 떠난 탐사대 모습을 사진으로 잘 담아주시기로 했다. 달그락지기지만 달그락 활동을 직접 참여해보신 적은 처음이셨다. 정건희 소장님께서 네팔 탐사대 활동과 의미를 적은 설명자료와 함께 안내하실 때 설명에 집중하며 펜을 들어 소장님이 말한 부연설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글자를 적어 가며 탐사대의 의미를 생각하시는 듯 했다.
#다른 공기
네팔행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으로 들어갔다. 비자를 받기 위해 준비한 달러를 대원님들에게 나눠주었다. 네팔에 도착했다는 긴장감인지, 날씨가 더워서인지 땀이 얼굴을 타고 따라 내렸다. 나만 긴장을 했나 할 정도로 다들 밝으시다. 돌아와서 생각한 것이지만 내가 유독 긴장해서 도와주시려고 다들 표정을 좋게 하신 것 같기도 하다. 긴 줄 끝에 이주형 대원님의 영어 실력발휘로 빠르게 비자를 받았다. 입국심사대로 통과하고 짐을 챙겨 윤종수 목사님과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볼펜과 스케치북 등 네팔 청소년들을 위해 선물을 챙겨왔다. 4박스 정도 되었는데, 예상치도 못한 문제가 생겼다. 선물의 개수가 많다는 이유로 네팔 공항 검색대에 걸리고 말았다. 선물이 아닌 판매목적으로 그 물건들을 판단했다. 우리는 기부 목적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난 이대로 선물 한 박스를 빼앗기는 줄 알았지만 해결방법은 검색대 직원에게 돈을 주면 가져갈 수 있다고 했다. 뭔가 탐탁지않았지만 돈을 지불하고 찝찝한 기분으로 윤종수 목사님을 만났다. 숙소로 가는 길에 방금 겪었던 황당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갑작스러운 시련을 함께 극복했다는 뿌듯함이 묻어나오는 대화를 나누었다.
숙소에 도착해 같은 방을 쓰는 김효주, 오지영 대원님과 내일 만날 청소년들에게 선물할 간식과 학용품들을 나누어 담았다. 에어컨이 없는 숙소에선 찬물목욕이 딱이다. 몸을 감싸는 찬 기운과 함께 침대에 기대 내일 일정을 정리했다. 정리하며 눈을 감고 내일을 상상해봤다. 감이 오지 않은 네팔에서 현지 청소년들을 만날 상상을 하니 한국에선 들지 않았던 설렘이 차올랐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걸어서 청소년들에게 갔다. 첫날은 꼬필라홈, 미션교회, 파더홈의 청소년연구원 활동을 하는 이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꼬필라홈을 가기 위해서 걷다가 6차선 정도의 길을 건너야했다. 카트만두는 유튜브에서 보던 인도의 길거리보다는 덜 복잡했지만 신호등은 없었다. 차를 위한 신호등이 없으니 사람을 위한 신호등은 있을 리가 만무했다. 멀리서 달리는 차를 믿고 부랴부랴 건넜다. 혼돈 속에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건너니 입 밖으로 탄식과 함께 “아 여기 진짜구나” 라고 말이 나왔다. 해외교류활동은 인생의 처음이었다. 대학교 시절 흔한 해외봉사도 가지 않았다. 5일 정도 해외로 봉사가는 것이 개도국 사람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이해가 잘 안됐고, 스펙 한줄 넣으려고 해외봉사 간다는 내 속의 부정적인 시선이 발목을 잡았다. “해외봉사를 가려면 적어도 한 달은 가야지!” 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이 때문인지 준비 내내 해외교류활동에 대해서 감을 잡기 어려웠고 짧은 시간에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이었다. 안전장치 따위 존재하지 않은 신호등 없는 도로를 건너다 이 것이 내가 찾았던 진짜 해외교류인가 생각했다. 아직 청소년들을 만나기도 전에 말이다.
