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5장 13-16절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오늘 설교는 저와 함께 교제하고 있는 정지수(JS) 목사님의 설교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산상수훈의 첫 시작인 팔복에 대해 살폈습니다. “진정한 복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복이란 결코 세상이 말하는 그런 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이란 세상이 말하는 그런 복의 내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뿐만 아니라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심지어 의를 위하여 박해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세상적인 시각에서 볼 때는 “그것이 어떻게 복인가?”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 외적으로는 인정할 수 있는 그런 내용조차 그 의미와 함께 생각해 보자면 결코 복이라 할 수 없는 것이 성도의 복으로 있다고 말씀해 주셨던 겁니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성도는 세상과는 철저히 구별된 존재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알리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드렸던 것이 “팔복의 말씀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느냐?”에 대한 것이고,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말씀이라고 자주 말씀을 드렸던 겁니다. 이미 복음을 통하여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시되 때가 되어 믿음을 선물로 주신 바로 그 사람들, 그들이 팔복의 대상이요, 산상수훈이 대상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팔복을 통해 약속된 모든 내용은 비록 시제로서는 현재형을 쓰고 있고, 또 미래형을 쓰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미 그것이 보장된 사람들로 있다고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예로 심령이 가난해야지만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을 소유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팔복의 마지막 내용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해를 받아야지만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을 소유한 자로 있기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을 소유한 자는 결코 이 땅의 원리로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게 될 말씀은 이런 세상 앞에서의 성도의 삶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긍휼을 베풀되 마음의 청결함으로 자비를 베풀며, 또한 화평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할지라도 우리의 삶과 저들의 삶의 원리가 다르기 때문에 박해 혹은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세상 앞에서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일단 오늘 본문을 보시면 두 가지로서 우리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그리고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먼저 소금이라 함은 본래의 성질이나 맛이 변질되는 것을 막고 오히려 이를 보존하며 또한 무미건조한 것으로 하여금 맛을 내게 하는 기능을 말합니다. 또한 빛이라 함은 더욱 간단하게 어두움을 물리치고 밝히는 기능을 말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소금, 빛이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 세상은 소금과 빛이 필요로 할 만큼 부패하고 썩었다, 또한 어두움 가운데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죄의 결과 세상은 부패함과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어떠했는가?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뒤 그 모든 양상이 바뀌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먼저 소금에 대해서는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또 빛에 대해서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쉽게 말해 맛을 잃으면 짜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맛을 내야 한다는 것이고, 또 빛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둬서 빛이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없으면 세상은 맛을 잃어버린 꼴이 되고, 우리가 없으면 세상은 어두움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세상 자체는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소위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 낙관적일 때가 많습니다. 아니 지금 현실이 좋지 못하더라도 미래만은 좋은 시대가 열릴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질 자세와는 무관하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부름 받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세상에 희망이 있다고 보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팔복의 내용 가운데서 마지막에 나온 것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마음을 다해 긍휼과 자비를 베풀고 화평하려고 하지만, 결국 그것에 대한 저들의 반응은 적어도 원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박해로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것을 11절에서는 어떻게까지 말하느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달리 말하면 세상이 우리에게 대하여 박해하기 때문에 우리가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소금과 빛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이런 내용이 호전되거나 좋아진다는 의미에서 너희는 세상에 소금, 너희는 세상의 빛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호전되지 않고 좋아지지 않더라도, 도리어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박해하는 형태로 나아갈지라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 너희는 세상의 빛으로 있어야 할 존재로 알리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미래가 좋을 것이라는 결과에 주목하여 거기에 무게를 싣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합당한 자세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자세는 미래의 결과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 우리가 머물러야 할 자리, 그리고 가야 할 그 길만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세속과의 관계에 있어 철저히 분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장로교 정치라 할 때 예수 그리스도만을 교회의 머리라 말하는데, 이것은 결코 세상의 원리, 세상의 권세가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에 그분으로부터만 받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과는 분리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를 말한다고 해서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떠나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해도 좋다, 무관심해야 한다는 소리도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무책임한 모습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은 우리를 향하여 박해와 어려움의 형태를 주게 되지만, 그리고 그런 원리 가운데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받을 것은 없지만, 그러나 교회만큼은 세상을 향하여 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럼 무엇을 주는가? 보통 이 소금과 빛에 대하여 기독교인으로서의 영향력, 교회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단순히 영향력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뭔가가 부족함이 있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영향력이란 것 때문에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에 있어 놓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뭔가를 취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원리와 교회의 원리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결코 세상의 원리가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가지는 자세는 관조주의적 태도여야 합니다(김영규,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신학 p.87). 