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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란토 ~ 크레타 Chania 마리나
2023년 2월 28일 오전 10시 40분. 한창 계류장 폰툰을 수리하는 파브리치오에게 갔다. 파브리치오, 난 오늘 오전 11시에 출항한다. 20분 후에 배에서 만나자. 파브리치오는 놀라는 눈치다. 며칠 더 있을 줄 알았나보다. 하지만 AIS 무전기 구매도 실패한 마당에 더 있을 이유는 없다. 이미 많이 지체 됐다. 아내가 요리 재료를 모두 플라스틱 통에 담아 냉장고에 정리했다. 나는 배에 다시 물을 가득 채우고 육전 전기 줄을 걷어 배 바닥에 넣는다. 공간이 넉넉해 접이식 수레와 육상에서 신는 신발까지 모두 넣는다. 배의 사다리를 스타보드 스텐천에 단단히 고정한다. 한창 바삐 움직이는데, 누가 Mr Kim! 하고 부른다. 돌아보니 파브리치오다. 벌써 11시네. 아내가 밖으로 나와 파브리치에게 인사한다. 나는 그에게 7일치 계류비 140유로를 건넨다. 파브리치오와 함께 계류 줄을 걷고 출항이다.
아주 수월하게 출항했다. 파브리치오에게 손 흔들어 인사한다. 파브리치오는 순식간에 개미만큼 작아진다. 일주일 전 만 해도 만나리라 생각도 못했던 사람. 어느덧 그와 제법 정 들었다. 그의 친절이 벌써 그를 그립게 만든다. 마리나를 벗어나자 계류 줄을 정리하고 항로를 잡는다. 바람은 없고 파도는 정면 1미터. 제법 피칭이 있다. 아내와 아이는 곧 잠 든다. 멀미가 있나보다. 다음 웨이포인트 Pelouzo 까지는 178마일. 하루하고 8시간 더 가야 한다. 이오니아 해에서 좌현으로 침로를 수정해야 한다. 1,400RPM 속도 5.5노트. 파도가 펀칭할 때마다 속도가 1노트씩 줄어든다. 5.5 노트로 잘 가다가, 4.5노트로 확 줄어든다. 1시간 쯤 전진하니 멀리서 해양 경찰 배가 지나간다. 2시간 쯤 갔을 때는 좀 더 규모가 큰 해군 함정이 지나간다. 어선 한 대가 그물을 끌고 우리 배 0.5마일 밖으로 지나간다. 그물 방향을 보며 잠시 긴장한다. 우리는 어떤 사고도 있어서는 안 되는 가족 세일 요트다.
아내와 함께 한국 돌아가서의 일들을 이야기 한다. 성급하지만 소망을 말하는 건 죄가 안 되겠지. 함께 울릉도부터 가자고 한다. 그리고 제주도, 일본, 필리핀, 팔라완 항해를 꿈꾼다. 그러려면 전자 장비를 좀 더 갖추어야 한다. AIS가 연계되는 플로터를 설치해야 한다. 이파브도 설치해야 하니 돈 좀 들겠다. 그래도 안전 장비는 생명과 연관되니 아끼면 안 된다.
오후 3시가 되자, 뒷 바람 8노트다. 풍압이 약해 펄렁이는 바람이지만, 세일 요트에게는 요긴하다. 메인 세일과 집세일을 펴고 엔진을 1,300 Rpm 으로 낮춘다. 6.2노트, 나쁘지 않다. 나는 아직 펄링 방식 메인세일에 익숙하지 않다. 메인 시트를 잡아 다니면 곧장 마스트 안에서 물린다. 메인 시트는 잡아당기고 펄링 시트를 살짝 살짝 감아주며 풀면 잘 풀린다. 아내는 멀미가 멈추지 않는 모양이다. 자꾸 춥다며 두꺼운 이불을 두 개나 덮고 누웠다. 리나는 간식을 잔뜩 먹고 다시 뽀로로 삼매경이다. 좁은 배안은 아이가 뛰 놀 공간이 부족하다. 어린이의 에너지는 50피트 요트도 감당 못한다. 나는 조종을 하고 아내가 리나와 놀아 주면 좋은데, 아내는 멀미에다 허리도 안 좋다. 걱정이다. 해도를 보니 왼쪽은 북 마케도니아 공화국이다. 알렉산더가 태어 난 곳이 맞나? 몇 시간 째 망망대해를 항해 중이다. 레이더에 배 한 척 나타나지 않는다. 이 바다엔 우리 가족뿐.
오후 5시 15분. 지중해에는 서편구름 뒤로 해가 지고 있다. 포트방향 쿼터 런 13노트 바람. 속도는 5.5~6노트 사이를 오르내린다. 축복의 바람이다. 엔진을 끄고 세일링 중이다. 뱃전엔 파도 소리만 가득이다. 엔진을 끄자 리나가 깨어났다. 깨어나자 곧장 엄마를 찾는다. 엄마의 이불 속으로 들어 엄마 얼굴을 만진다. 아기에겐 엄마가 최고다. 이대로 바람을 타고 몇 시간 달리기로 한다. 바람이 좋아 아무 것도 하기 싫다. 고민은 저녁식사다. 아내가 만들어 놓은 김치찌개를 지금 먹을까? 조금 후에 먹을까? 그러나 나는 고민 직후 곧장 아내의 김치찌개에 밥을 말아 먹었다. 세계 제일의 김치찌개였다. 멀미 하는 아내에게 미안할 정도로 맛난 찌개여서 나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내가 식사하는 동안 아내는 선실로 내려갔다. 엔진 꺼서 조용하니 잠을 청해 보라고 했다. 아내는 선실로 가기 전에 내게 물었다.
