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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창작집 <급매물교회>를 사보지 못한 분 중에 이 부분만 읽기를 원하는 분이 있어 여기에 글을 올립니다.
1. 2000년 8월 15일
이날은 남북 이산가족이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에서 상봉하는 날이었다.
동생이 온다! 가슴속에만 살아 있던 동생을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다는 것은 비 온 뒤 활짝 비치는 햇살처럼 황홀한 기쁨이었다. 한 때 북한은 괴뢰집단으로 뿔 달린 마귀들이 살고 있는 나라로 생각된 때도 있었다. 그래서 그 나라의 이야기는 해서도 안 되고 들어서도 안 되는 두려운 이웃나라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두 독재자들인 박정희와 김일성이 남한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북한의 노동당 조직부장 김영주를 감쪽같이 만나게 해서 비밀 회담을 마치고 남북에서 1972년 7월 4일에는 함께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우리 힘으로 자주 통일을 하며, 전쟁 없는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이 대단결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때는 너무나 놀라운 소식이었다. 그러나 유신헌법이 공고되고 김대중의 피랍사건이 일어나고 독재는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몇 년이 지니자 더 놀라운 것은 이제는 이남의 김대중 대통령이 이북의 김정일을 직접 만나 대담하고 2000년 6월 15일에는 남북 공동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첫 열매가 남북 이산가족 1차 상봉이다. ‘정말 철조망은 사라지고 통일은 되는 것일까?’ 온 나라가 이산가족 상봉으로 들떠 있었다.
8월 14일 우리 가족 일행은 올림픽 공원 안에 있는 파크텔로 모였다. 시골에 살고 계시던 삼촌과 두 남동생과 여동생이었다. 이북에서 내려오는 가족 한 사람에게 할당된 남쪽의 최대 인원인 다섯 사람이었다. ‘자기들 오씨끼리 똘똘 뭉쳐서 만나러 간다.’고 아내가 불평하며 챙겨 준 짐을 들고 올림픽 파크텔로 왔다. 숙소는 온통 난장판이었다. 객실 배정을 받고 보니 5명 가족에 한 방씩으로 남녀 동숙이었다. 어려서는 한 방에서 같이 자기도 했지만 50이 넘은 여동생과 동숙하기는 또 처음이었다. 우리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어떤 가족은 바깥사돈과 안사돈이 한 방으로 배정되었다고 야단법석이었다. 기자들은 뭔가 기삿거리를 얻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어떻게 해서 이산가족이 되었느냐? 선물은 무엇을 준비했느냐? 준비한 선물을 좀 보여줄 수 없느냐? 만나면 맨 먼저 무슨 말을 하겠느냐? 이렇게 상봉을 하게 된 소감이 어떠냐?
다음날 15일 코엑스의 상봉 장소에 오후 3시까지 가서 3시 반부터 면담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우리는 점심을 먹고 바로 2시쯤부터 탑승을 서둘렀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20대 정도는 되어 보이는 버스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각 가족마다 배정된 버스가 있었고 적십자 요원은 핸드폰으로 자기 식구들을 챙기고 있었다. 보안을 요하는 만남이기에 선두 차부터 맨 꼬리 차까지 점호가 끝나지 않으면 출발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우리가 코엑스로 가는 가도를 지나갈 때 교통이 차단되어 줄지어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승용차에서는 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50년만에 있는 너무도 감격스러운 사건이기 때문에 짜증 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온 국민의 감격을 우리가 대표로 체감하며 가고 있었다.
코엑스에서 우리는 면회 장소로 한 줄로 걸어 들어갔다. 각 테이블에 북측에서 오는 사람을 한 사람씩 배정하고 그 번호에 해당하는 가족이 미리 가서 그 테이블에 앉아 대기하게 되어 있었다. 100 가정을 네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기자들의 취재 경쟁을 막기 위해 YTN, KBS, MBC, SBS에 네 그룹을 미리 배정하고 있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며 복도를 걸어 들어가고 있는데 복도 양옆에 늘어선 사람들이 박수를 했다. 나는 혹 우리를 북측 인사로 오해하고 박수를 쳐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우리나 그들이나 같은 한국인으로 모습이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안타깝던 과거를 알아보고 박수하고 있는 것이었다. ‘50년 동안이나 사랑하는 가족을 가슴에 품고 얼마나 두려움 속에 말도 못하며 살아 왔는가?’ 하고 위로하고 축하하는 것 같아 와락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나는 동생의 이름이 적힌 테이블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이북에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1967년 내가 하와이대학에 연수로 나가 있을 때 방첩대를 통해서였다. 체포된 간첩을 통해 동생이 남파간첩으로 훈련을 받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것이었다. 집에서는 그것을 알았지만 내가 걱정한다고 나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 내가 귀국한 후는 간첩활동이 더 심해졌다. 거기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재선되어 3선 개헌을 추진하고 있는 때여서 반독재 운동가들이 간첩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호된 시련을 겪는 때였고 연이어 있었던 김신조 등의 무장공비 서울 침입과 울산 삼척 침투 등으로 삼엄한 때였다. 그런 와중에 나는 빨갱이 가족으로 점 찍힌 것이었다. 1969년에는 대학으로 주소를 옮겼는데 그 때도 방첩대에 불려가서 동생이 오게 되면 맨 먼저 신고한다는 각서를 썼고 교회 목사는 내 행위를 일일이 보고하게 되었고 이웃집 사람은 우리 집에 손님이 올 때마다 지키고 있다가 보고 했으며 학교에서는 친한 친구가 나를 감시하였다. 그래서 나는 갑자기 요 주의인물이 되었다.
