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주민운동과 [민중의 집]
― 와인과 레지스탕스 거리의 시민들
박홍순 번역
머릿말
내가 [민중의 집]의 존재를 처음으로 안 것은 1973년에 펠지아의 외국인 대학에 유학하고 있을 때이므로 10년 전의 일이다. 대학 근처에 있는 가리발디 거리에 바(BAR}가 있는데 ‘CASA DEL POPOLO'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다음 해에 볼로냐로 레지스탕스 조사를 하러 갔을 때 안내인에게 파르티잔 경험자의 말을 듣고 싶다고 하자 [민중의 집]에 가면 직접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이 말를 듣고 방문한 것이 이 책에 나온 산․도나트 지구와 콜티쳇라 지구의 [민중의 집]이다.
그 후 기회 있을 때마다 볼로냐, 피렌체, 토리노, 로마 등에 있는 [민중의 집]를 방문하였다. 나에게 이 방문은 이탈리아 민중(포포로)의 생활과 발상에 대한 귀중한 체험의 장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각 지역 [민중의 집]의 역사가 정리된 것은 1975년경부터이다. 그것은 파시즙, 나치즘으로부터의 해방 30주년(75년 4월 25일), 공화제 출범 30주년(76년 6월 2일) 등 전후사에 하나의 매듭이 지어진 시기이다. 그것은 또한 파시즘과 레지스탕스라는 양극의 국민적 체험을 역사적으로 파악해 보려는 이탈리아 민중의 바램과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민중의 집] 활동의 조사를 통해 이탈리아에서 항상 강조된 ‘아래로부터의 통일’의 구체적 상을 실감나게 파악하려고 했다. 이는 소위 민주주의의 생활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도,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당파 사람들이 함께 술을 마시면서 정력적으로 토론하고 있는 [민중의 집] 바(BAR)의 광경은 지금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다른 입장과 사상, 신조를 배제하지 않고 각각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고 상호 이해, 협력, 공동의 관계를 만들어 내는 장으로서 [민중의 집]이 중요시되고 있는 점에서 ‘이탈리아 민주주의’가 갖는 강인함을 볼 수 있다.
‘비파나무의 열매가 열리기 위해서는 시간과 짚이 필요하다’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격언이 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상호 이해와 신뢰를 쌓고 공동으로 무언가를 하기까지는 어느 정도 많은 시간과 와인과 에네르기를 필요한 것인가.
이탈리아 전체적으로 천 군데 이상이 있고 130년에 이르는 전통을 갖는 [민중의 집]을 방문햐는 일본인도 해마다 늘고 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을 보통 이탈리아 애호가라고 하는데 어떤 종류의 문화 충격을 느끼게 하는 매력을 [민중의 집]은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민주주의의 활성화’가 논의된지 오래인데 이것을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생활화 내지는 민주주의를 생활 문화로서 파악하는 시각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은 이러한 시각에서 [민중의 집]을 소개하고 있다.
Ⅰ 볼로냐 [민중의 집]으로부터의 보고
1. [민중의 집]의 탄생
와인과 토론의 장
[민중의 짐]. 이탈리아어로 ‘카사 델 포포로’라고 한다.
카사는 집, 포포로는 인민․민중․시민을 의미한다.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주(주의 도시는 피렌체), 에밀리아․로마냐 주(주의 도시는 볼로냐), 삐에몬떼 주(주의 도시는 토리노)를 중심으로 하여 이탈리아 전체로는 1000개 이상 있다는 이 [민중의 집]은 18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그 전신인 [상호부조조합]을 포함하여 130여년의 전통을 갖는 이탈리아의 독특한 민주적 지역조직이다. 따라서 각 지역 [민중의 집]은 이름이 같을지라도 그 지역의 노동운동, 농민운동, 반파시즘 레지스탕스 운동 등의 역사적 전통과 생활 양식이 깊게 새겨져 있기 때문에 구체적 형태, 활동 내용은 지역마다 매우 다르다.
볼로냐 현(인구 약 백만명)에는 [민중의 집]이 94개(그 가운데 볼로냐 시내에는 20개)가 있는데 ARCI(나중에 상세하게 설명하겠다) 에미리아․로마냐주 연합회 의장 A․볼피 씨의 말에 의하면 이들의 평균적 모습은 다음과 같다.
우선 [민중의 집]의 건물은 지하 1층에 3층 건물로 되어 있다. 각 층의 기능은,
▴ 1층 : 바(BAR), 살롱, 카드실, 당구실
▴ 2층 : 정당 사무소(주로 사회당, 공산당), 노조사무소(노동총동맹의 지역 노조),
각 민주 단체, 써클실, 회의실
▴ 3층 : 다목적 홀(각종 집회, 강연회, 댄스 파티 등에 사용)
▴ 지하 : 창고, 써클실, 암실, 체육홀 등.
이들 시설이 하나의 건물 안에 있다.
각 지역 [민중의 집]의 공통적인 요소를 먼저 종합하여 보면,
(1) 시민, 노동자의 모금과 자발적 노동 봉사로 건설되었다는 것.
(2) 정당(특히 사회당, 공산당), 노동조합, 협동조합, 청년 조직, 부인 조직, 문화․레크레이션․스포츠 조직 등이 협력하여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든가, 혹은 지원하고 있는 것. 그러한 의미에서 확실히 [민중의 집]은 지역 민주 운동의 ‘통일 센타’이다.
(3) 바를 비롯하여 레스토랑, 카드실, 당구실이 있고 업무가 끝난 후에 노동자와 시민들이 와인을 마시거나 레크레이션을 즐길 수 있는 ‘휴식의 장’이라는 것. 체육관, 축구장, 영화관 등을 갖추고 있는 곳도 있다.
동료들과 와인을 마시면서 정치 토론을 하는 것이 이탈리아 노동자들에게 가장 즐거운 일 중의 하나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어느 의사에게서, 다른 선진국에 비하여 이탈리아는 신경성 위장염과 노이로제가 적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민중의 집]에서 와인을 마시며 활발하게 정치 토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마라보면서 ‘그것은 개방적인 샐활 양식에 의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4) 지역의 문화, 레크레이션, 학습 활동의 센타로서 소위 지역의 민주적 문화 센타적인 기능을 갖고 있는 것.
(5) 바티칸을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교회 조직의 이데올로기적․문화적 영향에 일상적으로 대항하는 민주적 진지의 일환인 것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 진실은 위장을 통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민중의 집]은 손발에 관련된 것(스포츠, 레크레이션)으로부터 위장, 심장, 두뇌에 관련된, 즉 그 지역의 생활과 문화, 투쟁에 관한 온갖 기능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시간 단축의 의미, 즉 노동자가 일정의 여가=자유 시간을 획득하는 것을 노동자의 건강 보호, 사회적 교류, 지적 발달의 세 가지 점에서 중요시 하였다. 일정의 여가=자유 시간을 자본측에서 조직․관리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민주 진영이 적극적으로 조직하여 노동자 건강의 보호․증진, 사회적 교류와 연대의 강화, 나아가 지적 발달의 조건을 창출해 나가는가라는, 80년대 일본의 ‘문화’를 둘러싼 2개의 길을 생각해 볼 때 [민중의 집]의 역사적 경험은 일정한 시사점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레지스탕스의 도시 ― 볼로냐
내가 중점적으로 조사한 것은 볼로냐 지방의 [민중의 집]이었는데 이곳은 북부와 함께 19세기 후반 이래 노동 운동, 농민 운동이 활발한 지방이다.
볼로냐 시는 1914년 지방 선거에서 사회당이 제 1당으로 되어 혁신 시정(市政)을 시작하고 다음 해에는 전국 수백의 혁신 자치체에 제안하여 제1회 혁신자치체전국회의가 개최되었다.
에미리아 지방에 최초의 혁신자치체가 탄생한 것은 1899년 렛죠․에미리아 시이다. 볼로냐 현은 1914년 선거에서 현과 시 모두 혁신자치체가 되었다. 1920년 선거에서는 에미리아 지방에 있는 지역 가운데 233개, 8개의 현 가운데 7개의 현이 혁신자치체로 되었다. 같은 해의 지방 선거에서는 이탈리아 전국에서 약 2000개의 혁신 지역이 탄생하였는데 이것은 지역 전체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볼로냐 시는 제2차대전 중 ‘레지스탕스 도시’로서 독일군에 대항하여 저항 세력의 힘으로 자력 해방을 이루었다. 전후에도 줄곧 제1당인 공산당, 제3당인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혁신 시정을 유지하고 있다. 참고로 말하면 1980년 지방 선거에서 공산당 득표율은 40%였다. 현 시장은 R․장게리 씨로 볼로냐 대학 교수이고 공산당 지도부원이기도 하다.
볼로냐 시는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유럽의 대표적 혁신자치체로서도 유명하고 ‘효율적․민주적이고 또한 청결한 시정’(뉴욕 타임즈), ‘유럽에서 가장 좋은 자치 도시’(뉴스위크) 등 미국의 메스콤으로부터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조사를 하면서 볼로냐에서 최초로 만난 사람은 루이지 알빗자니 씨이다. 그는 에미리아․로마냐 지방의 노동․농민운동사, 레지스탕스 운동사 연구자로서 저명하고 이 지방 민중사 발굴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알빗자니 씨는 파시즘의 폭압이 강하던 1924년에 태어났다. ‘파르티잔 행동대’의 일원으로 레지스탕스에 참가하고 파르티잔에 의한 볼로냐 지방의 자력 해방을 체험한 사람이다.
현재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중심적 연구 센타인 그람시 연구소 볼로냐 분실 책임자, 볼로냐를 비롯하여 각 자치체에 부설되어 있는 레지스탕스사 연구소 지도원을 맡고 있다. 최근 청년․학생들로부터 파시즘사, 레지스탕스사의 학습․연구의 요구가 높아지고 각 지역에서의 강의와 학습 써클의 지역사 탐구 지도로 매우 바빴지만 다행히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알빗자니 씨와의 인터뷰 ― [민중의 집]의 역사
▴문 : 우선 [민중의 집]의 기원에 대하여 설명해 주십시오.
▴답 : [민중의 집]의 탄생은 이 지방 노동 운동, 농민 운동의 전통에 매우 깊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볼로냐에서는 이탈리아 통일전선(=리소르지멘트. 1861년 이탈리아는 이를 계기로 근대 국가를 수립하였다)이 한창인 1860년 4월, 볼로냐 노동자 협회가 설립되고 ‘노동자 회관’이 시내의 카바리에라 거리에 만들어졌습니다. 이 노동자 협회는 노동조합이라기보다는 상호 부조, 학습 교육, 교류의 조직이었고 나중에 이로부터 다양한 노동자 조직이 태어나고 성장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1893년에는 노동평의회(지역노조)가 세워졌고 1871년(파리 코뮨의 해)에 설립된 인민교육연맹은 1901년에 ‘인민 대학’으로 발전하였으며 협동 조합도 조직되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자의 조직이 확대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1881년에는 로마냐 사회혁명당이 결성되고 1892년에는 이탈리아 노동자당(사회당의 전신)이 창설되었습니다. 이처럼 당시의 노동자․농민의 정치적 고양이 [민중의 집]을 만든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문 : 그러면 당시에 이미 [민중의 집]으로 불려지고 있었던 것입니까?
