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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테너" 임웅균 ... 테너 임웅균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2학년때 음악선생님의 적극적인 권유로 음악과 인연을 맺으면서 음악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 그는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을 수석으로 입학, 수석졸업이라는 것에서부터 성악가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1979년 대학졸업 후 곧바로 꿈에도 그리던 음악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로마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을 수학했고 "오지모 아카데미아" 를 졸업했다. 특히 유학중엔 로마 "밀라노신문" 과 "만토바신문" 으로부터 "영웅적인 소리를 지닌 천부적인 테너" 라는 평을 받았다. 1985년 귀국후 지금까지 1,200여회의 기록적인 공연을 통해 국민의 넓은 사랑을 받은 클래식계에서 보기드문 국민성악가로 우뚝 섰다. 또한 오페라 활동에도 남다른 탁월성을 보였는데 "사랑의 묘약", "리골렛토", "포스카리가의 비극", "팔리앗치", "아이다", "오텔로", "라트라비아타" 등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고 특히 그가 출연하는 오페라는 음악계의 주요 화제가 되기도 해 전문 평론가들로 부터, "발성과 연기력이 일체가 되어 노래하는 성악가". "황금의 테너", "한국최고의 테너", "세계적 수준의 테너" 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탈리아 벨칸토 창법의 정수로서 광범위한 노래의 영역을 소화하고 있고 "드라마틱" 과 "리리코", "메싸 디 보체" 의 발성법 구사는 가히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성악가라 극찬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영상음악에도 관심을 보인 그는 KBS "겨울나그네" SBS 창작특집극 "미늘" 에서 주제가와 삽입곡 아리아 및 가곡을 녹음하여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KBS 열린음악회의 클래식 부문 최고스타로서 1995년 방송대상을 수상하였고 "주병진쇼", "스타가 되기까지", "TV는 사랑을 싣고", "TV데이트", "감동깜짝쇼", "인생노트", 서세원쇼" 등에 출연하여 시청자의 마음을 시원스럽게 하여 주는 엔터테이너로서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또한, 만토바 국제콩쿨 2위, 비욧티 국제콩쿨 특별상, 베르디 국제콩쿨 에선 한국 최초 결승진출로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제적인 연주로는 로마, 밀라노 등 17개 도시 순회연주, 프랑크푸르트, 히로시마, 홍콩, 뉴욕, 워싱턴, LA 등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홍보대사, 사랑의 운동본부 대표, 5월 5일 파란마음 하얀마음 축제 대표,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이사장 등의 활발한 대외활동를 하였으며, 현재는 학교폭력대책국민회의 공동대표와 국립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로서 재직하고 있다. 우선 임웅균(경칭 생략)은 소리통이 좋다. 뚱뚱한 몸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발성은 기차화통을 삶아 먹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히 들 정도로 울림이 크다. 미성은 아니지만 하여튼 열린음악회의 빅스타가 된 그는 어떻게 현재의 임웅균이 되었을까? "열린 음악회" 를 통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의 삶은 여느 성악가와는 다르다. 고3 몇 개월간의 레슨으로 연세대 성악과에 수석 입학했으며, 단돈 3백만원을 들고 떠난 이탈리아 유학은 차라리 고행에 가까웠다. 좌충우돌, 아직도 피가 끓는 다혈질의 "사나이" 성악가... 눈물도 참 많이 흘렸다는 그의 젊은 날의 얘기를 들어본다. 말을 할때 내 목소리는 아주 굵고 크다. 학생들을 야단칠 때면 음악원 전체가 쩌렁쩌렁 울린다. 그래서 다들 이렇게 묻는다. "성악가는 목소리를 아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럴 때마다 나는 "강철론" 을 편다. 나는 내 목이 강철처럼 단련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말할 때도 발성을 하고 코를 골면서도 내 목을 단련시킬 뿐이다. 물론 강철은 부러질 수도 있다. 그러나 대신 큰일에 쓰인다. 부러져 짦게 살지언정 사는 동안 강철이고 싶다. 나의 피는 항상 뜨거웠다. 내 뜨거운 피는 어린시절부터 끓고 있었다. 동네에서 임씨네 셋째아들 하면 독종으로 소문나 있었다.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전까지 나는 약간 주눅이 들어있는 상태였다. 방이 60칸인 집에 살다 쫄딱 망해 뚝섬으로 흘러들어간 후부터였다. 우리집은 아들만 여섯형제였다. 온 가족이 방하나에서 먹고 잤으니 주인 입장에서는 골치아픈 식구였다. 그때 셋방살이의 서러움을 알았고 주인집 눈치를 봐야한다는 것도 배웠다. 그런 내가 4학년 때 마을의 골목대장과 싸움을 벌였다. 몇 년을 그 놈 부하로 있었는데 어느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상대는 코피를 흘리며 울음을 떠트렸다.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어린시절 나는 음악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나마 조금 관련이 있다면 어머니가 노래를 아주 잘하였다는 정도. 결혼 후 숙대 성악과에 등록까지 했다가 덜컥 임신을 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낳은 아이가 바로 나다. 가난한 살림에 피아노를 배울 수도 없었고 음악성적도 별로였다. 