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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7년(2013년) 10월 17일 후기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2)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10월 17일 후기.hwp
서울경기강원지역방 2588번 글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2588
의 후속타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두 번째로 읽었습니다. 오늘 불서읽기 모임은, 보리연꽃 법우, 환희장엄 법우, 클나라 법우 그리고 저 관문, 이렇게 4명이 참석했습니다. 책쫌읽자 법우는 바쁜 일이 있어서 당분간 공부 모임에 참석하기가 어렵다고 하네요.
오늘도 지난번에 모였던 장소 ‘Cafe 57th’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80 미터 가량 직진하신 후 풍문여고를 오른 쪽에 끼고 돌아서 약 60 미터 가면 보이는 곳입니다. 모이는 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교재 <Thich Nhat Hanh,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중 Part One The Four Noble Truths: Chapter Four와 Chapter Five를 읽었습니다. 관문이 가지고 있는 책으로 16페이지 11째 줄부터 23페이지 마지막 줄까지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읽는 동안의 후기는 저희가 그 날 읽은 부분의 영어 본문과 그 번역서인 <진현종 옮김, 틱낫한 스님의 아! 붓다, 반디미디어> 의 번역을 올리겠습니다.
CHAPTER FOUR Understanding the Buddha's Teachings
4장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By comparing the two extant sutra recensions, we can see which teachings must have preceded Buddhism's dividing into schools. When the sutras of both transmissions are the same, we can conclude that what they say must have been there before the division. When the recensions are different, we can surmise that one or both might be incorrect. The Northern transmission preserved some discourses better, and the Southern transmission preserved others better. That is the advantage of having two transmissions to compare.
현존하고 있는 두 판본을 비교해보면 어떤 가르침이 부파 분열 이전의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두 가지 판본의 내용이 똑같다면, 그것은 분열 이전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내용이 다르다면 둘 중 하나 또는 둘 다 틀린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북전과 남전은 각기 좀 더 잘 보존하고 있는 경전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비교해 볼 수 있는 두 가지 전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다고 하겠다.
The third stream of the Buddha's teaching, Mahayana Buddhism, arose in the first or second century B.C.E.6 In the centuries following the Buddha's life, the practice of the Dharma had become the exclusive domain of monks and nuns, and laypeople were limited to supporting the ordained Sangha with food, shelter, clothing, and medicine. By the first century B.C.E., many monks and nuns seemed to be practicing only for themselves, and reaction was inevitable. The ideal put forth by the Mahayanists was that of the bodhisattva, who practiced and taught for the benefit of everyone.
부처님 가르침의 세 번째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대승불교는 기원전 1~2세기에 일어났다.(주6)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던 때로부터 몇 백 년 동안 불법(佛法)의 수행은 비구와 비구니들의 전유물이었다. 재가신자들은 출가승가에 의식주와 약을 보시하는 데 그쳤다. 기원전 1세기 무렵이 되자 비구와 비구니들 중 상당수가 일신의 해탈만을 위해서 수행하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작용을 피할 수 없었다. 대승불자들이 제시한 이상(理想) 인격은 만 중생을 위하여 수행하고 가르치는 보살(菩薩, bodhisattva)이었다.
6 See Thich Nhat Hanh, Cultivating the Mind of Love: The Practice of Looking Deeply in the Mahayana Buddhist Tradition (Berkeley: Parallax Press, 1996).
These three streams complement one another. It was impossible for Source Buddhism to remember everything the Buddha had taught, so it was necessary for Many-Schools Buddhism and Mahayana Buddhism to renew teachings that had been forgotten or overlooked. Like all traditions, Buddhism needs to renew itself regularly in order to stay alive and grow. The Buddha always found new ways to express his awakening. Since the Buddha's lifetime, Buddhists have continued to open new Dharma doors to express and share the teachings begun in the Deer Park in Sarnath.
지금까지 말한 세 가지 흐름은 서로를 보완해주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근본불교가 부처님이 가르치셨던 것을 모두 간직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부파불교와 대승불교는 잊혀지거나 간과된 가르침을 되살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모든 종교 전통과 마찬가지로 불교는 계속해서 명맥을 유지하고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스스로를 쇄신해야 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던 이래 불자들은 사르나트의 녹야원에서 시작된 가르침을 표현하고 나누고자 끊임없이 새로운 법문(法門)을 열어왔다.
