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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 재 훈(7회 농업과 졸) ․공주사대 국어교육과 졸/고려대 문학박사 ․전 공주대사범대학장/명예교수 ․현 민족작가회의자문위원/시인
시작하며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다.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 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써주었으면 싶었는데, 부득이 내가 하게 되었다. 혼란기에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다녔기 때문에 기억의 단절이 심하다. 어쩔 수 없이 나를 중심으로 단편적인 서술이 될 수밖에 없다. 추억이란 아름다운 법이다. 그러나 우리에게(적어도 나에게)는 고통이다. 그 고통을 들추어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서산농림중학 시절 1949년, 나는 서산농림중학교 학생이 되었다. 그때는 9월이 학년의 시작이었다. 서산군에서는 읍에 세 군데의 중학교가 있었다. 서산여자중학교, 서산중학교, 그리고 서산농림중학교가 그것인데, 지금의 중고가 합쳐진 6년제였다. 시험도 1차, 2차가 있었다. 1차에서 낙방하면 2차로 가야했다. 서산농림중학교는 1차였다. 내가 시험볼 때는 5.7대 1의 경쟁이었다. 지금도 그런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내가 수석으로 합격을 했기 때문이다. 전체 수석이었지만 장학금 같은 것이 전혀 없었고, 주어진 것은 겨우 팔자에도 없는 반장이었다. 희망에 찬 신입생이어야 했는데 나는 심드렁한 느낌이었다. 수석을 했으니 가다(그 당시에는 일본말인 ‘가다’라는 말이 유행했다.)를 낼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못 했다.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 나는 부석국민학교를 나왔다.) 때 3학년에서 5학년으로 뛰어오르는 월반도 했고, 월반하고서도 수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공부가, 그것도 학교 공부가 그리 탐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5․6학년의 담임이셨던 강동원 선생님은 나에게 우상이었다. 지겨울 정도로 하루하루 매일 만나는 분인데도 그분의 말씀 하나하나가 쏘옥쏘옥 들어왔다. 지금도 당시 그분의 표정과 말하신 내용을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다. 나는 그때 한국의 에디슨이 되고 싶었다. 그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것처럼 나도 굳이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진학하라고 하셨을 때 그러한 이유로 나는 거부했다. 외가의 큰댁에서 입학금을 대주는 바람에 들어갔는데, 그것은 억지 춘향이였다. 신바람이 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중학교 졸업 때까지는 입을 수 있는 크고 헐렁한 옷과 거기에다가 노란 모표가 붙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부모님의 뜻에 따라 열심히 학교에 다녔다. 나는 그 당시 꼬마 중에 꼬마였다. 내 또래보다 목 하나 정도 작았다. 지금은 작다고 하는 사람이 없는데 그때에는 표 나게 작았다. 그덕에 늘 일번이었다. 그것은 월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때에는 학령이라는 게 뭐 그렇게 제약이 없어서 나이 많은 사람들이 거의였다. 체격들은 얼마나 우람한 지 나에게는 모두 무섭고 장군같았다. 출석번호도 나이든 순이었고, 매일 있는 조회도 키 큰 사람들이 옆 세 줄, 층층히 낮은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작은 사람은 맨 끝에 있어서 아무리 까치발을 서도 선생님이 서 있는 앞쪽이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밀림 속에 있는 듯했다. 어쩌다 궁금해서 몸을 흔들면 군모 군복을 착용한 교관이 쫓아와 다짜고짜로 팼다. “부동자세는 군인의 기본 자세다. 고로….” 그런 것들을 외우게 하고 어절 하나가 끝날 때마다 몽둥이로 때리기 일쑤였다. 나에게 학교는 공포와 밀림이었다. 특히 5개학년까지 있는 선배들이 무서웠다. 바로 일년 위 선배들이 더 심했는데 어쩌다 윗단추가 한두 개 끼어있지 않아도 날벼락이었다. 그렇다고 신기하고도 재미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꼬마인데다 집으로부터 학교까지는 삼십 리 길이라 어려움 천지였는데도 열심히 다닌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재미나지 않는 과목이 하나도 없었다. 영어와 수학은 그 중에 제일로 좋았다. 「내셔널 잉글리쉬」(김선기 저, National English)가 그때의 교재였다. 단어장을 만들어 통학시 길을 오갈 때 줄곧 외웠다. 