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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6:37-38, 교회와 성도에게 요구되는 삶의 윤리2, 7.21, 박홍섭 목사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 몸 된 교회와 그 지체인 성도들에게 주신 삶의 윤리가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랑하되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렇게 살아서 너희 아버지가 자비로운 하나님임을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지독한 자기중심의 이기성을 가진 우리에게는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렵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어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라고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기 합리화로 외면하거나 피해갈 수 없는 말씀임을 알고 순종하려고 할 때 가난하고 주린 마음과 애통하는 마음이 생기고 주님의 은혜가 주는 긍휼의 능력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주님이 계속 구체적인 내용을 이어가십니다. 너희는 비판하지 말라 하십니다. 정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도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 헤아리지 말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받으려 하기 전에 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 정리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바른 판단과 분별을 금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이나 선악에 대한 올바른 분별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 분별력이 없으면 위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시대를 분간하고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눅 12:56-57) 마태복음 산상수훈의 결론 부분에서도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여 가려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15-23). 우리는 선과 악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분별력이 있어야 이 세상이라는 무대를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럼, 여기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헤아리지 말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다른 사람의 재판관 역할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정죄하지 말라고 할 때 정죄는 재판관이 피고인에게 형량을 선고하여 내리는 법정적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렇게 법적 선고에 해당하는 판단을 자기의 기준으로 내려서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고 비판하고 “너는 이런 심판을 받아 마땅해”라고 정죄하는 것은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월권이고 교만입니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악을 경고해야 하지만 사람들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본문이 원수 사랑에 관한 문맥이므로 여기 비판과 정죄의 일차적인 대상은 원수입니다. 그냥 다른 사람 정도가 아니라 원수에 대해서 내가 그 원수를 판단하고 정죄하여 갚으려고 하지 말라고 하시니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원수를 원수로 대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쉽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그런 본성대로 살지 말라고 하시니 어렵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왜 비판과 정죄가 마땅한 사람에게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까? 주님은 너희가 비판받지 않고 정죄받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헤아리지 말라는 이 말씀은 원수 사랑의 문맥이고 바로 앞에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원수를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원수 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자녀 삼아주었기 때문이라는 논리입니다. 어렵지만 설득이 되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비판받지 않기 위해서 비판하지 말고 정죄 받지 않기 위해서 정죄하지 말라고 하시니 갑자기 그 논리에서 이탈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논리를 강화하기 위하여 앞에서 제시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비판하지 않아야 비판받지 않고, 정죄하지 않아야 정죄 받지 않고, 헤아림 받지 않으려면 헤아리지 말고 용서받고 싶으면 용서하고, 받고 싶으면 주라는 말씀이 전부 황금률의 적용입니다. 주님이 황금률을 제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그 원리를 하나님에게까지 연장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마 6:14-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내가 남을 대하는 모습에 따라서 하나님도 나를 그렇게 대하신다는 황금률의 연장입니다. 오늘 본문 전체가 그런 의미의 황금률이고 마지막도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라고 황금률로 끝이 납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언제 우리가 비판하고 정죄합니까? 황금률을 잊어버릴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를 잊어버릴 때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에게 받은 은혜가 실종될 때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였던 내가 하나님께 받은 자비와 은혜를 기억하고 있어야 받은 그것을 그대로 다른 사람과 나의 원수에게 돌려줄 수 있는데 그 은혜와 자비를 다 잃어버렸으니 돌려줄 수가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과 원수를 비판과 정죄와 헤아림의 대상으로 삼아 공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 우리가 타인을 비판하고 원수를 정죄합니까?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런 비판과 정죄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헤아림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황금률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을 때입니다.
주님은 복수심으로 가득한 그런 분노와 교만의 삶을 살지 말고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너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대로 비판과 정죄와 헤아림 대신 용서하고 베푸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 안에 있는 천국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원수였던 너희가 용서받고 은혜 안에 있듯이 너희도 원수를 그렇게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는 것도 힘든 데 용서하고 주고 베풀라고 하십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황금률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이런 대접을 받았으니 나를 힘들게 하고 내 것을 빼앗아 가며 내 뺨을 치면서 모욕하고 조롱하고 억압하며 나를 억울하게 하는 원수를 그렇게 대하라고 하십니다.