Please remember that a sutra or a Dharma talk is not insight in and of itself. It is a means of presenting insight, using words and concepts. When you use a map to get to Paris, once you have arrived, you can put the map away and enjoy being in Paris. If you spend all your time with your map, if you get caught by the words and notions presented by the Buddha, you'll miss the reality. The Buddha said many times,"My teaching is like a finger pointing to the moon. Do not mistake the finger for the moon."
경전이나 설법은 그 자체가 바로 지혜는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말과 개념을 통해 지혜를 소개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지도를 이용해서 파리로 가는 사람은 일단 그곳에 도착하면 지도를 던져버리고 파리를 맘껏 구경한다. 만일 지도에만 매달려 있다면, 그러니까 부처님이 전해주신 말씀이나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실재를 놓쳐버리고 말 것이다. 부처님은 여러 차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가르침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도 같다. 손가락을 달로 착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In the Mahayana Buddhist tradition, it is said, "If you explain the meaning of every word and phrase in the sutras, you slander the Buddhas of the three times — past, present, and future. But if you disregard even one word of the sutras, you risk speaking the words of Mara."7 Sutras are essential guides for our practice, but we must read them carefully and use our own intelligence and the help of a teacher and a Sangha to understand the true meaning and put it into practice. After reading a sutra or any spiritual text, we should feel lighter, not heavier. Buddhist teachings are meant to awaken our true self, not merely to add to our storehouse of knowledge.
대승불교의 전승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경전에 나오는 모든 문구의 뜻을 설명한다면, 삼세(三世), 즉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부처님들을 비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경전에 나오는 단 한 마디 말이라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마라의 말을 내뱉는 것이다.” (주7)
경전은 수행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지침이지만, 그 속에 담긴 참된 의미를 깨닫고 실천에 옮기자면 주의 깊게 읽고 스스로 생각해 보고 스승이나 승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경전이나 논서(論書)를 읽고 나면 심신이 무거워지기는커녕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불교는 그저 지식의 창고에 뭔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진아(眞我)를 일깨워주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7 Mara: the Tempter, the Evil One, the Killer, the opposite of the Buddha nature in each person. Sometimes personalized as a deity.
주7) 마라(Mara): 유혹자, 악마, 살인자라는 뜻으로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는 불성과 반대되는 개념. 신격화되는 경우도 있다.
From time to time the Buddha refused to answer a question posed to him. The philosopher Vatsigotra asked, "Is there a self?" and the Buddha did not say anything. Vatsigotra persisted, "Do you mean there is no self?" but the Buddha still did not reply. Finally, Vatsigotra left. Ananda, the Buddha's attendant, was puzzled. "Lord, you always teach that there is no self. Why did you not say so to Vatsigotra?" The Buddha told Ananda that he did not reply because Vatsigotra was looking for a theory, not a way to remove obstacles.8 On another occasion, the Buddha heard a group of disciples discussing whether or not he had said such and such, and he told them, "For forty-five years, I have not uttered a single word." He did not want his disciples to be caught by words or notions, even his own.
경전은 수행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지침이지만, 그 속에 담긴 참된 의미를 깨닫고 실천에 옮기자면 주의 깊게 읽고 스스로 생각해 보고 스승이나 승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경전이나 논서(論書)를 읽고 나면 심신이 무거워지기는커녕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불교는 그저 지식의 창고에 뭔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진아(眞我)를 일깨워주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따금 대답을 거절하신 적이 있다. 바치고트라(Vatsigotra)라는 철학자가 물었다.
“자아는 존재합니까?”
부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그가 계속해서 물었다.
“자아는 없다는 뜻입니까?”
그래도 부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다. 결국 바치고트라는 물러갔다. 이에 부처님의 시자(侍者)였던 아난다(Ananda)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여쭈었다.
“세존(世尊)께서는 늘 자아라는 것은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왜 바치고트라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에 부처님은 바치고트라가 바란 것은 깨달음을 얻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를 없애는 방법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이론이었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은 것이라고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주8) 또 한 번은 일단의 제자들이 부처님의 하신 말씀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소리를 듣게 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45년 동안 나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제자들이 말이나 관념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기를 바라셨다. 설령 그것이 당신의 말씀이라고 해도 말이다.