▴답 : 카바리에라 거리의 노동자 회관이 [민중의 집]으로 불린 것은 18932년부터 입니다. 이 해에 사회당 제2회 대회가 개최되고 이 지방의 각지에 이미 건설되어 있었던 노동자 회관과 집회소를 [민중의 집]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인민교육연맹1)과 노동평의회의 사무소, 집회실, 생활협동조합 등이 당시 노동자 회관의 참가 단체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노동자․농민들의 집회소와 써클 등도 당시 경찰은 [민중의 집]으로 간주하고 감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점입니다. [민중의 집]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는 않았어도 그와 같은 기능을 갖는 노동자․농민의 써클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있었는가를 말해주는 흥미있는 에피소드라 할 수 있습니다. 전쟁과 파시즘의 탄압에 의해 [민중의 집]에 관한 사료가 손실되었기 때문에 정리된 자료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공문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경찰 자료 중에는 당시의 삐라, 팜프렛, [민중의 집]의 활동 보고 등의 귀중한 사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 젊은 연구자들과 협력하여 발굴 작업을 진척시키고 있습니다.1)
▴문 : 당시 [민중의 집]의 활동은 어떠했습니까?
▴답 : 우선 노동자․농민 각층의 우호와 연대를 강화하는 파티나 토론회 등의 개최, 둘째로 병이나 사고가 났을 경우의 상호 부조와 공제 활동을 했습니다. 셋째로 당시 노동자․농민의 다수는 소년기부터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등 교육 조차도 받을 수 없었고 60% 이상이 문맹이었기 때문에 글자 교육 등의 초보적 교육과 보통 선거권의 의의에 대한 정치 교육을 했습니다. 넷째로 협동조합운동(생산협동조합에서 소비협동조합에 이르는) 추진 등이 활동의 중심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민중의 집]의 활동 내용과는 크게 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농민이 교회와 자본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완전히 자력으로 건설한 최초의 자주적 조직이었다는 점을 [민중의 집] 탄생의 의의로서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사상적․문화적 영향력은 오늘날 보다도 훨씬 강하였고 [민중의 집] 건설 활동 자체가 노동자․농민의 계급적 자각, 사상적 성장에 있어서 매우 큰 교훈과 자신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민중이 집]은 노동자 계급 연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864년에 마르크스․엥겔스가 참여한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가 창설되고 제1인터내셔널의 사상적 제 조류가 급속하게 이탈리아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도 이탈리아 노동자들 사이에 계급적 자각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노동자 주택 건설을 위해 건설 협동조합도 1880년대에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이것 역시 노동자 협회의 노력으로 실현됐던 것입니다. 제1인터내셔널의 영향과 더불어 생산 협동조합, 건설 협동조합을 중시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러 이 지방 사회 운동, 노동 운동, 협동조합 운동의 전통을 만들고 있습니다.
‘잔돈의 집’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민중의 집]은 주로 노동자의 교류․연대 활동, 상호부조 활동, 교육․학습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알빗자니 씨의 말은 처음에는 냉정하고 차분한 어조였으나 점차 열기를 띄어 손짓 몸짓을 섞어가며 인터뷰를 하였다. ‘이탈리아 인은 손으로 말을’ 하기 때문에 ‘이탈리아 인을 조용히 시키고 싶을 때는 손을 묶어 두면 된다’고 하는데 완전히 그대로였다. 자신이 발굴한 자료의 설명도 섞어가며 알빗자니 씨의 설명은 점차 이 지방 근대 사회 운동사의 강의로 되었다. 그 모두를 여기에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요점만 소개하겠다. 교회의 영향력(그것은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이 노동자․농민에게 뿌리내리고 있는 가운데 [민중의 집]의 교육․학습 활동은 다양한 민주주의 사상을 민중에게 전파하는 ‘민주주의 교육 센타’로서 역할했던 것이다. ‘부르주아지에게 있어서 도시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있어서 [민중의 집]’ ‘[민중의 집]은 장래 협동 사회의 맹아이다.’라는 당시의 표현은 근로 인민에게 있어서 [민중의 집]이 가졌던 의의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볼로냐를 포함한 에미리아 지방은 1903년에 이미 371개의 사회당 지부와 15039명의 당원을 갖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볼로냐 시에서는 32개의 지부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지부의 대부분이 [민중의 집] 내지 그것에 가까운 써클을 다른 민주 조직과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어떤 [민중의 집]은 [잔돈의 집]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노동자․농민의 몇년에 걸친 소액 모금에 의하여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자 자녀를 위한 보육과 여름 학교 등의 활동도 혁신 시정 아래에서 추진되었다. 제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는 독일에 침략당한 벨기에의 전쟁 고아를 받아 들여 보살펴 주는 국제 연대 활동도 하였다.
파시즘 아래에서
▴문 : 제1차 대전 후는 어떠했습니까?
▴답 : 러시아 혁명(1919년)의 영향도 있고 토리노의 공장평의회 운동을 비롯하여 이탈리아 전 국토에서 노동자․농민의 운동이 크게 고양되고 [민중의 집]은 다양한 투쟁의 거점으로서 더욱 발전했습니다.2)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에 따라 무솔리니가 주도하는 파시즘 운동이 대두되어 볼로냐에서는 혁신 시정도 무장 파시스트에 의하여 파괴되고 대부분의 [민중의 집]이 파시스트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1921년만 해도 [민중의 집]의 간부를 포함하여 19명이 파시스트에 의하여 살해되고 1936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파시스트에 대한 패배라는 뼈아픈 경험 으로부터 우리들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운동, 노동 운동을 더욱 발전적으로 통일시켜 나가기 위한 생생한 교훈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지역에 있어서 계급 투쟁의 역사를 밝혀 내는 것이 중요한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 : 파시즘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는?
▴답 : 파시스트 권력은 [민중의 집]을 파시즘의 민중 지배에 이용하려고 [민중의 집]을 점거하여 [파시즘의 집]이라 고쳐 부르고 새로운 [파시즘의 집]을 건설하였습니다. 노동자․농민에게 강제적인 모금을 했고 모금이 가능하기 않은 경우는 강제노역을 시켰습니다. 곳에 따라 다르지만 한 사람당 30~40일간 무상으로 노동을 시켰습니다. 그 중에는 90시간이나 노동을 시키는 지독한 곳도 있었습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한 세대당 400리라의 강제 모금이 강요되기조차 했습니다(당시 노동자의 일당은 5~10리라이고 400리라는 숙련 노동자의 한달분 이상의 임금에 해당한다). 파시즘 시대에 [민중의 집] 위원회와 그 활동가는 지하 활동을 하였습니다. ‘온갖 파시즘 조직에 들어가 그 내에서 파시즘 비판을 수행한다’라는 방침 아래 [파시즘의 집]에도 참가하여 반 파시즘 활동을 하였습니다. ‘파시스트를 가장한 반 파시스트’에 대해서는 파시스트 당국도 골치아파했습니다. 파시즘의 압정 아래서도 이같이 저항 활동이 끊이지 않고 지역 저항 조직(국민해방위원회의 지역 조직)망의 눈을 구축하였고 또한 전후 개혁기에 지역적 연대를 강화하였습니다. 이렇듯 파시스트 권력 아래서 [민중의 집] 위원회의 활동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어떤 [민중의 집]의 역사
파르티잔 투사의 이름을
여기에서 볼로냐현 가운데서도 가장 큰 규모를 갖고 있는 [민중의 집]의 하나인 콜티쳇라 지구 [민중의 집]의 소사를 소개하겠다.
이 [민중의 집]은 파르티잔 투사의 이름에서 따서 지은 <부르노 토사렛리>라는 애칭이 붙여져 있다. 토사렛리라는 사람은 이 지역에서 태어난 솜씨 좋은 목공이었는데 철저한 반파시스트였기 때문에 파시즘 시대에 7년간 투옥되었다. 레지스탕스에도 파르티잔으로 참가하고 전후 [민중의 집] 운동을 크게 발전시킨 지도자였다. 이 지역의 반파시즘과 레지스탕스, 전후의 역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사후 그 이름을 [민중의 집]의 이름으로 기념하고 있다.
이곳의 소사는 이 지역의 ARCI(이탈리아 문화 레크레이션 협회) 소속 <B․브레히트 써클>의 청년․학생 회원들이 지역사 발굴 운동(그것은 또한 살아있는 학습 운동인데)의 일환으로 추진하여 소책자로 정리했다.
이곳 [민중이 집]의 부지는 약 300평, 현재 건물의 앞 부분은 지하 1층(체육실, 극장), 1층(레스토랑, 오락실 등), 2층(중간 홀, 현재는 청소년들의 디스코 홀), 3층(큰 홀로 주로 주민 집회와 댄스 파티 등에 사용됨)이 있다. 건물의 뒷 부분은 4층으로 각 단체의 사무소, 도서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가 방문한 [민중의 집] 가운데서도 좋은 설비를 갖추고 있는 곳이었다.
공격하는 파시스트
노동자․농민의 운동은 그것이 태어난 때부터 정치 활동과 조합 활동, 협동조합 운동 등을 위하여 자신의 시설을 필요로 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설의 확보가 근로 제계급이 자신들의 자유를 실현하고 자주적 능력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민중의 집]의 탄생은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다. [민중의 집]은 노동자․농민의 모금과 노동 봉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것은 [민중의 집]을 운영하는 이념에 있어서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연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민중의 집]은 문화적 개혁의 수단이 되고, 또한 정치 생활로부터 배제된 채 비인간적 노동 조건 아래 처해 있던 당시의 근로자에게 개인적인 요구가 근로 계급 전체에 결합하는 공통의 요구라는 자각, 즉 계급적 자각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우리들의 콜티쳇라 지구에는 금세기 초기에 ‘상호부조조합’(SMS)이 만들어지고 이 지역 근로자의 상호 연대를 강화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 협회의 회원은 일정한 회비를 납부하면 무료로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이 가능했다. 1915년에 이 ‘상호부조협회’는 사회당 혁신 시정의 협력 아래서 근로자의 자녀를 위한 레크레이션 캠프를 만들었고 이 행사는 그 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나중에는 보육원도 병설되었다.