꼬필라홈에 들어갔을 때, 한 청소년이 두 손을 모아 “자르마시” 하며 인사를 건넸다. 수줍은 미소로 함께 우리가 만난 첫 번째 청소년 연구원이었다. 처음 만난 네팔 청소년이어선지 미소를 주고 받은 것이 기억에 남는다. 영어로 몇 마디 건냈지만 내 정직한 발음탓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미소로 ‘반겨줘서 고맙다’라고 마음을 전했다. 작은 가정집에서 재봉틀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꼬필라홈에서 조금 더 가면 미션교회가 있었다. 작은 공간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사람들이 빈 공간 없이 꽉꽉 자리가 채워져 갔다. 피아노를 치는 청소년, 기타를 치는 청소년들이 눈에 띄었다. 좁은 공간에서 서로 공기를 나눠 마시며 예배를 드렸다. 난 무교다. 좁은 곳에 옹기종기 모여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이 믿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 것이 신기했다. ‘무엇이 그들을 이 곳에 앉게 만들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들이 기도를 통해 상상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지 궁금했다. 물어보진 못했지만 작은 공간에서 약 2시간이 넘는 예배시간 동안 이 궁금증은 내 머릿 속을 휘젓고 다녔다.
점심을 먹고 파더홈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꽤 괜찮은 승합차였지만 승합차의 뒷자리 사정을 그렇지 못했다. 포장도로를 한 5분정도 달렸을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포장도로였다. 내 엉덩이로 도로를 걷는 듯 도로의 사정을 다 알 수 있었다. 멀미가 심해 얼굴은 점점 하얘지고 큰일이 나기 일보직전에 도착했다. 파더홈 주변 마을의 풍경은 작은 시골마을에 온 듯 했다. 높은 산들도 가까이 있고 우리를 반겨주는 파더홈 청소년들도 있었다. 시골에 친구들 만나러 온 듯 반겨주었다. 파더홈엔 다양한 연령대의 아동, 청소년들이 살고 있다. 아동들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몇 가지 노래와 안무를 준비했다. 내 속을 지배했던 멀미는 그들의 흥겨운 몸짓을 따라 내려갔다. 김효주 대원님은 한국에서 직접 태평소를 가져오셨다. 태평소를 가까이서 처음 본 터라 신기했다. 한국인인 나도 신기한데 그 소리가 크고 웅장해 네팔인들을 더 놀라게 했다. 그들은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네팔의 푸르른 마을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미소를 지어주기도 했다. 오지영 대원님은 한 아동의 헝크러진 머리를 빗겨주며 예쁜 양갈래 머리로 묶어주셨고, 이주형 대원님은 네팔 아동들의 미소 버금가는 표정으로 연신 사진을 찍으셨다. 모두 미소를 지었다. 이 미소는 머리를 거치지 않고 마음으로 내보내는 진심이었다.
파더홈에선 청소년연구원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과 공동체에 대해 연구했다. 연구물은 에세이다. 에세이는 주로 영어로 페이스북에 업로드 된다고 했다. 청소년연구원들의 활동장소라는 파더홈 2층 방에서 미팅시간을 가졌다. 법인에서 오신 후원자분들과 네팔탐사대 대원들이 왼쪽에, 청소년들은 오른쪽에 붙어 앉았다. 그 사이 생겨난 작은 공간은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며 대화를 나누게 도와주었다. 청소년들이 자기소개와 함께 꿈과 청소년연구원을 통해 알게 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들이 꿈을 이야기할 때마다 여러 감탄이 이어졌다. 어떤 청소년은 휴머니스트가 되는 것, 다른 청소년은 네팔의 마더 데레사가 되겠다고 이야기했다. 흥미로웠다. 그들의 꿈은 구체적인 직업이 아니라 자신들의 인생에서 나아갈 방향이었다. 그들은 당장 주어진 가난과 어려움만 걱정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길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두 청소년은 내년부터 청소년연구원 활동을 파더홈 청소년들 중 몇몇 그룹을 지어 그 그룹의 리더가 되어 활동을 이어간다는 것이 기억에 남았다. 연구원 활동을 포기하고 나갈 수도 있었지만 긴 과정을 함께 하며 나뿐만이 아닌 연구 활동을 더 많은 청소년들과 해보고 싶다는 이야기에 청소년연구원들을 보면서 달그락 활동이 떠올랐다. 활동을 하다보면 처음 프로그램 틀은 실무를 담당하는 활동가가 세팅한다. 달그락 같은 경우 프로그램의 내용은 청소년들과 논의하며 채워지는데 이 과정 속에서 활동가가 가장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은 청소년들이 스스로 프로그램의 보충점을 찾아서 대책을 마련하는 모습이다. 청소년들은 “내년에는 사회에 대한 우리 생각을 전달하는 것에 더 집중해보자.” “친구들을 프로그램에 더 모아와야겠어” 하며 자연스럽게 내년을 꿈꾸곤 한다. 그때 가장 큰 희열을 느낀다. 프로그램과 활동의 주인이 누가 되어야하는지 다시 깨달을 수 있는 경험이었다. 누군가 앞에 나서서 이끄는 것이 아닌 함께 만들고 스스로 중요성을 깨닫는 과정을 달그락을 통해서 배우고 있다.