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금북정맥 09차(갈마고개~나본들고개)
산 행 일 : 2014. 12. 13.(토)
산행코스 : 갈마고개~162봉~와계교(신성역)~꽃조개고개~남산~수리고개~하고개~백월산~까치고개 ~홍등산~육괴정고개~덕숭산~나본들고개 (산행거리 19.5km)
산행참가 : 20명.
<산행코스>
지난 구간 산행에서 이곳 갈마고개에 도착하기까지는 비를 맞으며 산행을 했었는데, 어느새 세월은 흘러 흘러 하얀 눈이 내리는 계절이 되었다. 산행지가 충청이라서 겨우내 경기나 강원보다는 좀 더 따뜻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하다. 양재를 출발한 버스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에는 제빠른 제설작업과 많은 차량통행으로 별다른 위험을 느끼지 못했으나, 홍성IC를 나와 지방도로를 달리게 되면서부터 가끔씩 미끄러지는 느낌이 확연히 전해진다. '그래도 우리 기사님이 베테랑이니 무사 할겨야'를 되뇌며 마음을 조리는 사이에, 예정되었던 시간쯤에 산행 출발지에 도착하였고, 눈 내리는 바깥세상은 나 몰라라하고 따뜻한 버스에서 잠깐의 단잠을 이어가다가, 실내등이 켜지면서 눈을 뜨고는 산행 준비를 시작한다.
04:50 갈마고개 아래 농산물 가공 공장 마당에서 산행준 비를 마치고, 이곳은 평지라서 스패츠와 아이젠이 별무 소용이 없을 듯 하지만, 산행을 시작하면 달라질 것이므로 눈길 산행에 대비한 준비를 갖춘다. 05:00 갈마고개에서 앞에 보이는 눈 덮힌 포장도로를 따라 금북길 잇기를 시작한다. <갈마고개> 홍성군 광천읍과 홍동면을 이어주는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다. 갈마고개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 있어 갈마재라 불렸다. 또한 갈매재 또는 말고개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이곳에 역정(驛丁)이 있을 때 말이 목을 축이던 연못이 있어서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갈마고개에서 홍성군 홍동면과 광천읍을 경계하는 포장도로를 따라 축산농가와 밭이 연이어 있고, 잠시 후 도로는 산으로 접어들어 임도와 연결되고, 눈 덮인 수레길을 잠시 따르면 묘지가 나오며 이내 갈마차도고개에 도착한다. 05:11 갈마차도고개에 도착하여, 들머리를 찾아 좌측으로 조금 이동하다가 우측 언덕으로 오른다.
이곳이 고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몇몇 산행기에는 이곳을 갈마차도고개로 표기하고 있다. <갈마차도고개> 지형도에 따르면 이 도로는 기타 도로에 해당되며, 96번 지방도와 609번 지방도 그리고 21번 국도와 이어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광천읍 월림리와 북쪽으로는 원천리를 이어주는 읍내도로에 해당한다. 05:15 들머리를 찾아 잠시 동안 헤매다가 묘지 좌측 가장자리를 따라 오르고, 온갖 잡목과 지저분한 것들을 덮고 있는 흰 눈을 밟으며 금북길을 이어간다. 05:34 162봉쯤을 지나고, 05:41 좌측으로 21번 국도와 홍성구항농공단지 불빛이 보이고, 그 뒤편으로는 잠시 후 올라야 할 남산쯤으로 보이는 산의 윤곽도 드러난다. 05:48 그러지 않아도 희미하던 등로가 눈에 덮여 더더욱 찾기 어려워지고, 05:55 수풀이 우거진 내림길에서는 방향만 보고 진행하다 보니, 05:59 어느새 우전방으로 신성역쯤으로 짐작되는 불빛이 밝게 빛나고 있고, 06:01 신성역 육교(와계교)로 통하는 도로에 내려선다. 06:02 와계교를 통하여 장항선 철로를 건넌다.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 예전에는 신성역 부근에서 철길을 건너야 했었으나, 현재는 신성역은 북쪽으로 이전하여 있고 그 자리에 와계교를 새로 설치하여 철길을 무단횡단할 필요 없이 와계교를 통하여 진행할 수 있게 되어, 전보다 한결 수월하게 되었다. 이곳부터는 우측으로 지금까지 같이해 온 홍동면과 이별을 하고 홍성읍으로 접어든다.