좋아요? 당신이 원하던 세계일주 항해를 해서? 나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나의 어린 시절의 꿈은 요트 선장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요트를 샀고, 운송비까지는 내게 무리였다. 이탈리아에서 적당한 요트를 샀고, 그래서 한국까지 직접 항해할 생각을 했다. 계획한 게 아니라 되는대로 하다 보니 이렇게 됐군. 하고 아내에게 말하기엔 좀 미안하다. 그러나 그쪽이 더 사실에 가깝다. 물론 세일요트로 일하면서 언젠가는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린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탈리아에서 지중해, 인도양,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국으로 항해하는 것이니, 정확히는 세계일주가 아니다. 진짜로 세계일주 항해 하신 분들껜 죄송한 일이다. 지금은 언젠가 완주할 전체 구간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일단 편의상 세계일주라고 하자, 나머지 구간도 언젠가는 갈 거니까. 너무 책망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람이 노고존으로 바뀌었다. 어둠 속에서 혼자 집세일과 메인 세일을 잘 접었다. 배가 손에 익어 가고 있다. 앞 파도에 요잉이 제법이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사람들이 떠오른다. 다들 알로라 알로라 하며 잘 들 지내고 있겠지? 바스토에 와서 처음 묵었던 B&B의 식당 아줌마, 보트 서베이를 하며 만났던 루카, 선주 까를로 네 가족, 파파로코, 까를로의 친절한 친구 안토니오. 렌터카 회사의 친절한 직원들, 오트란토의 마리나 관리인 파브리치오, 기술자 무스카텔로 영감님과 전기기사 로미오.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친절은 마음 속 깊이 새기고 간다. 언제나 어디서든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마음속으로 배가 결정될 무렵, 나는 수에즈 구간을 통과할 계획을 세웠다. 법적인 여러 조건을 공부하고 확인했다. 나중에 나와 비슷하게 수에즈 구간을 통과하실 분들께 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핑거포스트가 되고 싶었다. 물론 내겐 윤태근 선장님이라는 이정표가 이미 있다. 그분은 해적들이 한참 활동하던 2009년에 수에즈를 지나 지중해로 갔다. 나는 해양수산부에서 아덴만을 위험해역으로 지정한 사실을 알았고, 이 지역을 통과하는 배들은 안전대피처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어불성설이다. 대피시설은 대형 배나 상선에나 가능한 일이다. 작은 세일 요트에 1.5센티 두께의 철판 안전대피처를 만든다는 것은, 배를 완전히 망치는 일이다. 배의 균형이나 성능이 다 박살난다. 또한 작은 세일 요트는 아무리 단단한 안전대피처를 만든다고 해도 해적이 그냥 끌고 가면 그만이다. 애초에 안전대피처가 소용없는 일이다. 상선에 적용되는 사항을 아무 고민 없이 세일 요트에 적용하고, 그런 시설이 안 되면 가지마라. 법적 조치하겠다. 하고 자국민을 협박하는 황당한 법해석을 하는 것이다. 문제해결이 아니라, 문제외면이다.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이 있다.
2023년 1월 1일부터 국제해운단체(BIMCO, ICS) 등에서 아덴만 지역을 HRA(High Risk Area)에서 제외해 버린 것이다. 현재 세계 각국의 세일 요트들이 활발하게 수에즈 운하를 통과중이다. 세일 요트인들의 국제 정보 사이트인 Noonsite 에도 이미 특집기사로 다루었다. 수에즈로 가니 못가니 하는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해수부는 전혀 이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채, 10년 전 같은 국제해운단체에서 지정한 HRA(현재는 이미 해제된!)를 근거로 뒷북을 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해수부가 전 세계의 바다 동향을 재빨리 파악하고, 기술적, 전문적인 행정을 펼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런데 실상은 낡은 정보를 바탕으로 자국민의 발목이나 잡고 있다. 이 정도라면 해수부는 민간 자문기관이라도 두고, 자문 받아야 할 것이다. 이 사람들, 과연 세금으로 월급을 줘야만 하는 사람들일까?
그뿐만이 아니다. 해외에서 중고 세일 요트를 사면 현지에서 임시 선박 안전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황당한 법조항이다. 예를 들어 1,000만 원짜리 중고 요트를 사려면 외국까지 한국 검사원이 출장을 가야하고, 그 출장비를 요트 구매자가 내야 한다는 거다. 수년 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요트를 산 후배가 관계기관에 문의하니, 그곳으로 출장은 불가능하다는 답이었다. 어쩌자는 것인가? 해수부에서 최근 내게 이 조항으로 경고했다. 코미디다. 이미 오래전, 이 법조항으로 해외에서 요트를 구매한 몇몇 선장들이 기소를 당했지만, 다 무혐의 처리 되었다. 한마디로 사(죽은)법이 된 것이다, 현재도 수많은 선장들이 세계 각국에서 요트를 구매해 한국으로 항해중이고, 내가 아는 사람만도 2명이 최근 일본에서 요트를 몰고 오는 중이다. 또한 유럽에서 요트 사서 한국으로 여러 번 항해 해온 선장님도 단 한 번도 그런 법조항 때문에 문제가 된 적이 없다고 한다. 뭔가? 도대체 해수부는 무엇을 주장하고 싶은 것일까? 안된다면 하지 마! 가라면 까. 뭐 그런 마인드인가? 정보에 느리고, 업무에 나태하고, 공부에 게으르다. 이미 여러 선장님들이 분개하고 있다. 우리는 해수부의 소극, 태만, 무지, 무책임 행정에 정식으로 민원을 제기할 것이다.