정말 우리의 본성과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원수를 사랑하는 방식이 아니라 원수를 제압하고 다시는 그 사람이 내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무릎 꿇리는 방식으로 작동됩니다. 말씀을 따르지 않고 본성을 따라가면 신앙도 원수를 무릎 꿇리고 제압할 수있는 힘과 권력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때 비판과 정죄는 나의 정당함과 권리와 자리를 지키고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그러나 누구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그를 비판하고 정죄하여 자기를 증명하는 방법은 참으로 가난한 자기 증명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렇게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만들어내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자녀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신 그 방식과 내용을 담은 황금률의 삶으로 증명하라고 하십니다. 비판과 정죄가 아닌 용서와 베품의 방식입니다.
세상 나라와 얼마나 다릅니까? 세상은 언제나 “지지 마라, 양보하지 마라, 왜 손해 보냐, 눈을 부릅뜨고 너의 권리를 지키고 옆의 사람을 이기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네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고, 비판하지 말며, 정죄하지 말고, 헤아리지 말고 용서하고 베푸는 삶을 살라”라고 하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이 우리를 명분과 규칙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경직성을 뛰어넘어 사랑과 용서와 인자와 자비로 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나의 길을 따르고 나의 생명과 진리 안에 있다면 선과 악을 분별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지언정 원수갚는 것은 내게 맡기고 원수를 사랑하되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고 베풀라고 하십니다.
이 신앙의 요구가 왜 주어지며 어떤 원리로 요구되는지를 모를 때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2:1-8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우리는 이렇게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판단 앞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과 용납하심, 길이 참으심이 필요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에게 쉬운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내가 받은 대로 갚아주기를 원합니다. 본성적으로 비판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만 아니라 원수의 필요를 공급하는 적극적인 사랑까지 요구하십니다. “주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그렇게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너희도 그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이 말씀에 응답할 수 있습니까?
2006년 10월 2일 월요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랭커스터 카운티 니켈 마인즈(Nickel Mines)라는 아미쉬 마을의 작은 시골 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오전 수업 시간 중, 40대 남성이 픽업 트럭을 몰고 학교에 침입하여 총을 난사했고 5명의 여자아이가 사망했습니다. 인근에 사는 우유배달 트럭 기사인 범인은 경찰과 총격전 끝에 자살했습니다. 이 사건은 작은 시골 마을에 일어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더 엄청난 이유는 아미쉬 마을 사람들의 그다음 행동 때문입니다. 그들은 범인의 집을 찾아가 그 아내와 가족들을 위로했습니다. 범인의 아버지 팔을 감싸 안으며 “우리는 이미 모두 용서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살인범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의 절반이 피해자 가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장례식에 참석하여 위로하였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피해자 가족들에게 보낸 성금의 일부도 살인범의 가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들 역시 가장을 잃은 피해자 가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후에 한 피해자 부모는 어떻게 그렇게 용서할 수 있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높은 수준의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 수 있도록 은혜와 힘을 주시고 있습니다. 지금도 비판받아 마땅하고 정죄와 헤아림을 받아 마땅한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판단하지 않으시고 기다려주고 계십니다. 이 길을 먼저 걸어가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해도 주님은 강하십니다. 우리는 넘어져도 주님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순종함으로 이 길을 걸어갈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고 그를 사랑하며 사는 것은 억울하고 손해 보는 삶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 때 예수님으로 인해 내 안에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경험됩니다. 그렇게 살아야 주님 다시 오실 때 완성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기다리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야 우리 자신과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위로와 위로부터 오는 기쁨과 평강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우리의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게 누릴 수 있습니다(요일 2:1). 그렇게 살아야 꾹꾹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우리 품에 안겨주시는 하나님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