6‧25 때는 어느 가족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가족이 모여 살 수가 없었다. 특히 우리 가족은 부친이 교장으로 있어서 집이 없이 교장관사를 떠도는 신세였는데 이북 공작원이 내려와 학교를 접수하여 교장이 된 뒤로는 갈 곳이 없었다. 부친과 나는 적령기가 되어서 붙들려가서 부역을 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시골 친척 집으로 피난을 가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여든이 되는 반신불수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한 살짜리 어린애까지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로 가지 못하고 학교 교장으로 와 있는 공작원 밥을 해주며 그곳에 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둘째였던 동생은 학교에서 브라스밴드의 단원이었기 때문에 중학교의 음악 교사를 따라 시골로 다니며 이북 노래를 가르치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전황이 나빠지자 인민군으로 차출된 것이다. 그렇게 차출되면 가족이 더 안전하다는 당원의 설득이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칠 십리가 떨어진 초등학교의 훈련소에 보내고 나서는 잠이 오지 않아 한살짜리 막내딸을 없고 그 먼 길을 걸어서 만나러 갔다. 나이도 어리니 인민군에서 빼달라고 사정하기 위해서였다. 어두워질 무렵 그곳에 닿아서 아들을 만났지만 짧은 시간에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 아들이 빠져나올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의견을 반대하지 못하는 분이었다. 어두워진 길을 한 살짜리 딸을 업고 또 어떻게 칠 십리 길을 걸어 집으로 왔는지 알 길이 없다. 그렇게 해서 UN군의 개입과 함께 인민군이 후퇴할 9월에 실종이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이 어디선가 돌아올 것 같아 문을 잠그지 않고 늘 더운밥을 그릇에 담아 아랫목에 밥망(밥을 덥히기 위해 털실로 짠 망)으로 씌워 이불 밑에 놓았었다.
1953년 휴전협정이 서명되기 전 포로 교환이 있었는데 늘 신문을 훑어보았어도 포로 교환 명단에는 그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도 어려서 태백산을 넘지 못하고 전사한 것으로 생각을 굳혔다. 그러나 어머니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어디선가에 살아 있어서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제발 남파 간첩으로 내려오지는 말라. 한 하늘 아래 살아 있기만 한 것도 우리에겐 더 없이 기쁜 소식이다.’
1975년에 나는 방첩대에서 출두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 동안 접선한 일은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으면 곧 연락하고 자수하는데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친절했다. 그러나 이렇게 불려갔다 나온 뒤는 힘이 빠지고 두려웠다.
‘하나님이 우리는 지켜 주실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지낼 수 있었겠는가?’
동생은 육사 16기생이다. 그는 육사를 수석으로 합격했으며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고 교관 요원으로 미국의 콜로라도 대학에서 학위를 하고 돌아 왔다. 또 나는 이북 동생의 소식이 전해 질 때 미국 하와이 대학의 동서문화 교류센터에 나가 있었다. 어떻게 신원조회가 심했던 그 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돈도 배경도 없는 시골 초등학교 교장의 자녀들이다. 하나님께서 일하는 사람들의 눈을 감겨 주시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북에 연고자가 있는 경우는 감시가 심할 뿐 아니라 연좌제로 취직도 안 되던 시절에 어떻게 이렇게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육사의 교관도 되고 나는 엄연한 직장에서 직장생활을 할 수가 있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동생이 시인으로 북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1990년 9월의 일이다. 남북총리회담을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하고 있을 때 한겨레신문에 동생의 소식이 실렸다. 9월 4일이었다. 미국 LA에 살고 있던 김영희씨가 1990년 8월 13일부터 엿새 동안 열린 범민족대회에 북미주 대표단의 일원으로 북한에 참석하여 동생을 만나고 술을 마신 기사를 자유기고가로 기고했던 것이다.
.......
우리의 밤 잔치에서 술을 가장 많이 마시고, 목이 쉬도록 노래를 많이 부르고, 또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린 이는 오영재였다.