손목시계와 컴퓨터는 2시 10분인데, 핸드폰은 서비스불가 라며, 3시 10분이다. 시간대가 바뀌었다. 이제 한국과의 시차는 7시간. 돛단배는 달마저 구름에 가린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달리고 있다. 지중해의 미스트랄을 역풍에 역 조류로 제대로 맛보고 있다. 1,400Rpm에 4.6노트. 힘들게 지중해를 가른다. 멀미로 고생하면서도 아내가 야간 견시를 해주어 나는 3시간 정도 땀을 쭉 흘리며 잘 잤다. 하루 종일 레이더는 텅텅 비고 잔잔한 엔진 음만 울린다, 한국의 바다에서는 늘 레이더 상에 뭔가 나타나고 긴장해야한다. 근해에선 만나기 힘든 상황이다. 아마 인도양으로 나서면, 몇 날 며칠 이렇게 공허한 바다를 지나야 할지 모른다.
3월 1일 오전 7시 35분. 미스트랄로 제대로 악전고투 중. 맞바람 15노트에 1.5미터 파도 또한 역방향이다. 파도 펀칭이 심해 배 바닥이 울리자 앞 선실서 자던 아내가 걱정한다. 조금 늦더라도 아내를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다. 배를 좌현으로 20도 돌려 파도를 비스듬히 받게 한다. 엔진 Rpm을 처음으로 1,500으로 올린다. 바람도 파도도 맞지 않아 속도가 나지 않는다. 4.5노트. 집세일을 1/3 펴고 침로에서 우현으로 30도, 좌현으로 30도 시험해 본다. 좌현 쪽이 속도가 더 낫다. 조류가 우현에서 오는가 보다. 몇 시간이면 또 바뀔 바다 날씨기에, 일단 좌현으로 방향을 잡고 항해 한다. 인터넷이 안 되니 날씨를 가늠하지 못해 답답하다. 위성전화기를 손에 들어다 놨다 한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물어 보고 싶지만 상황이 위급한 것이 아니라서 참는다. 이런저런 시험을 하고 파도를 타다보니 밥을 태웠다.
겨울의 아드리아해와 지중해는 엄청나게 습하다. 아침이면 선실 천정과 해치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화장실 커튼엔 곰팡이가 올라온다. 습기 관리가 관건이다. 이불이 온통 끈끈하다. 곧 비가 올 듯 하늘이 잿빛이다. 배는 파도를 넘으며 힘겹게 전진한다. 앞 선실에 가본다. 다행이 아내와 아이는 별 탈 없이 잠들어 있다. 아마 선잠이 들어 깨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을 거다. 이런 파도에는 잠들기 쉽지 않다. 다음 웨이포인트까지는 83.7 해리, 어제 저녁 8시부터 24시간에서 줄어들지를 않는다. 거리가 줄어들어도, 파도와 바람에 순항 속도가 느려져 그렇다. 밥솥에 밥이 식어가고 있지만 밥 먹을 상황이 아니다.
일기예보가 20%만 맞는다면 바다는 80%가 예보 밖이다. 파도가 2미터가 넘고 역풍이 17노트 이상이다. 물론 이런 건 예보에 없었다. 이 와중에 리나는 밥 한 공기를 뚝딱해치웠다. 강릉 할머니가 해 주시던 대로 애간장 한 수저에 참기름 한 방울. 그것만으로도 꿀맛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 그렇게 간장 비빔밥이나, 간장 주먹밥을 즐겨 먹었다. 리나는 멀미도 전혀 없다. 그런 건 딱 아빠를 닮았구나. 엄마는 비닐 봉투를 곁에 지니고 멀미를 통과중이다. 내일쯤이면 적응하겠지. 나도 김치찌개에 밥 한 그릇 먹고 아침 식사를 마친다.
9시 40분. 아침 식사를 잘 먹은 리나가 똥을 한바가지 쌌다. 나도 이젠 흔들리는 배에서 리나 기저귀를 잘 처리한다. 스킬이 늘었다. 아내는 여전히 멀미 중. 리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뽀로로 시청중이다. 침로를 케팔로니아 방향으로 틀어 파도를 비켜가는 데도, 배가 펀칭을 계속하며 속도가 나지 않는다. 하늘은 잔뜩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는다. 비까지 오면 고생 제대론데, 이 정도만 하도록 도우소서.
12시 정오. 6시간 째 역풍항해 중이다. 역 파도와 역풍이 너무 강해, 전진이 어렵다. 방향을 아예 케팔로니아로 향하게 한다. 메인 세일을 1/3만 펴고 태킹을 계속할 생각이다. 메일 세일을 펴는데, 강한 바람으로 앗! 하는 사이에 메인세일이 다 펴져 버렸다. 엉금엉금 기어 갑판 마스트로 나가 다시 접는다. 파도를 맞으며 제법 스펙타클한 장면이 나왔다 촬영은 안했다. 와중에 리나가 잘 놀아 다행이다. 파도가 너무 들이쳐서, 스프레이 후드 밖으로 견시가 어렵다. 핸드폰은 계속 서비스 불가.
오후 12시 50분 케팔로니아 섬 50마일 우측. 갑자기 전화가 된다, 윈디를 열어보니 불통, 지인에게 전화해 케팔로니아 근방의 윈디 상태를 물어본다. 바람이 없단다. 그런 난 뭐지? 지금 17~19노트 역풍에 1.5미터 역 파도를 7 시간 째 맞고 있는데? 어쨌든 윈디가 그렇다면 그리 오래갈 바람은 아닌가보지. 그렇게 받아들이고 지인에게 감사 인사를 한다. 케팔로니아로 다가가 10마일 지점까지 바람이 계속 이 상태면, 태킹으로 다시 웨이포인트로 접근해 보자.
