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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지식 스크랩 1986.01.08 ?프랑스의 첼로 연주자 피에르 푸르니에 사망
luvseul 추천 0 조회 48 12.01.26 10: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86.01.08  프랑스의 첼로 연주자 피에르 푸르니에(Pierre Fournier) 사망

 

 

 

 

 

 

 

 

 

 

푸르니에

첼로라는 악기에 현대적인 의미에 있어서 거장성 혹은 비르투오시티가 발현되기 시작한 것은 1876년 12월 29일 태어난 파블로 카잘스에 의해서 가능했다. 이 카탈루냐 출신의 위대한 첼리스트는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의 열렬한 찬미자인 동시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 세상의 빛을 보게끔 한 구원자였다. 그의 위대한 첼로의 전통은 가스파르 카사도, 안토니오 야니그로와 같은 스페인 및 이탈리아 출신의 첼리스트들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카잘스의 그림자가 너무 컸던 탓인가, 카사도와 야니그로 모두 중요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일군의 악파를 형성하거나 선배를 뛰어넘는 명성을 얻는 데에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카잘스에 의해 개화된 첼로의 시대는 스페인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프랑스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진 것이다.

 

 

 

프랑스 첼로악파의 고색창연한 전통

20세기 초중반 프랑스에서는 첼로를 위한 수많은 작품이 탄생했다. 이는 대규모 관현악곡에 등을 돌리고 다시금 실내악에 눈을 돌린 당시의 작곡 경향도 그러했거니와, 콘서바토리 중심의 프랑스 음악계에서 걸출한 실내악 연주자들(현악을 포함한 목관 및 금관)이 많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폴 바젤레르와 모리스 마레샬이 등장하면서 19세기부터 존속해 온 프랑스 첼로악파의 전통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작곡된 첼로가 포함된 모든 실내악 작품들의 초연을 도맡았던 이 두 거장은 연주자로서의 화려한 삶보다는 교육자로서의 길에 더욱 충실하여 음반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특히 마레샬이 피아니스트 장-마리 다레와 함께 연주한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집을 들어보면 특유의 찬연함과 고전적인 엄격함, 자유롭되 절제되어 있는 스타일로부터 프랑스 첼로 전통의 그 고색창연한 향기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길러낸 일군의 제자들이 등장하면서부터 프랑스의 첼로 악파가 진정으로 20세기를 지배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앙드레 나바라, 폴 토르틀리에, 모리스 장드롱을 비롯하여 피에르 푸르니에에 이르기까지, 한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첼로의 거장들이 한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했다. 이들 네 명의 첼리스트는 카잘스에 의해 그 위상이 높아진 첼로라는 악기에 다양성과 품격을 얹어 본격적인 첼로의 시대를 개막했다. 요절한 엠마뉴엘 포이어만이나 미국에서 활동한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도 이들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지만, 프랑스 첼로 4인방 가운데 특히 피에르 푸르니에와 같이 폭넓은 인지도와 레코딩에서의 명성을 누리진 못했다.


고아하고 기품있는 연주를 들려주었던 피에르 푸르니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젊은 첼리스트의 등장


피에르 푸르니에는 1906년 6월 24일 프랑스 파리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로서 항상 음악과 함께 한 교양있는 가정이었던 만큼, 그의 남동생인 장 푸르니에는 후일 명망 높은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원래 피아노를 쳤던 푸르니에는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으면서 페달을 밟을 수 없게 되자 앉아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카잘스에 의해 첼로란 악기가 부각을 받았던만큼 푸르니에는 9세 무렵부터 첼로라는 악기에 매진하게 되었고, 곧 파리 음악원에서 폴 바젤레르와 앙드레 헤킹을 사사하며 기린아로 성장한다. 1923년에는 콘서바토리 최우수 학생으로 선발된 그는 전설적인 현악4중주단의 리더인 루시엥 카페로부터 실내악을 배우기도 하고 라벨의 ‘샹송 마데카스’ 초연에 참가하는 등 여러 연주회에 참가하며 경력을 쌓아나갔다. 1925년에는 콜론 오케스트라와 협주곡 데뷔 무대를 갖기도 했다.


1934년 런던 위그모어 홀에서 데뷔 무대를 가진 그는 다음 해에는 카잘스의 지휘로 바르셀로나에서 협주자로 나서며 인정을 받기도 하고 루셀과 마르티누의 작품을 초연하기도 하며 본격적으로 솔리스트로서의 경력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마르티누는 [첼로 소나타 1번]과 개정한 [첼로 협주곡 1번]을 그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1939년에는 파리에서 파테-마르코니 레이블에서 첫 레코딩을 가졌고 폴 파레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로 베를린 무대에 데뷔하기도 했다.