그는 ‘반달’을 부르면서도 울었다. 어릴 적 고향집에서 동생들과 부르던 노래라고 했다. 혹 고향 소식을 들을까 하여 ‘통일예술’에 시 대신 회상기를 냈다는 그는 범밈족대회에 참가하는 해외동포단에 혹시 가족이 있을까 해서 그 명단을 열심히 들춰 봤지만 자기와 같은 오씨 성을 가진 이조차 없었다고 서운해 했다. 사흘에 한 번은 어머니의 꿈을 꾼다는 그는 광주 사범 출신인 오유길씨의 차남으로 ‘별 할 일이 없을 것 같아 북으로 왔을 뿐, 당시 나에겐 아무 이념도 없었다.’는 그는 누가 봐도 꾸밈없고 다정다감한 시인이었다. …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밤잔치에서 부르던 노래를 다시 불렀다. ‘우리의 소원’ 등 통일 염원의 노래를 부를 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손을 잡았다. 서울에서 선배 예술인, 연극패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던 옛 시절이 생각났다. 평양에서 만난 북의 문인들과 그들의 어디가 다르단 말인가? 믿기 어렵겠지만 45년간의 장벽은 일주일간의 만남, 아니 단 하루만의 만남으로도 허물어질 수 있다고 감히 외치고 싶었다. 헤어질 무렵에는 빗속에 서서 모두 울었다. 남과 북, 북과 남은 아직도 멀리 서로 그리워만 하고 있었다. …
이때부터는 동생이 이북에 생존하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어졌다, 또 이북을 다녀온 재일 교포나 재미 교포는 동생을 만난 뒤는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해 왔다. 작품도 전해 주고 미국의 New Korea Times 사의 사장은 동생 집에서 인터뷰한 비디오테이프도 보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를 옆에서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늘 불안하고 두려웠다. 간첩훈련을 받았다고 하는데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은 어쩌면 체포된 간첩이 같이 훈련 받은 사람을 대라고 위협해서 잘 알고 있는 동생 이름을 댔는지 모를 일이다. 또 40세가 넘으면 간첩으로 내보내지 않는다는 말대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작품을 대하면 늘 눈물이었다.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어머니에게 편지를 씁니다
몇 번째 써 보내는 편지인지
그것은 나도 모릅니다
보내는 편지마다
이 땅을 갈라놓은 분계선 철조망에 찢기어
저주를 안고 다시 나의 가슴에 돌아 왔습니다
때로 그 장벽을 넘어 나래 쳐간 마음의 편지는
온 남녘 땅을 헤매다가 찾은
늙으신 어머님의 머리맡에
아들의 말없는 안부를 남기며
이 내 가슴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우리를 갈라놓았습니까?
어머니 품에서 열여섯 해
어머니 없이 열 네 해를 나는 자랐습니다
열여섯 해 동안 나의 곁에서 나를 기른 어머나는
새 옷 한 벌 해주지 못하던 어머니였고
열 네 해 동안 나의 곁에 없는 지금의 어머니는
고생 많은 그 몸에 새 옷 한 벌 감아드리지 못하는
아들의 가슴에 안타까운 어머니입니다.
…
머지 않아 돌을 맞을
딸애를 잠재우며, 어머니 손녀를 잠재우며
끝맺을 길 없는 이 기나긴 편지를 씁니다
대답 없는 어머니를 부르고 부르며
…
젖먹이 누이동생을 업고
이 아들을 찾아온 칠 십리 길…. 야영훈련소의 은행나무 밑
의용군 복장을 한 아들을 보며 웃으며
몸 성히 싸우고 돌아오라 이르고 돌아서 간 칠십 리 길…
석양이 뉘엿뉘엿 저물던
그 먼지 낀 신작로 길로 멀리 사라져 가던
아아, 마지막으로 보던 어머니 모습이여
그 밤 어두운 길을 무사히 사셨습니까....
이런 시를 읽으면 어머니는 그 시를 품에 품고 하염없이 우셨다. 아들도 만나보고 밥도 해주며 귀여운 손녀도 안고 길러주고 싶었던 것이다. ‘사고무친四顧無親 이역 땅에서 어머니가 여기 살아 있는데 홀로 외롭게 지내야 한다는 말인가?’ 어머니는 가슴을 에는 아픔을 느끼고 계셨다. 동생은 유난히 어머니의 정을 그리워했었다. 성질이 급해서 ‘덥석’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앞을 보지 않고 덥석 덥석 걸어서 잘 넘어진다고 붙은 별명이었다. 운동장에서 해가 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집에 오면 벗어놓은 고무신도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는 애였다. 아버지가 지금 당장 가서 찾아오라고 호통을 치면 밖으로 나가는데 어머니가 나가보면 땅을 보고 찾는 것이 아니고 하늘을 보며 빙빙 운동장만 돌고 있는 애였다. 그래서 결국 어머니가 찾아오시곤 했다. 한 가지 일에 매달리면 심취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그것을 얻으려 했다. 사람 두질도 넘는 담 위에서 돌로 밑에 있는 조개껍질을 맞추는 일을 하다가 몇 번 돌을 던져도 맞지 않자 몸을 앞으로 숙여 던지다가 땅에 떨어져 이마를 다쳤다. 그 때 어머니는 놀래서 데려와 상처에 된장을 붙여 지혈 했는데 지금도 그 흉터가 눈 위 이마에 나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싸움을 잘해서 운동장이 왁자지껄 하면 동생이 싸우고 있었는데 그 학교의 교장인 아버지는 그것이 마땅치 않아 애들 앞에서 큰 대나무로 때렸었다. 결국 어머니 품으로 도망 왔는데 아들 감싸지 말라고 또 때려서 집을 나가 버렸었다. 밤이 어두워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아버지가 무서워서 아들을 찾으러 나서지를 못했다. 그가 간 곳은 삼십분쯤 걸리는 큰댁이었다. 손이 귀해서 십촌 형 댁이 큰댁이었다. 결국 다음날 재재당숙이 동생을 데려와서 아버지께 용서를 빌게 했다. 그 때도 어머니가 숨겨 놓은 시루떡을 그에게 주었었다.
