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집은 原集 4권, 續集 3권, 附錄 2권, 年譜 합 9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에 許穆과 趙絅의 초간 서발과 鄭鴻慶의 重刊序가 실려 있으며 目錄은 없다.
原集의 권1은 詩이고, 권2~4는 文이다. 詩는 詩體別로 편차되어 오언절구 7제, 칠언절구 134제, 오언율시 96제, 칠언율시 87제, 오언 배율과 고시 17제, 칠언고시 8제가 실려 있다. 초간본에서 補遺로 실었던 시는 모두 각 체별로 재편차하였다. 전체적으로는 詩體別 편차이고 각 체 내에서는 다시 연도순으로 배열하였으며 주요 시기나 인물에 대해서는 編者가 小註를 달아 이해를 돕고 있다.
시기별로는 1611년 鏡城 判官으로 貶職되어 北道를 순행할 적에 지은 紀行詩 100여 수와 1614년 濟州 大靜縣에 위리안치된 이후 10여 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지은 시가 가장 많다. 특히 유배 기간 동안에는 憂國思親의 情懷를 담고 있는 시가 많다. 이 밖에 丁卯, 丙子 胡亂을 당해 慷慨하여 지은 시 몇 편과 말년에 某里에 은거하는 동안 지은 〈山居〉 등의 작품 수십여 편이 있다. 또 칠언율시 뒤에는 李埈, 李廷龜, 李好閔, 柳仲龍, 趙靖, 鄭百昌, 南以興 등에 대한 挽詩가 연도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권2는 記 5편, 說 1편, 序 11편, 跋 1편, 文 2편, 祭文 2편, 傳 2편, 論 4편, 書 9편이며 詩와 같이 각 문체 내에서 대체로 연도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초간본과 내용이 거의 일치하는데 다만 초간본에 실려 있던 跋文 4편이 빠지고, 石谷 成彭年의 傳은 續集으로 옮겨졌다. 〈葛川先生旌門重修記〉는 1600년작으로 葛川 林薰의 효행을 기리는 旌門이 다시 세워진 것에 대한 기문이고, 〈大靜縣東門內圍籬記〉는 1614년 제주에 위리안치된 후에 大靜縣의 산악과 섬, 저자가 머문 처소의 구조를 상세히 적은 글이다. 다음 해 濟州에서 族人의 堂에 지어준 〈鄭贊甫滿月堂記〉가 있고, 藥圃 鄭琢 후손의 요청에 따라 1635년에 쓴 〈挹湖亭記〉, 1637년 南漢山城에서 나온 뒤 伯夷가 首陽山에 숨었던 고사를 본받아 은거하던 은둔처인 〈某里鳩巢記〉가 있다. 〈起荒田說〉은 1595년작으로 가장 빠른 작품인데 황폐한 밭을 가는 것으로 治心의 비유를 삼았다. 〈送河主簿弘道還鄕序〉는 濟州까지 저자를 찾아와 몇 달을 같이 지내다 가는 河弘道를 떠나보내며 쓴 것이고, 〈書吳翼承筆帖後序〉는 일찍이 1613년 吳長이 써준 公平正大라는 네 글자의 筆帖에 대해 1617년에 회고하며 지은 것이며, 〈元朝自警箴〉은 저자의 나이 50이 되던 해인 1618년작이다. 「德辨錄」은 역시 유배 생활 동안 經史에서 글을 뽑아 文王부터 眞德秀까지 59명의 행적을 엮어 후인의 감계로 삼도록 한 일종의 위인전인데, 그 序文에서 곤궁에 처한 뒤에야 그 德이 나타난다는 「周易」困卦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밝히고 있다. 또 1623년에 쓴 盧禛의 〈玉溪集重刊序〉가 있는데「玉溪集」에는 1632년작으로 되어 있어 본집의 年譜에 기재된 것과 연도가 다르다. 그러나 서문의 내용은 같다. 〈南冥先生學記類編後跋〉은 저자가 본래 鄭仁弘의 문하에 출입하여 曺植에게도 學統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1600년에 쓴 〈一鄕呈文〉은 한 고을에서 壬亂 중에 죽은 孝子와 烈婦 5명에 대해 간단하게 顚末을 기록하여 관가에 올린 것이다. 祭文은 저자의 조카인 鄭昌世와 친구 吳長에 대한 글이다. 傳은 丁酉再亂時 黃石山城 싸움에서 어미를 보호하다 죽은 鄭大益, 鄭大有 형제와 역시 黃石山城에서 죽은 郭䞭에 대한 글이다. 論은 張良, 太公, 箕子 등 중국 고사와 관련된 글이고, 〈道覆載萬物論〉은 성리학적 道의 개념을 설명한 것이다. 書도 연도별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는 저자의 편지가 적어서 인물별로 배열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李元翼, 鄭仁弘, 韓浚謙, 李大期, 吳長, 宋浚吉, 崔晛 등에게 보낸 편지인데, 이 중 鄭仁弘에게 보낸 것은 臨海君의 옥사 때에 全恩을 주장한 것이고, 崔晛에게 보낸 것은 壬亂 중에 죽은 忠臣, 孝子의 事蹟을 정리하는 일에 대해 논의한 것이다.