또한 금세기 초기에 최초의 노동자 써클이 생기고 혼티 거리에 그 거점이 만들어졌다. 이곳은 사회주의자는 물론 제1차대전 이전에는 무정부주의자도 포함된 정치 토론의 장으로 되었다(초기의 회원수는 약 20명). 이 써클은 그 내에 도서관을 갖추고 정치 문서를 논의하는 집회를 자주 열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밤에만 문을 여는 술집도 있었고 회원에 의하여 자주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 후 ‘노동자협동조합’도 이 지구에 조직되고 같은 지혼티 거리에 있는 건물을 분할로 사들여 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 장소에는 현재 전사한 파르티잔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1920년대 초, 파시즘(뭇솔리니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1922년)이 온갖 자유를 억압하기 시작한 때, 이들 써클 조직도 그 폭력적 공격의 목표로 되었다.
어느 날 저녁 무렵에 훼라라 지구의 파시스크 돌격대가 이 지구로 원정을 와서 이들 써클을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파시스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구에서는 얼굴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활동하기 어려웠으므로 자주 원정을 하였다. 이 날의 공격에 의하여 써클을 지키려고 싸우던 노동자가 한 명 살해되었다. 이들 써클은 이 공격에 의하여 폐쇄되었지만 노동자는 비공개적인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중에서도 1920년에 창설된 ‘렝가 제조협동조합’만은 유일하게 파시즘 체제에 맞서 공공연한 저항을 계속하고 그 후에 반파시즘 운동의 거점으로 되어 그 조합원은 단 한사람도 파시스트 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파시즘은 온갖 단체를 금지시켰지만 한편으로는 [민중의 집]이 민중의 합의를 형성하는 수단으로서 유효하다고 생각하여 그들의 손으로 [파쇼의 집]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파쇼의 집]은 단순한 통제와 밀고의 기관이 되었을 뿐 시민이 모이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못했다.
전쟁의 종결과 함께 이 지구의 해방위원회(레지스탕스에 참가한 반파시즘 제 정당에 의한 ‘국민해방위원회’의 지역 지부)는 [파쇼의 집]을 점거하고 그곳을 해방위원회의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민중의 집]이 재건되고 그곳에 좌익의 제 정당, 민주 단체, 청년전선(해방위원회의 통일적 청년 조직) 등의 사무실도 들어섰다.
당시 [민중의 집]은 술집과 작은 집회실밖에 없었고 가까운 영화관을 빌려쓰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 때문에 정치적 활동뿐만 아니라 문화․레크레이션 활동 등 폭넓은 활동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시설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도 당연하였다. 이 문제 때문에 주민 집회가 자주 열리고 새로운 [민중의 집]을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건설 자금을 어떻게 마련하는가, 용지를 어떻게 구하는가라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고 실제로 건설에 착수하기까지 수 년의 시일이 필요했다.
여기에 새로운 [민중의 집]이 건설됩니다
1958년 8월 공산당, 사회당, 노동평의회, 문화 조직 등의 참여속에 [민중의 집] 건설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 좌익 정당과 [민중의 집]에 대한 편견이 있었고, 구입이 예정되어 있던 용지의 주인에게 압력이 들어오거나 또는 주인 자신이 편견 때문에 토지의 가격을 두 배로 올려 부르는 등 방해 요인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 준비위원회는 시민에게 용지 구입을 위한 모금을 호소하여 필요한 구입 자금 700만 리라를 모았다. 이것은 이 지구의 사람들이 자신의 시설을 얼마나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1959년 1월 5일에는 구입한 토지 위에 ‘여기에 새로운 [민중의 집]이 건설됩니다’라는 간판이 세워졌다. 직접적인 체험이 없는 요즈음의 젊은이들과 이후에 이곳으로 이사온 사람들은 이 간판이 갖는 의미를 실감나게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테지만 당시의 정세에서 그것은 하나의 승리(그것은 아직 작은 승리였지만)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지구의 뿌리깊은 통일의 의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준비위원회는 설립된 초기부터 다양한 민주주의 세력의 참가를 호소하였다. 이 지구 주민의 연대는 사회당, 공산당 지지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준비위원회의 공정한 활동에 의하여 이데올로기의 벽을 넘어 광범한 주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한 집마다 매월 1000리라를 [민중이 집]을 위하여’라는 슬로간 아래 설비 자금 조달의 호소가 시작되었다. 사상, 이데올로기에 관계없이 다수의 주민이 이 호소에 호응하였다. 연급 생활자도 그 적은 수입에서 모금에 참여하였다. 사회당, 공산당의 지역 지부도 댄스 파티, 농민 축제, 야외 파티 등을 개최하여 수익금을 모으는 등 적극적인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새로운 [민중의 집]의 건설은 파시즘과 투쟁한 전통을 갖고 있는 건설협동조합이 맡기로 하였다. 이 조합은 건축 자재 비용을 장기 분할하여 갚는 좋은 조건으로 일을 맡았다. 설계도도 이 지구의 전문가가 협력하여 4개의 안이 만들어지고 이것을 원안으로 400여명이 참가한 주민 집회에서 대중적으로 검토되었다.
건설준비위원회의 결성으로부터 4년 8개월, 자금 조달의 어려움에 의하여 건설 계획은 예정보다 늦춰졌는데 63년 3월에는 1층 술집 부분이 완성되어 공개되었다(카드실, 당구실이 병설되어 있다). 건설 작업에는 많은 주민의 노동 봉사가 제공되었고 자금과 건설 계획상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건설위원회는 주민 집회를 조직하여 주민의 의견과 비판을 듣고 한편으로는 주민 자신의 직접 참가를 요청하면서 완성을 목표로 작업이 추진되었다.
이리하여 1964년 6월 2일(이 날은 46년의 정체 결정 극민투표로 공화파가 승리한 기념일)에 새로운 [민중의 집]의 완성 축하회가 열렸다. 완성까지 들어간 자금은 약 7000만 리라, 이것은 당초 예상 자금을 훨씬 넘는 금액이었다.
연대의 센타로서 ― 1963~79년의 활동
완성하고 나서 최초의 10년 동안 [민중의 집] 운영위원회는 재정 문제로 큰 곤란을 겪었다. 지불 기일까지 필요한 돈을 마련하는 것이 도대체 무리한 일이었다. 60년대를 거치면서 지불 총액은 1억 리라를 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믿기 어렵게도 이 재정적 위기는 주민 전체의 지원에 의하여 극복되었다. 운영위원회의 호소로 열린 재정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주민 집회는 위원회와 주민의 결합을 강화하고, 단지 당면한 경영 개선의 노력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주민의 협력과 지지를 확대하는 장으로 되었다. 이 주민 집회로부터 운영위원회는 주민의 신뢰를 획득하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하여 주민집회는 주민에게 있어서 [민중의 집] 운영에 직접 참가하는 장이 되고 [민중의 집] 운영이라는 범위를 넘어 훌륭한 정치 교육 학교가 되었다.
이 새로운 [민중의 집]에는 개설 당시부터 사회당, 공산당, 사회주의청년동맹(사회당계의 청년 조직), 공산청년동맹(공산당계), ANPI(이탈리아 파르티잔 협회), UDI(이탈리아 부인연맹, 레지스탕스 활동시에 결성된 민주적 부인의 통일 조직), 각종 노동조합, 축구 클럽 등이 사무실을 두고 나중에는 ARCI(문화․레그레이션 협회) 가맹 써클인 <B․브레히트>도 참가하였다.
이들 제 조직에 의하여 이 지구의 사회적․문화적 활동의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시도가 이루어 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와 동시에 이들 조직간의 연대 강화,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다지기 위한 다양한 노력도 이루어졌다. 술집은 공적인 영업 허가를 얻어 비회원에게도 개방되고 일반 주민이 자유롭게 즐기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재정적인 프라스만이 아니라 사상, 신조, 회원, 비회원을 가리지 않고 다수의 시민이 모이고 교류하고 의논하는 장으로 되었다. 이 술집은 [민중의 집] 위원회의 전문부서에 의해 운영되었다.
[민중의 집]에서는 정치 토론 등도 자주 벌어지지만 무엇보다도 활동의 중심은 문화 운동이었다. 다양한 주제의 강연회, 세미나, 영화회, 리사이틀, 콘서트, 연극, 에니메이션 상영, 미술전, 취미 모임 등이 열렸다.
문화 레크레이션 협회의 써클은 댄스 파티 등의 레크레이션 활동을 담당하고 있는데 이것은 재정적으로도 이익을 준다. 3층의 다목적 홀(약 136평)은 댄스 파티를 비롯해 주민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시설이다.
문화 레크레이션 협회의 평화 문제에 대한 노력은 특별한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1967년, 68년에 가톨릭 청년 조직과 공동으로 개최한 베트남 문제에 대한 집회는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베트남, 스페인, 모잠비크, 그리스, 중동 제국, 칠레, 이란 등에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활동에 많은 시민이 참가하였다.
처음에 창고용으로 만들어진 지하실은 체육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스포츠는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 쉽고 정신적․육체적 발달에 유용하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 교육적 의의가 중시되고 체조 교실이 개설되어 있다. 이 체육관은 어린이와 어른 각각의 요구에 부응하는 스포츠 공간이 되고 있다.
1965년부터 73년에 결쳐서 활발한 토의가 이루어진 문제의 하나는 초등학생 보육을 둘러싼 문제였다. 이 지구는 노동자증 중심의 지역인데 주민의 다수는 과거의 ‘소수자를 위한 학교’(선별주의 교육을 추구하는)라는 교육 방식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시 당국에 의한 초등학생 보육은 고비용의 사립 시설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공립 학교를 쇄신하는 자극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었다. 시에 의하여 새로운 초등학생 보육 시설이 만들어지기까지 [민중의 집]이 초등학생 보육의 가장 좋은 장소로 생각되었고 이 때문에 여러 시설이 시에 제공되었다. 초등학생 보육은 자녀들의 교류의 장이었고 단순한 학습 이상의 귀중한 체험을 얻는 곳이었다. 어린이들은 여기서 학습만이 아니라 연극 활동, 신문의 발행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민중의 집]의 초등학생 보육에 대한 노력은 부모들의 관심을 높이고 학교 교육의 방식, 내용에 대하여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교육과 사회위원회’가 결성되고 자녀들을 소년기부터 선별하는 교육 방식을 쇄신하기 위한 광범위한 운동이 고양되었다(오늘날에는 ‘민주부모위원회’라는 이름으로[민중의 집]에 참가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민중의 집]은 20년 전에 설계된 것이지만 장래를 내다보며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지역의 요구에 충분히 부응할 만하다. 오늘날에도 술집의 확충과 개선, 창고의 극장으로의 개축이 이루어지고 있다.
[민중의 집]의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참가 단체에 의한 분담금 수입, 회원의 회비, 술집 수익금, 시설 대여료, 축제 수익금 등에 의하여 마련되고 있다.
