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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연구 28. 천국에서 누가 크냐? (마 18:1~11)
관찰 및 묵상:
1. 단락의 구조
①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제자들이 논의함.
② 예수님의 대답: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는 큰 자다.
③ 자기를 낮추는 자의 특징 설명: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사람이다.
④ 결코 실족하게 하지 말라: 한 손, 한 발, 한 눈을 없애 장애인이 될지언정 타인을 실족하게 하지 말라.
2.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에 노상 토론이 일어났다. 토론의 주제는 누가 크냐 였다. 아마 누구의 공이 크냐 정도가 아닐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세 번이나 듣고서도 서로 장차 예루살렘에서 받을 공로에 대한 논공행상을 의논하면서 다툼이 일어났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알아차리시고 가버나움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길에서 이야기 한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예수께 질문 드리기를 주님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공이 크거나 수고가 크냐고 했다. 아마 제자들 중에 가장 먼저 부름을 받기로는 요한의 제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이다. 그리고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빌립과 마태 순서가 아닐까? 먼저 온 사람은 텃새를 부리기 마련이다.[1] 이는 포도원에 아침 일찍부터 일하러 온 사람이 하는 질문과 유사한 것이리라.
3.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달랐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그 사람이 천국에서는 가장 큰 자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천국이요 하나님의 나라다. 그 나라에서 큰 자는 누굴까? 그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다. 그리고 뭇 사람의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고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어린 아이 하나를 실제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그들에게 보여주셨다. 실은 그 방에서 가장 작은 자는 그 어린아이였으며 그가 천국에서는 가장 큰 자가 될 것이었다. 왜냐면 다른 사람들은 논쟁하며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면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보다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보다 낮아지는 사람이 천국에서는 더 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으리라.
4.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약한 사람들이 나로 말미암아 넘어진다 또는 시험에 든다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의미가 있다. 언제 실족하는가? 그 사람을 낮추는 다른 사람의 어떤 행동 때문이다.
① 사람을 실족시키는 행동은 손이나 발일 수 있다. 양 손으로 다른 사람을 못살게 굴었다면 한 손만 가진 장애인이 되어 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지 말아서 실족하게 하지 말라.
l 우리 형의 이야기다. 청년 시절 고향 완도에서 교회를 다니던 시절, 어느 날 부친께서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가는데 함께 가자는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오후 늦게 교회에 갔는데 교회 문 앞에서 전도사님이 기다리고 계시다가 뺨을 후려 갈기셨다고 한다. 그 이후로 형은 실족하여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l 나의 이야기다. 행당동에서 전도사로 봉사하던 시절, 예배 중에 밖이 시끄러워 나가보니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이 교회 2층 계단에서 싸우는 중이다. 그 중에 한 아이가 흉기를 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만류하려는데 그 아이는 막무가내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의 뺨을 치고 흉기를 빼앗았다. 아이들은 놀라고 흩어졌다. 오후 예배 전에 그 아이의 엄마는 교회로 찾아와 나에게 따졌다. 나는 사죄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는 아마 그 이후로 실족된 것 같다. 차라리 그럴 경우에는 한 손이 없었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② 눈으로도 실족시킬 수 있다.
l 잠 6:16~19을 보라: 교만한 눈이 가장 먼저 나온다.