네팔에서도 연구원 활동이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닌 직접 활동하는 청소년들에게도 그들의 능력을 발휘하고 나아가 한 공동체를 꾸릴 수 있는 활동이 된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청소년들은 네팔어로 꽤 길게 이야기를 했는데, 해석을 도와주시는 윤종수 목사님의 통역은 꽤 짧아 언어의 장벽을 느꼈다. ‘바로 이야기가 되었더라면 더 많은 교감을 할 수 있을 것인데...’ 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언어 말고 청소년들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눈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함께 있던 방은 전구가 없는 방이었지만 꿈과 네팔청소년들의 눈이 빛났기에 전구가 필요없었다.
#우리는 다르지 않다.
바글롱 홀리차일드스쿨에 가기 위해 경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를 타고 포카라에 도착해 승합차를 갈아탔다. 네팔은 대부분 산이어서 산 중턱에 마을이 있었다. 산을 몇 개를 넘고 나서 바글롱 홀리차일드스쿨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홀리차일드스쿨을 주도적으로 세운 사히 교장선생님은 한국어를 잘 사용하셨다. 인도의 교육을 접할 수 있었던 기회, 그로인해 바글롱에도 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한국으로 와 돈을 벌어 학교를 짓기 위해 노력한 과정과 들꽃법인과의 인연도 이야기해주셨다. 네팔탐사대가 이곳까지 온 목적 중 하나는 네팔 달그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달그락 청소년들이 자치기구 형태로 활동을 하는 것처럼 이곳에도 소그룹을 지어 교과수업 외에 활동이 있는지 궁금증이 들어 동아리활동 같이 수업이 아닌 자유로운 활동시간이 마련되어 있는지 질문했다. ‘만약 존재한다면 그 활동을 연장하여 지역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활동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체육이나 미술시간도 있고 금요일마다 “Friday activity” 가 진행된다고 말씀해주셨다. 이 시간에는 춤을 추거나 미술을 그리거나 하는 등 한국의 동아리 활동과 유사해보였다.
홀리차일드스쿨의 소개가 끝나고 학교를 둘러보기 위해 교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다양한 연령대의 청소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며 인사를 해주기도 했다. 우리가 찾아간 날은 금요일이 아니어서 Friday activity 의 모습을 확인할 순 없었다. 그 대신 청소년들에게 간단하게나마 활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어졌다. 인사를 건넨 뒤, 카트만두에서 여기까지 오는 험난한 여정을 말했더니 힘들었겠다고 공감해주었다. “Do you know K-POP?” 이라고 묻기도 하고 짧은 영어 단어로 몇 가지 소통을 나누었다. 본론으로 들어가 Friday activity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활동을 할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물었다. 한 청소년은 “Tired” 라고 답해주었다. 굉장히 솔직한 표현이었다. 난 답을 듣고 크게 놀라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었던 편견과 반대되는 답변이라 아주 조금 놀랬다. 네팔과 같은 개발도상국에서 동아리 활동과 같은 것을 청소년들이 재미있어하고 새로워할 줄 알았다. 청소년의 답을 듣고 내 중학교, 고등학교 때가 생각났다. 수업을 안하고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은 딱히 그렇다할 취미도, 관심사도 없었던 나에겐 곤욕이었다. 교실을 바꾸는 것도 귀찮았고 동아리 활동이 없는 날을 좋아했다. ‘이 네팔 청소년도 나와 같은 마음 아닐까..’ 원하는 것을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적고, 설령 고른다고 해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면 동아리 활동도 피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금요일 활동 중 괜찮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Dancing”이라고 말해주었다. 내 고등학교도 댄스동아리가 최고 잘나갔었다. 잠깐의 대화였지만 이곳에서 달그락처럼 지역사회 내에서 활동할 거리를 만든다면 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만들어가는 과정에 시간은 걸리겠지만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활동이 아니라 직접 기획하고 참여하는 활동을 만든다면 그리고 작은 변화부터 시작해본다면 네팔 달그락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듯 하다.