‘참가민주주의’의 그물코
[민중의 집]은 노동자의 민주주의적 전통을 체현하고 사회적으로 널리 보급된 문화적 재산으로서 우리 볼로냐 현만해도 100개가 있다.
우리들의 [민중의 집]은 이 지역의 현실에 깊이 뿌리를 내려 지역의 정치와 문화의 얼굴이 되고 있다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현재의 [민중의 집]이 생긴 지 15년이 지났는데 그 사이에 이 지역은 큰 변화를 겪었다. 주민의 수가 급속하게 증가하여 1961년 당시 9800명이었던 것이 현재는 16800명으로 늘어났다. 이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의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일정한 곤란이 생기고 있다.
또한 정보 수단의 발달과 문화, 레크레이션의 다양화는 시민의 요구와 바램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들의 [민중의 집] 활동도 새로운 사회적 현실로부터 출발하는 현실적인 요구에 뿌리를 두는 것으로 변화해 나갈 것을 요구받고 있다.
이탈리아는 지금 위기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국민 대중의 민주주의적 전진을 온갖 수단으로 저지하고 좌절시키려 하고 있다. 민주주의 제도와 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폭력적 공격도 심해지고 있다. 또한 매스콤을 통해 ‘소비주의 신화’와 무관심주의,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침투시키려는 시도가 매일 반복되고 있다.
이같은 경향은 일정한 경제적․정치적 이해에 결합되어 있다. 인간적․사회적 가치관에 근거한 생활 체계와 사회의 근본적 쇄신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민중의 집]과 그밖의 사회 운동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경향은 이 지구에 있어서도 ‘참가의 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지금까지 [민중의 집]은 주민의 대다수가 참가하는 교류의 장이었는데 점차 인구가 배가한 지금 이 지역의 새로운 요구에 비하여 [민중의 집]의 활동은 충분히 확대되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개인주의로의 회귀’라는 문제와 퇴폐의 문제에 대하여 유해한 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대책이 민주주의 세력에 의하여 모색되고 있는데 주민의 구체적 요구를 파악하여 주민의 참가를 촉진하고 자각을 높이는 새로운 활동 형태를 보일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민중의 집]의 역할은 50년대와 같은 첨예한 사상적 대결을 통하여 근로자의 제 조직을 방위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정치적 조건은 크게 변화하고 [민중의 집]도 밖으로 열려져 있다. 주민과의 관계 역시 충분하다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요구별 그룹 활동 등을 통하여 넓어지고 있다. 이제 [민중의 집] 시설을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주민 참가를 촉진시키는 것이 요청되고 있다.
현재 지구에는 ‘시민센타’(지구주민평의회 같은 공적 지역 기구가 들어가고 있는 공공 시설)도 있다. 20년 전 주민은 토론과 교류의 장을 사신들의 노력으로 건설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자치체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제는 ‘시민센타’ 등의 공공 시설을 어떻게 주민을 위하여 활용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과제도 제기되고 있다.
‘주민센타’의 건설에 의하여(여기에는 지구 도서관, 보건․의료 센타, 학교평의회 등도 있다) [민중의 집]은 자주적 활동의 내용을 자치체에서 하는 사업과 경합하지 않도록 고려해야 할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시설과 서비스의 계획적 활용 방침을 세울 필요가 있다.
[민중의 집]은 그 문화적․정치적 활동을 살리고 민주주의적 참가의 새로운 형태(지구주민평의회 등을 가리킨다. 1976년의 자료에 의하면 1년간 지구평의회 관계의 회의, 집회의 개최수는 154회. 지역 사회의 모세혈관 같은 ‘참가형 민주주의’의 그물코를 죽 둘러치고 민주주의를 일상 생활 내에 활성화시켜 나가는 위에서 [민중의 집]의 자주적 활동과 ‘지구평의회’의 공적 활동과의 유기적인 제휴의 실현이 점차 중시되고 있다.)와의 제휴를 강화하면서 지역 사회 활동의 센타로서 앞으로 제 정당간, 시민 사회의 제 조직간, 개개의 시민 상호의 관계를 강화시켜 나가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특히 청년 문제에 대해 그들이 정치적․문화적 제 분야의 책임 있는 활동에 참가할 수 있도록 통일적인 이니셔티브를 발휘해야 한다.
고도 경제 성장의 일그러진 메카니즘에 의하여 생긴 사회적․문화적 조건은 소비주의적, 개인 중심적인 사상을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 침투시키고 있다. [민중의 집]이 청소년 층에게 열려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라는 이 과제는 단순히 청소년 층의 요구를 무조건 용인하는 것은 아니다. [민중의 집]은 사회적․건설적 제안에 의하여 젊은 세대에 대한 교육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민중의 집], 지구주민평의회, 학교, 공장, 교회, 그리고 지역에 있는 정치적․사회적 제 조직의 협력을 통해 청소년의 통일적 요구를 분명히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날 [민중의 집]은 다양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데 이들 제 문제를 타개해 나가는 활력과 능력은 지금까지도 그래왔듯이 이 지역의 사람들과 제 조직의 참가, 이니셔티브, 연대, 활동에 달려 있다.
3. ‘코랏샤’집의 사람들
운영위원은 모두 노동자
볼로냐 시의 중심부로부터 버스로 약 10분, 상도나트 지구에 도착하였다. 전쟁 전에는 주택지와 근교 농업의 혼합 지대였지만 전쟁 후 50~60년대의 고도 경제 성장을 거치면서 주택 지대로 급속하게 도시화한 지역이다.
이 지구에는 볼로냐 시내에 있는 20개의 [민중의 집] 가운데서도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민중의 집․코랏샤]가 있다. 코랏샤란 이 지구의 레지스탕스 지도자이고 파르티잔으로서 전사한 노동자 루이지 코랏샤를 기념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소위 [민중의 집]의 애칭이다.
내가 이 [민중의 집]을 방문한 것은 8월 말이었는데 와인 제조 협동조합(농업 협동조합의 일부분)으로부터 사들인 와인을 병에 넣는 작업과 이탈리아 최대의 축제인 ‘우니타 축제’의 준비, 바캉스 이후인 9월부터의 활동 준비 등으로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러 가지 활동으로 매우 활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이 [민중의 집]의 운영위원은 9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운영위원장인 가스파리 씨는 1928년 생인 철도 노동자. 17세에 레지스탕스에 참가하고 전쟁 후에도 계속 [민중의 집]의 멤버로서 활동하여 소위 이 [민중의 집]의 살아 있는 신화적 존재이다.
간단하게 각종 위원회를 소개한다.
토넷리 씨는 가스파리 씨와 동년배의 국립병원 직원인데 주로 주로 [민중의 집]의 경영을 담당하고 있다. 언제 찾아가도 [민중의 집] 운영위원회의 사무실에서 와인을 마실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취재 노트에는 ‘언제나 와인을 마시고 있는 사람’으로 적혀 있는데 가스파리 씨의 좋은 파트너이다. [민중의 집]의 지하에 있는 운영위원회 사무실의 대형 냉장고에는 언제나 차가운 와인이 있다.
가리스트 씨는 버스 운전사이고 1931년 생이다. 어린이 때부터 [민중의 집]의 활동에 참가했고 닉네임은 ‘코밋서리’(정치위원)이다. 검은 색 점퍼를 애용하며 언제나 이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역의 구석구석까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닉네임이 붙여진 듯하다.
오뎃로 씨는 1921년 생의 금속 노동자. 이 [민중의 집]에 사무실이 있는 FLM(기계금속노조)의 간부이다.
부르노 씨는 1924년 생인 건설 노동자. 이 사람도 와인을 좋아한다.
빌리아니 씨는 측량 기술자인데 1954년 생으로 가장 젊다. 이 지역 공산당의 청년 간부이고 [민중의 집] 젊은 층의 중심 멤버로서 청년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루치아노 씨는 1944년 생이고 시청소국원. 운영위원 가운데 단 한 명의 30대이다. ‘정치 활동은 싫어하지만 [민중의 집]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운영위원을 맡았다’고 한다. ‘자신의 생활을 희생하여 활동한다라는 과거의 활동 스타일은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종래의 [민중의 집] 활동 방식을 비판하며 활동 개선을 위한 의욕을 갖고 있다.
피에트로 씨는 1951년 생의 인쇄공으로 이 지구 최대의 스포츠․레크레이션 써클인 UISP(스포츠인민연맹)의 종합 스포츠 클럽 출신이고 운영위원회에서도 스포츠․레크레이션 부분을 맡고 있다.
마지막으로 네리오 씨는 가장 나이가 많은 위원으로 1919년 생이다. 이미 연금 생활을 하고 있는데 운영위원회에서는 노인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이 9명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 아래 문제별로 소위원회를 두고 있는데, 일상적인 활동 계획의 작성, 지도는 이 소위원회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실제 활동의 중심은 ARCI(문화레크레이션 협회)의 써클인 ‘레오파르티’(회원 500명)와 UISP의 종합 스포츠 클럽(회원 650명)이다.
지하에서 흐르는 지역 방송
가스파리 씨의 안내로 각 층을 둘러보았다. 지하의 구석에 있는 방은 와인 창고로 쓰고 있는데 200리터 병들이 빽빽하게 쌓여 있었다. 10명 정도의 노인이 와인을 마시고 잡담을 나누면서 활기차게 와인을 병에 넣는 작업을 하고 있다. 우니타 축제에서 판매하는 와인이 4000 병 정도 필요하기 때문에 그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와인 판매 이익은 [민중의 집]의 중요한 자금원의 하나이다.
그 옆방에서는 볼로냐 명물인 토르티리니(파스타의 일종)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서는 주로 여성들이 일을 하고 있다. 토르티리니도 지금은 기계를 이용해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손으로 만드는 것이 더욱 맛이 있기 때문에 우니타 축제에서도 인기가 있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작업을 하는 방식을 가르치고 있었다. 가스파리 씨는 ‘이것은 농촌 시대의 전통이 [민중의 집] 활동에 받아들여지고 있는 있는 하나의 사례’라고 한다.
지하에서 가장 넓은 공간은 지역 방송국이 차지하고 있다. ARCI의 이니셔티브로 77년에 개설되었는데 고교생, 대학생, 청년 노동자의 손으로 운영되고 있다. 최근 좋은 반응을 얻은 프로그램은 이 지역 파르티잔 생존자와의 대화를 시리즈로 내보낸 것이다. [민중의 집]에서 개최하는 각종 강연회, 학습회 등도 테잎으로 만들어져 방송된다. 앞으로 이 지구의 비행과 마약 문제, 교육 문제 등을 기획중이라 한다.
