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0:1-42,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 24.6.19, 박홍섭 목사
사무엘상 20장은 사울의 다윗 살해 의지를 확인한 요나단이 다윗과 언약을 체결하고 그를 피신시키는 내용입니다. 이로써 다윗은 기나긴 10여 년의 도피 생활을 시작합니다. 지금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사무엘이 있는 라마 나욧으로 가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숨어 있을 수 없음을 압니다. 사울의 살해 의도는 여전했으며 자칫 잘못하면 자기 때문에 사무엘까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가서 하소연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너의 아버지가 이렇게 나를 죽이려 하냐고 자신과 죽음은 한 걸음밖에 안 될 정도로 위급하니 나를 위하여 너의 아버지 사울의 진심을 확인해서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내일이 신하들이 왕과 함께 식사하는 월삭인데 그때 식사 자리에 없는 자신을 사울이 관대하게 넘어가면 죽일 의사가 없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나를 죽이려는 마음이니 확인해 달라고 저번에 맹세한 언약을 근거로 부탁합니다(3-8). 8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원컨대 네 종에게 인자히 행하라. 네가 네 종으로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하게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으면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아버지에게로 데려갈 이유가 무엇이냐 하니라”
이에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마음을 확인하여 반드시 알려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만약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다윗을 평안히 가도록 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여호와께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라는 자기 저주의 맹세로 다윗과 언약을 맺습니다. 12-16절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증언하시거니와 내가 내일이나 모레 이맘때에 내 아버지를 살펴서 너 다윗에게 대한 의향이 선하면 내가 사람을 보내어 네게 알리지 않겠느냐 그러나 만일 내 아버지께서 너를 해치려 하는 데도 내가 이 일을 네게 알려 주어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와 함께 하신 것 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이처럼 요나단은 다윗을 살려주는 일에 자기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나아가 다윗에게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고 부탁하면서 언약을 맺습니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 상황입니까? 다윗이 요나단에게 부탁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요나단이 다윗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을 치시라는 청원까지 합니다. 다윗의 대적이 누구입니까? 자기 아버지 사울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택하시고 세우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사울이 정당한 이유 없이 다윗을 죽이려 하며 그렇게 다윗을 죽게 내버려 두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을 편들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편드는 아들 요나단에게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이라 욕을 하고 빨리 다윗을 끌어오라고 하면서 요나단을 창으로 죽이려 합니다. 이런 사울의 마음을 확인한 요나단은 사울의 식탁에서 떠나 다윗을 위하여 슬퍼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미리 약속한 대로 다윗에게 사울의 살해 의도를 알립니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을 맞추고 같이 울며 헤어집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보내면서 여호와께서 영원히 너와 나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합니다. 이로써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두 번째 언약이 확인되고 다윗의 긴 도망자 생활이 시작됩니다(20:16, 42).
요나단은 사울과 부자지간의 인연도 뛰어넘어 다윗을 사랑했으며 자신에게 위험이 올 수 있음에도 다윗을 살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 둘의 관계를 성경은 언약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그 언약의 관계가 요나단으로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게 했습니다. 훗날 다윗은 요나단이 죽었을 때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자신을 향한 그의 사랑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다고 말합니다(삼하 1:26).
요나단이 어떻게 다윗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13절 후반부를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와 함께하신 것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함께 하신다’의 시제가 사울에게는 완료이지만 다윗에게는 미 완료입니다. 이제 곧 사울의 시대가 지나고 다윗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끊어 버리실 때 다윗이 베푸는 인자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살게 할 유일한 원천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다윗에게 달려 있음을 알았기에 요나단은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그와 맺은 언약 안에 둘 수 있었으며 다윗을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참된 사랑은 언약의 관계에서 그 진정한 의미가 나타납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는 단순한 인간의 우정과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윗과 자신을 바라보았고, 하나님의 뜻이 다윗에게 임할 때 다윗이 베푸는 인자가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좌우함을 알았습니다. 다윗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다윗에게 있었고 하나님의 인자가 다윗을 통해 자신에게 베풀어짐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에는 여호와의 뜻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요나단이 자손 대대로 너와 나 사이에 여호와가 계실 것이라고 맹세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단순한 우정의 관계가 아니라 여호와를 중심으로 한 언약의 관계입니다. 그 언약 안에서 자신의 생명처럼 다윗을 사랑할 수 있었고 다윗에게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가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멸망 당해 마땅한 우리에게 독생자를 보내셔서 인자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여호와의 인자를 경험하고 생명을 얻고 사랑을 배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언약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우리에게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언약입니다. 언약에서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순종이 나왔고 그 언약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원수에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이끌었습니다.
성도와 성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관계 속에 계시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 없이 형성된 관계라면, 우리의 관계가 언약적 사랑과 연관이 없다면 이해관계로 얽힌 세상의 인간관계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다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친목 모임일 뿐이겠죠. 그런 관계는 아무리 친하게 어울리고 함께 밥 먹고 웃고 노는 관계라 할지라도 사랑의 관계는 아닙니다. 친하게 잘 어울린다고 사랑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서로 예수님이 계신 관계로 만난다고 자신에게 맹세해야 합니다. 그래야 소유와 신분, 지위와 권력을 떠나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를 지켜줄 수 있고 생명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이끌어가고 있는 인물은 다윗이 아니라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왕으로서 누릴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보다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이 자신의 가장 강력한 정적임에도 그는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기뻐하여 아버지가 아닌 다윗을 택하였고 다윗에게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았다면 할 수 없는 결단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내려놓고 또 내려놓으며 다윗과 친구가 되어 그의 편에 서서 그를 위해 수고하기를 기꺼워합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아버지의 반대편에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살며 언약 안에서 사랑하며 사는 삶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