과목 담당은 이두규 선생님이셨다. 단단하고 작은 체구를 가지신 분이었는데 일본에서 오래 사셨기 때문에 우리말이 좀 어색했다. 영어 발음도 ‘댓도 이스 스쿠르 보이’식이었다. 수학은 영어보다 더 재미있었다. 논증 기하, 삼각 함수 그런 과목을 공부했다. 나는 수학을 잘 하기로 소문날 정도였다. 메뚜기라는 별명의 선생님이셨는데 늘 가느다란 막대기를 들고 다니셨다. 한번 교장선생님께서 수업에 들어오신 적이 있다. 이항범이라는 분이셨다. 코끼리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분은 정문(말이 정문이지 시멘트 기둥 같은 것이 기우뚱하게 서 있었다.) 옆의 관사에서 사셨다. 그분의 자제가 이도재던가, 나와 같은 반이라서 그애가 가자고 하여 몇 차례 그 왜식 목조 건물에 가본 적이 있었다. 저의 아버지인 교장 선생님께 내 소개를 해주었다. 그래서인지 친밀감이 있었다. 그분은 역사가 전공이라고 하시면서, 만일에 나하고 늬네들 부모 중 누구 하나 물에 빠져 아우성을 치면 누구를 먼저 건지겠냐고 물었다. 또, 그것은 내가 물어서 답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한자의 상형성에 관해 “無”자를 예를 들어 설명해주셨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모든 게 다 의문 투성이였다. 그 중에 하나가 한자가 도대체 누가 무슨 원리로 만들었는가라는 것이었다. 사서삼경을 뗐다는 분에게도 물어보았으나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 의문을 오래 품고 있다가 나이 든 교장 선생님께서 아무거나 모르는 것 있으면 물으라고 해서 그걸 내가 물은 것이었다. 한문 이야기가 나오니까 김준경 선생님이 떠오른다. 별명이 백두산이었다. 머리가 하얀 백발이었다. 뒷짐진 채 회초리를 늘 가지고 들어오셨다. 그분에게서 “抑强扶弱”을 배웠다. 생물은 이만구 선생님께서 가르치셨다. 현미경에다 나방가루를 놓고, 학생들 모두에게 차례대로 보도록 했다. 코스모스 꽃잎처럼 아름답던 모양이 지금도 선하다. 닥터 지바고가 의대생 시절 현미경에 나타난 세균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던 장면에서 그때의 일을 떠올린 적이 있다. 이만구 선생님은 말씀이 적으신 분이었다. 늘 입에 힘을 준 듯 한일자로 꽉 다물고 계셨다. 말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그분에게서 배웠다. 이복형 선생님은 작문이랑 영어를 가르치셨다. 별명은 그리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지만, 따뜻하고 자상하신 분이었다. 그리고 박학하였다. 60년대 중반 홍성여고에 근무할 적에 교장 선생님으로 모신 적이 있으며 한참 뒤 공주여상 교장으로 계실 때에도 몇 차례 뵈온 적이 있다.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셨다. 담임은 최종찬 선생님이셨다. 작고 다부진 몸매에 안경을 끼고 계셨다. 미술을 담당하셨는데 미술 수업은 기억 나지 않는다. 그분은 그때 막 신혼시절이셨고, 6․25 얼마 후에는 뵈올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중학에 와 첫 담임이자 반장으로 만나게 된 인연 때문인지 오래 기억이 남는다. 이름도 밝히지 않으시고 몇 시간 국어를 가르치신 선생님, 그분은 흑판에다 『故鄕』이라는 시 한 편을 써주셨다. 나는 그 시가 아주 좋아 흡수하듯 금방 외웠다. 뒤에 알고보니 정지용의 작품이었다. 이 시절의 친구로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사람은 김준환 군이다. 그는 대산인가가 집이었는데 성실한 공부꾼이었다. 턱에 거뭇거뭇 수염이 뻗쳐 있었다. 그가 가자고 해서 그의 하숙집에 들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수학 ․영어 등 과목을 한 학년 앞당겨 하고 있었다. 참고서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성적도 뛰어났었는데 6․25이후 볼 수 없었다. 살았다면 사회에 공헌도가 컸을 것이다. 농림중학교를 입학한 다음 학기, 그러니까 50년 6월에 커다란 쉼표를 찍게 되었다. 말이 쉼표이지 마침표나 다름이 없었다. 모든게 풍비박산이었다. 전쟁통에도 학교의 소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6․25 직후에도 소집이 있었고, 인공 시절에도 소집이 있었다. 역사의 격랑이 지난 뒤 나가보니까 선생님 중에 보이지 않는 분도 있었고, 동급생, 선배 중에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수업은 아예 팽개치고 북진통일의 시위에 우리는 동원되어 시가지를 누벼야 했다. 그런 소용돌이 가운데에서도 학년은 바뀌고 제도가 바뀌었다. 서산중학은 중등부로, 농림중학은 고등부로 바뀌었다. 우리는 짐을 싸짊어지고 언덕 너머 서산중학교로가 그 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평소 서산중학교와 서산농림중학교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산 읍내 학교가 다 모이는 행사가 잦았는데, 그때 농림중학은 제일 첫 자리를 차지하였다. 