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설교 | 23.6.4(환경주일)
피조물의 희망
로마서 8:19~21
설교_ 김경희목사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부지방 앞바다에 9.0 강도의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쓰나미가 닥쳤죠. 그 재앙이 닥친 곳이 바로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였습니다. 다음날부터 4일 동안, 1~4호기에서 수소폭발이 일어났습니다. 2012년 4월, 사고가 난 1~4호기는 폐로되었고 2012년 10월 당시, 2기만 가동되었습니다. 사고 당시에 일본에는 총 54기의 원자로가 있었고, 그 중 38기가 운전 중이었습니다.
그 후로 10년, 2021년 4월, 일본은 방사성 물질을 포함한 오염수를 해양방류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실시년도를 올해로 정했죠. 그 결정을 내렸던 2021년, 1,000 여개의 탱크가 수용할 수 있는 137만 톤 용량 중 125만 톤이 채워져 해결방법을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었습니다. 증기화배출, 지하밀봉, 전기분해, 시멘트화... 그러나 일본이 선택한 방법은 해양방류.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다에 버리는 것이 가장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이런 결정에 미국이 지지하고, IAEA가 지지하고, G7이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거기에 가장 근접하여 있기에 실제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우리나라,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는 우리 정부는 이에 무대응의 태도를 보임으로써 국민들의 불신과 반발을 사고 있습니다.
이것이 당장 우리가 직면한 환경문제입니다. 지난 5월 환경운동연합은 이 사안을 두고 설문조사를 벌였습니다. 예상하다시피 85.4%가 일본이 결정한 방식에 반대하였고, 방류 이후 수산물 소비의향을 묻는 질문에 72%가 줄어들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 5만여명이 종사하는 어업에 큰 타격이 올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할까요? 어떻게 행동할까에 앞서서 우리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가져야 하는지 오늘 환경주일에 주신 말씀 속에서 길을 찾고자 합니다.
환경, 인간중심적 표현
환경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①사람이나 동식물의 생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눈·비·바람 등의 기후적 조건이나 산·강·바다·공기·햇빛·흙 등의 자연적 조건”입니다. 그런데 비슷한 의미를 가진 자연을 사전에서 찾으니 이렇게 설명됩니다. “②천연으로 이루어지거나 생겨난, 산·강·바다·초목·동물 등의 존재. 또는, 그것들이 이루는 환경.” 두 설명 모두 공통적인 것은 인간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중심주의라고 하죠.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은 다른 존재와 구분되는 유일하고 우월한 존재이다. 인간 이외의 다른 모든 존재는 인간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도구적 대상이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의 근원은 다름 아닌 성서에서 가져왔죠. 창세기 1장 2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을 다스려라” 하셨다.(창세기1:28)
사실상 성서마저도 인간을 위해 이용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는 신 중심주의의 중세를 지나 근대를 연 사상이기는 했으나, 또다시 다른 대상, 즉 자연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어리석음을 반복합니다.
“우리는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주가 될 수 있다. 인간은 정신을 소유한 존엄한 존재지만 자연은 의식이 없는 물질이다.”(데카르트)
“자연이 인간에게 이롭도록 지식을 활용해야 한다. 방황하고 있는 자연을 사냥해서 노예로 만들어 인간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베이컨)
자연과 인간은 서로 의존적 존재이며, 원래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에 의지하여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혼자 있는 것이 악하다’(창2:18)고 했던 것입니다. 이 때 ‘혼자 있는 것’은 분리돼 있는 상태(바드)를 의미합니다. 아담이 흙인 아다마에서 온 것을 잊고, 흙을 이용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모래를 골재로 보고 나무를 목재로, 바위를 석재로, 동물을 고기로, 식물을 약재로 보는 것 등이 모두 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후쿠시마 오염수를 바다로 내보내는 결정을 내릴 때, 그들이 고려한 것은 경제적 손익뿐입니다. 바다에 살고 있는 70만 종 이상의 생명체는 그들의 안중에 없습니다. 그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거기서 먹거리를 얻어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후재앙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6차 보고서가 지난 3월 20일 발표되었습니다. 