:1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2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3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4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l 야고보서 2:1~4도 보라.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l 눈이 둘이어서 완벽하게 다른 사람을 비웃는 눈길을 완성할 수 있어서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한 것이라면 차라리 한 눈을 빼내어 버리면 그는 이미 장애인이 되어 다른 사람을 깔보는 눈은 더 이상 갖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사람을 깔보는 눈길을 피하고 실족시키지 말라는 당부다.[2]
5. 작은 자를 지키는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뵙기 때문에 어린 자들 또는 사람들이 외면하기 쉬운 약자들을 실족하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① 여기서 업신여기다 는 단어를 보자:
κατα-φρονέω, f. ήσω, 아래로 내려다보며 생각하다 to think down upon, 다시 말하면, 깔보다 to look down upon, 가볍게 여기다 think slightly of, 가볍게 대하다 to regard slightly, 무시하다 despise,
l ΦΡΗΝ ἡ, I. 원래는 횡경막(διάφραγμα, the midriff) 또는 복부로부터 심장과 폐를 구별하여 감싸는 근육을 가리키는 말이다. II. 호머는 이 단어를 심장 부분 또는 가슴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했다. 또는 열정의 자리로서의 심장, 생각의 자리로서의 마음으로 사용된다.
l φρονέω, 생각하다. 이해력을 갖다. 현명하게 되다. è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다. 의미하다. 의도하다. è 마음에 어떤 것을 품다, 어떤 것에 관심을 기울이다.
l φρόνημα, ατος, τό, 그 사람의 마음, 정신 è 생각, 의도, 의지. 성경에서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② 업신여기다는 동사가 성경에 사용된 경우
l 교회에 대하여 - 고전11: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l 연소한 지도자에 대하여 - 딤전 4: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l 제사 음식 먹음과 관하여 - 로마서 14: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l 흠이 있는 지도자에 대하여 - 갈라디아서 4: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l 가난한 자에 대하여 - 야고보서 2: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l 예수님께 대하여 - 누가복음 23: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③ 업신여기다는 단어를 성경에서 보면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어떤 경우인지를 알 수 있다. 약자에 대한 횡포, 또는 갑의 횡포라고 할 수 있다.
l 업신여기는 것은 남을 낮게 생각하는 것이니 자신을 높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로마서 12:16에서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라(μὴ τὰ ὑψηλὰ φρονοῦντες 교만한 마음을 버리라)고 하였다. 도리어 낮고 천한 사람들의 벗이 되라고 현대인의 성경은 이 구절의 나머지 부분을 번역한다.
l 업신여기는 것, 곧 남을 나보다 낮게 여기는 것은 남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요 그런 사람은 범죄한 것이다. 도리어 주께서는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라(ταπεινώσει ἑαυτὸν)고 하셨다. 그러므로 마음이 어떤가에 따라 남을 실족하게 하느냐 또는 남을 세우느냐가 결정된다.
④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3]
l 자기를 높이는 자는 자기가 앉을 자리를 찾지만 자기를 낮추는 자는 자리에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디든 앉는다. 왕좌든 말석이든 그에게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천국의 보좌든 낮고 천한 마구간의 말구유든 낮아지신 주님께는 문제가 될 것이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제자들은 지금 자리를 탐내고 있다.
l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주의를 기울이지만 자기를 낮추는 자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다. 코흘리개든 할머니든 그의 친구가 된다. 그를 위협하지만 않는다면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이미 낮아진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같은 존귀한 공의회 회원과도 어울리고 세리와 죄인들까지도 그의 친구가 되는 데 문제가 없었다.
l 눅 18:10~14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오는데 그 말미에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다. 여기서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나와 자기를 높여 자기의 한 일들을 자랑하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우위를 드러낸다. 그러나 세리는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죄인임을 고백한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 칭찬을 구하며 겸손한 자는 하나님께 긍휼을 구한다. 어쩌면 교만한 자는 하나님과 동등함을 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자신이 한 선행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잘 알고 있다. 도리어 그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임을 인정한다.
l 고후 11:7~9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자신이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당시의 모든 순회전도자들이나 소피스트들(순회철학자)은 강의나 설교를 한 후에 꼭 돈을 거두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렇게 하지 않았다. 마게도냐에서 성도들이 후원한 것으로 대신 생계를 이어가고 고린도교우들에게는 재정적 부담을 끼치지 않았다 고전 9:1~11. 때때로 바울은 천막을 치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바울은 이것을 자신을 낮추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기는 낮추는 자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왜냐면 그에게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의 권리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6. 네 마음에 무엇이 있는가? 실족(失足)
① 높은 것, 존귀한 자, 유명한 자에 대한 동경이 네 마음에 가득한가, 아니면 낮은 자들 천한 자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가? 무엇이 네 마음에 있는가?