서산중학교 측은 그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언젠가는 전학생의 모임에서 시가 행진을 하기 위해 농림 중학의 6학년부터 나가고 있었다. 사회자가 마이크로 서산중학교는 서산농림중학의 꼬리를 물고 나가라고 했다. 그때 서산중학의 6학년 학생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회자가 재촉하자 방향을 바꿔 나갔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결국엔 우리의 뒤를 따라왔다. 우리는 우리 학교를 응시했다가 떨어진 학생이 가는 곳이 서산중학이라고 은근히 무시했다. 알고 보니 일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부유한 집안의 자제 중에 서산중학을 택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가 그곳으로 가게 되니 굴욕스러운 느낌이었다. 원래 다니던 그곳 학생의 텃세와 괄시도 심했다. 전쟁은 38선 근처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서산 농림고등학교 시절 나는 더 이상 학교 다니는 것을 단념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원래에도 다니기 싫은데 6․25가 일어나 그런 생각이 굳혀 있었다. 몇 살 위 사람들이 국군에 징집되어 전쟁에서 이슬로 사라지는가 하면, 별 이유 없이 의용군으로 나가 목숨을 잃었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싸우고 죽였다. 공부가 뭐 필요한가 그런 생각이 머리를 짓눌렀다. 나는 내 또래보다는 좀 조숙했던 데가 있었지 싶다. 그것은 중학 시절 신문 배달과 상관이 깊은 것 같다. 우리 집 근처에 작은 초등학교가 있었다. 그 학교에서 구독하는 신문을 통학하는 내가 날라다 주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나에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지만, 나는 섭섭하기는커녕 오히려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지방지와 중앙지의 둘을 집으로 오는 도중 다 읽었던 것이다. 한자가 많은 신문을 다 읽은 걸 보면 지금 생각해도 신통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문 덕분에 세상 돌아가는 걸 좀 짐작하는터라 앞날에 가망이 없어 보였다. 거기다가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의 속병이 도져 사형제의 맏인 나는 여자일, 남자일을 다 해야했다. 학교 간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때 나는 가끔씩 잡초를 없애는 약을 어떻게 만들 수는 있을까? 콩밭과 논매기는 정말 힘이 들었다. 책을 쉽게 여러 권으로 복사할 수 없을까? 책이 무지무지 읽고 싶었으나 귀했다. 불에 타지 않는 종이를 만들 수 없을까? 그러다가는 엉뚱하게 비행접시의 실체에 관해서 곰곰히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끝장이었다. 과학은 돈이 있어야 했다. 나는 내 나름으로는 엄청난 과학의 길을 포기했다. 그렇다면 어떠한 길을 택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문학이었다. 앞으로 닥칠 고생의 풍부한 체험을 문학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겉만 알게된 막심 고리키의 영항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사실 국민학교 저학년 때 아버지가 감춰둔 토막만한, 알멩이만 돌아 다니는 소설을 몰래 읽은 일이 있다. 수년 뒤에 알고 보니 이태준의 <청춘무성>이었다. 중학때 <백범일지>도 읽고 이기영의 <인생수업>이나 방인근, 김내성의 작품을 위시해서 <추월색>이니 <춘향전>이니 하는 것들을 닥치는대로 읽은 과거가 있어서 내딴에는 현명한 판단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부모님과 외숙은 고등학교로의 진학을 강권했다. 싫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출할까 그런 생각도 여러 번 했으나 가정 형편이 그러한 용기를 꺾었다. 모교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그리하여 전쟁중인 1952년에 나는 서산농고 1학년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꼬마에다가 지각대장이었다. 지각은 마지못해 입학했기 때문에도 그렇고 혼자 가야 책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생긴 버릇이었다. 정말 이때 나는 굶주릴 대로 굶주린 사람처럼 닥치는대로 책이라면 모조리 다 읽었다. 동급생에게 책이 보이면 염치불구하고 끈질기게 따라 붙어 빌려읽었다. 학교에는 도서실이 없었다. 시내에 흥문사란 서점이 있었지만 거기에도 몇 종의 참고서가 전부였다. 학교는 소설같은 문학서를 읽는 것을 엄격히 통제했다. 조회 때 학생들의 가방을 일일이 뒤져 교과서나 참고서가 아닌 것은 다 압수해갔다. 