지하에는 종합 스포츠 클럽 방도 있다. 이탈리아에서 인기있는 스포츠는 국기라고도 말할 수 있는 축구이다. 연령별로 5개의 팀이 클럽에 소속되어 있다. [민중의 집] 가까이에 있는 시 유휴지를 무상으로 빌려 지금 종합 연습장(축구장, 테니스 코트 등)을 2년 계획으로 건설중이다. 땅을 고르는 작업 등은 회원의 노력 봉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스포츠 클럽 책임자인 아르티노 씨의 본직은 스파게티와 마카로니 등을 제조하는 파스타(면류의 총칭) 요리사이다. 그의 꿈은 지역의 아이들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다 스포츠 활동에 참가할 수 있도록 지역의 스포츠 시설을 확충하고 전국 수준에 달하는 선수의 양성 시스템을 갖추는 일이다. ‘이 클럽이 자주적으로 높은 수준과 폭넓은 스포츠 애호가의 장으로 되는 것이 경기 선수 중심의 스포츠계를 민주적으로 발전시키는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될 것이다’라고 한다.
바 ‘리나시타’의 활기 ― 대화와 오락을 위한 공간
1층은 바(BAR)를 중심으로 당구실, 카드실, TV실 등 대화와 오락을 위한 공간이 주로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 ARCI(문화레크레이션협회)의 낚시 클럽 회원들이 새벽에 볼로냐 근교의 레노천(川)에서 낚은 고기들을 대접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낚시 클럽의 회원 수는 약 50명, 매월 1회 가까운 강에서 낚시 대회를 열고 낚은 고기는 [민중의 집]에서 요리를 하여 와인과 함께 대접한다고 한다. 고기는 일본의 황어와 잉어, 산천어와 비슷한 것으로 차가운 와인에 잘 맞고 맛이 있다.
이 바의 명칭은 ‘니나시타’(재생의 의미)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이론․문화 주간지와 같은 이름이다. 일본의 경우로 말하면 ‘퍼브․赤旗’라든가 ‘스낵․前衛’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바는 전후 [민중의 집]이 재건되고부터 76년까지 [민중의 집] 회원의 자원봉사에 의해 운영되어 왔는데 레스토랑이 번창하면서 자원봉사만으로는 운영이 어려워져 [민중의 집]의 멤버로서 다른 바를 운영하고 있는 마리오 씨 부부에게 운영을 위탁하고 있다.
마리오 씨의 말에 의하면 바에서 커피와 와인을 마시고 간단한 음식을 즐기는 사람은 1일 평균 500명에서 600명 정도, 주말과 휴일이 되면 1000명 가까이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오전 중에는 연금 생활자, 오후에는 부인층과 아이들, 저녁 이후에는 남자 노동자들이 주로 찾아 오고 가장 활기가 넘치는 때는 저녁 식사 후인 9시부터 12시 문을 닫을 때까지이다. 1리터짜리 와인이 일본 엔화로 200엔에서 300엔 정도로 값이 싸기 때문에 와인을 마시면서 정치․노동운동․스포츠 등 대화의 꽃을 피운다.
‘연설’은 그만 ― 매일 저녁 자연발생적인 ‘토론회’
[민중의 집]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이탈리아인이 토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자주 느낄 수 있었다. 이탈리아인의 ‘정치토론 즐기기’는 이미 일종의 국민성으로 유명한데 내가 방문하였을 때는 아프카니스탄 문제를 비롯한 현재의 사회주의 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부정적 요소의 문제, 공산당을 포함한 민주적 정부 수립의 가능성 문제, 지구의 주민 운동과 교육 운동의 문제 등에 대해 몇 개의 소그룹으로 나누어 열심히 토론하고 있었다. 와인 잔을 손에 들고 몇 개의 그룹을 옮겨가며 토론을 하는 사람도 있다. ‘차분하게 토론하는 것이 민주주의 제1의 전제이고 [민중의 집]의 여러 토론에 일상적으로 참가하는 가운데 시민의 정치적․사회적 자각이 높아지기 때문에 우리는 바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토론을 중시하고 있다. 운영위원회는 이 토론 내용을 통하여 시민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라고 가스파리 씨는 말한다.
거의 매일 저녁 벌어지는 이와 같은 자연발생적인 ‘토론회’로부터 학습․문화 활동과 강연회에서 다루어지는 주제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들이 주의해야 하는 것은 [민중의 집]이 [좌익의 집]이나 [붉은 집]으로 한정되지 않고 가능한 한 다른 입장과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폭 넓게 받아들이고 상호 생각의 차이를 존중하며 상호 이해와 합의, 상호 신뢰 관계를 강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나는 [민중의 집]의 운영위원과 활동가에게 ‘연설’은 그만하라고 항상 말하고 있지요. [민중의 집]이 갖는 교육적 기능은 어디까지나 시민의 자발적 참가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지요. 나 자신도 토론을 매우 좋아하지만 타인의 연설을 듣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라고 가스파리 씨는 말한다.
가스파리 씨는 [민중의 집]이 성장하면서 현재 새로운 곤란이 생기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운영위원과 활동가가 [민중의 집]의 광범위한 활동에 시간을 투여하면서 [민중의 집]에 틀어박혀 지역으로 나가는 일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코밋서리’ 카리스트 씨는 “[민중의 집]에는 혼자 오지 말아라. 누가 됐든 함께 오라. [민중의 집]에 오기 전에 지역을 한 바퀴 돌고 오라”라고 활동가에게 호소한다. 현재 19세의 장남 마우로는 지역 청년 동맹의 활동가이고 14세의 차남 이완은 스포츠 클럽의 멤버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야외 영화관에서 ― 지역에서 자라는 아이들
바의 옆에는 발레 코트보다 약간 큰 옥외 집회장이 설치되어 있고 6월에서 7월까지는 이곳이 야외 영화관이 된다. 내가 방문하였을 때는 아이들이 주간에 애니메이션을 관람하고 있었다. 이 상 도나트 지구에는 영화관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짜임새는 갖추고 있다. 80석 정도의 좌석은 3분의 2가 아이들을 데리고 온 시민으로 차있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관의 표를 받는 것, 매점에서의 판매, 쉬는 시간에 쥬스나 아이스크림을 파는 것을 학생과 초등학생이 하고 있는 점이다. 그 중심은 카리스트 씨의 차남인 이완이고 아이들 전원이 스포츨 클럽의 회원이었다.
운영위원으로서는 아이들을 [민중의 집] 활동에 어려서부터 참가시켜 [민중의 집] 다음 세대를 육성시키겠다는 생각이다. 또한 아이들도 매점 수입의 일부를 가짐으로써 축구공 등의 용구를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시도는 성공하고 있다고 한다.
이완에 의하면 산수를 잘 못하는 소학생이 매점에서 매일 계산을 한 후에 산수 실력이 향상되는 부산물도 생겼다고 한다.
“아이들이 [민중의 집] 활동에 어떤 형태로든 참가하는 것을 통해 지역과 결합을 강화하고 시민적 자각을 높이는 것이 가능하다. 초등․중등 학생을 스포츠 클럽에 맡기는 데 그치지 않고 이러한 것을 [민중의 집]의 새로운 활동 분야로서 전체의 문제로 중시해 나가고 싶다”라고 가스파리 씨는 강조하였다. 일본에서도 지역 교육력의 형성, 발전의 문제가 관심을 모으고 있는 지금, [민중의 집]의 경험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4. 공산청년동맹과 파르티잔협회
[민중의 집․코랏샤]의 2층으로 올라가면 이 지역의 민주단체, 노동조합, 정당의 사무소와 회의실이 있다. 전부 13개의 방이 있는데 ①ANPI(파르티잔협회), ②UDI(부인동맹), ③ARCI(문화레크레이션협회), ④FGCI(공산청년동맹), ⑤FLM(기계금속노조) 및 CGIL(노동총동맹), ⑥연금생활자조합, ⑦사회당 지부, ⑧공산당 지부, ⑨공산당 지구위원회, ⑩DP(프롤레타리아 민주당), ⑪인쇄실, ⑫소회의실(40명 수용), ⑬중회의실(100명 수용)이 있다.
우선 FGCI(공산청년동맹)와 ANPI(파르티잔협회)를 소개하겠다.
[민중의 집]의 젊은이들 ― 공산청년동맹
공산청년동맹은 공산당의 청년조직이고 이 지역에서 청년 운동의 중심적 조직이다. 동맹원의 숫자는 140명, 그 가운데 밀리탕트(적극적 활동가)는 약 50명. 이 지역 최대의 써클인 문화레크레이션협회(ARCI)와 스포츠인민연맹(UISP)을 비롯한 [민중의 집]의 여러가지 활동, 지구주민평의회의 활동 등이 주된 활동 영역이다.
ARCI의 써클에는 앞에서 언급한 지역방송국을 비롯한 사진 써클, 댄스, 영화
제작, SF 애호 그룹, 어린이 학습 지도 그룹 등의 분야가 있는데 그 중심적 활동가는 거의 동맹원이라고 FGCI 지부장인 낭니는 말한다. ARCI 써클의 연맹위원회도 13명 가운데 5명이 동맹원이라고 한다.
낭니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보면 [민중의 집]과 ARCI 회원과 활동가 층의 ‘고령화’가 심각한 문제이고 [민중의 집]이 [노인의 집]으로 되어버렸다는 등의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이 지구에서는 젊은이들이 [민중이 집]에서 뛰어난 활동을 하고 있다. 그것은 [민중의 집]을 지역의 청소년들에게 매력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민중의 집] 지도부가 청년 운동과 서로 협력하면서 노력한 결과”라고 한다.
댄스 그룹은 춤을 잘 추는 동맹원과 때로는 전문가를 초대하여 정기적으로 강습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댄스 콘테스트와 [민중의 집]이 개최하는 댄스 파티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여름의 댄스 강습회에는 100명이 넘는 참가자로 대성황이었다고 한다. 댄스 그룹에는 수준 높은 콘테스트에서 입상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우니타 축제에서도 거의 항상 댄스장이 설치되는데 파티와 축제에 참가할 기회가 많은 이탈리아에서 댄스는 사회적 교양의 하나로서 요구가 높은 것이다.