오후 2시 큰 카고들이 많이 다닌다. 다시 레이더를 켜자, 뭔가 대기 시간이 많이 걸리네, 앗 하는 사이에 등에 걸린 뒷 커버가 바다에 떨어졌다. 물에 잘 떠 있길래 건지려고 배를 돌리고 바라보니 사라졌다. 시야에서 놓친 거다. 사람이 빠져도 누군가 한 사람은 익수자를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다니. 값비싼 경험을 했다. 커버 하나 있고 없고가 많이 다르다. 안전 끈을 보강하여 둔다. 다음 항구에 가면 나무로 제대로 된 의자를 하나 짜자. 결국 불편한 부분은 오래 못 간다. 개선하자.
어떻게든 웨이포인트까지 거리를 줄이려고 태킹에 세일 조절에 별 짓을 다해도 거리가 잘 좁혀지지 않는다. 파도가 좀 약해지기에 다 포기하고 곧장 기주로 웨이포인트를 향한다. 속도는 4노트 정도, 거리는 65마일. 이대로라면 17시간 정도다. 손해 본 시간을 만회하려 곧장 다음 웨이포인트로 향한다. 아내의 멀미가 가라앉지 않는다. 식음을 전폐하고 콕핏에 누워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겠다고 한다. 멀미로 생병이 났다. 큰일이다.
오후 4시 5분. 파도는 50센티, 바람은 10노트 까지 줄었다. 모두 역방향이지만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 아내는 하던 일을 계속한다. 멀미 말이다. 1,500Rpm에 속도는 4.5노트. 아직 역 조류다. Pilos 앞 웨이포인트로 곧장 진행한다. 적어도 하루를 그냥 까먹은 것 같다. 힘들고 긴 항해다. 진짜 항해이기도 하다. 제대로 한번 고생해야 세일러가 된다. 그래도 아내는 막 토하지는 않으니 대략 체질은 괜찮다고 하겠다.
오후 7시. 파도가 가라앉고 바람은 노고존 6노트. 배 속도도 6노트다. 바다가 다시 평온하다. 거의 하루 종일 역풍과 역 파도로 고생했다. 항해 일정도 거의 하루가 더 늘어났다. 아내의 상태가 조금 좋아졌다. 남은 김치찌개로 아내와 함께 밥을 먹었다. 리나는 하루 종일 먹고 놀고, 에너지 넘친다. 7시 30분이 되자 눈을 비비며 졸기 시작한다. 혹시 몰라 리나가 먹을 밥을 다시 해 둔다. 리나는 우리 부부에게 찾아 온 최고의 천사이며 선물이다. 잘 모시자. 하하.
레이다를 켜서 20~30 분에 한번 씩 바라본다. Beep 음이 들리지 않아서다. 크레타에 들르면 수리점이 있기를 바란다. 물에 빠트린 스턴 커버를 나무로 한 번 만들어 보자. 너무 이른 소망들인가? 크레타 Chania 마리나 까지는 하루하고 22시간 남았다. 예상은 금요일 도착이지만 바다일은 당연히 예상대로 안 된다. 막바지에 바람이 좀 도와주기를 기대한다. 해가 있을 때 입항해야한다.
3월 2일 오전 12시 20분, 그리스 자퀀토스 섬 앞을 지난다. 섬 이름인지 섬 안의 도시 이름인지 인터넷 불통으로 검색이 안 되니 확인불가다. 바다는 잔잔하고 속도는 6노트. 어둠속 옅은 해무의 바다를 건너니 꿈을 꾸는 것 같다. 앞 선실에서 아기가 울어, 아내는 교대하고 들어갔다. 나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엄마는 아빠가 듣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는 아기의 움직임을 느낀다. 정말 대단하다. 남자들은 애초에 없는 능력 같다. 말 못 하는 아기의 의사를 알고 적절한 대응을 한다. 말이 아닌 사랑과 마음으로 대화한다. 감탄한다.
이렇게 한밤에 해무까지 끼었을 때, 레이더가 진가를 발휘한다. 밤에는 멀리 배의 항해등 빛을 보고도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지만, 해무가 끼면 가시거리가 확보되지 않는다, 또 항해등이 없는 암초나 기타 장애물도 레이더로 확인 가능하다. 소나기가 꾸물꾸물 지나가는 것도 보인다. 장거리 항해엔 꼭 필요한 장비다. 여기에 인근 배들의 종류와 명칭, 진행방향과 속도, 국적 등 다양한 정보를 알 수 있는 AIS가 함께 표시 된다면 아주 유용하다. 그런데 제네시스의 플로터는 스피커 고장으로, 장애물을 감지하면 팝 업으로 표시하지만 Beep 알람이 울리지 않는다. 20~30분 이내에 반드시 레이더를 확인해야만 한다. 한국 같으면 당장 세운상가로 달려가서 몇 천 원짜리 스피커로 교체하면 그만이지만, 여기는 그런 한국의 특급(?)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 부분은 내가 한국인이어서가 아니라 정말 편리하게 진화된 시스템 같다. 여기는 무조건 정식 서비스 센터로 물건을 보내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다. 여기 시스템에 동화되면 한국의 시스템이 이상하고 불편할까? 그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배는 점잖게 리듬을 타며 이오니아 해로 접근한다. 해도 상으로는 절반 가까이 온 것 같다.
