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자격증을 취득해보겠다며 시작한 학원 강의가 막바지로 향할 즈음, 현우석의 출국일도 다가오고 있었다. 3시간의 Full강의를 듣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질 때 진동으로 해두었던 휴대폰이 울린다. 액정화면에 뜨는 이름은 ‘현우석’ 세 글자.
“여보세요?”
“어디야?”
“나, 학원.”
“아, 그럼 오래통화 못하겠네. 내가 문자할게.”
현우석이 달라졌다. 이전 같았으면 내 상황은 상관없이 자신만 바라보고, 자신하고 연락하는 게 우선이어야 한다는 어린 애 같은 투정이 많았다면... 아무래도 그날을 기점으로 현우석의 태도가 많이 어른스럽고, 배려심 있는 사람으로 바뀐 느낌이었다. 하지만 급한 성격은 여전한 현우석.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문자를 보내왔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나 오늘 출국해.’
드디어 오늘이었구나 싶었다. 불과 몇 일전만 해도 ‘상처’를 기억나지도 않게 사랑해주니, 어쩌니 하던 놈이 홀연히 떠난다는 통보를 하는 날이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는 사이 또다시 문자가 왔다.
‘나 꼭 기다리고 있어야 돼. 딴 놈한테 가버리면 그땐 진짜 막장 찍는 걸로 생각해.’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타국에 나가서 생활하는 건데 잘 지내다 와. 건강하게.’
‘난 그게 더 중요해. 그러니까 꼭! 기다리고 있어야 돼. 돌아올 거니까.’
소리 없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누군가가 날 이토록 애타게 바라봐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이 마음이 거짓이 아닌 진심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상대가 있다는 것에 새삼 고마웠다.
* * * *
현우석이 호주로 떠난 지 24시간도 안됐을 시간. ‘국제전화’라는 표시가 떴고, 느낌상으로 알 수 있었다. ‘현우석 이제 호주에 도착했구나’ 라는 생각.
“여보세요?”
“나야!”
“응.”
“난 지금 멜버른에 도착했어. 시차는 한 시간 정도 난대.”
“아 진짜? 그럼 지금 거긴 저녁 6시?”
“응. 벌써 보고 싶은데 어떡하지? 나 여기서 잘 버틸 수 있을까?”
“그래도 적은 돈 들여 간 것도 아닌데, 열심히 해서 끝을 보고 와야지. 안 그래?”
“알았어, 내가 꼭! 돈 많이 벌어서 이루나 호강시켜줄게.”
“왜 말이 그리 튀어?”
“내 삶의 이유는 이루나니까. 기승전이루나니까.”
그것이 현우석이 호주에서 걸었던 마지막 전화였다. 통화를 끝낼 무렵 통화료 아끼라며 전화하지 말라했더니 이렇게 철썩 같이 한통의 연락도 하지 않을 줄은 예상치 못했었다.
* * * *
어느덧 그렇게 6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난 다니던 직장에서 1년차라는 경력이 쌓였고, 공부하던 자격증을 취득했다. 쉬는 날이라 집에 있던 루성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는 날 향해 발톱을 깎느라 시선을 맞추지는 않고 묻는다.
“현우석한테 요즘에도 연락 와?”
“뭐? 그건 왜 네가 궁금해 하는데?”
“엄마한테 듣자하니, 그 형이 너한테 겁나 들이댔다던데 뭐 이렇다 할 결과는 없이 그냥 떠난 거야?”
이루성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군인시절 군기는 빠진지 오래고, 능글맞아 졌다. 다 깎아낸 발톱잔여물들을 정리해서 쓰레기통에 버리더니 마주하고 앉아서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을 짓는다.
“매번 휴대폰에 [국제전화입니다] 라고 찍히는 게 은근 부담스러워서. 괜히 나 땜에 돈 더 쓰는 거 같고... 그래서 돈 아끼라고 전화하지 말랬어.”
“허... 참! 네가 그랬다고 전화를 안 한다고?”
“아마도? 근데 그게 뭐?”
“이게 지금 말을 잘 들어서 안하고 있는 거라고 받아 들여야 돼? 아니면 센스가 없다고 해야 돼?”
“뭔 소리야 이루성.”
“봐봐. 만약 내가 현우석이라면! 좋아하는 여자가 그런 말을 한다 해도 주구장창 연락을 할 거야. 보고 싶고, 만지고 싶어 죽을지경일텐데, 어떻게 그게 돼?”
