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재로 일어난 교화
자료 제공; 조영진 원로교무(중앙수도원) 취재- 이법은 기자
원광 2012년(원기 97년) 1월호
조영진 원로교무(중앙수도원)가 유성교당에 근무할 때다.
순교(교도집 방문)를 갔다가 교당에 돌아오니
현관문 앞에 낯선 아주머니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대뜸 하는 말.
“집에 아픈 사람이 있는데, 기도 좀 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교무는 갑작스런 요구에 내심 당황했으나 그들의 절박한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교당 근처에 살고 있는 교도와 함께 그들을 따라 나섰다.
그 집에 들어갔는데 30세 가량의 젊은 여자가 방바닥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앙상하게 남은 몰골이었다.
교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정성스럽게 독경을 했다.
그러자 괴로워하던 그녀의 행동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그때 그녀의 엄마가 “이제야 딸이 편안하게 죽었네요.”라고 했다.
교무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영가의 이름은 박신자였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이유없이 아팠고,
가족들은 그녀를 데리고 여러 병원을 다녔지만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굿도 했다. 그러나 박 씨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박 씨의 행동은 기이해져만 갔다.
어느 날이었다.
박 씨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종이에 이상한 글씨를 써서 엄마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하는 말.
“옥황상제가 계룡산 정기를 받으라고 했으니 거기로 빨리 가야 해요.”
그래서 일주일 동안 먹을 것을 싸 들고 산에 갔다 왔다고 한다.
가족들은 그녀로 인해 점점 지쳐갔다.
그리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원불교에 찾아왔던 것이다.
2재 때가 되는 날이었다.
박 씨의 엄마가 찾아와 초재를 지낸 날 밤의 꿈 이야기를 했다.
“딸이 나타나 지금까지 그녀를 괴롭힌 사람이 6·25때 전사한 삼촌이었다는 말을 했어요.”
교무는 그 말에 ‘조금 일찍 원불교를 만났더라면….’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어 하는 말이
“딸이 옥황상제의 옷을 입고서 ‘내가 (기가) 제일 센 데 (천도재 지낸다고) 갈까봐?’
라는 말을 했는데 계속 마음속에 걸려 심난하다.”고 했다.
교무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아 주었다.
종재 날이었다.
교무는 내심 궁금했다.
천도재를 지낼 때마다 가족들이 찾아와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박 씨의 조카가 교무를 찾아왔다.
고모가 이제 멀리 가야하니 표 한 장을 끊어 달라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표를 끊어주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에 교무도 안심이 되었다.
그 후 박 씨의 가족들은
“천도재 이후로 그녀를 애타게 불러보아도 꿈에 나오지 않는다.”며,
한편 “섭섭하면서도 기쁘다.”는 말을 전해왔다.
천도재로 감동을 받은 가족들은 모두 입교를 했다.
그 후로 “천도재는 유성교당에 가서 지내야 영가가 잘 떠난다.”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조영진 원로교무는 그들의 공덕(?)으로
유성교당이 ‘천도교당’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재를 지냈고, 텅 빈 법당이 사람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