오전 3시 41분. 1,500 Rpm 속도 6.2 노트. 배는 물을 가르듯 나아간다. 지중해는 ‘장판 아니면 난장판’ 이래드니 딱 맞는 말 같다. 뒷바람 3~4노트. 세일을 펼칠 바람은 아니다. 처음 장거리 세일링을 시작할 때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계획을 세웠다. 하루 8시간만 엔진을 켜 기주하면서 충전하면, 나머지 16시간 배터리로 자동항법 운항이 가능할까? 물론 이론상이고 계획이었지만, 지금 마리나스베바에서 이오니아해까지 총 6일간 항해 하면서 제대로 범주한 것은 채 6시간이 되지 않는다. 배터리 걱정이 아니라 연료를 걱정해야 한다. 한국까지 전체 항로를 이런 식으로 가야 한다면 유류비가 어머어마하게 들 거다. 도중에 10일 이상 항로도 몇 번 있다. 예비 연료까지 다 해도 총 510리터. 연료 소모에 바짝 신경을 써야 한다.
나는 요트체험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이다. 강릉 앞마다는 늘 바람이 있었고, 나는 고객들에게 제대로 된 세일링을 보여주는 보람으로 일했다. 물론 울릉도, 독도, 포항, 부산, 제주, 서해안 일주에 일본, 필리핀까지 항해 했지만, 주로 딜리버리 운항으로 한 것들이다. 무조건 빠르게 가야 한다. 연료 소모량을 걱정할 항해는 아니었다. 그러나 세계일주 항해는 차원이 다르다. 배와 사람이 함께 극한을 경험하는 거다. 바람, 파도, 연료, 물, 금전, 건강, 출입국절차 등등. 그러니 내가 위에 말한 계획들이 먼저 세계일주를 하신 분들의 눈에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하루 8시간 기주?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다. 물론 선배 선장님들은 실제로 함께 걱정해 주시고 정보를 주시고 도움을 주셨다. 하지만 이렇게 해봐야 아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안 해 보고 상상과 계획만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기록한다. 또 다른 장거리 항해인들이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적자,적어. 적자생존!
2월의 아드리아해, 지중해 야간항해는 추위와의 싸움이다. 야간에 6~10도. 가만히 앉아 레이더를 보고 전방을 견시 하자면 그야말로 뼈가 시리다. 배에 있던 이불을 두 겹으로 몸에 둘둘 말아야 간신히 콕핏애서 잠들 수 있다. (아내의 견시 시간에 나는 콕핏에서 잔다.) 지금 윗도리에는 런닝, 내복, 셔츠, 경량 패딩, 세일복 #1, 세일복 #2. 총 6개를 껴입었다. 아랫도리엔 팬티, 내복, 겨울 누비바지, 세일복 바지. 이렇게 4개를 껴입었다. 그래도 따듯하지는 않다. 간신히 버틸 만 하다. 경량 패딩은 한두 개 여유 있게 챙기는 것이 좋겠다. 역시 가봐야 알겠지만 이집트 포트사이드까지는 이런 상황이 아닐까? 가늠해 본다.
오전 6시 10분. 견시 하던 아내가 나를 깨운다. 보니 11시 방향 3마일 지점에 대형 배다. 주시하며 지나가는데 멈추어 있는 것 같다. 아무도 견시 하지 않고 저런 배가 전방에 있다면 사고다. 레이더의 필요성이 확실한 순간이다. 갑자기 후미에 돌고래가 튀어 오른다. 잠시 후 우현에 한 번 더 튀어 오른다. 돌고래다! 아내가 소리 지르며 반기고 촬영하려는데, 그것으로 끝이다. 이상한 일이다. 보통 돌고래는 떼를 지어 다니고 20~30분은 놀다 가는데, 한 마리라니.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걸까? 홀로 나타난 저 돌고래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쩌면 돌고래도, 저 배는 뭔데 혼자 이 밤에 돌아다니는 거야? 하고 궁금해서 온 걸 수도 있지. 고독한 무리 동물들의 짧은 해후였다. 우리는 6시간 후에 Pilos 앞을 지난다.
오전 7시 31분. Nestor 쪽에서 구름을 뚫고 해가 솟아나온다. 바다의 무채색 사물들이 비로소 색을 찾기 시작한다. 세상은 밤의 여왕에서 벗어나 헬리오스(그리스어: Ἥλιος)의 통치권에 들었다. 생물들은 온기를 되찾는다. 주변에 통나무 몇 개가 떠다닌다. 사고 날 정도는 아니지만 신경 쓰인다. 갑자기 작은 파리 두 마리가 나타났다. 뭍에서 50마일 이상 떨어진 곳인데, 어떻게 이 배까지 왔을까? 생명 현상은 정말로 신기하지만, 이제부터 음식물에 뚜껑을 꼭 닫아야겠다. 아무래도 봄이 시작된 모양이다. 잔잔히 춤추는 너울, 호수 같은 바다를 건너고 있다.