8 Samyutta Nikaya XIV, 10.
When an archaeologist finds a statue that has been broken, he invites sculptors who specialize in restoration to study the art of that period and repair the statue. We must do the same. If we have an overall view of the teachings of the Buddha, when a piece is missing or has been added, we have to recognize it and repair the damage.
부서진 조각상을 발견한 어느 고고학자는 조각상을 고쳐서 그 시대의 예술을 연구하고자 복원을 전문으로 하는 조각가들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면, 일부분이 망실되거나 부가되어 있을 경우 그것을 알아차리고 손실된 부분을 복원해야 한다는 말이다.
CHAPTER FIVE Is Everything Suffering?
5장 과연 모든 것이 고통일까?
If we are not careful in the way we practice, we may have the tendency to make the words of our teacher into a doctrine or an ideology. Since the Buddha said that the First Noble Truth is suffering, many good students of the Buddha have used their skills to prove that everything on Earth is suffering. The theory of the Three Kinds of Suffering was such an attempt. It is not a teaching of the Buddha.
수행하는 방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스승의 말씀을 하나의 교리나 이데올로기로 삼는 수가 있다. 부처님이 첫 번째 거룩한 진리가 고통이라고 말씀하신 이래, 수많은 훌륭한 불제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통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갖가지 역량을 발휘했다. 삼고론(三苦論)이 바로 그러한 시도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The first kind of suffering is "the suffering of suffering" (dukkha dukkhata), the suffering associated with unpleasant feelings, like the pain of a toothache, losing your temper, or feeling too cold on a winter's day. The second is "the suffering of composite things" (samskara dukkhata). Whatever comes together eventually has to come apart; therefore, all composite things are described as suffering. Even things that have not yet decayed, such as mountains, rivers, and the sun, are seen to be suffering, because they will decay and cause suffering eventually. When you believe that everything composed is suffering, how can you find joy? The third is "the suffering associated with change" (viparinama dukkhata). Our liver may be in good health today, but when we grow old, it will cause us to suffer. There is no point in celebrating joy, because sooner or later it will turn into suffering. Suffering is a black cloud that envelops everything. Joy is an illusion. Only suffering is real.
삼고의 첫 번째는 ‘고통의 고통’, 즉 치통, 분노, 추위에서 비롯되는 고통처럼 불쾌한 느낌과 결부된 고통으로 ‘고고(苦苦)’라 한다. 두 번째는 ‘합성물의 고통’으로 ‘괴고(壞苦)’라고 부른다. 함께 모인 것은 결국 헤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모든 합성물은 고통으로 설명된다. 산과 강 그리고 태양처럼 여태껏 쇠하지 않은 사물조차도 고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는데, 그것들도 마침내는 쇠해서 고통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합성되어 있는 모든 것이 고통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기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세 번째는 ‘변화에 따른 고통’으로 ‘행고(行苦)’라 한다. 오늘 우리 몸속의 간이 건강하다 해도 나이가 들면 고통을 야기할 수도 있다. 기쁨을 즐길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다. 조만간 그것은 고통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만물을 뒤덮고 있는 먹구름과도 같다. 기쁨은 환상이요, 고통만이 진실이다.
For more than two thousand years, students of Buddhism have been declaring that the Buddha taught that all objects of perception — all physical (table, sun, moon) and physiological phenomena and all wholesome, unwholesome, and neutral states of mind — are suffering. One hundred years after the Buddha passed away, practitioners were already repeating the formula, "This is suffering. Life is suffering. Everything is suffering." They thought that to obtain insight into the First Noble Truth, they had to repeat this formula. Some commentators said that without this constant repetition, the Four Noble Truths could not be realized.1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불제자들은 부처님께서 모든 지각의 대상, 즉 물질적인 것(탁자, 해와 달)과 생리적인 현상을 비롯해서 건전하거나 불건전하거나 이도 저도 아닌 마음의 상태까지 죄다 합쳐서 그 모든 것이 고통이라고 가르치셨다고 말해 왔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지 100년이 되자 수행자들은 이미 다음과 같은 상투적인 문장을 되뇌고 있었다.
“이것은 고통이다. 삶은 고통이다. 모든 것은 고통이다.”
