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1:1-40, 입다의 서원, 23.5.24, 박홍섭 목사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들은 그 시대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사사 기드온을 보십시오. 기드온은 미디안을 두려워해서 제대로 추수도 못 하는 겁쟁이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드온을 사사로 쓰시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겁쟁이 같은 이스라엘도 세상을 이기는 큰 용사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입다도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와 거기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입니까? 1-3을 보십시오.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리에 입다를 쫓아내며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그는 매춘부(우리 말 번역의 기생은 매춘부가 정확합니다)의 아들로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버림받아 돕 땅으로 쫓겨나 잡류들과 함께 살았던 쫓겨난 인생이고 잡류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입다를 이스라엘의 머리(사사)로 세워 구원하심으로 두 가지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하나는 지금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은 다른 원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지적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런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인도하는 자는 그들이 버렸던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지난주에 암몬에게 18년을 고통당하다 부르짖는 이스라엘의 기도에 너희가 선택한 이방 신들에게 가서 구원해달라고 하라고 차갑게 등을 돌리신 하나님의 거절을 기억하십니까? 고통을 모면하기 위해 어려울 때만 하나님을 찾는 이스라엘의 영적 곤고함을 가슴아파 하시면서 내 영이 줄어든다고 하던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지기 위해 사용하신 인물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버림 받은 입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온갖 잡신들에게 자신들의 운명과 미래를 맡겼지만 정작 이들을 구원하실 분은 이들이 버린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선명한 메시지가 입다라는 인물 자체에 들어있습니다.
이는 입다 이야기의 절정인 그의 서원에서 잘 나타납니다. 우선 입다는 암몬과 외교적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12-28). 그러나 암몬이 거절하므로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만약 하나님이 이 전쟁의 승리를 주신다면 누구든지 자기 집에서 가장 먼저 나와 그를 맞이하는 사람을 하나님 앞에 번제로 바치겠다고 서원합니다(30-31). 우리는 이 전쟁의 결론을 알기 때문에 왜 입다가 이런 서원으로 사서 어려움을 당하는지 안타깝고 당혹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서원이 입다 이야기의 가장 큰 핵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서원은 경박한 서원이 아니고 쓸데없는 서원도 아닙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입다가 서원하기 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습니까?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의 서원은 성령이 임하여서 한 서원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서원은 즉흥적이거나 불 신앙에서 나온 경박한 서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서원을 통하여 보이실 분명한 메시지가 있어서 하게 한 서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학자들이 입다의 서원을 실제로 사람의 목숨을 바친다는 서원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 자신을 드리는 서원으로 해석하여 이 서원의 당황스러움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굉장히 어색합니다. 만약 여기의 번제가 실제로 입다의 딸이 죽는 것이 아니라 평생 처녀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신앙적인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입다와 이스라엘이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입다의 서원이 누구든지 가장 먼저 자신을 맞이하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는 서원이 맞다면 사람을 바치는 인신 제사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이 왜 입다의 딸이 번제로 드려지는 것을 허락하셨을까요? 바로 여기에 입다와 이스라엘 만이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믿음의 사람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입다의 서원과 그가 딸을 번제로 바치는 서원의 이행을 통해 지금 이스라엘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자리로 속히 돌아오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버렸다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너무나 멀리 떠나 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여호와만을 섬기고 그분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겠다는 그 언약으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그 언약대로 사는 삶이 어리석어 보이고 힘들어 보여도 그렇게 사는 삶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복되게 살아가는 유일한 길임을 보여주기 위해 입다의 서원이 성령의 임하심 가운데 이루어져서 실행되고 있습니다.
서원이 무엇입니까? 약속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트리고 우상과 언약하여 그들과의 약속 아래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고 동시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그들의 욕심을 향하여 우상을 택하여 섬겼습니다. 그것도 있는 데로 다 끌어모아서 우상이라는 우상은 다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고통스러운 서원을 통하여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입다와 딸이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도 “여호와께 입을 열었으니...”라고 말함으로 서원을 지키고 행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런 입다와 딸의 모습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이스라엘은 쉽게 약속하고 쉽게 버립니다. 언약 백성이면서도 좀처럼 언약을 지키지 않는 백성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조금만 힘들면 언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다른 약속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입다의 딸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순간 왜 죽어가야 하냐고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들의 눈앞에서 입다의 딸이 서원대로 죽어나가는 것처럼 이스라엘 가운데 신실하게 언약을 이행해오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그들과의 언약에 신실하게 반응하실 것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버렸던 이스라엘과 달리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에게 신실하셔서 언약을 이행해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움을 입은 입다가 자신의 외동딸을 서원을 지키기 위해 제물로 드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외아들을 언약을 위해 십자가에 다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빠진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제물로 드리면서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아마 입다의 딸이 죽어야 했을 때 길르앗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이 놀라운 승리의 날에 죄없는 처녀가 죽어야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입다의 딸의 죽음을 통해 지금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암몬에게 승리한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왜 너희들이 암몬에게 고통을 당해야 하며 지금 승리 후에도 이런 슬픔을 겪어야 하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고 세상적 욕망을 향하여 마치 발정한 들나귀처럼 달려갔던 그들의 죄입니다. 바로 그들의 죄 때문에 입다의 딸이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무죄한 피가 흘려지지 않는 이상 절대로 자신들의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집안이 다 망하고 살림이 거덜나도 모릅니다. 오직 무죄한 피가 흘려질 때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무섭고 심각한지를 겨우 돌아보게 됩니다. 결국 입다의 딸을 죽게 만든 것은 하나님을 버린 그들의 죄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것은 우리의 죄입니다. 길르앗 사람들이 입다의 딸의 죽음을 잊지 못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위해 죽으신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짐승처럼 십자가에 달려서 비참하게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고 우리에게 얼마나 언약에 신실한 분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아들을 죽이신 아버지의 사랑과 그 언약의 신실함 때문에 우리는 오늘 구원과 자유와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얻은 생명과 자유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남용하거나 더럽게 사용하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살기 힘들다고 언약을 팽개치고 다시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달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입다의 딸이 죽어간 이유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언약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언약 백성입니까? 하나님 나라, 예수의 나라를 약속받은 백성입니까? 그렇다면 언약 백성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약 관계의 즐거운 여정뿐 아니라 힘들고 괴로운 여정까지도 다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영광을 얻습니다. 조금 힘들다고, 어려움이 있다고 쉽게 버리는 언약이라면 언약도 아니고, 언약 백성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입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