이탈리아 오트란토 항에 들어 갈 때, 통발 그물 같은 것을 두세 개 보았다. 마리나 입구에는 두어 명이 카약을 타고 있었다. 그 외엔 유럽의 바다가 아주 깨끗했다. 양식그물이나, 정치망이나, 총총히 박아 놓은 통발 등을 본적이 없다. 그리스 해안을 5~10마일 떨어져 운항하며 그물을 단 한 개도 보지 못했다. 해안에서 조금만 떨어져도 수심이 1,000~3,000 미터가 되어서일까? 늘 그물 가득한 바다만 보아 온 나로서는 신기한 일이다. 이들도 어업이 있고 굴과 홍합을 먹는다. 그런데 이렇게 텅 빈 바다라니. 나 같은 세일 요트 선장은 너무 고마운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어업 형태와 너무 다르니 궁금하다. 유럽 항해를 하는 세일 요트 선장들은 그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오전 8시, 아침은 어묵 국이다. 이게 1월 29일 로마에서 산건데, 냉장고에 보관했지만 걱정은 되네. 표면을 살펴보고 냄새를 맡아봐도 이상한 것 같지는 않다. 서양 파와 감자, 진간장을 넣고 푹 끓였다. 냄새와 맛이 훌륭하다. 밥과 어묵 국을 아내에게 주었더니 웬걸 리나가 더 잘 먹는다. 결국 대부분을 리나에게 양보한 아내를 위해 한 그릇 더 퍼온다. 여전히 한국식을 애호하는 아내의 식성에 준비한 한국 음식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감자를 많이 샀으니 조만간 감자를 위주로 요리해야겠다.
오전 9시. 다시 돌고래다. 이번엔 제법 많다. 앞쪽으로 두세 마리가 뛰고 돌아보니 배에서 50미터 지점에 5~6마리가 더 보인다. 잠깐 촬영하고 나니 사라졌다. 10분도 안 놀고 갔나보다. 돌고래 입장에서 별 재미가 없었나 보다. 매번 돌고래를 보면 신대륙 발견한 것처럼 난리를 쳤는데, 이젠 그만하라는 의미인가보다. 고마해라 시끄럽다. 뭐, 그런 의미?
오전 10시. 배 한 척 없는 망망대해. 리나를 샤워 시키고, 3일 만에 군대식 샤워로 씻었다. 피부를 닦았는데, 뼛속까지 시원하다. 엔진 열로 온수를 쓸 수 있어서 정말 좋다. 이오니아 해를 달리는 세일 요트 안에서 더운 물 샤워라. 더 바랄 것 있겠는가? 이런 호사라면 나는 소박한 사람이라 할 수 없을 거다. 이제 하루 4시간, 28시간이면 크레타에 도착이다. 예상은 내일 오후 2시 30분. 그대로 되기를 소망한다.
오후 2시부터 천둥번개가 엄청나게 친다. 비가 내린다. 하지만 소나기처럼 굵게 내리지는 않는다. 우리는 담요를 선내로 옮기고 비를 피하려 애쓴다. 그러나 빗방울은 교묘하게 우리의 옷깃으로 파고든다. 아내에게 선실로 들어가라고 한다. 그러나 선실 내는 멀미가 심해지므로 들어가지 못하고 방수복을 껴입는다. 리나는 뽀로로를 보며 간식도 먹고 건강하게 잘 있다. 어묵국에 말은 밥을 몆수저 먹고 빵도 먹고, 초콜릿도 먹는다.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어느 순간 카톡이 무더기로 와있다. 답신은 안 된다. 문자는 가고 인터넷은 안 된다. 거대한 카고선이 뒤에서 나타가 좌현 전방으로 사라진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다. 만약 우리 배에 부딪친다 해도 전혀 감도 못 잡을 사이즈다. 앞으로도 마주칠 배들의 조타수가 레이더를 잘 보고 있기를 기대한다.
오후 3시 30분. 비가 그쳤다. 이오니아 해에 갑자기 햇살이 퍼지고, 우현에 그리스가 보인다. 구글맵을 보니 칼라마타, 스파르타 등의 지명이 보인다. 인터넷이 안 되니 정말인지 확인은 어렵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모르니 답답하다. 그래도 저 안에 스파르탄들이 살고 있다. 지금도 그렇게 혹독한 훈련을 하진 않겠지. 아내는 스파르타를 어제 구글맵에서 보고 나를 떠올렸다고 한다. 왜? 10마일 전방에서 보기엔 한려수도 같은 느낌이다. 해안 절벽의 속살이 멋지다. 우리 가족은 드디어 그리스에 접근중이다. 오늘 밤부터는 그리스 내해로 들어간다. 큰 섬들이 있다. 야간 견시를 잘 해야 한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항해하여 마침내 그리스를 본다. 이런 게 항해다.
오후 4시 30분 풍향을 살피는데 뭔가 이상하다. 풍향계 화살이 없다. 미스트랄이 가져간 모양이다. 전자식 풍향계는 정상 작동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모처럼 바람이 빔리치라 세일을 다시 편다. 지중해에서는 바람이 너무 자주 바뀌어 세일을 계속 접었다 폈다 했다. 전동 윈치가 있어도 나이가 있으니 입에 단내 난다. 바람 방향도 자주 바뀌지만 풍속도 계속 바뀐다. 바람이 불다, 안 불다, 계속 바뀌니 도무지 세일 펴고 쉴 새가 없다. 지금도 혹시 싶어 집세일만 폈더니 20분도 안되어 펄럭인다. 이제 인터넷 되는데 가면, 먼저 세계일주 하신 선배 선장님들께 질문해 봐야겠다. 기주와 범주는 각각 몇 % 정도였나요? 하고 물론 무동력 무기항 세계일주 항해를 하신 김승진 선장은 100% 범주였겠지만, 그 외의 항해에 대한 질문이다. 세일요트의 범주 항해에 관해서는, 일단 아드리아해, 지중해 모두 별 재미가 없었다.