한겨례 신문의 소식을 듣고 우리는 너무 기뻐서 재미교포인 민문예협(미주 민족문화예술인협회) 회장에게 전화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더니 특히 사랑하는 아들에게 들려주는 육성을 녹음하겠다고 해서 어머니 육성도 들려주었었다. 그랬더니 얼마 후 또 시를 보내왔다.
고맙습니다.
생존해 계시다니
생존해 계시다니
팔순이 다 된 그 나이까지
오늘도 어머님이 생존해 계시다니
그것은
캄캄한 밤중에
문득 솟아 오른 햇님입니다.
한꺼번에 가슴에 차고 넘치며
쏟아지는 기쁨의 소나기입니다.
그 기쁨 천근으로 몸에 실려
그만 쓸어져 웁니다.
목놓아 이 아들은 울고 웁니다.
땅에 엎드려 넋을 잃고
자꾸만 큰절을 합니다. ....
어머님을 이날까지
지켜준 것은
하나님의 자비도 아닙니다.
세월의 인정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 아들을 다시 안아보기 전에는
차마 눈을 감으실 수 없어
이날까지 세상에 굿굿이 머리 들고 계시는
어머니의 그 믿음입니다.
그 믿음 앞에
내 큰절을 올립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어머니여, 고맙습니다.
부르다만 그 이름
한밤중에 일어나
불을 켜고
다시 보는 어머니 얼굴
먼 미주를 에돌아
나에게 온 사진
어머니 없는
자식이 없건만
너무도 오랜 세월이 헝클어버린 생각
나에게도 어머니가 있었던가
남들처럼 내게도
정말 어머니가 있었던가
열여섯, 집을 떠나
쉰이 퍽 넘을 때까지
대답해 줄 어머니가 곁에 없어
단 한번도 불러보지 못한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태어나 젖을 물며
제일 먼저 배운 말이건만
너무도 일찍이 헤어져버린 탓에
부르다만 그 이름
세상에 귀중한
어머니란 말을 잃고
그 말 앞에선 벙어리가 되어버린 이 자식
40년만에
이 벙어리가 입을 엽니다.
어머니의 사진을 앞에 놓고
엄마!
어무니!
늙지 마시라.
늙지 마시라.
더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이날까지 늙으신 것만도
이 가슴이 아픈데
세월아, 섰거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너 기어이 가야만 한다면
어머니 앞으로 흐르는 세월을
나에게 다오
내 어머니 몫까지
한 해에 두 살씩 먹으리
…
그가 보내온 소식은 언제나 시였다.
3시 반에 오기로 되어 있는 북측 가족들은 한 시간이 넘도록 시간을 지연하며 초조하게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65세가 된 그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해 하며 원탁 테이블에 가족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렇게 외로웠던 그에게 우리 가족 앨범을 안겨 주고 ‘너는 외롭지 않다.’고 힘을 내라고 말해 줄 셈이었다.
이윽고 입구가 소란해지더니 꿈에 그리던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내는 하나씩, 하나씩 끌어안고 우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너무 놀라고 반가워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16살의 어린 나이에 떠났는데 굵은 주름이 잡힌 65살의 할아버지가 되어 내 동생 오영재는 나타났다. <살아 있었구나> 흐느끼는 울음은 가족을 하나하나 안으며 멎질 않았다. 50년 동안 가슴에 숨어 있던 그리움이 폭발하여 나오는 울음이었다. 이것은 비단 이산가족 500명의 울음이 아니고 이산가족 1세대 123만 명을 대신해서 우는 울음이었다. 아니 이 TV를 시청하면서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모든 동포들의 울음이었다. ‘동생, 우리가 이남에 이렇게 든든하게 살고 있으니 외로워하지 말고 힘내시게.’ 이렇게 말하려 했는데 그의 첫 음성은
“어머니를 왜 좀더 기다리게 하시지 못했습니까?”
하는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어머니는 5년 전 95년 4월에 돌아 가셨다. 이제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오래 살아야 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생명은 인간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미안하네. 그렇게 보고 싶어 하셨는데 그렇게 쉬 돌아가실 줄은 몰랐네. 그러나 외로워하지 말게. 고향에 이 많은 형제들이 살고 있으니 힘내어 살고 있다가 통일 되면 만나세.”
그러나 그의 답은 의외였다.