이렇게 내가 청소년들과 Friday activity를 알아보기 위해 정신이 팔린 사이 대원님들은 홀리차일드스쿨 외관을 살펴보았다. 학교의 향후 조감도를 보니 한참 더 지어져야 할 학교였다. 지붕조차 자리하지 못했고 창문도 없었다. 사히 교장선생님의 댁에서 밥을 먹으면서 대화는 이어졌다. 현재 학교의 교사들 월급이 적어 생계를 이어나가기도 힘든 상황이며 교육 개발에 완전히 집중할 수 없는 상태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학교엔 청소년들도 중요한 존재지만 그들을 이끌어줄 교사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교육 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대책이 필요해 보였다. 이강휴 대장님은 “한국 청년들을 활동가로 네팔로 파견하는 것도 중요하나 네팔에 있는 교사들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교육이나 지역사회 내 활동들을 배워갈 수 있는 기회도 마련했으면 좋겠다.” 라며 본래 계획보다 심화된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외에도 홀리차일드스쿨 발전과 바글롱이라는 도시의 성장을 위해서 어떤 것이 필요한지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 지역의 특징을 파악해 네팔 달그락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에 도움을 받고 싶지만 바글롱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 학교 외 마을의 모습을 알아가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좋은 지구시민들
바글롱에서 다시 포카라로 돌아와 대원들은 네팔 탐사대 활동에 관한 평가를 나누었다. 첫 날에도 이와 같은 평가회가 열렸었는데, 대부분 대원님들은 “예전 어려웠을 시절 한국 모습을 보는 듯 하네요.” 라고 말씀해주셨다. 90년도 후반에 태어난 나는 사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한국 모습을 모른다. ‘70년대 한국 모습이 이랬을까?’ 상상할 정도였다. 그리고 가난한 시절을 모르는 나로써는 대원님들의 ‘네팔이 한국처럼 되면 좋겠다.’라는 생각과는 반대에 있었다. 절대적인 빈곤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된 한국이지만 빠른 성장 뒤에 가려진 여러 사회적 병들은 젊은 세대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빈곤의 대물림, 빈부 격차, 지나친 경쟁사회 등 한국의 모습을 네팔에게 기대할 수 없다. ‘한국보다 더 평등한 나라가 되어야할 텐데...’ 하곤 우리가 성장만을 생각하느라 깨뜨려왔던 공동체의 중요성을 네팔의 성장 과정에 녹여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내 생각은 대원님들의 구체적인 네팔 발전 방향에 비해서는 두루뭉술할 수 있다. 하지만 빼놓고 갈 수 없는 부분임은 확실하다. 첫날은 어쩔 수 없는 세대차이에 대원님들의 평가 내용을 100% 이해할 수 없었다.
홀리차일드스쿨에 다녀온 후 평가회는 달랐다. 김효주 대원님은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흙소리 청소년 연희단’이 생각나셨다고 했다. “연희단 청소년들이 이곳에 와서 청소년 연구원들과 만나 자신들의 활동에 대한 의지를 얻어가면 좋겠어요.” 라고 말씀해주시기도 했다. “흙소리가 네팔 바글롱에서 무대를 연다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요? 홀리차일드스쿨과 한국에 대해서요.” 라며 문화적 교류를 제안해주셨다. 김대성 대원님은 대원님의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말씀해주셨다. 네팔 청소년들도 성공할 기회가 분명히 존재하며 이 기회를 보장해주기 위해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한국에 돌아가 알아보신다고 하셨다.