목소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우렁찼는데 국민학교 5학년 때는 그 때문에 선생님에게 뺨을 맞았다. 악보에 "점점 세게" 라고 적혀 있어서 그대로 불렀을 뿐이었다. 결국 음악점수는 "양" 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도 큰 목소리가 문제가 되었다. 선생님은 조용하고 예쁘게 안불럿다는 이유로 59점을 줬다. 낙제점이었다. 그러니 내가 음악에 소질이 있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2학년 때 만난 이송매 선생님은 달랐다. 놀랍게도 그는 내가 "성악을 하지 않으면 안될, 기가 막히게 좋은 목소리를 지녔다' 고 칭찬했다. 용기백배한 나는 "고성방가" 하는 버릇이 생겼다. 당시 우리 동네 독서실의 주인 아저씨는 멋진 바리톤이었다. 매일 저녁 그는 뚝방길을 걸어다니며 "오 솔레오" 나 "키타리" 를 불렀는데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나도 그 아저씨를 흉내내 온 동네를 다니며 고성방가를 시작한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네 밖에서부터 노래를 부르면 마을 사람들이 "웅균이가 오는가봐" 했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가고파", "내 마음" 이 그때 내 단골 레퍼토리였다. 50년대 뚝섬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전차와 버스의 좀점이어서 도시의 혜택을 모두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돛단배가 떠다니고 마을 아낙들이 빨래터에 나와수다를 떠는 곳이었다. 뚝섬으로 흘러들어가기 전 우리짐은 60칸의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고 한다. 큐슈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신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 쫄딱 망한 후 정학한 곳이 뚝섬이었다. 방 하나에 남자형제 여섯과 어머니, 아버지가 함께 먹고 자는 생활... 셋방살이 서러움도 많이 받았지만 뚝섬은 호연지기를 기르기엔 천혜의 장소였다. 겨울이면 스케이트를 탔고 여름이면 장마 급류를 타고 수영을 했다. 떡밥 할아버지에게 얻은 떡밥을 들고 했던 방울낚시, 형이 잡아서 구워준 참새고기 맛도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 아버지는 명지고 영어교사로 일하셨다. 그러나교사월급으로 여섯형제를 키우기는 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분이었다. 생활력강한 어머니가 팔을 걷어붙이셨다. 플라스틱 그릇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고 만화가게를 연 적도 있었다. 일수계까지 하는 바람에 어머니와 함께 일수를 거두러 다녔던 기억까지 있다. 나에게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었다. 중요한 시험을 바로 앞두고 꼭 아버지에게 호된 꾸지럼을 듣거나 몸이 아프곤 했다. 초등학교를 전교 2등으로 졸업후 경기중 입학시험에 떨어진 것이 시작 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1차, 2차까지 떨어져 대구까지 내려가는 우여곡절을 겪은 후 명지고를 다니게 됐다. 그때 아버지는 이미 명지고 교사직을 그만두고 다시사업을 하고 계셨다. 베어링과 관련해 특허까지 보유한 제법 탄탄한 기업이었다. 집안 형편이 많이 나아져 고 2때는 연못이 있는 꽤 근사한 집까지 샀다. 학교 성적도 많이 회복되어 전교 2, 3등을 다투었다. 그 때 내 꿈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성악가는 생각해본적도 없었다. 큰 목소리는 여전했는데 그 좋은 소리로 노래는 하지 않고 웅변을 했다. 한 번 단상에 오리면 학교가 쩌렁쩌렁해 상도 여러번 탔다. 군인이 되겠다는 내 꿈에 제동을 건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결사 반대하며 딴 길을 찾아보라고 권했다. 그때 문득 중 2때 음악선생님에게 들었던 칭찬이 떠올랐다. 성악가 ... 성악가가 된다면 세계 수준이 될 자신이 있었다. 음악선생님을 찾아갔더니 기다리고 계셨던 것처럼, "그래, 왜 노래를 안하나 했다" 고 하셨다. 그 길로 음악레슨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 5월 1일이었다. 지금도 이도식 선생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때 선생님은 단돈 3만원의 레슨비로 매일 세시간씩,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를 가르쳤다. 선생님은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내게 실현하셨다. 하루라도 레슨에 빠지면 두들겨 맞는 강행군이었다. 그리고 7개월의 레슨 후 나는 연세대 성악과에 수석으로 당당히 합격했다. 성악을 나의 길로 택한 후 비로소 나는 생애 처음으로 1등을 하게 되었다. 여학생을 사귀고 가끔 땡땡이도 치는 사이에 대학생활이 흘러갔다. 나는 학교에서 다혈질로 통했다. 일을 맡았다 하면 두팔 걷어붙였고 뛰어다녔지만 한번 "아니다" 싶으면 그냥 뒤엎어버리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평화로울 때의 이야기다. 대학교 3학년 때 오일쇼크와 함께 집안이 풍지박산 났다. 수출길이 막히면서 부도가 났고 집달리들이 몰아닥쳤다. 거기서부터 고난의 세월은 시작된다. 나는 지금도 중소기업의 사장들을 존경한다. 10여년 사업을 하면서 아버지가 겪은 고통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늘 돈 걱정이었고 그 때문에 어머니는 친구나 친척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였다. "중소기업가가 벌면 얼마나 벌겠니. 직원들과 같이 먹고 사는 거란다." 부도가 났던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침에 우리를 불러놓더니 "오늘 부도가 날거다" 라고 얘기했다. 아무 대책도 없었다. 집에 있던 돈을 전부 긁어모으니 17만원... 