“사람이 다 이루성 너 같지 않다고 내가 누누이 말했던 거 같은데?!”
씻으려고 욕실로 들어가는 날 잡아 세우고, 더 이상 가만히 보고 둬서는 안 되겠다는 듯 결의에 찬 표정으로 운을 뗀다.
“그러지 말고 이참에 최주원 만나라 너.”
“뭐?!! 그게 무슨 뜬금포?”
“아, 그래! 사귀라고는 안 해. 그냥 연애수업 받는다 생각하고 만나라도 봐. 회사, 집. 회사, 집. 인생 너무 재미없게 살고 있단 생각 안 하냐 이루나?”
“됐고. 근데 굳이 상대가 최주원인 건데?”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한쪽 손을 흔들어 보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루성. 이루성이 그런 생각인줄은 최주원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했었다.
* * * *
썸 비슷한 상황이 있었기는 하지만 이렇다 할 결과가 없었던 주원과 루나. 루성은 가족을 위해 본인의 삶에 재미를 포기한 듯 보이는 루나가 안쓰러웠다. 연애도 제대로 해보려 노력조차 않는 루나에게 약속을 잡아줄 상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루성. 며칠 후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한통으로 루나와 주원의 만남은 시작되는 듯 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누구세요?”
“낯선 전화 받는 목소리는 상당히 앙칼지구나...”
“네?”
“최주원 입니다.”
익숙한 이름 석 자에 루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휴대폰 액정을 한번 확인하고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 최주원은 휴대폰 너머로 재미있단 듯 웃음소리를 슬쩍 뱉으며 되묻는다.
“왜요? 내가 잡아먹기라도 해요?”
불쑥 루나의 앞으로 익숙한 얼굴을 비추며 방긋 웃어 보이는 주원. 루나는 회사에서 잠시 볼일이 있어서 외출을 한 상태였고, 입이 궁금해서 커피나 마셔볼까 하고, 카페에 들어섰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서는 동생친구 놈 이름을 들먹이고, 그 인물이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는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삼키던 침이 사래가 걸린 듯 ‘켁켁’ 거리는 루나. 그런 루나의 등을 능청스럽게 토닥여주면서 ‘우쭈쭈’ 태도를 보이는 주원.
“뭐, 뭐야 너?! 여긴 어떻게?!”
“왜요, 이 카페 누나가 전세 냈어요? 아니잖아요. 나도 근처에 볼일 있어서 들렀다가 커피한잔 하려고 카페에 들어왔는데 누나가 딱 보이지 뭐에요.”
“그럼 나 먼저 가볼게.”
“에잇! 그럼 섭하죠.”
주문한 커피가 나왔고, 그 테이크아웃 컵을 집어 들고 카페를 벗어나려고 돌아서는 루나를 잡아 세우던 주원은 황급히 주문을 하고, 자신의 음료가 나올 때까지 꼼짝없이 붙잡아 세워둔 루나를 보며 실실거리고 있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루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주원의 힘으로 루나를 데리고 카페 밖으로 나온다. 한참을 몸을 비틀어대던 루나가 튕겨지듯 주원의 품에서 멀찍이 서 진다.
“뭐야, 너!”
“난 최주원이라고 합니다만.”
“아우, 진짜... 누가 이루성 친구 아니랄까봐. 어쩜 그렇게 똑같이 하는 짓이.”
“뭐요? 하는 짓?!”
눈매가 매섭게 치켜 올라간 표정으로 루나를 보고 선 주원. 주원의 차가운 태도에 당황한 듯 눈이 휘둥그레진 루나. 루나의 반응이 재밌어 더 인상을 구겨가며 연기를 해 보이는 주원.
“최주원... 미안, 내가 동생친구라 생각해서 스스럼없이 말이 툭 나와 버렸다. 실수야, 실수. 응?!”
루나의 반응에 입 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애써 참으려 용을 쓰던 주원이 갑자기 길 한복판에서 루나를 확 안을 것처럼 하다가 원위치로 돌아가더니 한마디 툭 뱉는 말.
“저녁때 봐요.”
“......?”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주원은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친구의 누나로 봐온 루나는 정말 싫을 땐 싫다고 말하는 성격인데, 툭 던진 말에 아무 말이 없었다는 것은 긍정이란 것을. 반면 루나는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쳐서 되물을 타이밍을 놓친 것 뿐 이었다.
‘마치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말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