쉽게 표현하자면 너무 적극적으로 세상을 향하여 들어가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너무 방관하지도 않는, 오히려 멀리 서서 바라보며 지켜보는 자세, 이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자는 전 삶을 통하여 마치 순례자요, 나그네요, 외인처럼 살게 됩니다. 적극적으로는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자로 나타나고, 소극적으로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한 자, 순교자로서 살아가려는 태도가 나타납니다. 동시에 사회의 변화와 소동에 민감하고 적극적이지만, 그러나 결코 그러한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자, 그가 바로 관조주의적인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러나 만약 소금과 빛을 영향력 있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반드시 세상에 대하여 적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소위 그러한 의미에서 개혁주의 문화관을 변혁적 문화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저 역시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하여 적극적이기 때문에 세상을 바꾸려 하고, 세상에 대하여 적극적이기 때문에 세상을 뒤엎으려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세상을 하나님께 다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자체에는 결코 소망이 없음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성경의 이해로 하자면 세상은 점점 죄악에 있어 관영해 갈 뿐입니다. 한편으로 변할 수 있다면 감사하겠지만,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에 대하여 적극적이지 않지만 그러나 너무 관망하는 자도 아닌 자로서,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쉽게 말해 선행,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향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라 말씀합니다. 역으로 우리가 선행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맛을 잃은 소금이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는 빛과 같은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착한 행실로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며 살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저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많은 사업을 합니다. 또한 선교 현장에 가면 선교를 위하여 어떤 일들을 하기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학교를 세우고, 또한 구제를 사는 등의 일을 합니다. 한편으로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이 되거나, 그것이 주된 일이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복음과 복음의 열매만이 세상을 향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맞물려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하면 우리는 늘 추상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이후의 말씀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자면 매우 실제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7절부터 보시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7-19) 쉽게 말해 하나님의 말씀 중 어느 것 하나도 폐하지 않는 것, 오히려 다 지켜 행하는 것,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사소하게 여기지 않고 그것까지라도 행하고 가르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20절 이하에 나오는데, 이렇게 말씀합니다. 20절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가 세상의 빛이라고 할 때 우리만이 세상을 향해 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뭐냐? 적어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열매요, 지금 성경이 말하는 착한 행실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만 보자면 저들보다 낫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분명 저들보다 나은 자들인데, 왜냐하면 우리의 의는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에 대해 단순히 우리 자신과만 비교하자면 결코 우리가 나은 의를 가졌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보다 나은 의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뭐냐?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 친히 그 의를 드러내시고 또한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에, 어디서 그것을 이루느냐 하면 우리 안에서 이룰 것이기 때문에, 바로 그 그리스도 때문에 저들보다 나은 의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 교훈적으로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이후에 나오는 말씀들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이런 것이고, 그런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의는 이런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선한 행실로서 열매는 어떤 것들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는 내용은 무엇이냐에 대해 율법의 해석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것이 이후의 본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해당 본문을 통해 좀 더 살펴보겠지만, 미리 확인을 하자면 이런 내용입니다. 우선 마태복음 5장 21절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을 빼앗지 않으면 된다는 정도가 서기관과 바라새인의 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고 했을 때는 더 나은 의를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22절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생명을 빼앗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그런 것조차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27절에서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생명을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간음만 행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더 나은 의입니다. 28절에 보시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즉 실제적인 간음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죄악 된 생각까지도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주님께서 너희는 소금과 빛이라고 하실 때, 그리고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뭔가를 준다고 할 때 외적으로 뭘 안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너희 마음부터 지키라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미 팔복을 통해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긍휼을 베풀면서도 마음의 청결함이 없을 수 있으며, 화평을 맺으면서도 마음의 청결이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 즉 그리스도의 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외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마음부터 살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의는 단지 사람들 앞에서 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31절도 보시면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는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오늘날 이런 일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이혼율의 증가와 또 사별이 아닌 이혼 이후에 만나서 다시금 결혼하는 것이 점점 보편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문제는 기독교 안에서 이런 일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리스도의 의라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3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여기까지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는 이것입니다. 