그들은 첫 번째 거룩한 진리[고성제(苦聖諦)]에 담긴 지혜를 간파하고자 한다면, 그 상투적인 문장을 되풀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반복해서 되풀이하지 않으면 첫 번째 거룩한 진리[고성제(苦聖諦)]를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한 주석가도 몇몇 있었다. (주1)
1 Points of Controversy (Kathavatthu), a work belonging to the Southern Transmission that enumerates points on which the various schools of Buddhism differed, says that the question, "Does the realization of the truth of suffering depend on the repetition of the words, 'Idam dukkham ti. '(This is suffering.)?" was answered affirmatively by many schools, including the Purvashaila, Aparashaila, Rajagirika, and Siddharthika. Also, when Mahadeva of the Mahasanghika School listed five reasons that an arhat is not fully awakened, one of the reasons he gave was that an arhat needs to repeat something constantly in order to be able to realize it.
주1) 논사(論事, Kathavatthu)는 남전에 속하는 논서로서 여러 부파가 의견을 달리했던 항목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 논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온다. “‘이것은 고통이다.’라는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고제(苦諦)를 깨닫는가?” 이에 대해 질다라부(質多羅部), 말다리부(末多利部), 라자기리카와 싯다르티카를 포함한 여러 부파들은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또한 대중부의 대천(大天)은 아라한(阿羅漢)이 완전히 깨닫지 못한 이유를 다섯 가지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아라한이 어떤 것을 깨닫고자 한다면 그것을 되뇌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Today, many people invoke the names of the Buddha or do similar practices mechanically, believing that this will bring them insight and emancipation. They are caught in forms, words, and notions, and are not using their intelligence to receive and practice the Dharma. It can be dangerous to practice without using your own intelligence, without a teacher and friends who can show you ways to practice correctly. Repeating a phrase like "Life is suffering" might help you notice when you are about to become attached to something, but it cannot help you understand the true nature of suffering or reveal the path shown to us by the Buddha.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거나 그와 비슷한 수행을 기계적으로 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지혜와 해탈을 얻게 되리라 믿고서 말이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해봄으로써 불법(佛法)을 받아들이고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과 말과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스스로 생각해 보지 않고 수행하는 것은 위험하다. 올바른 수행의 방법을 가르쳐줄 수 있는 스승이나 도반 없이 그렇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삶은 고통이다.’와 같은 말을 되뇌면 어떤 것에 집착하려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고통의 참 모습을 이해하거나 부처님이 보여주신 길을 드러내 보이는 데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This dialogue is repeated in many sutras:
다음의 대화는 여러 경전에서 반복되고 있다.
"Monks, are conditioned things permanent or impermanent?"
'They are impermanent, World-Honored One."
"If things are impermanent, are they suffering or well-being?"
"They are suffering, World-Honored One."
"If things are suffering, can we say that they are self or belong to self?"
"No, World-Honored One."
“비구들이여, 조건 지어진 것[유위법(有爲法)]들은 여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세존이시여, 그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물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은 고통인가, 행복인가?”
“그것들은 고통입니다. 세존이시여.”
“사물이 고통이라면, 그것은 나 또는 나에게 속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When we read this, we may think that the Buddha is offering a theory — "All things are suffering" — that we have to prove in our daily life. But in other parts of the same sutras, the Buddha says that he only wants us to recognize suffering when it is present and to recognize joy when suffering is absent. By the time the Buddha's discourses were written down, seeing all things as suffering must have been widely practiced, as the above quotation occurs more frequently than the teaching to identify suffering and the path to end suffering.
이 대화를 읽고는 부처님은 ‘모든 것은 고통이다.’는 설을 내세우셨으니 우리는 일상생활을
통해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전의 다른 부분을 보면 부처님은 우리가 고통이 있을 때는 그것을 인지하고 고통이 없을 때는 기쁨을 인지하기를 바랄 따름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고통과 고통을 멎게 하는 길을 일러주는 가르침보다 앞에서 인용한 대목이 더 자주 나타나는 것을 보면 부처님의 말씀이 문자로 기록될 무렵에 모든 것을 고통으로 여기는 수행법이 광범위하게 유행했던 것이 틀림없다.