우선 그돈을 들고 아버지는 몸을 피했다. 그날 어머니는 몇시간 동안 계단에 멍하니 앉아계셨다. 아니나 다를까. 빚쟁이와 집달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머니, 형, 동생들도 각자 흩어져서 살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집에 남은 것은 나 혼자였다. 그로부터 경매로 넘어갈 때까지 3개월간 나는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며 혼자서 집을 지켰다. 식구라고는 늙은 셰퍼드뿐이었다. 그놈마저 굶어 죽어버렸다. 처음엔 집에 있던 멸치를 먹이고 삼립빵을 사다줬는데 돈이 떨어지니 내가 먹을 음식도 없었다. 한겨울이었지만 난방은 꿈도 못 꾸었다. 낮에는 빚쟁이를 상대하고 밤이면 차가운 바닥에 몸을 누이면서 외로움에 떨어야 했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왔다. 어버지는 행방조차 몰랐고 대구에 내려가신 어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지셨다. 집이 처분된 후 문화촌 달동네에 사글세방을 구했다. 그리고 밤무대를 뛰기 시작했다. 클래식을 연주하는 레스토랑이 내 첫직장이었다. 한번은 레스토랑에서 음대 학장과 맞닥뜨렸다. 혼날 각오로인사를 했는데 학장은 꾸지람 대신 내 어깨를 두드려줬다. "임군, 용기를 갖고 열심히 살아" 당시 월급이 12만원. 지금으로 치면 1백만원은 족히 되는 큰 돈이었다. 돈은 어머니 치료비로 송금했다. 그러다보니 물로 배를 채우고 무대에 오르기 일쑤였다. 결국 탈이 났다. 달동네 생활 3개월만에 장티푸스에 걸린 것이다. 돈없이 병에 걸린다는 건 참 기가 막히는 일이다. 박계숙 교수님이 보증을 서줘서 급한 대로 입원을 했지만 침대가 바늘 방석이었다. 나중엔 원무과에서 찾아오면 화장실에 들어가 숨곤 했다. 결국 작은 형이 집달리에게 빼앗기지 않았던 대영백과사전을 가져다 팔았다. 겨우 병원비를 해결했는데 얼마 안있어 다시 재발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상태가 심각했다.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하나님을 다시 찾았다. 국민학교 5학년때 목사님으로부터 억울한 오해를 받은 후 "차라리 고무신을 믿겠다." 며 버린 하나님이었다. 밤새 기도를 드리며 애원하다 잠이 든 다음날... 내 몸은 거짓말처럼 나아 있었다. 그날 나는 내 나머지 삶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했다. 그때의 맹세는 지금까지도 흔들림 없이 지켜지고 있다. 보기에는 무디고 우락부락한 것 같지만 사실 나는 눈물이 많은 남자다. 부도가 나고 7개월 후 어머니가 뇌혈전으로 돌아가셨을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성통곡을 했다. 졸업식날도 혼자 교문을 걸어나오며 엉엉 울었다. 초라한 군복차림에 아무도 오지 않는 쓸쓸한 졸업식... 수석졸업장을 받았지만 축하해 줄 사람도 없었다. 제대한 후 첫직장은 화곡고등학교 음악선생... 나는 학교에 있으면서 획기적인 실기시험방법을 개발했다. 매번 빵점을 받는 음치학생들을 위해 창작, 연주, 감상 중 자기가 잘하는 것을 선책하도록 한 것이다. 노래는 못하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들은 감상문을 써서 제출하고 기타를 잘 치는 학생은 기타를 들고 나와 시험을 치렀다. 꽤 보람있는 생활이었지만 나는 이미 유학을 떠날 결심을 굳혔다. 간판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당시 나는 높은 도를 잘내지 못했다. 고음의 벽을 뚫고 음악적 완성을 이루려면 이탈리아로 가야 했다. 테너에게 고음은 생명과도 같다. 때로 테너는 고음을 위해 생명을 걸기도 한다. 세계적인 테너 리차드 더커는 "당신은 높은 도를 내면 죽는다" 는 의사의 경고로 고음을 포기했고, 국내의 한 원로 테너는 결혼식장에서 축가를 부른 후 돌아가셨다. 나도 노래를 부르다 죽을 뻔한 기억이 몇 번있다. 집이망하고 몸이 약해졌을 때였다. 채플시간에 찬송 특송을 했다. "주여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라는 곡이었는데 높은 "라" 정도여서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라" 음을 내고 돌아서는 순간 뇌혈관 쪽에서 피가 솟구쳤다. 숨이 콱 막히면서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후 김자경 오페라단이 공연한 심청전을 연습하면서 다시 한번 그 증세가 재발했다. 농부가를 멋들어지게 부르다 숨이 콱 막혀버린 것이다. 의학용어로는 부정맥현상... 한동안은 노래 부르는 것 자체가 겁이 났다. 유학을 가려면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다. 우선 비행기값이라도 마련해야 했다. 또 함께 떠날 아내가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요. 여자한테 원하는 거 없습니다. 그저 제가 키가 작으니까 여자가 키가 크고 이왕이면 예뻤으면 하고요, 제가 피아노를 못치니까 반주를 해줄수 있는 여자였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학교선생치고는 과한 요구였지만 그 소원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반석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하면서 반주를 하던 최영인을 아내로 맞게 된 것이다. 키는 1m 73... 3년의 교사생활을 청산하고 유학준비를 했다. 수중에 가진 돈이라곤 없었다. 궁리 끝에 유관순 기념관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당시만 해도 독창회는 자기 돈 쏟아부어가면 하는 게 관례였지만 나는 3백 70만원을 벌었다. 그 돈이 내 유학자금이었다. 급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도 생략한채 이탈리아로 떠났다. 아내에게는 "우린 지금 이탈리아로 신혼여행 가는 거야" 라고 큰소리 쳤다. 그러나 이탈리아에 도착한 첫날부터 이미 신혼여행은 끝났다. 그곳에는 기나긴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2개월 동안 페루자에서 이탈리아어를 배운 후 아내와 함께 로마로 향했다. 