오후 7시. 아내에게 라면을 끓여주었다. 다행이 그건 잘 먹었다. 리나는 자신의 어묵 국 먹기를 즉각 멈추고, 엄마의 라면에 달려 든다. 요즘 엄마가 먹는 건 다 먹으려고 덤빈다. 엄마 신발도 신어 보겠다고 난리다. 보고 있으면 미소가 절로난다. 딱 거기까지다. 얼마나 말썽을 피는지 정신이 하나 없다. 온갖 스위치는 다 눌러 보려하고, 갑판으로 나가겠다고 난리다. 아내는 리나의 안전 줄을 더 튼튼한 것으로 바꾸자고 한다. 내일 크레타에 도착하면 리나 구명조끼를 더 실용적인 것으로 구해봐야겠다. 신라면이라 어묵 국에 넣어 헹구어 먹인다. 엄마의 라면 하나를 다 먹어도 모자랄 기세다. 겨우 18개월 주제에. 그러자니 싸기도 엄청 싼다. 아까는 큰 배들이 주변으로 막 지나가는 상황에, 세일을 조정하고 연속 동작으로 똥 기저귀를 갈았다. 아기 아빠 선장은 이래저래 바쁘다.
해가지자, 5마일 거리의 해변 마을에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나비오닉스에 Ak, Toinaro 라고 표기 된다. 마을 위에 승천이라도 하듯 커다랗게 북두칠성이 걸려있다. 산을 넘어 가는 고압선 표시등이 깜빡인다. 그리스의 저녁이다. 그들은 어떤 저녁을 보내고 있을까? 생선회에 소주는 아니겠지만 그들만의 저녁식사와 밤 문화를 즐기고 있겠지. 부디 모두 행복하시기를. 바다에서 불 켜진 마을을 바라보니 강릉 안인 부근의 야경 같다. 여러 번 반복하지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 밤바다에 바람이 없다. 기껏 펴놓은 메인 세일이 펄럭인다. 집세일은 아까 접어 버렸다. 파도에 비치는 달빛이 좋다. 이제 Nisos Kithira 섬 까지 7시간을 더 야간항해를 하고 크레타 쪽으로 침로 변경이다. 그리스 해변 마을은 현실의 저녁을 맞고, 나는 이오니아 해의 배 위에서 신화의 밤을 맞는다.
3월 3일 새벽 0시 47분. 야간 견시 하던 아내가 나를 깨운다. 아까 먹은 라면에 속이 안 좋다고 한다. 이번 항해에 많이 힘들어 한다. 가엾다. 어서 들어가 쉬라고 한다. 걱정이다. 항해를 하면서 다행히 건강한 리나를 챙기고 놀아 줄 사람은 아내뿐이다. 함께 수에즈를 보고, 몰디브를 보고, 싱가폴, 팔라완을 보자고 즐거워했는데, 풀 죽은 아내를 보니 안타깝다. 항해 내내 멀미로 힘들 지는 않겠지만, 당장 힘든 건 힘든 거다. 그리스에서 하루 이틀, 출국 수속과 배 수리만 하고 곧장 이집트포트 사이드로 떠나려 했는데, 며칠 쉬어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항해보다 더 중요한 것이 건강이다. 건강해야 뭐든 할 수 있다. 크레타에서 병원에라도 가봐야겠다. 이래저래 힘든 선장의 머리 위로 달빛만 대책 없이 교교하다.
우리 오른쪽으로는 큰 상선들이 지나고, 왼쪽 연안으로는 작은 배들의 항해등이 많이 보인다. 아마 어선이겠지? 그리스의 어부들도 가족을 위해 한밤중 검은 바다로 그물을 던지고 있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거는 모든 가장들은 다 성자들이다. 나는 이오니아 해의 검은 바다에서 성자들의 행진을 보고 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별이 가득하다. 신이여 저들을 축복하소서.
3시 50분. 달이 너무 밝아 뭐든 집중하기 힘들다. 부끄러운 곰보딱지까지 뚜렷하게 보이는 달이다. 달은 바다를 길게 가로 질러와 뱃전 파도에 부서진다. 아내와 리나는 앞 선실에서 기척 없이 잠들어 있다. 아내의 상태가 호전되기를 잠깐 기도한다. 이오니아 해의 밤바다와 달빛이 호흡 잘 맞는 탱고 댄서들처럼 절묘하게 어우러지기에, Jazz 몇 곡을 어둠 속에 풀어 놓았다. Jazz 곡들은 즉시 추억의 타임머신이 된다. 잠시 회상에 잠긴 사이, 전방 시야에 항해등이 보인다. 레이더를 확인하니 상당한 크기의 선박 같아서 나도 상당히 긴장한다. 우리 침로로 접근해 오기 때문. 잠시 긴장하며 레이더를 바라보는 사이, 큰 선박은 곧장 멀어지더니 레이더에서 사라진다. 빠른고 큰 배다. 다시 Jazz에 집중하니 리사오노 –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곡들이 흐르고 있다. 이번 코스 마지막 날 항해는 시작부터 지나치게 로맨틱하도다.
오전 6시 30분, Antiky thira 섬이 보인다. 그런데 Antiky thira 섬 우측으로 10마일 정도에 작은 섬이 두 개 더 있다. 해도에는 나와 있지 않다. 임의로 해로를 잡을 떄 저런 게 가운데 있으면 사고다. 나비오닉스, 이 자식들이 해도를 대강 만드네. 뱃사람의 생명이 걸린 일인데, 투덜대며 구글 맵을 열어도 작은 섬은 나오지 않는다. 해도 만드는 기준은 충족되는지 모르지만 작은 요트 선장 입장에서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다행이 레이다에는 모두 포착 된다. 박규희의 기타연주를 들으며 크레타 앞 Antiky thira 섬으로 접근 중이다.
