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Prodigal Sun" (돌아온 탕자(蕩子). "렘브란트"(Rambrant Hamensz van Rijin)
1669년. 262 x 206cm. " 에르미타쥬 博物館"(State Hermitage Museum) 소장.
"에르미타쥬"박물관에서 이 그림을 처음봤을 때 '에이,,, 설마,,,,,'
그림 위에 REMBRN,, 를 보고서야 아 진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임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림앞에 모여 그림을 감상하고 있어 사진을 찍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기회가 오니 창문 옆이라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 때문에 제대로 찍지는 못하고 말았다.
이 "돌아온 탕자"는 오래 전부터 많은 화가들이 화폭에 담았다.
"폼페오 바토니"(Pompeo Batoni)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773)
oil on canvas "빈 미술사 박물관"(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소장.
"바르톨로메 이스테반 무릴로"(Bartolomé Esteban Murillo)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70-74. Oil on canvas.
"미국 국립 미술관"(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USA. 소장.
"루카 복음"이 전하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되찾은 양"과 "되찾은 은전"의 비유에 이어 나오는
매우 시적(詩的)이고도 심리적 통찰력이 뛰어난 일화다.
방탕한 아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이 있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요구하여, 유산을 챙겨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재산을 탕진하였다.
곤궁에 허덕이던 그는 돼지를 치게 되었고, 돼지들이 먹는 주엽나무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길 간절히 바랬지만, 그것마져 배불리 먹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멀리서 아들을 본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즐거운 잔치를 벌인다.
그때 들에 나가있던 큰 아들이 돌아왔지만 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저는 여러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 군요” 라며 화를 낸다.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복음 15:1 ~ 32 요약)
흥미로운 이야기의 전개와 방탕한 아들, 자비로운 아버지,
모범적인 아들이 엮어내는 갈등은 미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그 이미지는 중세부터 여러 형태로 표현되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돌아온 탕아" 14세기경. 상아로 만든 공예품 루브르 박물관 소장.
14세기에 제작된 "루브르"에 있는 상아판에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장면부터 회개하는 장면까지를 담고 있다.
상단의 상아판 맨 왼쪽, 아들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있고,
뒤쪽에 서 있는 베일을 쓴 이는 어머니로 여겨진다.
유산을 받은 아들은 말을 타고, 재산과 하인을 앞세우고 집을 떠난다.
이 장면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케 한다.
하단의 상아판, 왼쪽 두 장면은 각각 아들이 친구들과 연회를 베풀며
재산을 탕진하는 모습과 창녀와 어울리는 모습이다.
오른편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과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모습이 새겨져 있다.
"방탕한 아들" 1330~1350년 상아함.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1330~50년 파리에서 제작된 상아 장식함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은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나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The Prodigal Son" DÜRER, Albrecht 1496년. 판화 261 x 202 mm
"카를스루에 쿤스트 할레"(The Staatliche Kunsthalle Karlsruhe)소장. 독일 바덴.
1496년 경 "뒤러"(DÜRER)는 방탕한 아들의 참회의 순간에 주목하여 이를 동판화로 제작한다.
화면 후경에 펼쳐진 농장은 낡고 방치되어 불결한 분위기를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기괴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된 돼지들, 특히 부모 곁에서 먹이를 먹고 있는 새끼돼지는
유복한 출신의 젊은이의 비참한 상황을 더욱 강조한다.
그는 아버지의 집을 나온 후, 돼지의 먹이를 탐낼 정도로 몰락했다.
가장 비참한 상태에서 그는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 구나”(루카15:17)며
그제야 제정신이 들고, 무릎을 꿇고 참회를 한다.
이 일화가 강조하는 "참회"(懺悔)라는 메시지에 의해
"서방교회"에서는 사순절의 세 번째 주일에 이 복음을 낭독하고,
"동방교회"는 부활 두 주일 전을"방탕한 아들의 주일"(Sunday of the Prodigal Son)로 지낸다.
Hemessen, Jan Sanders van "The Prodigal Son" 1536 "Oil on oak> 140 x 198 cm
"벨기에 왕립박물관"(Musees Royaux des Beaux-Arts) Brussels 소장.
집을 떠난 방탕한 아들에 대한 세세한 상상은 16세기 북유럽 화가들에 의해 풍속화로 다루어진다.
앤트웨프 길드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헤메센"(Jan Sanders van Hemessen)은
"방탕한 아들"이 쾌락에 빠져있는 모습을 풍속화로 그리고 있다.
화면 전경의 아들은 술병을 들고 창녀들에게 둘러싸인 호색한으로 표현되었으며,
화면 왼쪽 끝에는 육체적 욕망을 상징하는 고양이가 등장한다.
포주로 여겨지는 늙은 여인, 만취한 노인, 그리고 도박에 열중한 두 남녀의 탐욕스러운 모습,
이들을 조롱하는 듯 쳐다보는 악사등 이 작품에는 탐욕, 탐식, 탐색, 나태와 같은
감각의 죄에 빠진 타락한 인간 군상들이 개성적이고도 풍자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화면 원경, 왼쪽 돼지를 치다가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아들의 모습이(잘 보이지는 않지만)
전면에 그려진 타락한 이야기의 주제를 상기시킨다.
Gerrit van Honthorst "The Prodigal Son" 1622년 Oil on wood, 130 x 196 cm
"알테 피나코데크 뮌헨"(Alte Pinakothek, Munich) 소장.
1623년 네덜란드의 화가, "헤라드 반 혼토르스트"(Gerard van Honthorst)가 그린 "방탕한 아들"에도
세 쌍의 젊은 남녀와 포주로 여겨지는 노파가 등장하여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화면 전경 푸른 옷을 입고, 거의 눕다시피 몸을 젖힌 이가 방탕한 둘째 아들로
그가 들고 있는 유리 술잔은 무절제와 낭비를 의미한다.