무려 1,000명이 넘는 과학자가 참여해 내놓은 보고서로서, 195개국의 650여 명의 대표단이 만장일치로 승인한 보고서입니다. 이 보고서의 키워드는 ‘경고’입니다. 향후 10년 내 대전환을 이루지 못한다면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의 계곡에 빠지고 말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산업화 이후 1.5도 이상 지구평균 온도를 제한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탈탄소사회로 혁신적으로 전환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5차 보고서(2014년)는 2도를 제한 온도로 제시했으나, 1.5도와 2도의 단 0.5도 차이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기준이 변경되었습니다. 표를 보시면, 북극해 해빙이 여름에 모두 녹아 없어질 확률이 1.5℃에서는 100년에 한번이어서 복원이 가능하지만, 2℃에서는 10년에 한번, 복원불가 상태가 됩니다. 어업 수확량도 1.5℃에서는 150만톤이 줄지만, 2℃에서는 300만톤 넘게 줄어듭니다. (수확량의 감소는 더 심각한 사태로 이어집니다. 전쟁이나 기후난민 등) 1.5℃에서는 전세계 산호의 70~90%가 사라질 것으로 전망되지만, 2℃에서는 99% 이상, 그러니까 거의 멸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2도를 ‘기후난간/지구보호난간’이라고 부릅니다. 지구를 지킬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는 뜻이겠죠. 그 너머를 어떤 이는 절벽이라고 표현하고 어떤 학자는 계곡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나면 더이상 인간의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는 것입니다. 모든 산업이 다 멈춘다고 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인데, 지구 스스로 온도를 높이는 작용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빙하가 녹아 반사하는 빛보다 깊고 검은 바다로 흡수되는 열이 많아지고, 빙하 대신 따뜻한 기온에 초원이 형성되면 더 많은 생명들이 살게 돼 탄소발생이 증가합니다. 통토에 갇힌 메탄 등의 온실가스가 공기 중으로 나온 결과는 상상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거기에 또 하나의 변수는 산불인데, 온난화와 함께 건조한 기후가 산불을 야기하고 산불로 타버린 검은 산 역시 열을 흡수하게 되니 지구의 온도는 갈수록 높아지기만 하는 것입니다. 지구온난화, 이미 인간의 손을 벗어나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기후학자 조천호 박사는 아직까지는 ‘기후위기/재앙’이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후위기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아직 늦지 않았고, 얼마든지 멈추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기후재앙의 징조들입니다. 이 징조를 분명히 목격하면서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지 못한다면, 멸망을 피할 길을 알려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천사가 직접 손을 잡고 재앙을 피하게 했어도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와 같은 종말을 맞을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일
기후위기를 극복할 근본적인 방법은 정치적 결단과 의지가 요구됩니다. 화석연료 사용을 감축해야 하고, 그와 관련한 보조금을 폐지해야 합니다. 탄소포집과 저장기술을 활용하고, 광범위한 전기화,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확대가 필요합니다. 기업들에 탄소세와 배출권거래제를 실시하는 것도 당장 요구됩니다. 개인들의 노력 역시 의미있고 가치있지만, 근본적인 제도와 산업구조가 변경되어야 합니다. 에너지시장 조사업체인 블룸버그 보고서(NEO 2019)에 나오는 ‘2050년 전세계 전력비용’이 어떻게 변화할 지에 대한 그림입니다.
맨 밑에 검은색이 석탄입니다. 그 다음 회색이 가스구요. 그리고 황토색이 석유, 빨강색이 핵에너지입니다. 2020~30년 사이에 이 에너지들이 급격히 줄어들고, 2050년에 이르러서는 풍력과 태양광, 기타 재생에너지들이 대부분의 전력자원이 된다는 전망입니다. 물론 이런 변화는 이 에너지들의 가격의 하락과 함께 찾아오는 결과입니다.
이런 변화에 정치적 결단과 의지가 필요한 아주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합니다. 다음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장소는 어디일까요? 암스테르담의 1971년과 2020년의 같은 장소 사진입니다. 세계적인 자전거의 수도, 또는 ‘자전거의 천국’으로 알려진 암스테르담이지만, 원래 이랬던 것이 아닙니다. 암스테르담도 한 때는 자동차를 사랑하는 도시였습니다. 네델란드가 경제호황을 누리기 시작했을 때, 정책입안자들은 자동차가 미래의 교통수단이라고 믿었습니다. 마침내 1971년에만 3,000명이 자동차로 사망했고 그들 중 450명은 어린이였습니다. 이에 항의하는 그룹들이 생겨나고, ‘아동살인중지’ 시위가 이어진 결과 정부가 바로 이 시위 조직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더 안전한 도시계획을 위해 협력하게 됩니다. 그 후 40년간의 도시계획과 정책으로 오늘날의 암스테르담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 거듭 발생하고 있는 어린이보호구역 내 음주운전 교통사고가 떠오릅니다. 학교 앞 차없는 거리, 불가능한 일일까요?