산타체실리아 음악원에서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처음으로 해외에서 치르는 시험이었지만 떨리거나 불안한 느낌은 없었다. 후배가, "형, 떨어지면 어떡할래?" 했을 때, 나는 "너 나를 뭐로 아니?" 하고 큰소리쳤다. 입학시험에 떨어질 실력이라면 처음부터 유학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기라성 같은 교수들 앞에서 푸치니의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전해주오" 를 불렀다. 내 노래가 끝나자 학장은 "브라비시모!"(매우 훌륭합니다.) 하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 2등으로 합격했다. 학교에 입학하고 3개월 후 예상했던 대로 돈이 똑 떨어졌다. 방 구하고 부엌 살림살이 몇가지 장만한 후 학비까지 내고 나니 그만 이었다. 방법은 하나... 아내든 나든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고집도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아내에게 선언했다. "이탈리아에는 음악공부를 하러 온 것이므로 관광가이드 같은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겠다. 당신이 나를 먹여살리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같이 굶어죽자는 얘기였다. 아내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지 나 몰래 크리스털 가게의 점원일을 시작했다. 더군다나 일요일에도 출근을 하느라 교회를 빠져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주일을 지키지 않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당장 가게로 달려가 주인과 대판 싸움을 벌이고 아내를 데리고 나왔다. "주일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다 먹고 살게 해주실거야" 큰소리를 쳤지만 그때 마음속으로는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아무런 희망도, 대책도 없었다. 그때 후배 한명이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했다. "오시모 아카데미라는데가 있는데 학비가 전혀 없어. 오시모는 인구가 5,000명밖에 안되고 집세도 아주 싸다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내와 함께 탐색을 하러갔다. 가보니 후배의 말 그대로였다. 파바로티의 스승인 캄보갈리아니, 영화 "물망초" 로 유명한 페르루치오 탈리아비니 등 세계적인 대가들이 이 학교의 선생님들이었다. 거기다 집세도 정말 쌌다. 하늘이 내게 준 학교였다. 곧바로 로마의 집을 정리했다. 보증금을 빼고 자재도구를 파니 1백50만원이 수중에 남았다. 그 돈을 들고 오시모로 향했다. 이탈리아는 방 구하기 어렵기로 유명한 나라다. 신원이 확실한 사람이 아니면 쉽게 방을 내주지 않는다. 내가 가장 익숙해진 이탈리아어가 "Io sto cercando un appartamento per mensile?". 한국말로는 "월세방 있어요?" 하고 다녔었다. 오시모에서는 먼저 야채가게를 찾아갔다. 외국인에게 친절한 사람이 누구냐고 주인에게 물었더니 페르난도라는 국립경찰을 소개해줬다. 파인애플 10개를 사들고 그의 집을 찾아갔다. 오시모 유학시절 내내 절대적인 도움을 줬던 은인을 그렇게 해서 만났다. 그 사람 덕에 집을 구한 나는 입학시험 준비를 했다. 이번에도 떨어질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역시 무난하게 오시모 아카데미 오페라과에 입학했다. 기라성 같은 대가들을 스승으로 모시는 행운이 내게 굴러들어온 것이다. 오시모에서 내가 살았던 집은 월세 3만원의 저택. 그러나 말이 저택이지 500년된 폐가였다. 난방시설은 고사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난로를 사고 거금 5만원을 들여 전기공사를 했다. 장롱도 없고 침대도 주워다 썼지만 없어서는 안될 것이 두가지 있었다. 피아노와 전축... 7만5천원짜리 전축을 구입하고 한달에 3만원을 내고 임대하는 방식으로 피아노를 들여놨다. 그리고 나중에 서울에서 온 손님이 카세트 라디오를 하나 줬다. 명색이 오페라의 나라에서 2년간 성악공부를 했던 내가 오페라라고는 세편 밖에 못봤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사실이다. 한달에 25만원으로 근근이 사는 내겐 오페라 구경이 먼나라 얘기였다. 대신 나는 전축과 카세트로 음악공부를 했다. 우선 디스크를 꾸준히 사모았다. 기라성 같은 테너와 소프라노의 음반을 구해다 틀어놓고 달달 외우다 시피 했다. 최대한 흉내를 내면서 발성을 연구했다. 카세트 라디오로는 녹음을 했다. 당시 라디오방송에서 "성악가의 초상" 이라는 프로를 방송했는데, 500원짜리 테이프를 사다가 한회도 빠지지 않고 녹음했다. 세계적인 성악가들의 육성, 인생관을 들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오시모 아카데미에서의 수업은 하루 4시간. 많은스승이 있었지만 마리아 칼라스의 뮤직코치로 유명했던 안토니오 토니니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때까지도 내 노래는 "소리자랑" 스타일이었다. 토니니는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심하면 40번씩 반복하게 했다. 한 한국인 유학생은 30번째에 피아노를 탕 치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나 역시 40번을 반복하노라면 돌기 일보직전이 되곤 했지만 꾹 참았다. 그러나 스승이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면 거침없이 항의하기도 했다. 멜라니 교수는 다혈질에 고집이 세다는 이유로 나를 "시칠라아노" 라고 불렀다. 한번은 마리아 칼라스 이전에 일세를 풍미했던 소프라노 마그다 올리베르가 특별레슨을 하러 오시모에 왔다. 그런데 내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눈을 감고 있는 폼이 졸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 제자가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위대한 성악가가 주무시면 어떡합니까?" 