이주형 대원님은 전날 파더홈의 아이들을 보고 네팔에서 들꽃청소년세상과 달그락이 하려는 일에 대해서 감을 잡으신 듯 몇가지 느낀 바를 말씀해주셨다. 한국에서 진행된 준비회의때는 말씀이 많이 없으시고 겸손하셔서 자신은 사진을 잘찍어보겠다며 네팔 달그락을 꿈꾸는 것에 대해서는 한 발 물러나셨었다. 활동가인 나로서는 적지 않은 비용을 내고 가는 대원님들의 탐사활동에 달그락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시길 내심 바랐다. 활동 중간중간 대원님들의 표정을 보면서 ‘이 활동이 대원님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두차례 평가회를 통해서 대원님들이 갖은 활동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주형 대원님은 “네팔 청소년들의 희망 직업이 자신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직업인 점이 안타깝네요. 더 많은 기회와 체험을 위해 한국으로 청소년들을 데려와서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라고 말씀 하시며 네팔 청소년들의 현실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까지 말씀해주셨다. 자신은 사진만 잘 찍으면 된다고 늘상 이야기하셨던 이주형 대원님도 네팔 청소년들의 삶에 진정성을 담아 응원하는 사람이 되셨다.
오지영 대원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꿈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셨다. 꿈깍지라는 예비사회적기업을 운영하는 것도 청소년 사역, 청소년들이 잘 살 수 있게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하셨다고 말씀하시며 꿈깍지와 달그락이 연계하여 네팔 달그락을 위해 지원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겠다고 하셨다. “홀리차일드스쿨에서 본 육아 협동조합이 기억에 많이 남네요. 육아 협동조합에 참여하는 보호자들이 직업적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꿈깍지에서 기술교육을 지원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하며 지원의 의지를 밝혀주셨다. 자신이 꿈깍지라는 곳을 운영하게 된 계기와 그것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꿈, 현재 네팔을 경험한 후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방안까지 생각해보셨다는 것이 오지영 대원님에게 네팔이 어떤 존재로 다가갔을지 알 수 있는 대화였다.
이강휴 대장님이 말씀하신 내용 중 기억에 또렷이 남는 것이 있다. “한 사람이 지역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요. 그 한사람이 지역사회에 씨를 뿌리는 거죠.”라고 말씀하시며 도시와 도시 간 교류활동을 제안하셨다. 꽤 구체적인 방안이었다. 전라북도 차원이나 지역의 국립대의 교류 방안을 알아보아 그들의 대학을 지원했으면 하셨다. 이강휴 대장님은 여기 온 목표보다 더 세부적은 계획을 이야기하셨다. 활동가인 나보다 더 실제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알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해야할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셨다. 네팔의 자연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다. 자연을 보며 휴식하시고, 사람들을 보며 달그락 활동에 힘을 받으시는 듯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네팔 청소년들과 지역사회를 가까이 보고 난 후 현재의 네팔과 한국의 경제적으로 극한 어려움에 빠진 시절을 이해 못한 둘째날의 나는 대원님들의 네팔 바글롱을 위한 제안들은 경험에서 비롯된 현실적인 대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셋째날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대원님들의 진심이 담긴 말 덕분에 얻을 수 있었다. 네팔 청소년연구원들을 보고 그들이 눈이 빛났다고 표현했다. 마지막 날 어두운 카페에서 서로의 생각을 비판하지 않고 집중해서 들어주며 공감해주던 눈빛도 그와 같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 아닌 지역을 넘어 처음 간 나라의 청소년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평소 생각이나 오랜 꿈, 과거 경험들을 털어놓아주셨고, 해결방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진정한 ‘어른’들, 아니 ‘지구시민’들과 함께한 교류활동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어떤 역할로 시민 노릇을 할 수 있을까 또 하나의 고민을 얻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