34절과 35절을 보시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이하 마태복음 5장의 모든 내용이 이런 내용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다는 것(39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43절) 등은 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는 것이요,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까지 말씀하시는 그런 의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 16절이 말하는 착한 행실은 단순히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 여기에만 머물러도 좋다는 게 아닙니다.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고 너희가 세상이 빛이라면, 그래서 짠 맛을 내야 하고 빛을 비추어야 한다면, 단지 외적인 생명을 빼앗지만 않으면 된다, 육체적으로 간음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정도의 세상 법 혹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수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까지 나아가야 그것이 참된 선행이요, 착한 행실이라 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착한 행실하면 우리는 다 외적으로 뭘 드러나는 것만 생각합니다. 마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 정도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일에 치중하지만, 오히려 착한 행실이라고 할 때 너희 마음을 먼저 살필 것을 요구한다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단순히 외적으로 했다, 안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네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팔복의 말씀 가운데서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 그때 예수님께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22)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비유를 드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것에 대한 비유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자 임금은 그 빛을 다 탕감해 줍니다.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그러다 자기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내어 놓지 않는다고 난리입니다. 전혀 불쌍히 여기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앞서 그가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다고 할 만한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에 있어 핵심은 단순히 용서하라는 것으로만 있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줄까요? 일곱 번만 하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 즉 490번까지라도 하라.” 때문에 490번이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18장 35절에 있는 것처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는 말씀이 결론으로 있는 겁니다. 무엇이 초점이 되냐 하면 “중심으로 하고 있느냐?” 그걸 질문에 대한 답으로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한 번 용서했다, 두 번 용서했다는 것으로 그 용서함 자체를 가지고 있도록 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중심으로 용서할 것, 그리고 중심으로 용서했다면 용서함 받아야 할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기억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용서해 주면 마치 용서한 것이 의가 되는 형태로 있을 때가 많습니다.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살인 안했다, 간음 안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외형적으로만 내가 저 사람 도와줬다는 것으로 있지, 마음 가운데는 그것이 자랑이요 교만의 내용으로 있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방금 말한 용서만 생각해 보더라도 분명 용서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런 용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벗어나질 못하는 것입니다. 착한 행실을 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살피지 않으면 외형은 착한 행실인데, 여전히 그 마음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자라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산상수훈으로 오시면 마태복음 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착한 행실이라고 하면 분명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있는 측면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구체적인 예가 2절 이하에 나오는데, 첫 번째 내용이 구제입니다. 여러분, 구제하는 것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분명 착한 행실입니다. 교회도 이 일을 많이 하고 있고, 또 세상을 향해서도 그 일을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구제한 자에게 초점이 맞춰지고, 그래서 구제한 자가 드러나고, 구제한 자 스스로가 그것을 자랑꺼리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일 뿐이란 것입니다. 구제한 자 자신의 의인 것이지, 결코 그리스도의 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명하시는 것이 오른손의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어떻게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의는 단지 세상 앞에서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까지 나아가는 의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 자신이 어떻게 일하시느냐 하면 다 이렇게 일하십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데, 팔복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상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은혜와 상이 어떻게 조화가 되겠습니까? 은혜라는 말이 나오면 우리가 받을 상은 사실 하나도 없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도 상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은혜의 상급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일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가 한 것처럼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겁니다.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고, 너희가 세상이 빛이라 할 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여기까지입니다. 단순히 외형적으로 뭘 했다는 것이 다가 아니라, 네 마음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 살피라는 것이냐?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착한 일을 했지만,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너의 의일 수 있는 것은 그 마음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없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부인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은밀하게 인간의 공로를 드러낼 때 그러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먼저 살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는 결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제로 살인하지 않는 것으로 잘했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분노도 안 되며, 욕하지도 말아야 하며, 업신여기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간음하지 않는 것으로 잘했다고 말하지 않고, 마음으로 저지르는 것까지도 하지 않는 자가 바로 교회요, 성도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아내를 버리면서 이혼 증서를 써 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사람에 대해서는 인간이 함부로 나눌 수 없음을 알고 끝까지 그 마음을 지키는 자, 맹세 역시 그런 맹세를 했기 때문에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지 알고 함부로 맹세하지 않으며, 나아가 혹 맹세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철저히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는 자, 비록 악한 자라할지라도 그를 위하는 자,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따라 성경은 어디까지 말하느냐?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 21절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무엇을 주목하십니까? 무엇을 진정한 보물로 여기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살핀 팔복의 내용이 진정한 보물은 아닙니까? 