Rpm 1,500 속도 6.7노트. 배는 쾌속 전진 중이다, 아내가 요트! 라고 해서 바라보니 Antiky thira 섬 앞에 요트 한 대가 유유자적 세일링 중이다. 집세일을 펴고 태킹한다. 섬에서 나온 배겠지? 그럼 저기도 마리나가 있다는 말인데. 인터넷 되는데 가면 검색 해 봐야겠다. 미리 알았으면 잠시 들러 볼 것을.
오전 7시 30분. 밥을 짓고 카레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 그런데 왜 수돗물줄기가 이리 약하지? 모터에 이상이 생겼나? 일단 물을 끄고 물탱크 게이지를 보니 헛! 반이 남았다. 어딘가 물이 샌다. 각 화장실을 열어보니 앞 선실 화장실에 물이 틀어져 있다. 알고 보니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나는 늘 수도 모터 스위치를 끈다. 아내가 화장실 갔다가 물이 안 나오니 그대로 틀어 놓고 들어 간 것. 멀미로 비몽사몽간이니 그랬다. 그러다 내가 나와 수도 모터 스위치를 열고 부엌일을 하니 그동안 물이 계속 쏟아져 나가고 있었던 것. 흔히 할 수 있는 실수지만 결과는 치명 적일 수 있다. 오늘은 우리가 입항하는 날이지 망정이지, 장거리 항해 도중에, 실수를 깨닫지 못하는 사이, 수돗물이 모두 빠져 나갔다면 정말 난감한 상황이 될 거다. 선장이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크루가 멀미를 심하게 하면 매번 화장실 수도꼭지들을 점검할 것! 현재, 앞 탱크는 물 100%, 뒤 탱크는 50% 있다. 해프닝으로 끝나서 다행이다.
오전 9시. 나는 카레 밥, 아내는 맨밥에 물 말아서 멸치 볶음, 리나는 계란후라이, 밥, 김해서 한 그릇 뚝딱이다. 세 식구 배부르고 배 속도는 7.1노트. 도착 시간도 앞당겨져서 오후 1시 도착이다. 4시간 남았다. 파도 있어 롤링이 심하다. 지금 배 앞은 망망대해다. 정 동쪽으로 순항 중이라 햇살이 강해 정면을 바라볼 수 없다. 도저히 20해리 앞에 육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있다. 흰 구름 아래로 육지의 검은 그림자가 언뜻언뜻 비친다. 저기가 크레타. 진짜 있기는 있구나.
오전 10시. 햇살과 구름에 숨어 모습을 보이지 않던 크레타가 갑자기 그 형태를 드러낸다. 울릉도, 독도, 제주도. 섬이 나타나는 방식은 모두 같다. 아주 멀리서 보일 듯 말 듯 애를 태우다, 지금처럼 완전한 형태로 척! 나타난다. 예전 수업시간에 크레타에 대해 잠깐 들은 것도 같은데 기억의 저편이다. 그저 수에즈에 가기 전 식량과 장비 보강을 위해 들리는 곳이라 공부가 너무 없었다. 도착해서 이런 저런 공부를 좀 하자. 일단 지중해에서 5번째 큰 섬이고, 그리스에서 제일 큰 섬이며, 제주도 보다 6배 면적에 인구는 60만이란다. 호주나 다른 나라서 그리스 요리를 파는 곳을 많이 보았는데, 정작 한 번도 먹어 본 적은 없다. 이번엔 그리스 요리를 확실하게 먹어보자.
오전 11시 30분. 하니아 마리나 담당자인 Mr 스피로와 통화했다. 앵커링 하라고 해서 어, 우리는 물과 전기가 필요하다 하니, 임시로 무어링 하고 연락하면, 우리에게 온단다. 아 그런 뜻이었군. 좌우 펜더들을 내리고, 앵커와 바우 트러스트 전원을 켠다. 계류 줄도 풀어서 던지기 좋게 만들고 계류 준비를 마친다. 곧 크레타 섬의 하니아 마리나다.
오후 1시 55분 Mr 스피로와 다시 통화 한다.
우리는 하니아 마리나 접근 중.
오케이 내가 네 배를 보고 있다. 앵커링 하지 말고 곧장 폰툰으로 들어와라.
오케이. 곧장 폰툰으로 간다.
폰툰에 도착하니 Mr 스피로가 대기 하고 있다. 서로 계류 줄을 던져 배를 잘 묶고 악수한다. 나는 엔지니어가 필요하다. 오케이, 하지만 너는 지금 피곤 할 테니 쉬어라. 내일 오전 9시에 다시 올게, 그때 자세한 이야기를 하자. 오케이 그러자. Mr 스피로는 가고 우리는 일단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부둣가의 Pallas 식당은 젊은이들이 득시글한 멋진 곳이었다. 음식도 우리 입맛에 딱 이었다. 가격은 3가지에 우리 돈 9만 원정도. 비싸다. 그러나 후회 없는 맛이었다. 간단히 공공 화장실과 샤워 실을 보고 왔다. 오전 8시~ 오후 8시까지. 수건 등은 모두 개인 지참. 당연하다. 마리나 곁 올드 타운이 너무 고풍스럽고 멋져서 잠시 걸었다. 지금까지 유럽보다는 거리 풍경이나 식당들이 훨씬 우리 쪽에 가까웠다. 갑자기 엄청나게 피로가 몰려왔다. 내 눈이 새빨개졌단다. 그렇겠지. 오늘은 내내 야간항해(Red eyes)를 했으니. 일단 자자. 내일일은 내일로 미루자, 혹시 안 해도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