SF 소설 애호가 그룹이 최근 결성되었는데 작품에 대한 평가와 창작, 외국의 SF 번역 등을 주 2회 하고 있다(회원수는 20명). 영화 그룹은 장래 영화 제작을 하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의 그룹이고 나중에 소개할 ANPI의 주이지 씨가 레지스탕스에 대한 8미리 영화를 제작했을 때에도 이 그룹이 협력하였다. 라디오 부분은 14세부터 22세까지의 약 30명의 청소년이 운영하고 있다. 이 지역 레지스탕스에 대한 이야기를 파르티잔 경험자를 통하여 취재하기도 하고 청년의 퇴폐와 비행에 관한 문제를 방송하면서 지역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지역 부모들의 가장 높은 관심사는 아이들의 학습을 지원하는 활동이다. 현재 교사를 지망하는 대학생 3명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는데 활동가의 부족으로 지역의 기대에는 충분히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 지역의 주민은 주로 불루 칼라, 상인 직인이 많은데 민주적인 지식인 층이 적은 것, 특히 교수들이 지역 활동에 거의 참가하지 않는 것이 고민이라고 한다. 혁신적인 분위기가 강한 볼로냐에서도 교원 조합은 전통적으로 가톨릭계가 강하고 가톨릭계의 교원 조합은 ‘붉은 볼로냐 내의 백색 조직’이라 불리우고 있을 정도이다. CGIL(노동총동맹)계의 교원 조합의 비중은 볼로냐시 교원 전체의 20%에도 못미치는 실정이다.
디스코장의 상설화를 둘러싸고
청년층이 가장 많이 요구하는 것은 학습회와 토론회 등에 더하여 디스코장을 [민중의집]에 상설화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운영위원회와 ARCI 회원들 내에서도 의견이 나뉘고 있다. 디스코 찬성파는 지금까지 [민중의 집]에 가까이 하지 않았던 청소년층이 [민중의 집]의 제 활동에 참가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청년층과 대화하는 기회가 생기고 청년층이 지역의 문제로 눈을 돌리는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는 것이다. 반대파는 디스코가 비행, 퇴폐의 온상으로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고 있다. 또한 디스코 장비의 구입과 유지, 운영 등에서 [민중의 집]의 재정적 부담이 무거워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미 디스코장을 상설화하고 있는 몇몇 [민중의 집]의 경험에 대한 검토를 포함하여 시간을 갖고 토론을 벌여나갈 예정이라고 하지만 다른 [민중의 집]의 경험에 의하면 적극적 성과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디스코 찬성파가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청소년의 심각한 문제는 실업과 ‘Semi 노동’의 병존 현상이라 한다. 정부 발표로도 이탈리아는 실업자가 170만 명, 7%가 넘는 고실업률의 나라인데 그 대부분이 ‘한번도 취업한 적이 없는’ 청년층이다. 동시에 법(노동자 헌장)과 노동협약의 적용을 받지 않는 ‘Semi 노동’이 경제 위기 과정에서 확대되고 있다. 이 지역의 청년 8000명 가운데 대부분이 ‘Semi 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청년동맹에서도 그 실태 조사를 준비하고 있다.
‘역사의 증언자’로서 ― 파르티잔협회
볼로냐시를 포함한 에미리아 지방은 최근 일본에서도 공개되어 화제가 된 베르톨루치 감독의 대작 ‘1900년’의 무대가 된 곳이다. 토리노, 밀라노 등 북부 공업지대와 함께 레지스탕스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지방이다. CLN(국민해방위원회)로부터 ‘연합군에 의한 해방이 아닌 레지스탕스 세력에 의한 자력 해방을’이라는 지시를 받은 볼로냐의 레지스탕스는 1944년 4월 19일 다수의 시민을 포함한 총봉기를 하고 21일 전 시를 자력으로 해방하였다. 22일 연합국이 시내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파르티잔들이 도로의 청소 등을 하고 있었고 해방위원회의 지도 아래 정상적인 시민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연합군의 지휘관이 깜짝 놀랐다는 애피소드가 남아 있다.
에미리아 지방에서 파르티잔으로서 무기를 갖고 독일군과 싸운 사람의 수는 약 4만 명. 그 가운데 6000명이 전사하였다. 시민들 중에서도 3000명의 희생자를 냈다. 볼로냐 총봉기에서 전사한 약 2500명의 파르티잔과 시민은 이름이 새겨진 사진 판넬로 시청의 벽에 결려 있는데 이곳은 ‘레지스탕스 도시’ 볼로냐의 상징이 되어 지금도 헌화가 끊이지 않는다. 레지스탕스사 학습을 하는 초․중학생이 교사의 강의를 열심히 경청하고 있는 광경도 자주 보인다.
당시 세계 최강이라 불렸던 독일군에게 결코 전쟁에 강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이탈리아인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레지스탕스 연구의 매력적인 테마인데 여기에서는 당시 독일군 사령관의 말을 소개해 둔다. “그들(파르티잔)의 전법은 군인으로서의 전투에 반하는 것이다. 소그룹 혹은 단독으로 산악 지방과 하천, 숲속, 그리고 도로 등의 온갖 장소에서 나타나고 어둠과 안개 속에서 행동한다. 결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파르티잔이 널리 퍼져 있는 지역에 있는 독일군 병사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시민이 광폭한 살인자의 얼굴로 보이고 언제 어디에서 공격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이 말을 전한 켓세린크 씨는 전후 종신형 판결을 받고 지금까지 복역중이다.
지금까지 계속되는 나치즘 전범의 추적
82년 초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R․라자로의 ‘이탈리아인 SS(나치스 친위대)’가 출판되어 화제가 되었다. 이 책은 ‘나치스 친위대 이탈리아 부대’에 참가한 2만명에 대한 상세한 조사 기록이다. 이탈리아에서도 구 나치스 파시즘에 대한 추적은 끈기있게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 1979년 7월 : 이 해 말에 기한이 끝날 예정이었던 나치스 범죄의 시효가 유럽 각국의 여론에 힘입어 서독 의회에서 시효의 영구 폐지 결정.
▶ 1979년 10월 : 나치 비밀경찰 파리 지구 장관인 쿨트 리슈카 등에 대해 유태인, 레지스탕스 참가자 살해 혐의로 재판 개시, 다음 해 80년 1월 전원 유죄 판정.
▶ 80년 7월 : 예전 나치스 친위대 장교 피터 멘틴, 폴란드에서의 유태인 학살 혐의로 체포, 징역 10년의 유죄 판정.
▶ 80년 10월 : 폴란드 유태인 강제 수용소에서 유태인 25만 명의 살해를 지휘한 나치 돌격대장 구스타프 우게나, 브라질에서 체포, 후에 자살.
▶ 81년 6월 : 폴란드 강제 수용소에서 유태인 살해에 가담한 나치 여성 간수 종신형 판정.
▶ 81년 12월 : 동독에서 가명으로 숨어 있던 나치 전범 하인츠 발트 체포.
▶ 82년 11월 : 프랑스 리용 지구의 게슈타포(비밀경찰) 책임자로 ‘리용 학살자’로 불린 크라우스 발비, 남미 볼리비아에서 체포.
▶ 83년 1월 : 서독 쥬셀도르프 지방법원, 리가 강제 수용소에서의 학살에 가담한 나치스 친위대장 하인츠 비스나에게 징역 6년 선고.
▶ 83년 1월 : 프랑스에서 지스카 루디스탕 전 내각의 각료를 역임한 모리스 파폰, 전쟁중 나치스 협력 혐의로 기소됨.
79년 서독 의회에서 나치 전범 시효의 영구 폐지가 가결됐을 때 언론은 지금까지 도망중인 수 천명의 전 나치 간부들은 ‘끊이지 않고 밤이 계속될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무솔리니 탄생 100년, 히틀러 정권 수립 50년째인 지금, 네오 파시즘, 네오 나치즘의 부활에 반대하는 활동과 함께 구 나치․파시즘 전범에 대한 엄격한 추적이 계속될 것이다.
소개가 길어졌는데 다시 산 도나트 지구 파르티잔협회에 대한 내용으로 돌아가겠다.
이 지구 파르티잔협회의 회원은 약 300명. 모두 볼로냐에서의 레지스탕스 체험자이고 출신 계급은 농민, 노동자가 반 이상을 점하고 있고 나머지는 상인, 직인이다. 이 지구 협회 책임자(지부장)는 루이지 부롯코리 씨이다. 1920년 생이고 농업용 비료․사료점을 운영하는 상인이다.
루이지 씨 등이 힘을 쏟고 있는 활동은 레지스탕스 지역사를 발굴하는 일과 학교 교육에서 레지스탕스 학습을 원조하는 활동이다. 루이지 씨는 자신의 출신지이자 파르티잔으로서 참가한 볼로냐 근교의 카스테나조라는 마을의 레지스탕스 지역사를 정성들여 발굴하여 10여 년에 결친 작업 끝에 ‘거리의 역사가’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또한 취미로 하고 있는 8미리 영화 기술을 살려 1시간짜리 레지스탕스 다큐멘타리 영화를 만들고 지역과 초․중등학교에서 순회 상영을 하고 있다.
[민중의 집] 대강당에서 열린 시사회에는 500명 가까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올지 안 올지 걱정이었지만 많이 찾아와서 기뻤다”고 한다. 원래 이 영화를 만든 목적이 이 지방 레지스탕스의 생생한 모습을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레지스탕스의 체험을 히로시마, 나가사키와 함께
루이지 씨는 독일군이 이탈리아 점령을 시작한 1943년 9월 8일에 레지스탕스에 참가하고 GAP(애국행동대. 도시 파르티잔 조직의 하나)의 일원이 되었다.
“내가 레지스탕스에 참가한 것은 먼저 반파시스트였던 아버님의 영향입니다. 아버님은 극히 평범한 농민이었지만 무솔리니와 파시즘에 대해 계속 비판적이셨어요. 그 때문에 파시스트들로부터 일과 생활에서 괴롭힘과 박해를 많이 받았지요. 아버님의 소박한 저항 정신은 소년기의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내가 친구들과 함께 레지스탕스에 참가하여 파르티잔으로서 투쟁하겠다고 아버님께 말씀드렸을 때 아버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루이지 씨는 GAP 활동 이후 44년에는 해방위원회의 지시로 농업 노동자의 비공개 노동조합의 조직자로서 활동하고 45년에는 다시 GAP의 일원으로서 볼로냐의 해방전투에 참가하였다.
지금 가장 힘을 쏟고 있는 활동이 무엇인가를 묻자 “학교, 지역, 가정, 자치체의 문화, 교육 활동 등 다양한 장에서 파시즘과 레지스탕스의 역사를 젊은 세대, 아이들에게 정확히 전하는 것입니다. 특히 학교 교육에서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계통적인 근현대사 학습의 일환으로서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후 30년간은 공교육의 장에서 레지스탕스에 대해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매우 불충분하였습니다. 그것은 정부측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들 레지스탕스 참가자들도 ‘자랑거리’나 ‘옛날 얘기’쯤으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루이지 씨 영화의 상영회가 볼로냐 근교의 마르챠봇트시에서 열렸기 때문에 동행하였다.