벌떡 눈을 뜬 올리베르는 "그저 눈을 감고 있었을뿐" 이라며 발끈했다. 기분이 나빠진 상태에서 올리베르와 나는 "사랑의 묘약" 과 "오텔로" 의 창법이 같니 다르니 하며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화가 난 올리베르가 방을 나가더니 학장에게 갔다. 학장은 "고집이 세서 그렇지 진실한 학생" 이라고 해명한 후 나를 불렀다. "올리베르 선생을 호텔까지 모셔다 드리게" 먼저 사과를 했더니 올리베르도 화가 풀린 것 같았다. 그리고 호텔로 내려가는 30분 동안 벨칸토 창법의 진수를 가르쳐주었다. 소리를 어떻게 전달할 것이며 숨 처리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짧은 순간의 이야기가 내 음악인생을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지금도 유학생활을 돌이켜보면 끔찍하다. 쌀 살 돈이 없어서 굶었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그시절 우리 부부가 그랬다. 오시모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나는 명지대 총장에게 편지를 썼다. 그와 나는 일면식도 없었다. 그저 아버지가 명지고 교사였다는 것과 내가 명지고를 나왔다는 것을 소개하고 감히 장학금을 부탁했다. 중학교 2학년때 음악선생님의 적극적인 권유로 음악과 인연을 맺으면서 기적적으로 "1년동안 매달 25만원씩 장학금을 보내주겠다." 는 답신을 받게 됐다. 그 25만원은 유학생활의 젖줄이었다. 월세에 피아노 임대료, 책구입비를 충당하고 나면 남는 돈은 7만원 정도. 그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은행이 파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말 속이 바짝바짝 탔다. 그럴 때는 이탈리아에서 만난 친구 페르난도를 찾아갔다. 오시모에서 월세방을 구해준 것이 바로 그였다. 국가경찰이던 그는 폐가 같던 우리집을 아무 대가없이 페인트칠해주기도 했다. 내가 안절부절 못하면그가 먼저 "너 돈 떨어졌니?" 하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면 10만리라씩 꿔주곤 했다. 곱게만 자란 아내가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쌀이 떨어졌다는 말을 하지 못해 윗층에 사는 이탈리아 할머니에게서 밀가루를 빌려다 수제비를 끓여주기도 했다. 나는 참 무심한 남편이었다. 속으로 "밥은 안하고 왜수제비를 끓여주나" 하고 불만스러워하기만 했다. 또자고 일어나면 아내의 눈이 퉁퉁 부어있었는데 나는 그 이유를 까맣게 몰랐다. 내가 코를 골며 잘 때 아내는 밤마다 베갯잇을 적시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참 육식을 좋아한다. 밥은 못먹어도 고기는 먹어야 했다. 궁리 끝에 아는 정육점에 가서 "오늘이 내 생일인데 친구들을 초대하려고 한다" 며 외상을 부탁했다. 그 다음에는 마누라 생일, 그 다음엔 한국에서 온 손님... 끊임없이 핑계를 대가면 외상거래를 하고 조금씩 갚아나가곤 했다. 밥은 못먹어도 해야할 일이 또 있었다. 콩쿠르에 출전하는 것이었다. 오시모에 입학한 다음해인 1984년 9월 나는 북부도시 만토바로 떠났다. "리골레토" 로 유명한 그곳에서 콩쿠르가 열렸기 때문이다. 결혼예물시계인 오메가를 시계방에 맡기고 얻은 20만리라가 여비였다. 식비를 아끼려고 여행용 버너에 라면과 김치까지 싸가지고 갔다. 호텔의 청소아줌마가 "이상한 냄새가 난다" 며 구박하는 바람에 창가에 서서 얼굴을 밖으로 내밀고 라면을 먹었다. 그렇게 출전한 만토바 콩쿠르에서 나는 2등을 했다. 1985년 5월에는 부셰토에서 열린 베르디 콩크르에 참가했다. 한국인 사상 최초로 결승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마지막 결선이 있기 전날 나는 호텔 주인과 말다툼을 벌였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내게 선불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파출소에까지 끌려가서 하룻밤을 보내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본상 수상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콩쿠르가 끝난 후 결선진출자들은 이탈리아 도시를 돌며 순회공연을 해야했다. 출연료도 없고 심지어 밥값까지 연주자에게 내게 했다. 상금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부당한 처사였다. 나는 주최측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공연 도중 그냥 돌아와버렸다. 집에 있는데 부셰토시 담당관에게 연락이 왔다. "앞으로 너는 이탈리아에서 노래를 못하게 될 것" 이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노래 못해도 좋다. 밥까지 내돈으로 사면서 너희 나라에서 노래부르고 싶은 마음 없다" 며 큰소리 쳤다. 학교 공연에서 내게 "그대의 찬손" 을 부르라고 했을때도 나는 100만 리라를 달라고 했다. 학장은 나를 볼때마다 "Un millione" 라고 놀렸다. 그런 일들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진짜 "직업가수" 로 소문이 났다. 마그다 올리베로로 해서 벨칸토창법을 깨우치게 된 이야기를 앞에서 했다. 그 외에도 내게는 두차례의 음악적 개안의 순간이 있었다. 콩쿠르 때문에 밀라노에 갔다가 페라로라는 원로 테너에게 잠깐동안 고음 내는 방법을 배웠다. 10년간 성악을 하면서도 테너를 사사한 적이 한번도 없었던 나는 비로소 내게 맞는 스승을 만난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높은 도에서 여전히 불안정했다. 그러나 그날 1시간의 레슨을 통해 나는 고음의 벽을 완전하게 뚫었다. 감격스럽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고음을 정복할 수 있다니... 또 하나의 사건은 파바레토라는 가곡 코치를 만난 것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가곡의 대부 격인 사람인데 오시모에 2주간 특별강의를 왔다. 3년간 중풍을 앓고 있어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고 산타 체칠리아에서 보조 피아니스트를 데리고 왔다. 