② 빌립보서 2:5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Τοῦτο φρονεῖτε ἐν ὑμῖν ὃ καὶ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이 말씀은 너희 안에 이것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을 너희도 품으라 또는 담으라는 것이다.
③ 그리스도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그 마음에는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지 못한 자, 회당에 나갈 수 없는 자, 죄인이라 여김을 받던 자들이다. 그들이 예수님 마음에 있었고 그들에게 다가가셨다. 심지어 사마리아 지방의 한 여인에게까지. 그에게는 바리새인들이 가진 종교적 권위나 사두개인들이 가진 세속적 부유함이 마음에 파고들지 못했다. 도리어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눅 6:26고 하시면서 그들을 경계하셨다.
④ 제자들의 마음에는 높은 자리를 추구하는 동경이 있었다. 그것은 욕심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반드시 어린 사람을 실족하게 한다. 작은 자를 돌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작고 보잘것없는 자들은 제자들의 출세로 나아가는 길에 장애물일 뿐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아이들을 가로막아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l 목회자에게 성도들은 잘 돌보아야 할 대상이요 농부에게 사랑스러운 토양과 같이 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성공지향적으로 바뀌면 성도들은 자신의 야망을 위한 수단이 되어 농토를 중장비로 마구 파고 헤집어 놓는 격으로 생명이 자랄 수 없는 토양으로 만들고 만다. 목회자는 작은 자들의 친구가 되어야 하며 각 사람의 현장에서 그들의 삶의 소리를 듣고 관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자는 성도들의 고혈을 빠는 거짓선지자가 된다. 많은 성도들은 실족한다.
l 지도자나 부모 또는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 공동체를 사랑하기보다는 자신의 야망에 마음이 물들어버리면 그 공동체의 개개인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야망 때문에 공동체의 개개인을 희생시키고 실족하게 하는 일이 일어난다. 한 사람의 욕심 때문에 겪는 고통은 온 세상에 가득하다. 부모의 야망 때문에, 나의 욕심 때문에 신음하는 이웃이 있음을 아는 것이 성숙한 믿음이다.
l 교회에서 개인의 욕심을 차리면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게 되고 실족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을 업신여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늘 공적인 유익을 먼저 생각하십시오. 배고파도 참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설령 헤어진다 할지라도 주님의 몸을 먼저 생각하십시오.
l 지도자의 허물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바울은 육체에 큰 가시가 있었지만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말씀 전하는 자나 지도자를 인간적인 모습으로 대하면 그 지도자를 업신여기게 됩니다. 그러면 지도자가 실족하든지 자신이 실족하게 됩니다.
l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신앙생활이든지 공동체 생활에서 나와 다른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음악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클래식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최신 유행가를 좋아합니다. 음식에 있어서 어떤 이는 젓갈을 매우 좋아하고 어떤 이는 젓갈의 냄새도 싫어합니다. 어떤 이는 이런 모습으로 신앙생활하기를 좋아하고 어떤 이는 저런 모습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십시오.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시오.
l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용하십시오. 그들이 불교든 천주교든 심지어 이단을 따르는 사람이든 박해하는 사람이든 그들을 존중해 주십시오. 결코 강요하지 말고 이기려 하지 말고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들도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만 사랑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의 빛 가운데 있습니다.