어떤 선생님도 학과목 외의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분은 별로 없었다. 나는 장날 늘전에서 책을 파는 예산의 김씨라는 분한테서 세를 내며 책을 빌려 읽었다. 전란 시절이라 좋은 책이 거리에 흘러나와 그런 대로 욕구를 채울 수 있었다. 그날도 장터의 책 파는 늘전에 서서 책을 읽고 있는데 한정우 선생님이 옆에서 <전선문학>이라는 잡지를 펼쳐보고 계셨다. 한선생님은 수학 선생님이었고 내 지각동지(?)였다. 성연서 걸어 통근하신 그분은 로맨틱한 분위기가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해군장교가 되어 평양까지 갔다가 김일성대학의 어느 여학생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그 여자를 고향집에 데려와 산다고 했다. 키가 후리후리한 분이었다. 교지에 ‘참죽나무에 매미는 하루 종일 울었다.’ 그런 시구가 있는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난리 때라 피난 겸 오셨는지 외지 선생님들이 많으셨다. 그분들은 거개 화려한 분들이었다. 국어를 가르치신 이희균 선생님, 후에 숙명여대 교수를 지내셨다. 백묵 하나만 들고 오셔 유창하게 강의하시던 깡마른 화학 담당 유학수 선생님, 그분은 연세대 교수로 오래 계셨다. 돌부처라는 별명의 전용신 선생님, 수학을 가르치셨다. 앙드레 지드의 <소련기행>을 진지하게 말씀하시던 철학자 같은 분이셨다. 그분도 고려대에서 봉직하셨다. 난리 덕분에 우리는 이런 기라성 같은 분들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실과 선생님들을 속으로 존경했다. 박병섭 선생님은 그중의 한분이다. 박선생님은 바기나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것은 암소의 그것을 가리키는 학명인데 축산 수업 시간에 그 어휘를 자주 쓰셔서 붙여진 것이었다. 어느 학부모가 교무실로 찾아와 박기나 선생님을 찾더라는 우스개도 있었다. 다소 신경질적이신 면이 있었으나 좋은 수업을 하셨다. 그리고 늘 팔소매를 걷어부친 와이셔츠 차림으로 일을 지휘하시고 또 직접 일을 하셨다. 수업 시간도 똑같은 차림이었다. 추수 감사절에 <오 대니 보이>를 부르시다 음정이 높아져 몇 번 끊어졌는 데에도 끝까지 부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사회과 김동원 선생님도 좋은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언제나 맑고 한결 같으셨다. 수업을 깔끔하게 하셨고 특히 시험문제가 늘 마음에 들었다. 우리 모두가 가까운 마음으로 속 깊이 존경하는 분이 계시다. 조재억 선생님이시다. 잠깐 오셨다 가신 분과는 달리 오래 동안 우리곁에 계시고 또 지금도 계신 그러한 선생님이시다. 그분의 시조 감상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 들었다. 훈민정음 시간에 그 서문을 못 외우면 우리나라 사람의 자격이 없다고 하셔서 나는 한문으로 된 원문과 언해한 글을 외워 지금도 입력되어 있다. 그분의 아호 ‘鶴山’처럼 학과도 같고 산과도 같은 성품을 지니신 분이다. 그 어려울 때 수업 시간마다 유인물을 준비해 주셨다. 학기가 끝나 그 유인물을 묶으니 훌륭한 책이 되었다. 나는 이것을 오래 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나 없는 사이 고향집을 수리할 때 다른 것들과 함께 없어졌다. 모든 선생님들의 고마움에 관하여 빼놓지 않고 구체적으로 쓰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여 아쉽다. 학교 가던 세 갈래 길, 입구의 왜식 건물의 관사들, 높은 벽돌집 본관, 그 옆 동편으로 이어서 지은 두 칸인가의 건물, 그 동쪽으로 남북 수직의 세 칸 건물 등이 눈에 어른거린다. 그 자리에는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고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울울창창한 학교 뒤 솔밭뿐이다. 그 솔밭에서 책을 읽다가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던 날이 떠오른다. 카베츠가 밭 가득히 자라던 실습지, 모를 내던 논, 벌들이 붕붕거리던 벌통 등등, 그리운 것들뿐이다.
마치며 나는 서산농림학교(지금은 서산농공고)를 나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어디서나 고등학교 동창생 중심으로 뭉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내 직장 주변에 선후배가 별로 없어 외로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외로움은 나에게 힘이 되었다. 가난의 의미와 인내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늘 부족한 나에게 넉넉한 자원이 거기 있기 때문이었다. 못 다한 말은 다른 기회에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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