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의 설음,북정록으로 본 나선정벌( 羅禪征伐)
아들아, 이번엔 나선정벌(羅禪征伐)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풀어보려고 한다.
한국의 武에서 조총 이야기를 다룬바 있었지..그때 짧게 얘기한 나선정벌에 대해 관심을
보인 분들이 있어서, 그 이야기를 한번 다루어 보려고 하는데..
아빠는 그때의 전술이나 무기에 대해 얘기하는 것 보다는 나선정벌의 배경과 전개를
큰 흐름에서 보여주고, 그 역사의 뒷 이야기에서 배우고 생각할 거리..역사의 교훈에
중점을 두고 말하고자 한다.
나선정벌도
아들아, 나선정벌이라 함은..중국 동북부를 흐르는 중국명은 흑룡강(黑龍江),
러시아명 아무르강 유역을 중심으로 청과 러시아간의 국경분쟁이 발생하여,
우리 조선이 청의 파병요청에 따라 조선군 조총부대를 파병하여 1654년과
1658년 두차례에 걸쳐 러시아와 전투를 벌였던 사건을 말한단다.
아들아, 이야기를 1658년 나선정벌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1636년 12월,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가 14만의 대군을 이끌고 한겨울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했단다.
우리의 산성을 지나치며 순식간에 한성까지 진격해오자 인조는 놀라 강화로 피신하려 했으나
청군의 진격이 빨라 강화로 가는 길을 끊겼고, 강화는 곧 무너졌단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근왕병의 구원을 기다리며 45일간 힘겹게 저항했지만,
강화가 무너지고 곳곳에서 근왕병들이 패퇴하며 힘을 잃었고, 또 남한산성 내에도
가혹한 추위와 군량부족까지 겹치며 극한까지 몰린 끝에 결국은 항복을 해야 했단다.
1637년 1월 한강 가의 삼전도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 앞에서 무릎꿇고 삼고두구배례의
예로 항복의식을 치르는 수치를 감내해야 했지.
이 전쟁의 결과로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청을 황제국으로 섬겨야 했으며, 세자와
왕자 등 왕실인사, 고관의 자녀를 인질로 청에 보내야 했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함께
청의 요구가 있을시 군사를 파병하겠다는 약조를 해야 했단다.
아들아, 이게 병조호란, 조청전쟁의 전말이었다.
조선의 화승총
그런데..우리가 조청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야빈대, 양고리 같은 청군의 고위 지휘관이
용인 광교산과 김화의 백전에서 조총병이 주축이 된 조선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큰 타격을 입었지.
그래서 이런 이유로 청군이 조선 조총병의 위력을 눈여겨 보게 되었어.
병자호란, 조청전쟁 후, 세월이 지났지. 그때 조선의 왕이었던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했단다. 효종은 봉림대군으로 불리던 시절, 형인 소현세자 내외와 더불어
청으로 가 오랜 세월을 볼모로 생활했단다.
소현세자는 청이 국력을 키워 어떻게 천하를 장악했는지 관심을 가지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배우려는 생각을 했고, 봉림대군은 나라의 힘을 키워 청에 당한 수치를
갚으려는 생각을 했지.
소현세자가 인조의 미움을 받고 또 의문의 죽음을 맞은 후 봉림대군이 새로운 세자가
되고 또 그가 즉위했어.
훈련대장 이완(李浣,1602~1674)과 송시열(宋時烈,1607~1689)등을 등용하였고,
군비를 확충하며, 중국대륙의 대세가 혼란스러운 때를 대비하며 기다렸지..
그러나, 북벌(北伐)은 그냥 꿈이었단다. 현실이 될 수 없었지.
청나라는 날로 강해졌고, 청나라의 중국대륙 장악은 더 굳건해졌지.
그렇게 북벌은 자연스럽게 좌절이 된거야.
사실 효종도 알고 이완과 송시열도 알았을거야.
북벌이 얼마나 허황되고 무모한지를.
====
그런데..이때쯤에 중국 대륙 북동부에는 심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어.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넘어 세력을 확장해왔고, 청나라와 흑룡강 유역에서 부딪혔지.
청군과 러시아군이 수차례 전투를 벌였는데..전세가 청군에 불리했고, 청은 조선에
그들을 도울 조선군 조총병 파병을 요구했단다.
그리고 조선은 조청전쟁 후 청과 맺은조약에 따라 조선군 파병을 결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
1654년에는 변급(邊岌,생몰년미상) 장군이 조총병 1백여명을 이끌고 원정길에 나서
조선군은 큰 활약을 펼치며, 승전을 하고 무사귀환 했고, 물러갔던 러시아가 다시
진출해오자 청이 조총병 파병을 재요청하여 1658년 신류(申瀏,1618~1680)장군이
조총병 2백명, 초관 60명을 이끌고 2차 나선정벌에 나섰단다.
러시아의 수석식 소총
아들아, 신류 장군은 2차 나선정벌의 출정배경, 부대편성, 보급과 전투상황과 진격로 등
모든 기록을 북정록(北征錄)에 남겼단다.