“어머니가 안 계신 곳은 더 이상 고향이 아닙니다. 형제가 많다 한들 많은 별이 해를 당할 수 있습니까? 어머니는 해입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누이동생을 많이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자기를 만나러 왔던 한살짜리 막내 동생은 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큰댁의 누이도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물었다. 그는 담배를 많이 피웠다. 아마 담배 많이 피우지 말고 술 많이 마시지 말라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을 것이었다.
“어머니는 담배와 술 때문에 많이 걱정하셨는데 …”
“압니다. 편지 받았습니다. 그것은 편지가 아니고 이제 어머님의 유언입니다.”
그러면서도 쉬 담배를 끄지 못했다. 끊지는 못해도 시간을 조절해서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자네가 어머님 8순 때 보내준 비단 옷감은 잘 받아 옷을 지어 입으셨네. 잔치 때 자네가 좋아하는 ‘옛날에 금잔디 동산’이라는 노래도 불렀고 또 바로 밑 형재 동생이 상징으로 자네 이름표를 목에 걸고 옷감을 어머니께 바치는 일도 했네.”
그의 머리 속은 어머니 생각뿐인 것 같았다. 사람의 생사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가 상봉하러 오기까지 어머님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밀어 닥쳤다.
파크텔로 돌아 온 뒤 다음날은 11시 워커힐에서 개별상담을 위해 떠났다. 가족들이 한 방에서 기자 없이, 침입자 없이 상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지 않은 눈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아 무슨 말이든 정말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벽에 무슨 도청장치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또 자유가 주어졌다 하더라도 이북에 대해 묻는 것은 그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가 어려서 떠났기 때문에 우리 가족이 주로 들어 있는 오씨 족보를 가지고 갔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가겠느냐고 물었더니 거절했다. 남쪽에서 가져간 물건을 함부로 서재에 꽂아 놓을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옷이 좀 낡은 것 같아 내일 옷을 한 벌 사서 주고 싶다고 괜찮겠느냐고 물었더니 필요 없다고 말했다.
“나 북녘에 옷 많습니다. 이 옷도 이곳에 올 때 김정일 장군께서 새로 해 주신 옷입니다.”
그는 자기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방문 올 때 넥타이도 사 주었으며 각자에게 남쪽 가족에게 줄 선물도 다 사 준 것이라고 했다.
“장군님 은혜로 우리는 잘 살고 있습니다. 그 은혜가 아니면 제가 어떻게 이 100명 가운데 끼어서 남쪽을 방문할 수 있었겠습니까? 한 가정에는 어버이가 계시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북녘에서 장군님은 우리 어버이이십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동생 가슴속에 깊숙이 들어앉은 김정일 위원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참 너의 은인이시다. 그러나 너에게 시를 쓸 수 있는 영혼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다만 그분이 그 재능이 꽃 피도록 길러 주신 것이다.”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한 것은 장군님이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결혼할 때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그는 결혼할 때 입고 갈 제대로 된 옷도 없었으며 와이셔츠도, 넥타이도 없었고 심지어 양말까지 없어서 빌려 신고 결혼했다고 말했다. 결혼한 뒤 다 돌려주었는데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 양말을 돌려 달라고 해서 그것까지 벗어 주었다고 말했다. 그런 자기를 작가학원에 보내어 시인이 되게 하고 네 남매의 아버지가 되어 시만 쓰면서 먹고살게 해 준 이가 누구냐고 반문했다. 신 없는 그곳에서는 감사를 돌린 대상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장군’이라는 말이 밖으로 세어나갈까 봐 조마조마하였다. ‘김정일을 찬양하는 대화를 이렇게 하고 있어도 되는 것일까?’하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다시 그에게 지난 6‧25 50주년을 기해 여의도 침례교회에서 공연한 ‘한국 진혼곡’의 두툼한 악보를 그에게 보이며 이것은 집으로 가지고 가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악보를 보고 또 팸플릿에 그의 사모곡 여섯 편이 다 영어로 번역되어 있는 것을 살펴보더니 가지고 가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미국의 남침례교 선교사 이요한 목사가 16년간 한국에서 음악사역을 하고 있는 동안 동생의 사모곡을 알게 되자 이 시에 곡을 붙여 ‘한국 진혼곡’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여의도 침례교회에서 130 여명의 합창단과 40 여명의 교향악단으로 공연한 내용이었다. 만나보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는 이산가족들을 달래는 진혼곡이었다.
우리는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선물 가방에 여름인데도 겨울 내의와 오리털 파커를 사서 넣고 시계를 살 때는 북녘에는 수은전지가 없을 것 같아 5년은 쓸 수 있다는 값비싼 전지를 갈아 끼우고, 넥타이와 양말들을 사 넣은 선물 꾸러미를 그에게 내밀었는데 그는 선물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어머니 묘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서 먼 곳입니까? 그 곳은 가보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가신 어머님께 자기 손으로 술을 따라 올리고 싶다고 말하며 가지고 온 석판石板을 꺼냈다. 아니 그것은 석판이 아니고 재질을 잘 알 수 없는 검정 색 동판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 어머니 팔순 때 학이 그려진 소나무 병풍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컴퓨터로 조각해 넣었는데 돌아가신 아버지 사진을 끼워 넣어 어머니와 나란히 앉게 하고 뒤에 선 형제 사진에는 자기를 끼워 넣어 7남매가 나란히 서 있는 가족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어머니가 보낸 편지의 일부가 각인되어 있었다.