내가 이탈리아 가곡을 부르자 그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럴수가" 보조 피아니스트에게 일어나라고 하더니 자신이 직접 피아노 반주를 했다. 그가 말하기를 페르루치오 탈리아비니 이후 끊겼던 이탈리아 가곡의 발성법을 내가 훌륭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성악가들이 도달하지 못한 그 창법을 어떻게 한국의 성악가가 해냈느냐고 감탄 반, 의아함 반으로 물었다. "베니아미노 질리에게 배웠습니다." 베니아미노 질리는 카루소와 더불어 벨칸도 창법의 대가였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사망한 사람이었다. "질리가 언제 사람인데 자네가 그에게 배웠다는 건가?" "그의 디스크를 들으면서 연습했습니다." 나는 질리의 디스크 36장을 가지고 있었다. 매일 디스크를 틀어놓고 흉내를 냈다. 진성대와 가성대의 중간부분을 사용하는 것인데 흉내를 내면서도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런테 파바레토가 확인을 시켜준 셈이었다. 파바레토는 "Peccato !"(그럴수가 !)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Va Busseto !"(부세토에 가시오!) 했다. 그래서 내가 베르디 콩쿠르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루치아노 콩쿠르에 참가했을 때 파바로티와 논쟁을 벌였던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나의 스승 안토니오 토니니, 파바로티 등이 심사위원이었다. 나는 2차에서 떨어졌다. 그냥 돌아가려는데 파바로티가 날 불러세웠다. 당시 내가 부른 곡이 "공주는 잠 못 이루고" 였는데 마지막에 "Vincero ∼ Vince ∼ "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는 내게 그 부분에서 악보상의 쉼표보다 너무 오래 쉬었다고 지적했다. 그의 말이 맞기는 했다. 그러나 "ce" 부분이 아주 고음이라 그 전에 충분한 숨의 양이 필요했다. 다른 성악가들도 모두 그 부분에서 악보를 지키지 않고 충분한 숨을 들이킨다. 나는 "당신은 그 노래를 부를 때 악보를 지키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는가" 라고 대들었다. 파바레로티는 "그래도 학생이니 악보대로 부르라"고 했고 우리 사이에 한참 언쟁이 오갔다. 내가 나간 후 토니니는 파바로티에게 "내 제자인데 주장이 굉장히 강한 학생이지만 노래는 잘한다"고 얘기했다. 나중에 토니니에게 들은 얘기로는 파바로티도 "목소리가 굉장히 고급 스럽다" 고 말했다고 한다. 그날 파바로티에게 대들기는 했지만 나는 지금도 파바로티만한 테너가 없다고 생각한다. 플라시도 도밍고나 호세 카레라스라면 맞대결해 이길 자신이 있다. 그러나 파바로티만큼은 자신이 없음을 고백한다. 졸업을 앞두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탈리아에 남을 것인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러나 이탈리아든 한국이든 돈이 있어야 노래를 할 수 있었다. 우선 일자리를 알아보기로 했다. 베네치아에서 관광가이드라도 하면서 스칼라에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오메가시계를 맡겨 20만리라를 마련하고 베네치아로 향했다. 이른바 "물만 먹고 왔지요" 사건... 지금 생각해도 우리 부부는 참 순진했다. 관광사무소에 불쑥 들어가 일자리가 있냐고 물어봤고 나중엔 안되니까 길가는 사람까지 붙잡고 늘어졌다. 아무 소득도 없이 하루가 지나고 말았다. 식사는 역앞에 앉아 바게트 빵에 김치를 넣어 우적우적 씹어먹고 생수 한 통 마시는 걸로 때웠다. 그날 샤워장도 없는 허름한 여인숙에서 밤을 지새며 부둥켜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래, 돌아가자. 더 이상은 나도 못견디겠다" 당시 아내는 오시모 아카데미 7학년생으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었다. 8학년이 마지막 과정인데 그조차 중도에 포기했다. 보증금에 가재도구를 팔고 여기저기 빚을 내니 겨우 비행기표 살 돈이 남았다. 1985년 11월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거지신세였다.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딱 270원. 마침 장인이 친구 차를 빌려오지 않았으면 집까지 걸어가야 할 판이었다. 우선은 살집 마련하는 것이 막막했다. 그렇다고 형제나 처가의 도움을 받기는 싫었다. 결국 몇 친구와 장모님에게 돈을 빌려 1백15만원 정도의 돈을 마련했다. 지금은 철거된 마포아파트. 연탄을 지게로 지고 날라야 하는 보증금 1백만원에 월세 15만원의 집이 우리 부부의 보금자리였다. 커튼은 신문지로 했고, 세탁기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도 꼭 필요한 것이 있었다. 피아노를 할부로 마련했다. 할부금을 못내 몇 달 후 다시 빼앗기긴 했지만 ... 3월이 되면서 연세대 강사로 채용됐다. 강사로 일하고 받은 돈은 한달에 12만원. 월세도 안됐다. 돌파구는 단 하나. 레슨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레슨도 여의치 않았다. 고 최시원교수와 박종윤교수가 보내준 학생 두명의 레슨비로 생활을 겨우 해결했다. 학교 강의가 있는 날이면 아내는 호주머니에 토큰 2개를 넣어줬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 돌아오니 아내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달걀을 사다 50원이 부족했는데 가게 주인이 돈을 받으려고 집까지 따라 왔어요. 그런데 집에 돈이 한푼도 없잖아요." 그 뒤 지금까지도 아내는 집안 여기저기에 100원짜리 동전을 쌓아놓는다. 동전을 볼 때마다 나는 아내에게 미안해진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안풀리나" 유학을 돌아와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성악과에서는 교수가 학생을 지정해서 강사에게 배분한다. 