마르챠봇트는 1919년 지방선거에서 당시의 사회당이 다수파가 되고 21년에는 이제 막 결성된 공산당을 중심으로 혁신자치체가 된, 혁신 전통이 강한 지역이다. 파시즘이 권력을 장악한 1922년 이전에 에미리아 지방에는 공산당원이 단체장을 하고 있는 자치체가 4개 있었는데 마르챠봇트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곳은 레지스탕스 투쟁사에 있어서도 파르티잔 부대 ‘붉은 별’의 거점으로서 독일군에 강력한 저항을 하였기 때문에 1944년 9월 29일 마르챠봇트 가까이에 있는 그릿자나, 몬츠노의 주민 1830명(그 가운데 파르티잔 226명)이 독일군에 의해 대학살을 당한 체험을 갖고 있다. 희생자 중에는 갓 태어난 유아를 비롯하여 많은 아이들과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독일의 항복 후, 이 학살을 지휘한 나치 친위대(SS) 사령관 레델은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최고형인 종신형(이탈리아에서는 공화법에 의해 사형이 폐지되어 있다)에 처해지고 이탈리아의 가에타 군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67년 4월 레델은 마르챠봇트 시장에게 특사를 청원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시장은 학살을 겨우 면했던 생존자 288인의 뜻에 맡겼다. 투표 결과 특사 반대가 282표, 찬성 4표 기권 2표의 압도적인 다수로 레델의 사면은 부결되었다. 레델은 현재도 형무소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번 상영회는 시의 도서관이 주최했는데, 초․중학생에게 레지스탕스의 구체적인 역사를 학습하는 기회를 주기 위하여 파르티잔 체험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파시즘과 레지스탕스에 대한 어린이용 책자의 판매도 하였다. 참가자는 초등학생 30명 정도와 몇 명의 초등학교 젊은 교사들이었다.
“오늘 영화회에 참가한 어린이들은 이미 학교의 특별 수업을 통해 파시즘과 레시스탕스에 대하여 초보적인 지식을 갖고 있고 스스로 레지스탕스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라 한다. 그러나 “자치체, 교사, 학부모회 등이 일체가 되어 추진을 하는 것은 아직 불충분하고 앞으로의 과제”라고 한다.
이날의 상영회 책임자인 마리오 씨의 말에 의하면 “아이들이 파시즘과 레지스탕스의 역사에 흥미를 갖고 자발적인 학습을 하면서 이러한 영화를 보는 것이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는데 다만 아쉬운 것은 교사, 특히 젊은 교사들의 참가가 적은 것”이라고 한다.
마르챠봇트 시에서는 학살이 벌어졌던 9월 29일이 끼어 있는 전후 1주간을 ‘레지스탕스 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1979년의 예를 들면 프로그램은 레지스탕스 전적지 순회하기, ‘나막신의 나무’(에르마노 올미 감독)와 ‘1900년’(베르톨루치 감독) 1․2부의 상영, 볼로냐시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페르티니 대통령(그도 레지스탕스 최고 지휘관의 한 사람이었다)의 연설, 레시스탕스의 현대적 의의에 대한 토론 집회 등 다채로운 내용이었다. 마리오 씨에 의하면 가까운 장래에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대표를 초청하여 평화를 위한 연대 회의를 실현하려는 계획도 있다면서 “마르챠봇트는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나가사키와 함께!라는 것이 우리들의 바램이다”고 한다.
루이지 씨가 활동하는 파르티잔 협회도 각 지방의 레지스탕스 역사를 지역의 민중사로서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연구 팀을 발족시킬 것이라고 한다. 또한 전후의 파르티잔협회 활동의 역사를 쓰는 것, 지금 도주중인 수천 명의 나치 전범의 추적, 헌법에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민주당의 암묵적인 승인 아래 활동하고 있는 MSI(이탈리아 사회운동, 네오 파시즘의 정당)의 해산 요구 운동 등 나치즘․파시즘과의 싸움은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님을 널리 호소하는 활동을 강화하고 싶다고 한다.
‘레지스탕스의 역사를 학교 교육의 장으로’라는 파르티잔협회의 주장은 볼로냐시 당국과 주 정부의 교육 정책에 서서히 반영되고 있다. 파시즘으로부터 레지스탕스에 이르는 이 지방의 역사를 종합한 책과 자료집이 출판되기 시작했고, 주립 레지스탕스연구소도 창설되었다. 또한 연구자․교사․학생과 루이지 씨 같은 ‘거리의 역사가’들에게 자료를 제공하기도 하고 연구회를 만들기도 한다.
루이지 씨의 출신지인 카스티나조에서는 지역의 당국자와 교장회, 학부모회, 교원조합, 파르티잔협회 등이 협력하여 역사 교육에 이 지역의 레지스탕스사를 넣어 계통적으로 교육시키는 것을 정식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파시즘과 레지스탕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전후 세대이 젊은 교사들을 위해 특별 강좌도 준비 중이라고 한다.
4월 25일은 나치즘․파시즘으로부터의 ‘해방기념일’인데 그 전후에 특별 수업으로 루이지 씨를 비롯한 파르티잔협회 멤버의 이야기를 듣는 초․중학교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루이지 씨는 자신이 제작한 8미리 영화를 상영하고 자신의 체험도 섞어넣어 이 지방의 레지스탕스 역사, 볼로냐시가 해방될 때의 상황 등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특히 강조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탈리아가 공화제로 된 46년 6월 2일의 정체(政體) 결정을 위한 국민투표와 공화국 헌법의 성립 과정에 대한 내용이다. 레지스탕스의 성과로서 공화국 헌법이 만들어졌다는 것, 따라서 공화국 체제와 공화국 헌법을 수호하는 것은 많은 이탈리아 민중의 희생 위에서 승리한 레지스탕스의 정신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볼로냐 시의 파르티잔협회에는 지금 건재한 1만 명의 구 파르티잔이 가입해 있다. 루이지 씨의 바램은 회원이 파시즘과 레지스탕스의 체험을 단순히 옛날 얘기나 에피소드로 여기지 말고 ‘역사의 증언자’로서 레지스탕스 지역사의 발굴에 참가하고 그것을 학교와 지역의 교육으로 살리는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회원 가운데는 파시즘과 레지스탕스의 체험이 너무 가혹했기 때문인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회원도 있다고 한다.
루이지 씨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협회의 회합에 함께 나와 레지스탕스 영화 ‘무방비 도시’, ‘전쟁의 저편’, ‘7인의 형제’를 함께 보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파시즘과 레지스탕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현재 아들은 볼로냐 대학의 문학부에서 레지스탕스사 연구를 하고 있다”고 기뻐하며 말한다.
교과서와 파시즘 교육
여담이지만 내가 입수한 이탈리아의 사회과 교과서를 소개해두고 싶다. 인터내셔널社의 중학 사회 교과서 ‘문명과 진보’ 가운데 현대사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 14장 양 대전 사이의 20년․불안정한 평화
(1) 1919년부터 1939년까지의 이탈리아
(2) 파시즘의 20년간
(3)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의 관계
제 15장 제 2차 대전
(1) 유럽에있어서 전쟁의 개시
(2) 전선의 확대
(3) 러시아 전선
(4) 극동․태평양의 전쟁
(5) 연합군의 반격
(6) 파시즘이 붕괴
(7) 레지스탕스란 무엇인가?
(8) 이탈리아의 레지스탕스
(9) 독일과 일본의 항복, 대전의 종결
(10) 이탈리아의 공화제 수립
제 15장의 제 7절 ‘레지스탕스란 무엇인가?’에서는 ‘파시즘과 무솔리니에 반대하여 이탈리아 중․북부에서 레지스탕스가 조직되었다’라는 내용에 이어서 3쪽에 걸쳐 이탈리아 및 유럽 각지에서 레지스탕스가 조직되었던 일이 서술되고 마지막으로는 ‘레지스탕스 전사자의 편지’를 인용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이어서 제8장 ‘이탈리아의 레지스탕스’도 역시 3쪽에 결쳐서 4매의 파르티잔 사진을 넣었는데 파르티잔 조직인 CVL(자유의용군. 국민해방위원회의 군사부문)과 GAP(애국행동대) 등이 조직되고 볼로냐, 밀라노, 토리노 등의 주요 도시가 파르티잔의 손으로 해방된 것, 무솔리니가 처형된 것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른 기회에 이탈리아의 교과서에 대해서는 정리하여 상세하게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 내가 입수한 몇 권의 중․고교 사회 교과서를 보아도 최근에 와서 이탈리아와 유럽 레지스탕스사의 비중은 양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충실해져 가고 있다.
동경 주재 어느 이탈리아 특파원에게 들은 말인데 최근에는 고교 졸업 자격(이탈리아는 대학 입시가 없기 때문에 고교 졸업 자격이 대학 입학 자격으로 된다)을 위한 구두 시험 요강이 개정되어 시험 시간에 레지스탕스 관련 문제가 반드시 포함된다고 한다.
“우리들은 파시즘 독재 체제 아래서 소년기를 보냈고 인생의 가장 왕성한 청년 시대를 세계대전과 레지스탕스라는 치열한 싸움 가운데서 보냈다. 파르티잔으로 싸운 친구들 가운데 지금도 살아있는 사람은 반도 안 된다. 전사했든가 부상으로 인해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우리들 구 파르티잔의 사회적․교육적 역할은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고 확신한다”라고 말하면서 루이지 씨는 부드러운 얼굴이 비장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5. 부인동맹․ARCI․공산당
이 지역 부인 운동의 중심은 이탈리아부인동맹(UDI)이다.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이 시작된 직후인 1943년 11월 파르티잔 활동의 원조와 방위를 위하여 초당파적으로 결성된 ‘부인방위집단’이 UDI의 전신이다. 이 부인방위집단은 파르티잔을 위한 식량, 의복 등을 제공하는 원조 활동을 비롯하여 독일군 점령 하의 로마에서 ‘로마를 무방비 도시로’라는 요구를 내건 데모를 조직하기도 했다. 또한 44년 3월 8일(국제 부인의 날)에는 역시 독일군 점령 하에서 부인 노동자의 스트라이크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 부인방위집단에 소속된 부인의 수는 7만명이 넘고 직접 파르티잔 전사로서 전투에 참가한 부인의 수는 3만 5천명이 넘었다. 볼로냐에서는 가리발디 여단(공산당계의 파르티잔 부대) 내에 부인만으로 이루어진 부대가 결성되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4년 9월에 부인방위집단은 UDI로 발전하는데 그 주요한 활동 과제는 첫째 파르티잔과 그 가족, 테러에 의한 희생자의 가족에 대한 원조 활동, 둘째 전쟁에 의해 비대해진 악덕 상인과 파시스트의 고발․추방 활동, 셋째 부인 노동자를 위한 보육소, 육아원 등의 설치, 넷째 문화, 교육, 레크레이션 활동(노래부르기, 낭독회, 파티, 콘서트, 연극, 독서회, 타이프라이터 치기, 자수놓기, 재봉 등) 등이었다. 이들 과제는 해방 이후 이탈이아의 재건, 부흥 과정에 있어서도 UDI의 중요한 임무로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도 74년의 ‘이혼법’ 국민 투표를 비롯하여 新어머니노동자보호법, 중절법, 남녀평등법의 실현 등 일련의 법개정 운동에서 UDI는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남성 중심의 [민중의 집]?