‘오매불망 나의 아들 영재야! 불러보고 싶고, 만져보고 싶고, 안아보고 싶은 너에게 붓을 들어 편지를 쓸려 하니 무슨 말을 먼저 써야 사십년간 쌓인 회포를 어떻게 풀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는 사진을 세워 놓고 김일성 어버이 수령이 하사했다는 금잔을 가지고 와서 술을 따랐다. 그러면서 흐느껴 울며 추모시를 낭송하였다.
슬픔
차라리 몰랐더라면
차라리 아들이 죽은 줄로 생각해 버리셨다면,
속고통 그리도 크시었으랴
통일이 되면 아들을 만나
불러보고 안아보고 만져보고 싶어
그날을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더는 못 기다리셨습니까 어머니
그리워 눈물도 많이 흘리시어서
그리워 밤마다 뜬눈으로 새우시어서
꿈마다 대전에서 평양까지 오가시느라 몸이 지쳐서...
그래서 더 일찍 가셨습니까.
아, 이제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어머니 나의 엄마!
그래서 나는 더 서럽습니다. 곽앵순 엄마!
기어이 안기고 싶어
머리맡에서 어머니의 림종을 지켜드린 형님이여,
동생들이여
어머니께서 눈을 감으시기 전에
제 이름을 부르지 않습디까
제 사진 보고싶다 하시지 않습디까
제 목소리를 듣고 싶다 하시며
주름 깊은 눈가에 이슬이 맺히지 않습디까
아, 사람들이 바라온 대로
죽어서 가는 다른 세상이 있고
어머니가 그 세상에서 다시 살게 되신다면
내 어머니 간 길을 찾아가리다
아이 적처럼 어머니 품에 기어이 안기고 싶어
눈물이 아니라 그 웃음을 보고 싶어....
그 세상엔
분계선이 없을 것 아닙니까
콩크리트 장벽도 없을 것 아닙니까
나는 그가 한국까지 왔는데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의 어머니 묘소를 지척에 두고 그를 데려갈 수 없어 그냥 보냈다. 철조망은 없었어도 여기에도 그와 어머니를 가로 막는 나라의 법이라는 벽이 있었다.
3일 동안의 상봉기간이 끝나서 떠날 때 그의 농부처럼 굳어진 손을 잡으며 이별을 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구들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만나고 샆었습니다
우리는 손수건 백장을 가지고 있어야 할 민족입니다
우리는 연 사흘 울음바다였습니다
엉엉 울어
멍든 가슴을 쏟아야 했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만났습니다
이제야 만나
뜨거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될 것을
몇 10년 동안 서로 장벽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말로 각각 달을 노래했고
한낮의 태양을 노래했습니다
이렇게 만났으니 다시는 헤여지지 맙시다
평양에서 서울까지 한시간도 못되게
그렇게도 쉽게 온 길을 어찌하여 50년 동안이나
찾으며 부르며 가슴을 말리우며 헤매였습니까
다시는 다시는
이 수난의 력사, 고통의 력사, 피눈물의 력사를 되풀이하지 맙시다
또다시 되풀이된다면 혈육들이 가슴이 터져 죽습니다 민족이 죽습니다
이렇게 피를 토하듯이 외치고 이제 떠나려 하고 있다. 이것이 이산가족의 만남인가? 떠나가면 서로 집에 도착해서
“형님, 참 기뻤습니다.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애들도 선물을 받고 기뻐했습니다. 다음에는 한 번 놀러 오십시오.”
이런 전화라도 받아야 하는데 떠나버리면 장막 저편은 어둠뿐이며 아무 소식도 들을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할 때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전화도 할 수 없고 편지도 전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이별이 이산가족의 만남이다.
그 뒤로 퍼주기만 하고 그것으로 핵무기와 군사력만 키웠다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는 그래도 남북 왕래가 있어 문인들을 통해서나 방북 기독교단체들을 통해 조금씩 동생의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으나 이명박 대통령 때는 소식이 끊기었다. 2005년 그가 백두산 6‧15 공동선언을 위한 민족 작가 대회에서 북측대표로 참석했다는 소식 후에는 들은 바가 없다.
2. 2011년 10월 23일
나는 지난2011년 10월 23일 이북에 이산가족으로 살고 있는 동생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부고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가 김일성 상을 받은 유명한 시인이 아니었다면 조선중앙통신이 그런 부고를 냈을 리 없다. 그리고 인터넷 북한 뉴스를 통해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 형제는 그의 사망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 형님이 나의 아버지이며, 형수씨가 나의 어머니입니다.”