⑤ 한국 교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큰 교회, 큰 목사, 멋진 예배당, 유명한 교회가 아닐까? 조용하게 이웃의 친구가 되는 일은 생각할 수 없다. 분명 이런 흐름이 우리 나라 교회를 주도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 원인을 우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허현회 씨는 다음과 같이 그 원인을 진단했다:[4] 칼빈은 구원을 신의 축복으로, 그리고 천벌을 신의 저주로 여기면서 항상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청교도의 출발 정신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미국의 청교도는 부를 신의 축복, 가난을 신의 저주로 바꾸었고, 끝없이 개혁해야 한다는 칼빈의 주장은 끝없이 부를 축적해야 한다는 왜곡이 일어났다. 그런 왜곡된 청교도가 한국에 넘어오면서 한국에도 미국의 교회에 일어난 것과 동일한 문제가 발생해왔다. 그것이 재산 축적의 문제, 지도자들의 비리와 부정의 문제들이다.
⑥ 현재 우리 마음에 문제가 생겼다. 마땅히 담겨야 할 것은 담기지 않고 담지 말아야 할 것이 가득한 상태가 되었다. 우리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아야 할 시간이다.
l 이 세상에서 큰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주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려고 하십시오. 왜냐하면 주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거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큰 사람이 되려고 하다 보면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l 작은 거인, 나를 세상의 빛으로 보내신 주님을 노래하는 휠체어 탄 지휘자를 만나보세요. ☆ 인생을 역전시킨 만남 ☆ 차인홍 교수 이야기 http://m.cafe.daum.net/JDPhoto/M6Bm/73?listURI=%2FJDPhoto%2F_rec%3Fpage%3D2&boardType=M®dt=20130831230949
l 멋진 사람들의 친구만 되려고 하지 말고 약하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일하십시오. 나의 유익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결국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잡니다. 천국에서는 자신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작은 자의 친구가 된 사람들을 크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가치관과는 좀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1. 갑의 을에 대한 횡포: 노사갈등, 여야갈등, 학원폭력, 가정폭력, 비정규직 문제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실족시키는 일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상이 되어간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당연시 한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
2. 대형 교회 콤플렉스, 성공주의적 목회자(유진 피터슨): 하나님의 낯을 구하지 않으면서도 성공적으로 사역을 해 나가는 목회자의 자가 진단. 목회자의 자가진단과 아울러 교회와 교우들이 추구하는 방향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정말 맡기시기를 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또는 정말 우리가 하는 이 일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까? 등.
3. 주님 앞에서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삶을 살려면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까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일은 작은 자들의 친구가 되는 일임을 일깨우자. 이것은 큰 인물, 대성공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미 우리 속에 익숙해져 있는 길 곧 삶의 방식과는 반대방향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피하고 싶은 길이요, 금새 잊기 쉬운 것이며, 쉽사리 갖기 어려운 습관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의미와 가치를 확인한 다음에는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실천계획을 수립하여 점검해 나가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이 아니면 이 또한 금방 잊혀지는 설교가 될 것이다.
설교를 위한 문단 및 메시지: 무엇을 전할 것인가?
1.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크고 위대한 것을 훌륭하다고 한다. 이등은 알아주지 않는 세대인 것도 사실이다. 경쟁이 나쁜 것은 아니다. 좋은 목표를 정하고 노력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우리를 가르치는 바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가? 우리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어떤 것이 주님의 뜻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한 것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우리 마음에 결국 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며 지금 내 마음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다.
2.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제자들이 서로 주님의 나라에서 그들이 들어갈 공동체에서 더 큰 자요 더 큰 기여를 했다고 논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누가 더 큰지를 생각하면 그 모임은 그 공동체는 분열을 겪는다. 서로 돕고 섬기고 사랑하는 공동체라야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질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는 서로 더 크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곳이요 더 높은 곳에 이르고자 다투는 곳이요 그것을 잘하는 사람을 뽑아 상 주는 세상이다. 더 낮은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섬기고 사랑하고 돕는 것은 알아주지 않는다. 그건 어쩌면 바보 같은 짓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낮추어야 한다. 사람들의 평판이나 지위를 개의치 않고 서로 진실되이 섬기고 사랑하는 곳이다. 그곳이 바로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 천국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 백성의 삶의 가치관과 원칙을 따라 살아야 한다.
