㉓ 마음의 문고리는 왜 안쪽에 있을까
갈릴래아(갈릴리) 호수의 북쪽에는 산촌이 있다.
카파르나움(가버나움)에서 산길 도로를 타고 20분쯤 가면 코라진(고라신)이 있다.
예수는 카파르나움에 거처를 두고 주위 산촌의 회당을 돌아다니며 설교했다.
코라진도 그중 하나였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예수가 코라진을 거세게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
기적을 많이 베풀었는데도 코라진 마을의 주민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11장 21~22절)
‘자루 옷’은 그리스어로 ‘삭코스(원어)’다.
히브리어로는 ‘삭(saq)’이다.
요즘 학생들이 짊어지고 다니는 ‘배낭(sack)’의 어원이다.
구약에서 자루 옷은 죽음을 애도할 때 입었다.
부모나 자식이 죽었을 때도 입고, 남편이 죽었을 때도 아내는 자루 옷을 입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도 입었다.
시편에는
가까운 사람이 아플 때도 그 아픔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자루 옷을 입었다고 한다.
전쟁에서 패했을 때는
패배를 인정하고 고개를 숙인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자루 옷을 입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자루 옷을 입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자루 옷을 입은 이들은 자신의 아픈 마음을 행동으로 드러냈다.
입고 있는 옷을 찢어서 벗기도 하고, 머리에 재나 흙먼지를 뿌리기도 했다.
아예 잿더미 속에 들어가 뒹굴기도 했다.
그리고 금식하며 통곡했다.
예수는 당시 유대의 풍습을 빗대며 코라진을 꾸짖었다.
나는 그 마을을 보고 싶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차를 몰고 코라진 마을로 갔다.
굽이굽이 산길이었다.
올라갈수록 갈릴래아 호수가 눈 아래로 펼쳐졌고,
산촌의 푸른 초지가 능선을 그리며 나타났다.
코라진 마을은 폐허에서 발굴한 유적지였다.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순례객도 없고 관광버스도 보이지 않았다.
코라진의 관리인은
“이곳은 단체 여행객이 좀체 오지 않아요.
주로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순례객이 대부분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입장권을 끊고 안으로 들어가니 제주도의 현무암 같은 돌로 쌓은 담이 있었다.
돌담을 만져 보았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이 마을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고 기록돼 있다.
그리스어 성경을 찾아봤다.
이 구절에서 ‘기적’에 해당하는 단어는 ‘dunamis(두나미스)’였다.
‘힘(power)’ 또는 ‘능력(ability)’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이 마을에서 자신의 ‘커다란 능력’을 보여주었다.
병자를 치유한 능력일 수도 있고, 마음을 치유한 능력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마음의 문고리는 안쪽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밖에서 문을 두드릴 수는 있다.
‘쿵! 쿵!’ 하고 세게 칠 수도 있다.
그러나 밖에는 문고리가 없다.
마음의 문은 안에서만 열린다.
그러므로 회개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가 없다.
설령 그가 예수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예수 역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졌듯이 말이다.
왜 그럴까.
내 마음의 문고리는 나만이 열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십자가는 나만이 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중앙일보] 백성호-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