라고 하며 어머니 없는 고향이라도 통일이 되어 다시 와서 만나보고 싶었던 그를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낸 것이다. 그는 가족들을 찾고 싶어 미국에서 발행하고 남북 작가가 함께 작품을 투고한 ‘통일예술’에 자기 이야기와 부모 고향 이야기를 자세히 적은 회상기 ‘나의 발자욱’을 1990년에 발표했는데도 나는 그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으며 더더욱 구입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한국 전남 광주에서도 출판 된 것이었는데 그 때는 불온 문서였고 지하로 유통된 책이어서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책을 통해 나는 이제야 그의 외로움과 고통을 알게 되었다.
그는 휴전협정이 서명이 된 무렵 이북의 군에서 제대하였다. 제대증을 받아 든 그의 심정은 착잡하였다. 남들은 부모형제들이 반기는 제 고향에 가게 되었다고 기뻐 들 했지만 그에게는 불비를 겪으면서도 살아 돌아오는 아들을 반겨줄 부모, 친척 단 한 사람도 거기 북녘 땅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삶의 방향이이나 목적도 없이 이제는 군에서도 용도폐기 되어 세상에 던져진 자신을 발견했다. 이제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갈 것인가? 자기에게 한없이 주어진 자유가 부담스러웠다. 그가 손에 잡힌 대로 올라탄 열차가 평양행 열차였다.
밖에서는 늦가을의 찬비가 뿌리고 있었다. 빗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차창 가에 앉아 그는 난생 처음으로 가슴을 저미는 고독과 불안을 체험하였으며 분열의 비극이 그의 일신상에 주는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 반겨줄 사람도 기다려 주는 사람도 없는 곳, 어린 시절 한국 지도를 그리며 연필로 그 이름을 적어본 것밖에 없는 평양, 그곳에선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목적 없이 캄캄한 곳을 지팡이로 더듬어 단단한 곳을 찾아 한걸음씩 걸어가야 할 인생행로의 끝은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는 낯선 곳으로 그를 싣고 열차는 빗속을 달리고 있었다.
함께 열차에 올랐던 전우들이 도중 역들에서 내렸다. 그들에게는 맨발로 달려 나와 안아 줄 감격적인 혈육간의 상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그의 손을 놓지 않고 자기 집에서 며칠 쉬었다 가라고 간절히 권할 때마다 그들의 진정이 눈물겨웠다. 그렇게 전우들이 그의 곁에서 하나 둘 사라져 갈 때마다 그는 더욱 고독의 심연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더 깊이 빠져들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드디어 홀로 남아버린 그는 한 밤 중에 평양역에 내렸다.
그렇게 해서 그가 더듬어 가게 된 것이 평양시 서구역 ‘건설 뜨레스트 로동자의 배치장’이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곳은 대형 공장이었으며 거기서 그는 난방관을 조립하며 지냈다. 그 때 그의 유일한 기쁨은 시를 써서 신문에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는 군에 있을 때에도 ‘전선문고’라고 군 중대마다 배포된 신문과 다른 잡지들에 시를 투고해 왔었다. 그래서 그 노동현장에서 시를 발표하자 ‘노동자 시인’이 나왔다고 모두 떠받들며 그를 반겨 주었고 고개 넘어 합숙소에 홀로 있을 때는 명절마다 작업반 ‘아바이’들이 자기 집으로 데려가 식사 대접도 했으며 식당 아주머니들은 식사 때마다 반찬을 더 놓아주곤 했었다.
그러자 작가동맹에서 그의 재능을 인정허여 작가학원에 입학시켜 주었다. 그는 무의무탁생이라고 노동현장에서 받던 노임보다 더 많은 장학금을 받았으며 해마다 무상으로 겨울옷과 여름옷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전문 교육을 받게 된 것이 황홀할 뿐이었다. 그는 그 시절을 가장 눈물이 헤펐던 시절리라고 회상했는데 장학금과 의복을 받을 때도 출판물에 실린 자기 시를 볼 때도 눈시울이 뜨거웠다. 어느 봄날에는 학급에서 망경대로 야유회를 갔는데 몇 잔의 술로 자제력을 잃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푸른 잔디밭을 뒹굴며 두고 온 어머니를 찾으며 아이처럼 울었다. 자기가 누리는 이 생활과 기쁨을 고향의 어머니에게 알릴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조선문학예술종합출판사 기자로 일하면서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내다가 작가동맹 부위원장을 따라 ‘대작 창작조’에 합류했다. 이것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혁명활동을 한 사람들을 전기식으로가 아니라 혁명적 대작으로 엮어 내라는 김일성의 교시를 따라 만들어진 창작 팀이었다. 최 부위원장은 작가들을 노동당의 사상으로 무장시키고 당의 의도대로 창작을 올바르게 할 수 있도록 온갖 힘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선 단원들을 데리고 7월 초에 시작해서 40여일에 걸쳐 백두산지구 혁명 전적지를 답사하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백두산 산정까지의 답사는 바람이 산을 요정 내듯 불어서 부석이 날아와 머리며 볼을 때렸는데도 강행군하였다. 이렇게 해서 소설이나 시를 발표할 때는 공동 작업을 해서 작품을 가지고 토의하고 사상성을 검토하여 갈무리가 되었다. ‘우리의 태양 김일성 원수’는 1968년 가을이었는데 이 작품을 완성하는데 작가들이 삼일 밤을 꼬박 새워 수정 작업을 했는데 동생은 참다못하여 딴 방 벽장 속에 숨어 있다가 들키기도 했다. 이렇게 그들은 혁명을 찬양하는 목적시를 많이 썼다. 이 서사시는 작가동맹 시문학분과 위원회의 이름으로 <로동신문> 2면에 걸쳐 게재되었었다.