이 지역 UDI 지부 회원은 약 200명이고 그 대다수는 부인이다. UDI 지부원인 파오라 씨는 나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들은 현재 [민중의 집]의 모습에 큰 의문과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라고 강하게 표현하였다. 그녀가 비판한 내용의 핵심은 [민중의 집]의 활동 스타일이 남성 중심적으로 조직되어 있고 부인이 참가하기 쉽게 고려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민중의 집] 운영위원회에는 부인의 대표가 들어가 있지 않다. 또 ARCI의 다양한 행사가 저녁 무렵에 열리기 때문에 부인들은 가사일로 인해 참가할 수가 없다. 주민의 반은 부인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민중의 집]은 사실상 [남성의 집]으로 되어버렸다.
파오라 씨에 의하면 이러한 문제는 사회당․공산당의 남성 당원 중에도 부인 문제에 대한 가부장적인 경시가 뿌리깊게 남아있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한다. 인터뷰에 동석하고 있던 운영위원인 토넷리 씨와 파르티잔협회의 부롯코리 씨가 반론을 펴려 하였지만 “당신들이 부인과 함께 [민중의 집]에 오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찌된 일입니까?”라는 말을 듣고 꼼짝못하게 되었다.
파오라 씨는 “확실히 이 [민중의 집]이 아이들, 청년, 노인들을 위한 활동을 잘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부인들에게는 아직 [민중의 집]이 열려져 있지 않다”고 호되게 비판했다. 이같은 부인들의 비판과 불만을 서로 논의하기 위해 가까운 시일 에 UDI 지부로서 지역의 부인들이 [민중의 집]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수 있도록 계획을 만들고 운영위원회와 ARCI와의 합동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나중에 [민중의 집] 운영위원장인 가스파리 씨에게 이 ‘논쟁’에 대하여 들었는데 운영위원회로서도 부인들이 참가하기 쉬운 시간에 학습회와 레크레이션을 하는 등 활동 스타일의 개선을 검토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직하게 말하면 사회당․공산당의 남성 활동가 내에서도 자기의 아내는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는 것이 좋다고 내심 생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요”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덧붙여 말하면 가스파리 씨는 주말에는 반드시 아내와 함께 [민중의 집]에 온다고 한다.
ARCI ― 문화 세력
ARCI는 1957년에 창립된 민주적인 종합 문화 레크레이션 활동의 전국조직이다. “ARCI는 레지스탕스와 공화국 헌법의 정신에 기초하여 민주적, 반 파시즘적, 자주적, 통일적, 복수주의적인 전국조직이다”라고 규약 제1조에 명시되어 있듯이 레지스탕스기로부터 전후에 걸쳐서 결성된 다양한 민주적 문화 써클의 전국적 결집체이다.
ARCI는 76년에 UISP(스포츠 인민연맹)와 통합하여 ARCI․UISP라 불리고, 또한 활동의 규모와 내용을 확대하였다. 볼로냐현(縣)의 ARCI․UISP에는 지역 내의 300여 개 써클이 참가하고 있다. 회원 총 수는 약 7만 명이다. 볼로냐의 ARCI․UISP는 스포츠(UISP가 담당), 사냥, 낚시, 영화․연극, 환경 문제(자연보호운동 등을 담당), 여행, 직장 써클 등의 각 부문으로 나뉘어져 활동하고 있다. ARCI․UISP 전체로서도 노동자 여가 시간(자육 시간)의 자주적․민주적 활용의 문제, 환경 문제, 청소년 문제 등의 조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여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민중의 집․코랏샤] ARCI 써클에는 낚시, 영화, 여행 등의 그룹도 참가하고 있는데 이곳의 특색은 “볼로냐에서도 가장 학습 활동이 왕성한 곳”이라고 [민중의 집] 운영위원장인 가스파리 씨는 자랑하였다. 채택된 주제도 ‘유럽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교회의 권력과 노동자 계급’, ‘파리 코뮨의 현재적 의미’, ‘노동운동의 역사’, ‘이탈리아 공산당의 역사’, ‘노동자 문화와 영화․연극’, ‘청년 문제’ 등 매우 진지한 내용의 강연회와 연속 강좌가 열리고 있다. 이같이 노동운동과 정치적인 주제가 많은 것은 회원의 다수가 선진적 의식을 갖고 있는 노동자인 것을 반영한 것이라고 가스파리 씨는 말한다. 그러나 문화 문제에 대한 주제가 적다.
“정치와 노동운동에 대한 주제는 그 때마다 투쟁 과제와 연관하여 잡기 쉬운 것이지만 문화 분야는 요구가 다양하고 주제를 좁힐 정도까지 ARCI의 중심 활동가가 성숙하지 못했으며 문화 문제를 개인 문제라고 생각해버리는 경향도 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 까지 반드시 계통적으로 추진되어 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캠패인으로 끝난 것은 아닌가라는 반성을 하고 있다”라고 가스파리 씨는 말한다. 회원들로부터도 이 지역의 더욱 관심있는 주제, 예를 들면 교육 문제, 청년 문제, 부인 문제 등 가까운 주제를 채택해야 한다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가스파리 씨의 분석에 의하면 “우리 간부들 내에서도 문화와 교육의 문제는 어렵다라는 의식이 남아있다. 또한 이 지역 주민은 노동자, 자영업 등의 근로 시민층이 대다수이고 교사와 연구자 등의 지식인층이 적으며 [민중의 집]과 이들 지식인층과의 협력 관계가 불충분한 것의 반영이다”라고 하는데 지식인, 전문가와의 연대를 중시하고 있는 점이 인상에 남았다.
이 ARCI 써클이 발족한 것은 1955년이었지만 60년대 초반은 댄스 파티, 영화회, 콘서트 등의 레크레이션 활동, UISP(스포츠 인민 동맹)와 협력한 스포초 활동이 중심이었다. 이 지구는 50년대 말의 27000명에서 71년에는 약 40000명으로 인구가 증가하여 공적․사적인 문화 시설의 부족이라는 문제가 생겼다. [민중의 집]과 ARCI 써클은 주민의 문화․레크레이션 요구의 일상적 실현의 장으로서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정치적․사회적 주제를 채택한 학습회와 토론회가 활발하게 된 것은 69년의 소위 ‘뜨거운 가을’이라고 불리운 노동운동의 고양을 계기로 한 것이었다.
가스파리 씨는 현재 ARCI의 문화 활동은 새로운 질적 발전의 시기에 있다고 한다. 종래의 문화․레크레이션 활동과 학습 활동에 더하여 다양화․고도화되는 주민의 문화 요구(특히 청년층)를 조직화․운동화하여 나가는 과제, 아메리카화 되고 있는 문화의 소비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적․연대적 생활 양식’을 지역에서 창조하는 ‘문화 세력’과의 대화와 공조의 과제가 있다고 한다. 이를 위하여 “[민중의 집]과 ARCI 써클을 좌익 세력의 선전 수단으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생각을 극복하고 죄익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조류와는 다른 입장과 사상을 갖고 있는 제 조류에 대해 열린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민중의 집]과 ARCI 써클은 다른 입장과 조류를 갖는 사람들이 교류․토론하고 상호 이해와 협력의 관계를 강화시키는 장으로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스파리 씨에 의하면 [민중의 집]과 ARCI 써클을 정당의 보조적 수단으로 간주하는 정치주의적 사고는 전후의 [민중의 집] 건설 운동에 참가했던 나이 많은 활동가층 내에 뿌리깊게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같은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대화와 상호 이해를 강화하려는 경향이 예컨데 ACLI(가톨릭 근로자 협회)에서도 강해지고 있다. 이미 네오 파시즘과 테러리즘에 맞선 공동 행동을 실현하고 있고 핵전쟁 반대 등의 평화 문제에서도 공동 행동의 합의가 나오고 있다.”
이 ACLI는 죄익이 압도적 영향력을 갖고 있던 전후 이탈리아 노동운동에서 교회의 영향력을 강화를 목적으로 46년에 설립되어 40, 50년대에는 통일노동총동맹(가톨릭계 노조)의 설립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 60년대에 들어서자 ‘ACLI의 좌경화’라고 일컬어지듯이 평화 운동과 네오 파시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민주 세력과 대화․연대의 태도를 강화하고 기독교민주당 일당 지지도 69년에 파기하는 등 주목할 만한 변화를 이루어 왔다. 회원수는 약 60만 명 정도라고 한다.
가톨릭계의 노동조합인 CISL이 노동운동의 민주적 통일(3대 노조의 연합)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정당으로부터의 자립’, ‘겸임 금지’(노조 간부와 정당 간부의 겸임 금지)의 방향을 강화한 것도 이 ACLI의 큰 변화를 보여주는 현상이다.
ARCI 써클의 또 하나 중요한 역할은 이 지방 노동운동, 농민운동, 레지스탕스가 만들어 낸 역사적 산물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민중이 집]의 사료, 기록 등을 수집하고 [민중의 집]의 역사를 정리하는 활동이다. 볼로냐현의 ARCI는 이미 1977년 [민중의 집]에 대한 최초의 연구 집회를 열어 [민중의 집] 역사의 발굴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을 결정하였다. 머지 않아 전국 차원에서의 연구 집회도 개최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당장은 각지의 [민중의 집] 역사의 발굴에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볼로냐, 피렌체, 토리노 등 각 지방의 역사적 전통의 차이에 따라 [민중의 집]이라는 명칭은 같아도 그 탄생의 시기와 걸어왔던 길, 활동 내용, 운영 방법, 조직원의 의식 등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이 [민중의 집․코랏샤]에서도 주로 ARCI의 학생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역사 발굴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에는 [민중의 집] 역사를 대학 졸업 논문의 주제로 정하는 학생도 나오고 있다고 한다.
볼로냐시 공산당 ― 유권자의 13%가 당원
볼로냐 시는 이탈리아 주요 도시 가운데 공산당이 가장 강력한 도시이다. 당원 수도 많아서 인구 50만 명 가운데(유권자 약 40만 명) 당원은 약 5만2천 명으로 유권자(75년부터 유권자 연령은 18세로 낮추어졌다)의 약 13%가 공산당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민중의 집․코랏샤]에 참가하고 있는 공산당 지부는 산․도나트 지구에 있는 4개의 지부 중에서도 가장 커서 640명의 당원이 소속되어 있다. 남성이 347명, 여성이 293명인데 그 연령 구성은 아래의 표와 같다.
공산당 세치오네 지부의 연령 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