The argument, "Impermanent, therefore suffering, therefore non-self" is illogical. Of course, if we believe that something is permanent or has a self, we may suffer when we discover that it is impermanent and without a separate self. But, in many texts, suffering is regarded as one of the Three Dharma Seals, along with impermanence and non-self. It is said that all teachings of the Buddha bear the Three Dharma Seals.2 To put suffering on the same level as impermanence and non-self is an error. Impermanence and non-self are "universal." They are a "mark" of all things. Suffering is not. It is not difficult to see that a table is impermanent and does not have a self separate of all non-table elements, like wood, rain, sun, furniture maker, and so on. But is it suffering? A table will only make us suffer if we attribute permanence or separateness to it. When we are attached to a certain table, it is not the table that causes us to suffer. It is our attachment. We can agree that anger is impermanent, without a separate self, and filled with suffering, but it is strange to talk about a table or a flower as being filled with suffering. The Buddha taught impermanence and non-self to help us not be caught in signs.
‘영원하지 않으므로 고통이고 따라서 무아(無我)다.’라는 논법은 비논리적이다. 물론 어떤 것은 영원하다거나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면, 그것이 영원하지 않고 별도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고통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 경전을 보면 고통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와 더불어 삼법인(三法印)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에는 삼법인이 들어있다고 한다.(주2) 고통을 무상과 무아와 같은 반열에 두는 것은 잘못이다. 무상과 무아는 ‘보편적인’ 사실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그러나 고통은 그렇지 않다. 탁자가 영원하지 못하고, 나무와 비, 태양, 목수 등등 탁자가 아닌 요소 전부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그것을 고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탁자는 우리가 그것을 영원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에 한해서만 고통을 야기할 뿐이다. 우리가 어떤 탁자에 집착한다고 할 때 고통을 야기하는 것은 탁자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집착이다. 우리는 화는 영원한 것이 아니고, 별도의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고,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탁자나 꽃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는 것은 좀 이상하다. 부처님이 무상과 무아를 가르치셨던 것은 사물의 현상에 사로잡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2 For an explication of the Three Dharma Seals, see chap. 18.
주2) 삼법인의 설명은 제18장을 참조하라.
The theory of the Three Kinds of Suffering is an attempt to justify the universalization of suffering. What joy is left in life? We find it in nirvana. In several sutras the Buddha taught that nirvana, the joy of completely extinguishing our ideas and concepts, rather than suffering, is one of the Three Dharma Seals. This is stated four times in the Samyukta Agama of the Northern transmission.3 Quoting from yet another sutra, Nagarjuna listed nirvana as one of the Three Dharma Seals.4 To me, it is much easier to envision a state where there are no obstacles created by concepts than to see all things as suffering. I hope scholars and practitioners will begin to accept the teaching that all things are marked by impermanence, non-self, and nirvana, and not make too great an effort to prove that everything is suffering.
삼고론(三苦論)은 고통의 보편성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이다. 그렇다면 삶에 무슨 기쁨이 남아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열반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몇몇 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고통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관념과 개념을 없애버리는 데서 비롯되는 기쁨, 즉 열반(涅槃)이 삼법인 중의 하나라고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은 북전(北傳)의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네 번 언급되고 있다.(주3) 용수(龍樹, Nagarjuna) 보살은 다시 다른 경전을 인용하면서 열반을 삼법인의 하나로 열거하고 있다.(주4) 나로서는 만물을 고통이라고 여기는 것보다는 개념 때문에 야기되는 장애가 하나도 없는 상태를 그려보는 것이 더 쉽게 생각된다. 나는 학자와 수행자들이 만물은 고통이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무진 애를 쓰기보다는 만물은 무상, 무아 그리고 열반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것을 바란다.
3 Tsa A Han 262 (Taisho 99).
주3) T. 99 잡아함경(雜阿含經) 262
4 Mahaprajñaparamita Shastra. See Étienne Lamotte, Le Traité de La Grande Vertu de Sagesse (Louvain, Belgium: Institut Orientaliste, 1949).
주4) 대지도론(大智度論) Étienne Lamotte, Le Traité de La Grande Vertu de Sagesse (Louvain, Belgium: Institut Orientaliste, 1949)를 보라.