권3은 疏箚 30편과 補遺 4편이다. 1611년 정언으로 慶運宮 移御를 반대했던 〈獨啓〉부터 1637년 南漢山城에서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山城箚子〉까지 연도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다만 1614년의 〈甲寅封事〉를 연도를 무시하고 제일 앞에 배치한 것은 光海朝에 義理를 천명했다는 저자의 업적을 돋보이게 하려는 안배이다. 당시 永昌大君을 핍박해 죽게 한 鄭沆의 처벌과 廢母殺弟를 주창한 丁好寬, 尹訒, 鄭造를 탄핵한 이 封事가 올려지자 저자는 일약 義理를 扶植한 인물로 인정되어 北人과 결별하고 仁祖反正 이후 南人의 儒賢으로 추대되었다. 丁好寬은 본래 폐모에 반대한 인물인데 〈甲寅封事〉가 너무 유명해지는 바람에 後代에 계속 廢母論 주창자로 비난받게 되어 그 후손인 丁時翰에 이르기까지 辨誣 활동이 계속되었다. 그 외에는 1623년 濟州 유배에서 풀려난 뒤 올린 辭職疏가 대부분이다. 몇 가지 중요한 것을 들자면, 1626년 啓運宮 喪禮의 잘못을 지적한 〈乞遞疏〉, 1627년의 〈斥和疏〉, 1636년 丙子胡亂 직전에 올린 〈斥胡使疏〉와 국방의 중요성과 방어책을 논한 〈丙子箚子〉 3편, 그리고 끝까지 斥和主戰을 주장한 〈山城箚子〉 등이 있다. 補遺로는 1633년 대사헌 때의 啓辭 1편과 저자 부모의 행장, 그리고 姜翼의 行狀이 실려 있다.
권4는 碑銘, 墓碣, 墓誌이다. 鄭汝昌, 曺好益, 洪進, 趙穆의 神道碑銘과 林薰, 李屹, 鄭謹, 鄭大民 등에 대한 墓碣銘 8편, 부친과 모친의 墓誌, 鄭琢, 李時稷, 장인인 尹劼의 墓誌銘이 실려 있다. 拾遺로는 李億載 부부의 묘지와 〈李子章所書己卯諸賢書帖跋〉이 실려 있다.
續集의 서두에는 金興根이 지은 序가 있다. 전체적인 구성과 편차는 原集과 같으며 초간시 누락된 詩文과 그 후 증가된 附錄文字를 실었다.
권1은 詩로서 오칠언절구, 오칠언율시, 古詩의 순서로 170題의 시가 詩體別로 수록되어 있다. 역시 鏡城에 있던 기간과 濟州 유배시, 그리고 某里 隱居時의 작품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 시 외에 〈卷中語聖賢〉, 〈少欲覺身輕〉 등 賦 6편이 실려 있다. 文으로는 편지 20편과 疏箚가 실려 있고, 補遺로 族侄 思道에 대한 挽詩가 있다. 편지는 金富倫, 姜彥欽, 鄭弘緖, 文景虎, 朴明榑, 吳長 등에게 보내는 글과 형제, 아들 등 친지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소차는 1623년 〈辭吏曹參義疏〉부터 1636년 〈丙子箚〉까지 모두 7편인데 내용은 대부분 辭職疏이다. 권말에 1852년에 쓴 權大肯의 續集跋이 있다.
권2는 저자의 유문과 부록문자가 반씩 실려 있다. 저자의 글로는 石谷 成彭年, 孤山 趙孝博, 申溪 朴世漢, 八溪 鄭昌世, 鄭庸에 대한 傳 5편과 〈鄕射堂重修記〉, 1619년 大靜縣의 先生案을 작성한 것에 대한 서문, 〈西澗小樓題詠序〉가 있으며, 李希雍, 文必陽에 대한 祭文, 李逸老의 行狀, 曺應仁, 全轍의 墓碣銘이 실려 있다. 附錄으로는 趙絅, 李溟, 姜大遂, 劉希道, 曺時亮 등의 挽詩와 저자가 배향된 龍門書院, 蘫溪書院의 祭文, 그리고 士林祭文 28편이 실려 있는데 전후로 祭文과 挽詩에 참여한 사람이 70여 명이나 되어 저자의 사회적, 학문적 지위를 말해준다.
권3도 부록으로, 正祖가 1799년에 내린 연교와 어제시, 사제문이 실려 있다. 옥당차자 및 河溍의 소 등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드러난 저자의 충절을 포장할 것을 청한 것이고, 이후 계사와 복계 등은 저자의 충절에 맞는 贈職과 改諡를 의논한 내용이다. 또 金坽, 朴絪, 宋挺濂, 許燉 등이 저자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이 외에 趙絅이 지은 神道碑銘, 말년의 은둔처였던 某里에 대해 후인들이 흠모의 마음으로 지은 遺墟碑와 遺事記, 花葉樓記, 龍泉精舍에 대한 記文과 詩가 실려 있으며, 松竹書院記와 奉安文, 祝文 등이 있다.
附錄은 原集과 함께 간행되었던 것으로, 許穆이 지은 行狀과 趙絅이 쓴 諡狀이 권1로, 敎書와 賜祭文, 祭文, 挽詩 등이 권2로 편차되어 있다.
年譜는 1817년 간행된 것으로, 권두에 年譜圖가 있어 저자의 출생처인 嶧洞圖, 葬地인 龍山, 은둔처인 某里圖, 影堂酌獻禮陳設圖가 차례로 실려 있다. 그 뒤로 八溪鄭氏世系圖가 있는데 朱文公譜圖에 따라 外孫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설명이 있다. 그리고 系圖後錄은 八溪鄭氏 始祖로부터 10대조 鄭丞에서 저자의 부친 鄭惟明까지의 사적을 간단하게 기술한 것이다. 年譜는 본래 저자의 曾孫인 鄭重元이 자료를 수집해놓았는데 후에 李光庭이 다시 정리한 것이다. 1756년 李光庭의 발이 붙어 있으나 正祖 연간의 일과 1816년(순조16) 南漢山城 顯節祠에 致祭한 기사까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간행 당시에 일부 관련기록을 보충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