이제 ‘이산화 탄소를 줄이기 위한 개인 선택의 영향’에 대한 그림입니다. 스웨덴 룬드 대학교가 2017년에 발표한 자료입니다. 어떤 항목이 있냐면, 왼쪽의 것들은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선택들인데, 그 항목들을 먼저 볼까요? 전구 업그레이드, 옷 걸어서 말리기, 재활용, 찬물로 세탁하기, 하이브리드차로 바꾸기입니다. 그러면 효과가 높은 오른쪽 항목들은 뭘까요? 채식하기, 전기차교체, 재생에너지사용, 대서양을 왕복하는 항공여행 안하기, 차없이 살기, 그리고 ‘한 사람이 없다면’(다른 말로 아기 안 낳기).
우리나라는 저출산 문제로 심각한데, 이런 항목이라니! 좀 놀랍죠? 이 보고서가 우리나라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감안하고 보셔야 하지만, 사실 지구온난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인간이므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연간 만들어내는 온실가스가 58.6톤이나 되니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실제로 노력하고 있는 것들은 사실상 효과가 미미한 항목들이라는 것입니다. 전기코드를 뽑는 것, 전등을 led로 바꾸는 것, 종이 빨대를 사용하는 것, 텀블러 쓰는 것, 재활용이나 물을 아끼는 것, 건조기를 쓰지 않는 것, 찬물로 세탁하는 것, 많이 해봐야 자동차를 하이브리드로 바꾸는 정도로는 이산화탄소 감축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조금 더 효과가 있는 것은 채식하기, 항공여행 안하기, 차없이 살기인데, 이것을 하자고 캠페인을 하거나 적극적으로 권고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일까요? 채식만 해도 재활용보다 4배 가까이 탄소를 줄일 수 있는데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소비산업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축산(육류)산업, 자동차산업, 관광산업, 이 표에는 나오지 않지만 의류산업, 그리고 핵발전소산업... 여기엔 자본주의의 주축이 되는 기업들의 힘이 작용하죠. 그들의 손익에 직접적 영향을 끼칠 권고와 캠페인에 정부가 소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탄소중립을 이야기하면서, 경제성장을 같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희망과 함께(에프 헬피디)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환난의 때에 공동책임과 연대를 말합니다. 그는 이 피조물(해 크시티스, 여성단수) 속에 인간을 포함하지 않는(8:23) 대신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의 연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휘온 투 테우, 남성복수)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씁니다. 새번역은 19절과 21절에서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번역했지만, 19절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맞습니다. 인간의 타락이 모든 피조물의 퇴락을 초래했듯, 인간의 구원은 모든 피조물들의 회복을 지향합니다. 모두가 허무에 굴복할만큼 허술하지만, 거기에 희망에 있습니다. 그 희망은 바로 썩어짐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테크논, 중성복수)가 되는 영광의 자유를 얻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을 대상화하여 지배하고 착취해 왔으나,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나게 되면 모든 피조물도 구원과 영광의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이 표현이 또 어디에 나왔던가요? 환경주일과 관련된 본문 중에 나옵니다. 창세기 6장의 노아의 홍수의 원인이 되는 인류의 죄악에 등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창세기 6장은 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말로 이어집니다. 이 구절에서 ‘모든’(콜)이 빠진 것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제 맘에 드는 대로 모든 여자를 취했다는 말입니다. ‘아내로 삼았다’는 표현 역시 점잖은 표현입니다. 그냥 ‘취했다’가 맞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있었는데, 사람의 딸들을 자기 맘에 드는대로 모조리 함부로 취했다, 이 말입니다.
어째서 그것이 가능한가요? 그들이 힘을 지닌 존재들, 강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서 태어난 존재들이 바로 네피림이라 불리는 거인족이라고 말하고, 이어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6:5~6)는 것입니다. 인류최초의 심판의 원인이 되었던 인간의 악은 강자가 약자를 짓누르는 구조적 악인 것입니다.
바울의 로마서 오늘 본문은 이 사람의 딸들, 약자를 ‘피조물’로 바꾸어서 그들 사이의 분리와 연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피조물들이 기다리는 그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의 딸들이 피하고 싶어하는 지배자들, 착취자들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창세기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을 모조리, 함부로 취합니다. 거기에 연대는 없습니다. 사람의 딸들은 강자에 의해 유린당하는 약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기자는 이 상태를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6장 11~12절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니, 세상이 썩었고, 무법천지가(하마쓰) 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땅을 보시니, 썩어 있었다. 살과 피를 지니고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속속들이 썩어 있었다.”(창세기 6:11~12)
그러나! 바울은 이 허무 속에서 희망을 말합니다. 다시금 피조물은 그 인간에게, 그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희망을 겁니다. 그리하여 피조물은 썩어짐의 속박에서 해방됩니다. 썩어짐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온통 썩고 무법천지가 되어 심판 말고는 답이 없던 그 날로부터 이제 해방과 자유와 영광의 날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심판이 바울에게 와서 ‘허무’(무익함)라는 단어로 바뀌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물에 쓸려 사라지는 홍수의 심판, 그 심판을 통해 인간과 피조물을 굴복하게 하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므로 그 심판에는 희망에 함께 합니다. 창세기에서 그 희망은 노아였고, 오늘 바울에게 그 희망은 그리스도인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가져올 자유(해방)입니다.