결혼 하고 나서 동생은 애들이 장성하고 자기 생일에 애들에게서 축배를 받을 때면 어머니를 생각했다. 언제나 시루떡을 자기 상 위에 올려놓고 축하해 주시던 어머니였다. 자기가 없는 동안도 빈 곳에 자기 자리를 마련해 놓고 어머니는 시루떡을 자가를 위해 차려 놓으시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어머니의 생일이 봄인지 가을인지 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한심했다. 어머니는 평소에 자기 생일을 말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가 어머니 생일이라고 알게 된다면 그날 생일상을 차려 놓고 아들딸들에게 “애들아, 오늘이 할머니 생신이다 인사 올려라.”라고 말할 텐데 누구에게 어머니 생일을 물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는 설날에만 아이들을 세워 남쪽 하늘을 향해 세배를 올리게 했다.
우리 형제는 그가 세상을 하직한 며칠 뒤 그가 그렇게도 그리던 어머니의 묘소 앞에 모여 그의 추도 예배를 드렸다. 그가 가져온 가족사진을 묘소의 대석 위에 올리고 그가 먼저 읊었던 시를 먼저 어머니께 바쳤다.
아, 사람들이 바라온 대로
죽어서 가는 다른 세상이 있고
어머니가 그 세상에서 다시 살게 되신다면
내 어머니 간 길을 찾아가리다
아이 적처럼 어머니 품에 기어이 안기고 싶어
눈물이 아니라 그 웃음을 보고 싶어....
그 세상엔
분계선이 없을 것 아닙니까
콩크리트 장벽도 없을 것 아닙니까
나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회개하였다.
“어머님, 제3국에서 아들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 가서 동생과 함께 살 수 없을 바엔 안 만나겠다는 어머님 말씀만 듣고 그 일을 하지 못해 어머니를 보고 싶어 이렇게 안타까워하다 죽은 동생 앞에 저는 죄인입니다.
어머님, 동생이 그렇게 형제간의 가족 속에 끼고 싶어 컴퓨터로 가족사진까지 끼워 넣어 만들어 왔는데 저는 아버님 묘소의 비석에 가족 이름을 새길 때 동생 이름을 빼 버렸습니다. 혹 어디 살고 있는 동생이냐고 누군가가 물을 것 같아 그런 것입니다.
어머님, 외국에 나갈 때마다 신원조회가 심해 어머님을 설득해서 호적에서 빼고 싶지 않은 동생을 실종신고를 해서 빼버렸습니다. 이 큰 죄를 그에게 어떻게 용서 받아야 합니까?
나는 기독교인이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 된다고 생각하며 온갖 나쁜 짓을 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으시며 너희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셨는데 저는 거룩한 하남의 성소를 제가 나쁜 짓을 하고 피하여 숨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고 있습니다.
어머니, 이제 그가 남북이 가로막힌 철조망도 죽어서는 없으니 훨훨 날아 어머니 곁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인이라 어머니는 믿어 낙원에 가셨고 동생은 안 믿어 스올(예수님이 재림하기까지 신‧불신자의 육체가 쉬고 있는 곳)에 갈 것이니 만날 수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죽어서도 또 장벽이 있다고 말을 해야 합니다. 아, 제가 기독교인인 것이 싫습니다. 이 벽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유대인들은 제사장과 바리새인을 앞세워 할례 받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배격했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를 죽였습니다.
이제 예수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고 죽은 아우가 죽어서 한에 맺힌 어머니를 마나고자 하는데 벽을 쌓아놓고 만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동생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동생이여, 나는 참으로 나쁜 놈이다. 악한 짓은 다 하고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고 하나님의 피난처를 강도의 소굴을 만들어 그 뒤에 숨어 편안하게 살고 있다가 또 낮에는 나쁜 짓을 일삼으니 제발 이 나쁜 놈을 용서하지 말아라. 그리고 너는 훨훨 날라 장벽 없는 저 세상에서 어머니를 만나라. 만일 만날 수 없다고 베드로나 바울이 막으면 직접 예수님께 가서 물어보아라. 정말 만날 수 없습니까? 하고 말이다. 너의 사랑은 나의 사랑보다 더 세상의 떼가 묻지 않은 하나님께서 주신 순수한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어머니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도 만날 수 없다고 하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어머니는 너를 보기 위해 하나님과 같이 있는 낙원을 버리고 스올에 가실 것이다. 너와는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눈시울이 촉촉해 지는 글입니다. 어머님을 생각하는 오영재 시인의 감동적인 작품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두고도 국가권력 앞에 어쩌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분단사의 현실을 접하면서 아픈 가슴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