Another common misunderstanding of the Buddha's teaching is that all of our suffering is caused by craving. In the Discourse on Turning the Wheel of the Dharma, the Buddha did say that craving is the cause of suffering, but he said this because craving is the first on the list of afflictions (kleshas). If we use our intelligence, we can see that craving can be a cause of pain, but other afflictions such as anger, ignorance, suspicion, arrogance, and wrong views can also cause pain and suffering. Ignorance, which gives rise to wrong perceptions, is responsible for much of our pain. To make the sutras shorter and therefore easier to memorize, the first item on a list was often used to represent the whole list. The word "eyes," for example, is used in many sutras to represent all six sense organs5 and "form" is often used to represent all Five Aggregates (skandhas).6 If we practice identifying the causes of our suffering, we will see that sometimes it is due to craving and sometimes it is due to other factors.
흔히 오해되고 있는 또 하나의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모든 고통은 갈애(渴愛)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것이다. <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갈애(渴愛)는 고통의 원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갈애(渴愛)가 모든 번뇌(煩惱, klesha) 중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해 보면 갈애(渴愛)는 고통을 야기하는 하나의 요인일 뿐 화, 무지(無知), 의혹(疑惑), 교만(驕慢) 그리고 사견(邪見-요사스러운 생각이나 바르지 못한 의견) 역시 고통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찌 보면 잘못 된 생각을 일으키는 무지야말로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의 많은 부분에 책임을 져야 한다. 경전을 암기하기 쉽도록 짧게 만들다보니 첫 번째 번뇌가 모든 것을 대표해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눈[眼(안)]’은 육근(六根)(주5)을 대표하고 ‘색(色)’은 5온(蘊, skhanda)(주6)을 대표하고 있는 경우를 여러 경전에서 볼 수 있다. 고통의 원인들을 확인하는 수행을 해보면, 고통이 갈애(渴愛)로부터 오는 경우도 있고 다른 요소로부터 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5 Six sense organs: eyes, ears, nose, tongue, body, and mind.
주5) 육근(六根): 눈[眼(안)], 귀[耳(이)], 코[鼻(비)], 혀[舌(설)], 몸[身(신)]과 마음[意(의)]으로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의미함.
6 The Five Aggregates are the elements that constitute a person, namely form, feelings, perceptions, mental formations, and consciousness. See chap. 23.
주6) 5온(蘊)은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로 즉 형상[色(색)], 느낌[受(수)], 지각[想(상)], 정신의 구성력[行(행)]과 의식[識(식)]을 말한다. 23장을 보라.
To say, "Life is suffering," is too general. To say that craving is the cause of all our suffering is too simplistic. We need to say, 'The basis for this suffering is such and such an affliction," and then call it by its true name. If we have a stomachache, we need to call it a stomachache. If it is a headache, we need to call it a headache. How else will we find the cause of our suffering and the way to heal ourselves?
‘삶은 고통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일반화시킨 것이다. 갈애(渴愛)가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너무 단순화시킨 것이다. “이 고통을 일으킨 근거는 이러이러한 번뇌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불러야 한다. 복통이 생기면 북통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것이 두통이라면 두통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밖에 어떻게 고통의 원인과 그 치유방법을 얻을 수 있겠는가?
It is true that the Buddha taught the truth of suffering, but he also taught the truth of "dwelling happily in things as they are" (drishta dharma sukha viharin).7 To succeed in the practice, we must stop trying to prove that everything is suffering. In fact, we must stop trying to prove anything. If we touch the truth of suffering with our mindfulness, we will be able to recognize and identify our specific suffering, its specific causes, and the way to remove those causes and end our suffering.
부처님이 고성제(苦聖諦)를 가르치신 것은 사실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물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진리’(주7) 즉 멸성제(滅聖諦)도 가르치셨다. 수행을 통해 성과를 얻고자 한다면, 만물은 고통이라는 것을 애써 증명해 보려고 하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실로 우리는 무언가를 증명하려고 애쓰는 태도를 멈춰야 한다. 알아차리는 자세로 고성제(苦聖諦)를 접한다면, 특정한 고통과 고통을 일으키는 특정한 원인 그리고 그러한 원인들을 제거해서 고통을 멎게 하는 방법을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7 Samyutta Nikaya V, 326, and many other places.
주7) Samyutta Nikaya V, 326과 여러 곳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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