물론 가장 복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목적과 관련하여 말한다면 구원의 서정 그 이상의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주의 은총을 따라 구해야 할 복은 그런 의미에서 팔복과 같은 그런 열매를 맺기를 소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도 보시면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다만 이런 말씀을 이상하게 꼬아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후자 쪽에 초점을 두게 된다면 그것 역시 소금과 빛으로서의 자세는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자세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살면서 주의 뜻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했더니 “무엇 무엇이 보장 되더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자입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땅에 있고 우리 마음은 모든 것을 더하시는 데 있는데, 여전히 외형은 하늘을 향하여 있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있는 것처럼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를 속이는 일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를 속일 수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그것을 사람들이 모르는 것처럼(렘17:9), 신자 역시 외적으로는 주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면서 내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는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스스로도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길을 가는지 모릅니다. 공공연하게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주의 섭리와는 상관없이 그저 외적인 성공을 지향하면서 잘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는 그런 외형에 속고 있습니다. 마음은 진심이라고 하지만, 실제 더 깊은 내면 가운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신앙으로서 서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두려워 하셔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우리 스스로를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로마서 12장 말씀만 보고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4절부터 보시면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4-21) 어떻게 보면 오늘 우리가 마태복음 5장에서 살핀 내용과 다르지 않는 내용입니다. 혹 여러분에게 핍박하는 자가 있다면 결코 저주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우리를 향해 핍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핍박하기 때문에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을 비는 자리까지 가는 게 세상을 향한 소금이요, 세상을 향한 빛의 역할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심보가 아니라 즐거워하는 자로 즐거워해야 하고,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해야 합니다. 그것도 진심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소금과 빛의 삶입니다. 무엇보다 원수를 갚는 것은 내게 속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일인 줄 아시고, 원수 된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면 그 은혜를 세상을 향하여 베푸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을 이기는 방법은 악보다 더 악해져서 되로 받고 말로 주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서만 악을 이기는 방식이 바로 소금과 빛이 방식입니다. 물론 마태복음 10장 36절처럼 사람의 원수가 자기 식구일 수 있다는 것도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저 인간만 없으면...”하는 자가 바로 내 식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더더욱 잘 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는 자주 부딪힐 일이 없지만 집안 식구는 그만큼 더 자주 부딪히고, 또 서로가 서로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너무 함부로 내비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어려운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더욱 선을 행해야 합니다. 혹 누군가 나에게 해를 줬다. 그러나 반드시 두 배, 세 배로 갚아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는 그런 못된 죄악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으로 악을 이기셔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 꼴 보기 싫다. 왜 그런 사람이 없겠습니까? 나에게 잘 해 주는 사람이면 반갑고, 나에게 서운하게 하면 얄밉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원수까지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오른뺨 맞으면 왼편도 돌려댈 각오를 하셔야 하고, 미워도 오래 참음으로 함께 가야 합니다. 그 자리를 피하면 다 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딜 가도 우리 마음에 흡족한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저 사람 때문이라는 핑계, 탓은 접으셔야 합니다. 오히려 보기 싫은 사람을 통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사람이 못 마땅하고, 저 사람이 못 마땅할 수 있지만 그를 붙여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그것은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 주셨지, 여러분더러 투정하라고 주신 적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광야 여정을 통하여 떡이 아니라 말씀만 먹고 사는 자인 줄 알도록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목적으로서 우리의 생을 이끌고 계신 겁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우리는 사명으로서 받은 자들입니다. 때문에 소망 없는 세상에 기대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를 의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무엇을 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니 세상은 결코 우리에게 뭔가를 줄 수 없습니다. 혹 여러분에게 뭔가를 주는 듯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란 걸 파악하셔야 합니다. 우리만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자요, 우리만이 그들을 위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무엇보다 착한 행실로 여러분의 다름이 증명되셔야 합니다. 그러나 단지 보이는 부분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을 먼저 살피십시오. 생각보다 우리는 우리 마음과 행동이 다를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처음에는 돕는다고 도왔는데 나중에 보니 괜히 도왔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도와줬지만 내게 못할 때 그런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이미 그런 마음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으셔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 하셨는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지만 결코 후회함이 없으십니다. 우리와 같은 성품이셨으면 후회해도 한 두 번 후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얼마나 부족합니까? 얼마나 모자랍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괜히 구원했다고 한탄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때문에 우리 모두가 그 자리로 나아가셔야 합니다.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 그래서 주고 또 줘도 아깝지 않는 마음, 주고 줬을 때 줬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 마음. 물론 받은 입장에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준 당사자는 그걸 기억하면서 자기 의를 삼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이것을 어떤 영향력이라고만 보기에는 너무 외형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소금과 빛은 어떤 면에서 티가 안 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어떻게 저들이 알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아시기에 그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정당함을 점검받으시길 바랍니다. 그 자리가 소금과 빛으로 부름 받은 성도만의 자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