그런데 나는 기껏해야 두명, 어떨 때는 한명만 달랑 배당받았다. 몇몇 교수에게 미운털이 박혀 버린 것이다. 방송이나 공연에서도 나를 불러주지 않았다. 콩쿠르 입상 경력도 화려하고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실력이었는데 그랬다. 1986년 11월에야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당시 KBS의 "FM콘서트" 를 만들던 박경규 PD를 만난 자리에서였다. 나와 한참 얘기를 하던 그는 "내 생각이 맞군요. 역시 사람은 만나보고 판단해야 돼요" 라고 말했다. 무슨 얘긴가 하고 물었더니 나에 대한 온갖 나쁜 소문을 죽 얘기해주었다. 알고보니 어처구니없는 오해가 있었다. 서울대 출신의 한 선배 성악가가 밀라노에 가서 오페라 카르멘을 보다가 한국 유학생을 만났다. 유학생이 너무나 버릇없게 굴어 화가 난 그는 서울에 돌아와 그 유학생을 욕하기 시작했다. "거 있잖아. 이름은 모르겠고 연대 나온 뚱뚱한 테너 말이야. 안하무인이더구먼" 그의 얘기에 사람들은 "아, 임웅균이 말이군요. 걔가 원래 그래요" 하고 단정해버렸다. 사실 뚱뚱한 연대 테너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오페라 "카르멘" 을 본 적도 없고 보러갈 돈도 없어쩔쩔매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박경규 PD의 "FM콘서트" 에 참여하게 됐다. 6인의 신인성악가가 모이는 음악회였는데 내 노래를 들은 라디오본부장이 "아니, 저렇게 좋은 테너가 있었어?" 라며 방송에 자주 출연시키라고 지시 했다. 1987년부터는 "KBS콘서트홀" 이라는 프로에 단골로 출연했다. "오묘한 조화", "금지된 노래", "황태자의 첫사랑" ... 출연 때마다 관객의 반응은 뜨거웠다. 지방 연주회 주문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오페라 "아이다", "리골레토", "포스카리가의 비극" 같은 오페라에도 활발하게 참가했다. 한달이면 3분의 2는 공연 스케줄이 짜여 있을 정도로 정신없이 돌아갔다. 그러나 수많은 공연 중에서도 나를 스타로 만들어준 것은 바로 "열린 음악회" 다. 1993년 10월 첫 출연한 이후 "열린 음악회" 는 나를 키워줬고 나는 "열린 음악회" 가 성공하는데 도움을 줬다. 첫 출연에서 내가 부른 노래는 "시골아가씨", "Love is many splendid things". LA "열린 음악회" 에서는 "두만강" 과 "타향살이" 를 편곡해 불렀다. 나는 이런 노래들을 "전통가요" 가 아닌 "고전가요" 라고 부른다. 클래식과 대중가요라는 경계를 넘어 이미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한 노래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대에서 자랑스럽게 부를수 있었다. 방송출연을 많이 했지만, 방송과 충돌하는 일도 많았다. 한번은 "가을맞이 가곡의 밤" 에 출연해달라는 섭외가 왔는데 놀랍게도 내게 칸소네와 오페라 아리아를 불러달라고 했다. "아니, 안그래도 우리 가곡의 맥이 자꾸 끊겨 걱정인데 가곡의 밤에서까지 아리아를 부르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결국 출연을 거부해버렸다. 그로인해 한동안 방송과 담을 쌓고 지냈지만 나는 내가 옳았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방송국의 사과를 받아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과장을 하면서 나는 111년 성악과 역사상 처음 으로 가곡을 필수과목으로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했지만 나는 우리 가곡과 가요를 사랑한다. 어쩌다 부부싸움을 하고 집을 뛰쳐나갈 때가 있다. 큰소리를 치고 문을 나서지만 30분을 넘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디 갈 때가 있어야지... 언제부터인가 나는 볼일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오는 가정적인 사람이 됐다. 공연이나 특별한 모임을 제외하고는 저녁약속을 만들지 않는다. 2차, 3차하며 옮겨다니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지방공연을 가도 마찬가지다. 새벽에라도 꼭 집으로 돌아온다. 마치 연어가 회귀하듯 정확하다. 그래서 내가 즐겨부르는 노래가 있다.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비숍의 "즐거운 우리집" 이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아내와 두 딸, 편안한 집안 공기, 속옷 바람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로움 ... 내가 이렇게 가정적으로 사는 또 다른 이유는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성악가 중에서도 테너는 몸이 뜨거운 사람이다. 몸안에 열정이 가득하고 욕망도 많다. 유명한 테너들의 여성편력을 봐도 알 수 있다. 만약 본성대로 행동했다면 나 또한 많은 죄를 지었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나는 마음으로 죄를 지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아이가 아프거나 하다못해 교통위반딱지라도 떼이게 된다. 지난해 6월부터 2개월 동안 미국 10개 도시를 순회하며 찬송가 부르는 법을 강의했다. 아내는 반주자, 두 딸은 보조중창단이었다. 강연에서 한풀이식 노래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음악은 주로 한을 풀어내고 있다. 본인은 속이 시원할지 모르지만 그 한맺힌 노래를 듣는 옆사람은 괴롭다.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가슴 속에 묻어두고서 기뻐하고 찬양하는 마음, 노래를 할 때는 그런 희생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동안 몇차례 토크쇼에 출연하면서 나는 우리 대중음악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김건모 등이 도마에 올랐다. 