이렇듯 30대 초반의 나이로 이미 프랑스를 대표하는 젊은 첼리스트로 각광받게 된 그에게 1943년 카잘스의 후계자로서 인식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나치 독일의 압제에 반대하며 자리를 비우게 된 카잘스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알프레드 코르토자크 티보와 함께 트리오 연주를 하게 된 것이다. 이후 베를린에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슈만의 첼로 협주곡을 네 차례에 걸쳐 연주하며 높은 명성을 쌓으며 2차대전 중 유럽을 대표하는 첼리스트로서 이탈리아의 엔리코 마이나르디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2차대전 중 독일에서의 활동은 그에게는 그다지 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1945년 영국 로열 알버트 홀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변주곡]과 랄로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함으로써 영국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보장받았을 뿐만 아니라 EMI(당시 콜럼비아) 레코드와 레코딩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1946년 베토벤의 화신으로 일컬어지던 아르투르 슈나벨과 아르투르 그뤼미오와 베토벤 [3중 협주곡]을 연주한 이후 1947년부터 48년 사이 슈나벨과 역사적인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 레코딩을 남기는 영광을 안을 수 있었고, 요제프 시게티와 윌리엄 프림로즈, 슈나벨과 함께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죤, 슈베르트의 실내악을 연주하며 유럽 최고의 실내악 첼리스트로 인정받게 된다. 특히 아드리안 볼트 지휘로 연주한 엘가 협주곡과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과의 슈만 협주곡은 그의 국제적 경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최고의 솔리스트들과의 성공적인 앙상블 활동


그의 예술은 흔히 ‘첼로계의 황태자’라는 표현으로 축약되곤 했다. 이 말에는 카잘스가 황제라는 복선이 깔려 있는 듯하여 만년 2인자로서의 안타까움이 배어있음을 부인하기 힘들지만, 푸르니에의 연주에서 배어나오는 저 고매한 귀족적인 자태와 고전주의자로서의 의연한 균형감은 황제가 아닌 황태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창적인 예술성임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자연스러우면서도 당당한 연주를 펼쳐보였던 그는 첼로라는 악기의 진정한 모범이 무엇인가를 솔리스트이자 협연자로서 보여주었지만, 무엇보다도 지노 프란체스카티, 솔로몬, 빌헬름 켐프, 프리드리히 굴다, 예후디 메뉴힌, 헨릭 셰링 등등과의 실내악 활동이야말로 푸르니에의 예술성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라고 말할 수 있다. 앙상블에 있어서 화합의 아름다움이 보여줄 수 있는 극한의 경지를 보여준 그는, 특히 켐프와의 듀오와 셰링이 가세한 트리오, 미국에서의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셰링-푸르니에 트리오를 통해 당대 최고의 앙상블로 인정받으며 고전 레파토리에 있어서 최고의 해석으로 존경받았다.

 

1947년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모인 요세프 시게티, 윌리엄 프림로즈, 아르투르 슈나벨, 피에르 푸르니에(왼쪽부터).

 

 

EMI에서의 활동 이후 1952년부터 56년 사이 데카에서 음반을 녹음했고 1959년부터 71년 사이에는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전설적인 레코딩을 남기며 모든 첼로 레파토리를 섭렵하며 그는 레코딩에 있어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카잘스 이후 최고의 고전적인 명연으로 손꼽히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Archiv)와 켐프와의 베토벤 첼로 소나타(DG) 및 셰링-켐프와의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DG)가 유명하고, 바로크 첼로 협주곡 및 프랑스 첼로 협주곡집(DG)과 빌헬름 박하우스와의 브람스 첼로 소나타집(DECCA)도 그의 대표 음반으로 손꼽힌다. 브람스 2중 협주곡은 그의 독무대에 가까웠다. 부르노 발터와 프란체스카티와의 녹음(SONY)을 비롯하여, 알체오 갈리에라 지휘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바이올린(EMI) 및 페렝크 프리차이 지휘와 볼프강 슈나이더한의 바이올린(DG)과 녹음을 남겼다.


많은 음악가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았던 그이지만, 그는 특히 조지 셸과의 만남을 대단히 특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와의 첫 연주회에서 프로그램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6번]과 R.슈트라우스의 [돈 키호테]로 꾸며진 것에 대해 그는 쉽게 납득하기 힘들었다. 알고 보니 이것은 푸르니에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셸이 꾸민 일종의 시험대였던 것이다. 오케스트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바흐를 묵묵히 연주하며 셸의 주목을 끈 푸르니에는 이후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을 함께 녹음(DG)하여 희대의 명연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더군다나 음악의 매력에 끌려 있는 사람들 사이에 끊어질 수 없는 튼튼한 연대감을 구축해서 국경이 없는 사랑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음악에 대한 사랑을 넓혀가는 일이야말로 우리 음악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렇듯 인간성조차 남달랐던 푸르니에는 러시아와 동양을 포함한 전세계를 돌며 자신의 음악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했고, 1978년과 1981년 한국을 방문, 세종문화회관에서 리사이틀과 협주곡 무대를 통해 한국 청중들에게 자신이 추구해온 사랑의 의미를 전달해 주기도 했다.


예와 인을 갖춘 덕장(德將)으로서 예술가의 모범적인 삶과 성악적인 호흡을 첼로를 통해 구현하고자 노력했던 피에르 푸르니에. 그는 1986년 1월 8일 스위스의 제네바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살아생전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오이스트라흐와의 브람스 [2중 협주곡] 음반을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약력
1924 18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데뷔
1934 위그모어 홀에서 런던 데뷔 연주회
1937∼1939 에콜 노르말 재직
1939 파리 ‘파테-마르코니’ 레이블에서 첫 레코딩
1941∼1949 파리 음악원 재직
1947~1948 아르투르 슈나벨과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 레코딩
1948 첫 미국 순회 공연
1963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서훈
1978 세종문화회관 내한 리사이틀

 

 

 

 

박제성
박제성 / 음악 칼럼니스트,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 역자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써 온 음악 칼럼니스트 공연, 방송, 저널활동, 음반리뷰, 음악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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