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해가 계속되던 시절.
|
|
연풍 병방골(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은 황석두 루가(18131866년) 성인의 고향입니다.
|
|
작두날로도 막지 못한 황 루가 성인의 신심.
|
소백산맥의 심산유곡에 둘러싸여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는 이곳. 하늘에 닿을 듯한 소백산맥의 조령산(해발 1,017m)과 백화산(해발 1,064m) 사이로 구름도 쉬어 가는 험지 중의 험지. 저 구름마저도 단지 산이 높아서가 아니라 그 고갯길 굽이굽이에 서려 있는 민초()들의 슬픈 이야기와 피로 얼룩진 신앙의 숭고한 역사를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기 때문이리라.
| |||||||||||||||||||||||||||||||||||||||||||||||||||||||||||||||||||||
<병인박해기 연풍 출신 순교자 현황> | |||||||||||||||||||||||||||||||||||||||||||||||||||||||||||||||||||||
| |||||||||||||||||||||||||||||||||||||||||||||||||||||||||||||||||||||
1850년의 초여름. 문경에서 이화령을 넘어 충청도로 향하는 두 명의 사내가 있었다. 한 명은 쉰이 다 되어 보이는 상민 차림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서른쯤 되어 보이는 젊은 양반 차림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입은 옷이 좀 남루해 보였다. 그 둘은 힘겹게 고개를 넘으면서 중간중간 쉬는 동안에도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듯했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라치면 상민 차림의 어른은 젊은이를 상전 모시듯이 깍듯하게 대했다. 그 젊은이가 바로 그 전 해에 상해에서 사제로 서품되어 귀국한 두 번째 조선인 사제 최양업(, 18211861년) 토마스 신부였다. 그리고 그보다 어른은 문경 교우촌에서부터 충청도 북부 지역으로 사제를 안내하던 연풍의 회장이었다. 최 신부는 그 해의 사목 순방에서 이제 막 전라도와 경상도 남북부의 순방을 모두 마친 터였다.
| |||||||||||||||||||||||||||||||||||||||||||||||||||||||||||||||||||||
교우들은 거의 모두 비신자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 속에서 비신자들과 아주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교우들은 거의 다 교리에도 밝고, 천주교 법규도 열심히 잘 지키고 삽니다. 그래서 열심한 교우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죄악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조선의 알프스라고 할 수 있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 | |||||||||||||||||||||||||||||||||||||||||||||||||||||||||||||||||||||
이처럼 이화령과 새재를 넘던 최양업 신부는 1861년 6월, 문경 땅 진안리의 한 주막에서 과로가 겹친 데다가 장티푸스까지 걸려 며칠 후 선종하였다. 그리고 선종한 곳에 가매장되었던 그분의 시신은 그 해 겨울 배론 신학교 뒷산으로 옮겨져 안장된다. 영남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넘던 험로가 진정한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의 마지막 길이 된 것이다.
| |||||||||||||||||||||||||||||||||||||||||||||||||||||||||||||||||||||
거기 어디로 가는 길손이요? 토마스가 대답했다. 충주로 가는 나그네요. 혹시 조정에서 체포하라는 천주학쟁이들이 아닌가? 아니, 우린 천주학 같은 것 모르오. 그래도 알 수 없으니, 주막으로 가서 조사해 보아야겠소. | |||||||||||||||||||||||||||||||||||||||||||||||||||||||||||||||||||||
방갓으로 얼굴을 감추고 있던 칼래 신부는 앞서 가면 따라가겠소 하면서 포졸들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줄행랑을 놓았다. 저놈이 도망간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그때 하느님의 섭리가 당신의 종을 위해 여기에 개입하셨다. | |||||||||||||||||||||||||||||||||||||||||||||||||||||||||||||||||||||
포졸들이 저를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때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시어, 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엽전 550닢이 든 전대 끈이 풀러지게 하셨습니다. 전에는 제가 돈을 지닌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우연히도 제가 전대를 차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제 목숨을 구해주려고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포졸들은 눈으로 엽전들을 볼 필요도 없었지요. 왜냐하면 엽전들이 돌멩이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어도 그들의 귀가 번쩍 뜨이는 일이니까요. 포졸들이 서로 엽전들을 주우려고 하는 틈을 타서 저는 멀리 내달았습니다. | |||||||||||||||||||||||||||||||||||||||||||||||||||||||||||||||||||||
칼래 신부는 이렇게 가까스로 체포되는 것을 면하고, 며칠 동안 산 속을 헤맨 뒤에야 한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또 연풍에서 잡혔던 복사 토마스가 하느님과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풀려 나오자 교우들과 함께 감사의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런 다음 5월 10일에는 한실을 출발, 진천 삼박골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을 거쳐 자신의 사목 중심지인 목천 소학골 교우촌(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에 도착하였다. 주님께 감사 ! 이후 칼래 신부는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탈출한 뒤에도, 프랑스로 귀국한 뒤에도 연풍 주막에서 있었던 일을 결코 잊지 못하였다. |
사진 제공 : 이필수 다리아
|
첫댓글 가보고 싶네요. 사진과 자세한 설명에 감동 받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