사실 우리 대중가수의 가창실력이나 춤솜씨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김건모의 노래실력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으며, 쿨이나 터보도 신세대 댄수가수지만 노래를 잘한다. 박진영의 춤은 마이클 잭슨과 대결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가사다. 애인이 친구와 바람을 피우고 아이들은 가출하며 기분 나쁘니 다 때려 부수자고 한다. 영어는 또 왜 그렇게 많이 사용하는지. 대중가요계도 그렇지만 성악계도 반성해야 한다. 쓸데없는 권위의식으로 대중과 멀어져가고 있다. 지난해 서울대 음대의 "열린 음악회" 거부사건을 보면서 착잡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르디, 푸치니, 스트라우스도 그 시대에는 궁정악사 이거나 대중적 지지를 받던 음악가였다. 왜 그렇게 닫힌 마음으로 사는 걸까. TV나 공연을 통해 많이 봤겠지만 나는 동요, 민요, 팝송에서 오페라, 가요까지 안부르는 노래가 없다. 그래도 내게 시비를 거는 성악가는 보지 못했다. 높은 곳에 올라갈 때마다 우리 부부가 꼭 하던 말이있었다. ' "저렇게 많은 집 가운데 왜 우리 이름으로 된집은 없을까" 1995년까지도 나는 월세집에 살고 있었다. 물론 예전에 비하면 먹고 살기가 나아졌지만 어쨌든 집은 없었다. 그러다 몇 년 동안 모아놓은 돈과 대출금 1억원을 합쳐 드디어 아파트를 산 것이 지난 해. 결혼 14년만에 장만한 집이다. 집 구입자금은 순수하게 공연을 통해 벌어들였다. 몇년 전부터 나는 공연 때마다 한국 최고 수준의 개런티를 요구하고 있다. 공연은 거의 공짜에 가깝게 출연하고 대신 레슨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풍토가 싫다. 그래서 레슨은 일절 하지 않고 내 노래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대신 어린이와 관계된 일이라면 돈은 상관없이 발벗고 나선다. 옛날엔 "누가누가 잘하나" 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고 지금도 어린이 합창단의 공연에 기쁘게 참여하곤 한다. 어린이를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내가 두 딸의 아버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딸딸이 아빠" 가 되면서 나는 철저한 폐미니스트로 변했다. 아이들에게 여자도 무엇이든 최고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3학년인 세희는 여자대통령이 꿈이란다. 1학년 세은이는 그림을 제법 잘 그리는데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그림공부에 물두해 피카소처럼 될 것" 이라고 장담한다. 두 딸과 아내는 내 음악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다. 아이들은 국내공연이든 해외공연이든 꼭 따라와 내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지켜봐준다. 아내는 아예 뮤직코치 역할을 맡고 있다. 공연 때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선곡을 해준다. LA "열린 음악회" 때 "타향살이" 를 부르게 한 것도, 광주에서 곧 있을 "5.18기념음악회" 에 "친구여" 나 "파란마음 하얀마음" 을 선곡해준 사람도 아내다. 연주를 마치고 나면 나는 먼저 아내의 눈치를 살핀다. 분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환하게 웃으면 내 노래가 아내의 마음에 들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아내의 얼굴이 굳어져 있으면 그날 내 노래는 신통치 않은 것이다. 홍콩공연 때는 아예 나와 얘기도 하지 않으려 했다. 아내는 "방송연주를 너무 많이 해 창법이 변했다." 고 나무랐고 나는 "잘했는데 왜 그러느냐" 고 반박했다. 아내는 화가 나 계단을 뛰어내려가다 굴러떨어지기까지 했다. 재작년 우리 부부는 둘이서 오붓하게 이탈리아로 "한풀이" 여행을 다녀 왔다. 아내의 소원은 단골이던 슈퍼마켓에서 식료품을 사 차에 싣는 것이었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좋은 차를 빌려서 아내의 소원을 풀어줬다. "물만 먹고 왔던" 베네치아에서는 먹고 싶은 음식을 실컷 먹었다. 그 여행에서 우리 부부는 참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가난했던 유학생활이 우리에게 큰 재산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가난해진 뒤에야 나는 음악에 대해 절실해졌고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가난한 자여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성경구절이 하나 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이사야 43장 21절)". 때가 되면 나는 교수직도, 직업성악가로서의 길도 버릴 작정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꿈은 찬양사로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다. [옮긴 글] |
첫댓글 제가 무지무지 하게 좋아하는 성악가입니다.
이 글 읽으면서 신념과 의지를 잃지않는 한 못 이룰 일이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여태 까지 제가 믿어 온 대로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해 보았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도 임웅균 님 처럼 하느님을 또 다른 방법으로
찬미할 수 있게 계획하고 계시리라고 굳게 굳게 믿습니다.아멘
아~~ 그저 유명한 성악가로만 알고 있었지 이렇게 어려움을 이기고 성공한 성악가인지는 몰랐어요...
순간 순간 만나는 사람에 따라 인생이 바뀌고 항상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하고 ..신념과 의지만 있으면 어떠힌 어려움도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주시는 하느님! 끝까지 저를 지켜주시기를 굳게 밉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