인간의 자리
사실 창세기 6장의 그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들이 아니라 인간이었습니다. 물론 사람의 딸들도 인간이죠. 그러나 사람의 아들들은 강자였고 사람의 딸들은 약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을 창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질서입니다. 인간이 만든 계급이며 세상입니다. 그러니 그곳은 하나님이 없는 ‘무법천지’(하마쓰:폭력)였던 것입니다. 무법천지란 힘센 사람이 힘을 제 마음대로 부리는 세상을 말하며, 그것이 하나님이 세상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게 만든 이유였던 것입니다.
이제 이런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지구를 착취해야만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아마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은 어떻습니까? 지하자원 개발, 산림개발, 해양개발, 광산개발, 심지어 인력개발, 개발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개발. 이 말은 당연한 말로 들립니까? 개발할 수 있는데 가만 놔두는 것이 오히려 잘못이라고 비난하고 있지 않습니까?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은 착취해온 우리가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 노릇을 해왔던 것이 아닌가요?
인간중심주의와 대조되는 것은 생태중심주의입니다. 생태중심주의란, ‘자연은 그 자체로 존중받을가치가 있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이다. 생태계를 이루는 모든 존재를 도덕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현대 환경윤리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도 레오폴드는 산림공무원이었습니다. 그는 사슴과 친구가 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 사슴들을 사냥하는 늑대를 보게 되죠. 그리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늑대를 없애버리면 사슴이 늘어나서 산이 더 보기 좋고 안전해질거야.’ 그래서 늑대사냥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을까요? 늘어난 사슴 떼가 풀과 나무를 모조리 먹어 치워 토양이 유실되고, 결국 먹이가 부족해져 동물들이 죽어가고 사슴마저도 죽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늑대의 눈을 통해 ‘늑대와 산만이 알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라는 깨달음을 얻죠.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5분 통합사회, EBSi)
「총.균.쇠」로 유명한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우리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50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지구 위에 물과 토양, 어류, 꽃들이 현상을 유지하는 속도보다 더 빨리 인간이 그것을 소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이 지속가능하도록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이 “우리에겐 문제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바울이 전한대로 ‘허무에 굴복할지라도 거기 희망이 있다’는 바로 그 말과 같은 말이겠지요.
다이아몬드 교수는 “인간에게는 자연과 전쟁을 벌이는 본능이라도 있는 것일까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자연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그저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종일 뿐입니다.”
(‘석학에게 던지는 5대 질문-재널드 다이아몬드 대멸종’, EBS2)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균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병을 치료하기도 하고 전쟁의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생각만 해도 무서운 핵연료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무시무시한 것이 되기도 하지만, 엄청난 에너지가 되기도 합니다. 힘이란 그 자체로는 선악이 아닙니다.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죠.(제레드 다이아몬드) 지금,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종인 인간, 우리가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지, 로마서 8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지에 따라서 피조물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나오며
오늘은 한국교회가 지키는 40번째 환경주일입니다. 또 우리교회가 녹색교회로 선정된 첫 환경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참 좋다’ 하셨을 때, 오직 인간만을 향해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고, 씨를 맺는 식물을 그 종류대로 나게 하고,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그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고, 커다란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는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날개 달린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집짐승도 그 종류대로, 들에 사는 모든 길짐승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창1:12,21,25,31)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목포의 첫 번째 녹색교회가 되었습니다. 일단 간판부터 걸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첫 사람 아담이 단지 피조물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준’ 작은 창조자였던 것처럼, 목포 녹색교회 1호인 우리교회는 우리 지역의 녹색교회 실천의 선두에 섰습니다. 우리의 작은 걸음이 첫 사람의 첫 발자국이 될 것입니다. 기후위기의 시대, 피조물이 간절히 기다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길을 갑시다. 허무의 시대에 희망이 됩시다.
■주요참고자료
1.영상 EBSi,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5분 통합사회
2.영상 ebs2, ‘석학에게 던지는 5대 질문-재널드 다이아몬드 대멸종’
3.김해창,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방류’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①②, 국제신문(23.5.31,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