3. 예수께서는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실제로 어린 아이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에 관하여 손과 발로, 그리고 눈으로 어떻게 실족하게 하며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일러주셨다. 차라리 손을 자르라는 것이다. 그만큼 약자를 실족시키는 것을 엄금하는 주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주님을 영접함이라고 하셨다. 스스로 낮추고 작은 자를 섬기고 그래서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교회는 이 세상의 빛이요 소망이요 그리고 나아가 하늘에 있는 천사들에게도 하나님의 영광과 지혜를 나타낼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 누가 이런 원칙과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가? 그들은 주님의 길을 걷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사람이다.
4. 이 말씀이 우리 삶 속에 이루어지면 우리 사회는 더 이상의 갑의 횡포니, 비정규직의 설움이니, 또는 중소기업의 비애니 하는 말들은 없어질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가? 우리 안에 세속적인 다툼과 욕망이 있으며 그 길을 따라 가는가? 아니면 주님의 귀한 뜻을 품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날마다 살아가는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무엇인가? 다음의 노래를 들어보자: 나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주님,
5. 성경 이야기: 제자들의 분쟁과 천국에서 큰 자
6. 예수께서 주신 실족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 손, 발, 눈(에피소드)
7. 작은 자들을 업신여기지 말라.
① 업신여기는 행동은 그러한 마음의 표현이다.
② 마음에 있어야 할 것과 있으면 안 되는 것.
③ 바울의 권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 낮은 자들과 친구가 되라.
8. 우리의 신앙 돌아보기: 우리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가?
4.
[1] 어떤 교회에서는 새로 들어온 성도가 가난한 사람들을 전도하니 여선교회 임원들이 지하실로 그 성도를 불러다가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부자 한 사람이지 가난한 사람들 열명이 아니다. 그들은 교회 출석 장부만 더럽히는 사람들이니 전도를 하지 말라고 했단다. 이런 일은 반복음적인 행동이요 교회에 해악을 끼치는 행동이다. 이것이 텃새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2] 전에 나는 이 구절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내가 보아서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걸 보다가 지옥불에 던져질 것이라면 차라리 한 눈을 뽑아버리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당연히 일어나는 질문은, 그래도 보이는데? 였다. 그러나 이 말씀은 내가 실족하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한다는 말이다. 두 눈으로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깔보는 눈길로 실족하게 한다면 한 눈만 가진 사람이 되어 감히 다른 사람을 깔보는 행동일랑 하지 말라는 것이다.
[3] 오래 전부터 이 말씀을 생각한 바 있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특성을 모두 말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의 무지함이나 좌우를 구별 못함 또는 어리광이나 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라고 명시한다. 어린아이가 어떻게 자신을 낮추는 특성이 있는가? 성경에서 자신을 낮추는 말이 사용된 예는 로마서 12장 16절에서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라는 말씀에 나온다. 이것은 낮고 천한 사람들과도 친구가 되라는 말이다. 실제로 어린 아이들은 누구와도 쉽게 친구가 된다.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에서와 달리 유치원에서는 노인도 쉽게 그들의 친구가 된다. 일단 친절하게 다가가면 6~7세의 어린 아이들은 쉽게 마음을 열고 반응을 하며 다가온다. 그러나 높은 데 마음을 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4] 금년 CBS방송 Christian Now라는 대담프로그램에서 십일조는 없다의 저자 조성기 교수, 뉴스앤조이 대표 김종희, 그리고 병원에 가지 말아야 할 81가지 이유, 그들은 어떻게 권력이 되었을까 등을 저술한 허현회 씨가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2013년 4월 23일자 방송. http://rainbowtv.cbs.co.kr/tv/view.asp?num=233257&page=2&program=chri_now&bt=&pgm=&skey=&sv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