그때 신류 장군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볼까. 당시 신류 장군은 함경도 병마우후로,
원정군으로 조총병 200, 초관 60명을 이끌고, 흑룡강과 송화강이 합수하는 지점까지
진군했단다. 1658년 6월 10일, 흑룡강에서 러시아군 함대 11척을 발견하고 곧바로
공격에 나섰지.
처음엔 화포로 공격하고 좀더 접근해서 조선 조총병의 조총사격이 이어지고
마지막엔 화공(火攻)으로..그렇게 싸웠고 11척 중 7척의 적선을 태우고
러시아군 사령관인 스테파노프를 포함해 약 270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지.
2차 나선정벌도..조선군 조총병의 맹활약으로 승리하였지.
두차례 나선정벌의 결과로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이 좌절되었고, 흑룡강 유역..
만주 동북 지역의 지배권을 다졌단다.
이 시점부터 약 2백년간 동북아의 안정과 영역을 확정짓는 그 토대는 우리 조선군의
역할에 의해 세워진 것이란 것을 기억해야지.
우리 조선군이 세계사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이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아들아, 그런데 신류 장군은 북정록에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있단다.
조선군이 청군 이상의 활약을 펼치며 승리에 기여하였지만,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간
속국의 군대로서..얼마나 설움을 당했는지..그대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었지.
청은 그들이 필요해서 우리 군을 원군으로 요청했음에도 2차 나선정벌 때는 군량도
대어주지 않고 우리에게 부담하게 했지.
청의 사령관 사이호달은 전투 중에 적선에 대한 화공을 하지 못하게 막고 근접전을
벌이게 만들어 조선군 7명을 전사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사이호달이 러시아 함선내
재물을 탐냈기 때문이었단다.
사이호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전리품, 재물이었지..조선 병사의 목숨은 아니었던거야.
역사저널 그날, 나선정벌편
그리고 사이호달은 전사한 조선군 7명의 시신을 화장하라고 명했지.
신류 장군은 분노했단다. 그들 때문에 남의 나라 전장에 끌려와, 그들의 실책때문에
희생된 사람인데..시신을 모셔가게 하지는 못할망정..불사르라니.
조선의 방식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신류 장군이 강하게 말하여 결국 흑룡강가
언덕에 그분들의 묘를 만들어 애도했단다. 신류 장군은 그때 전사했던 부하들의 출신지
그리고 이름 하나하나 기록하여 비통한 마음을 표현했지.
게다가 사이호달의 악행은 계속되고 있었어.
전쟁 후 전리품을 청군이 모두 독차지했고, 조선군이 취한 것은 러시아군이 보유한
수석식 소총 뿐이었는데..이것도 모조리 빼았아갔단다. 나중에 신류 장군이 강하게
요구하여 겨우 1정 받아내는데 그쳤단다.
조선의 조총병
원군으로 간 조선군에게 군량 지원도 없이 우리가 군량까지 부담하도록 만들더니..
3개월치 군량을 준비해간 우리 조선군을 전투가 끝난 후에도 러시아가 또다시 올지
모른다며 귀환시키지 않고 붙잡아 놓는거야.
어쩔 수 없이 청에 군량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지원받은 군량도 태반이
먹을 수 없는 것이었고, 그나마도 우리가 다시 가져온 군량을 비싼 이자까지 쳐서
갚으라면서 빼았아 갔단다..
양심불량에 파렴치가 딴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이지.
결국은 그래서 우리 조선군은 이국땅에서 굶주림에까지 시달려야 했었다.
보다못한 신류 장군이 지속적으로 강하게 반발하여 뒤늦게 귀환할 수 있었단다.
아들아, 신류 장군은 훗날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오르는 그 시대 대표적인 명장이었다.
그는 북정록에서 나선정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무관으로서 전쟁에 대한 모든 것, 전투상황, 작전, 보급과 부대관리 등 그 모든 기록을
남기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 조선군이 뛰어난 조총 사격술과 작전으로
큰 공을 세웠다는게 아니라 왜 조선군이 수천리 밖 남의 나라, 남의 전쟁터에 와서
싸우게 되었는지..그것도 원수의 나라인 청을 위해서 말이지.
또 힘없는 나라..속국의 군대가 그리고 자체 지휘권이 없는 군대가 겪어야 하는 설움이
어떤 것인지가 아니겠느냐..
약간 경우가 다르다 말할 순 있으나..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안타까운 현실은 우리 대한민국도, 군의 지휘권을 온전히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기에..
만약의 경우..3백여년이 지난 우리도 그때의 그 설움을 또다시 겪지 않는다고...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는 전쟁에서, 우리의 의지와는 다른 전투를 강요받고 그 설움을
또다시 당하지 않는다고 그 누가 장담하겠느냐..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나라의 힘을 키워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하고
우리의 군대는 온전히 우리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나선정벌에 나섰던 신류 장군이 북정록의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아, 아빠 생각에 나선정벌(羅禪征伐)은 어쩌면..3백여년 전 과거가 아닌
3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우리의 현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