"혼토르스트"(Honthorst)는 1616년 이탈리아 여행 후, "카라바조"(Caravaggio)의 영향을 받아
화면을 어두운 배경과 강한 하이라이트의 대조로 이끈다.
이 작품에서도 노파가 들고 있는 촛불로 인해
주인공인 작은 아들과 창녀의 얼굴에 빛이 집중되고, 이들의 쾌락적인 표정이 환히 드러난다.
"레오넬리 스패다"(Lionello Spada)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7 C
Oil on canvas, 119cm×160cm 루브르박물관(Musée du Louvre) Paris 소장.
"카라바조"의 제자로 알려진 볼로냐 출신의 화가,
레오넬로 스패다 (Leonello Spada)가 그린 "돌아온 탕자"에는
질투하는 큰 아들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고, 아버지와 작은 아들의 모습만이 등장한다.
어깨가 들어날 만큼 헤진 옷을 입고, 걸인처럼 지팡이를 짚고 온 작은 아들은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루카 15:17)라며
아버지의 처분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순명을 상징하는 제스쳐를 취하고 있다.
아버지는 지친 아들을 자신의 망토로 감싸 안는다.
자비를 구하는 애처러운 아들의 눈빛과 자비로운 아버지의 눈빛은 칠흑 같은 배경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그런데 이따금 그림에 나오는 "돼지먹이"라는 "주엽나무"어떤 나무일까?
이스라엘 "게세마니"동산 앞에 가로수로 심겨진 "주엽나무".
이 열매의 꼬투리는 이스라엘이나 중동지방에서는 돼지먹이로나 사용된다고 한다.
종교개혁과 반종교 개혁기를 거치면서 화가들이 방탕한 아들을 묘사하는 관점에는 변화가 생긴다.
바로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그를 맞아주는 아버지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1669년 렘브란트는 "돌아온 탕자"를 제작한다.
이 작품은 그의 생애 마지막 해에 그려진 마지막 작품으로 강력한 명암대비보다는
부드러운 빛을 사용해 화면의 요소들을 융합한다.
화면 전경,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머리는 마치 죄수처럼 밀어버린 거칠고 비루한 모습으로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무릎을 꿇은 아들을 감싸 안은 아버지는 집나간 아들을 눈이 빠지게 기다려,
혹은 노안으로 시력을 잃은 것처럼 표현되었다.
아들의 어깨에 놓인 아버지의 커다란 손에서는 보호와 따뜻함이 느껴진다.
좌측의 아버지와 돌아온 작은 아들의 얼굴, 그리고 오른쪽의 불만이 가득한 큰아들의 얼굴.
다른 사람들보다 이 세 사람의 얼굴을 환하게 그려 이 그림의 주인공임을 나타낸다.
포옹하는 두 부자 뒤로, 서 있는 한 여인과 앉아있는 남자가 어둡고 희미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다시 빛은 화면 오른편에 서 있는 큰 아들의 얼굴을 비춘다.
큰 아들은 방탕한 아들에게 이런 환대를 하는 것이 공정한지 의문을 가지며 아버지에게 불평을 한다.
물끄러미 서 있는 큰 아들과 포옹하는 두 부자 사이의 거리는
그들을 질투하는 큰아들의 심리적 거리를 느끼게 한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이제는 됐다' 하는 표정으로 아버지 품에 안겨있다.
아버지의 눈은 붉게 짓물렀고, 한쪽 눈동자가 다른 쪽을 보고 있다.
집을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동안 어버이의 마음은 눈이 짓무르고 실명(失明)을 하도록 아팠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을 감싸는 아버지의 양쪽 손의 모양이 다르다.
부드럽게 묘사된 오른손은 어머니의 손길인 모성(母性)을,
굵고 투박하게 묘사된 왼손은 강인한 아버지의 손 모습인 부성(父性)을 상징한다.
즉 "램브란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으로 "성부"(聖父)의 자비로움을 표현한 것이다.
"성부"(聖父)의 얼굴을 그리지 않았던 중세시대에,
하느님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손이었음을 상기하면 이러한 표현은 어색하지 않다.
그는 "성부" 하느님을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을 함께 가지고 있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돌아 온 아들의 허리에는 칼이 채워져 있다.
비록 남루하고 거지꼴을 한 아들이지만 그 칼로 귀한 집의 자식임을 나타낸다.
신발이 벗겨진 아들의 발바닥은 상처투성이다.
신겨있는 오른쪽 신발은 발보다 작고, 신발 끝의 모양으로 봐서 오른쪽이 아니고 왼쪽 신발이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이것 저것 줏어서 신은 것이다.
왜 이 "램브란트" 그림이 가슴깊게 와 닿는 것이까?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理由)가 있다.
"램브란트"는 네델란드에서 1606년 부유(富有)한 방아간집 아들로 태어 났다.
그는 젊은 시절 그림으로 큰 성공(成功)을 거두고 호화롭고 향락적인 생활(生活)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말년(末年)에는 모든 재산(財産)을 탕진(蕩盡)하고 비참한 생활(生活)을 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고난으로 얼룩진 인생(人生)을 살아온 자신(自身)을 "돌아온 탕자"로 묘사하여 그린 것이라고 한다.
"램브란트"의 이 그림은 1669년에 그린 작품(作品)으로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이 그림을 완성(完成)한 그 해 가을인 1669년 10월 4일.
암스테르담의 외딴 빈민촌(貧民村)에서 63세의 나이로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글의 내용 일부는 네이버 캐스트 (정은진)씨의 글을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