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청포도
나옥선
논두렁길 사이로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마법을 부리듯 질주 한다
신작로길 소달구지에 몸을 실자 바람이 엿보다가 주인에게 고자질하고
어머니가 갯벌을 헤치고 붉은발농게를 잔뜩 잡으셨는지 행복해행복해
메마른 풀잎에 앉아 빨간 고추잠자리 노래하고
뻐꾹새 한 쌍이 봄의 숨결에 안착하듯 신나게 왈츠를 춘다
높은 산을 기점으로 흐르는 폭포수, 물먹은 물안개가 사방으로 젖어든다
시냇가 짙푸른 나무들이 기지개를 펴려다가 흠칫,
흙 돌에 끼인 톱날처럼 갈라진 민들레 잎이 뿌리로 흙들을 할퀴고 있다
언젠가 주근깨 여자아이가 쥐어준 빨간 석류 알알이는
피로 물들어 내안에 갇혔는데,
너는 나에게 장독대에 기대어 봉숭아를 보고 또 보는 시인의 흉내를 내게 한다
그해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에...,
새벽 동트기 전 고요 속에서 고난의 행군을 만끽하며
드디어 승리의 깃발을 꽂고 나만의 방식으로 낙하하는 순례자의 길을 걷고
광활한 모래밭에 발을 푹푹 내주어 너의 이름을 쓰고 또 쓰면서 미소 지었지
이슬 머금은 모래 알갱이가 태양빛에 반짝반짝 너의 이름이 사라지는데도 말이야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 나를 붙들었을까,
나는 타인의 서성이는 실루엣에 그만 울음을 터뜨렸지... 텅 빈 꿈이었어.
밤새 꽃잎이 떨어진 마른 목련 같은 나의 몰골은
그렁한 고열로 좁쌀의 붉은 반점이 뜨겁게 몸을 삼켰다
그 해 여름 창호지가 투명하도록 찬란한 방안에 갇혀, 홍역과 싸웠다
아버지가 사뿐히 지고 가는 나무 지게에서 활짝 피어난 진달래꽃을 보아야하고,
저 은빛 바다위에 벌거벗은 숭어 한 마리가 현란한 몸짓으로 튀어 오르기를 반복하는 희한한 풍경을 다시 보자고 우리는 하얀 이를 보이며 눈빛으로 맹세했는데...
단, 하나의 스산한 바람이 분다
흙먼지 묻은 혼탁한 자아는 생채기를 외면하며 홀로 사색하고,
심술쟁이인 나는 착한 나무의자가 필요하다며 아우성이다
전봇대 옆 피마자나무도 덩달아 찐한 향기로 아우성이다
그 때 봉식이 어머니가 하얀 비누거품을 헹구려고 작두샘에 마중물을 먹여주자
동네 개구쟁이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당탕 한바탕 물싸움이네
물벼락에 화가 치민 아이는 눈살을 찌푸리고 누구를 한참 쏘아 보았을까...
내가 검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그때에,
창호지 뚫린 문 사이로 국화꽃 담은 그 아이가 빛으로 씩씩하게 달려왔다
주먹 불끈 쥔 손에 청포도를 가지고... 그런데
이내 청포도를 마루에 가만히 두고 말없이 떠나버렸다
심 쿵 포도송이 입안에 아사삭 터뜨리자 인생의 쓴 포도 맛이다
청포도에 묻어있는 습습한 그 아이의 향기에서 풀벌레 소리가 오래도록 들려왔다
밤을 향해 차가 내달리자,
차창 건너 잿빛의 시골산길에 한 여인이 분홍 포대기에 아기를 업고 서있다
그때의 나의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아기를 안은 저 모습이 나에게 선물이 되어 오래도록 반짝반짝 비추어 주었을까...
우리는 열네 살 여름방학을 끝으로,
햇빛이 눈이 부셔 마음이 모호할 때 오래된 감정들이 거리로 날아갔다
콘크리트 빌딩에 주눅 든 시골소녀가 돈암동 제법 사랑스러운 터전에 꿈을 심으로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에 그리움을 안고 올 수 있었다
“아, 함박눈이 내리는 날.. 내 메일통에 눈 같은 메일이 왔네요..
그것도 여러 통이나.... 장문의 답장은 못 드리고 한걸음 한걸음씩 걷다 보면 어느새 백두산 천지위에 있을 꺼예요..”
“ 메일 읽고 한참동안 웃음이 나와 수업을 못들었네요...
아직도 질척거리는 눈길 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다른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세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고, 일상을 무게로 재지 않고
진달래 분홍 꿈을 안고 노래합니다
진정 우연인지 필연인지 우리 집 냉장고에는 포도봉봉 캔이 나란히 놓여있습니다
“엄마는 포도봉봉만 좋아해?”“심 쿵하니까 사랑스럽지...,”
난 극상품 포도를 달콤하게 먹고자 서둘러 사과 한입 베어 물고 산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