06:23 학계리 마을을 통과하여 다시 산길로 진입하고, 잠시 산길을 따라 오르면 135봉쯤을 지난다.
06:28 좌측 아래로 무지개아파트 단지가 내려다 보이고, 이곳 홍성군 구항면 마온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요동(堯洞), 온동(溫洞), 마근동(麻根洞)을 병합하여, 마근(麻根)과 온동(溫洞)의 이름을 따서 마온리(麻溫里)라 하여 홍성군(洪城郡) 구항면(龜項面)에 편입되었다.
06:31 잠시 후 꽃조개고개(마온교차로) 절개지 위에 서게 된다. <꽃조개고개(마온교차로)> 충청남도 홍성군의 홍성읍 학계리(鶴溪里)와 구항면 마온리(麻溫里)를 연결하는 고개이다. 최근 홍성남부순환도로(위 육교)가 개설되면서, 21번 국도(아래)가 교차하는 교차로가 되었다. 꽃조개란 특이한 지명은 풍수설에 의하면 홍성 남방에 풍혈라대(風吹羅帶, 비단허리띠가 바람에 나부끼는 모양임)의 형국인 명당이 있고, 이 고개가 옷고름을 맨 모양이라 하여 '고쪼개'라 칭한 바, 발음의 변화로 꽃조개가 되었다는 국립지리정보원의 설명이다. 그러나 홍성군 홈페이지에는, 옛날에 진달래가 많이 피어 꽃동산을 이루어서 봄 꽃구경을 즐기던 고개라 하여 그리 불리우게 되었다고도 한다.
06:35 절개지를 조심스럽게 내려 서고, 06:37 마온교차로라고 불리는 꽃조개고개 사거리를 대각선 방향으로 건너, 06:38 계단을 올라서면, 06:41 만해 한용운 선사의 동상이 우뚝 서 있는 공원으로 들어서게 되고, 동상 아래에는 만해 선사가 지은 "님의 침묵"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 1879~1944)> 만해 한용운은 고종 16년(1879) 8월 29일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이라는 곳에서, 청주한씨 서원군 한명보의 후손인 부친 한응준과, 모친 온양방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릴 때 이름은 유천(裕天), 본명은 정옥(貞玉), 불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卍海, 혹은 萬海)라 한다. 6세부터 성곡리의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찰령을 공포하여 우리나라의 불교를 일본 불교에 예속시키고, 사찰에 대한 권리를 장악하려 하자 반대운동을 벌였으며,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여 불교계의 개혁을 주도하였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을 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고, 독립선언을 낭독한 후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 수감 중, 독립의 서(獨立의 書)를 써 명문을 남겼다. 1926년 88편으로 된 '님의침묵'이란 시집을 발간하였고, 지조가 곧고 절개가 있어 일제와 추호의 타협도 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몸 바치다가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별세하였다. 묘지는 서울 중랑구 망우동 정상에 부인 유씨와 같이 쌍봉으로 안장되었다. 홍성군은 결성면 성곡리 한용운 생가지에 생가 복원에 이어 사당을 건립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잔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떠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처럼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기에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것은 아니니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희망의 정수박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것을 염려하는 것과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에 만해의 동상 앞에서! 07:03 이곳 홍성군 남산에는 ‘재너머사래긴밭 가는 숲길’이라는 긴 이름의 둘레길이 만들어져 있다. 남산 정상 갈림길 삼거리의 남서쪽 마온리 방향. 07:04 금북정맥 갈림길 삼거리가 나오며 정맥길은 좌측 보개산 방향으로 이어지지만, 그래도 홍성의 명산인 남산 구경은 하여야 할 것 같아 우측 남산정 방향으로 오른면, 07:05 남산 정상에는 홍성시내를 볼 수 있는 '남산정'이라는 팔각정이 세워져 있다. 07:06 남산정은 콘크리트로 만든 시설물이어서 그런지, 그닥 운치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남산의 팔각정에서 바라본 홍성읍내 조망. <애국자와 독립운동가 의인을 많이 배출한 고장, 홍성> 고려의 명장이자 명 재상인 최영(崔瑩, 1316~1388)은 홍성 홍북 출신이다. 고려말 왜구들이 창궐할 때 왜구들을 격파하였고, 10만의 홍건적이 침입하여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함락시키자, 이를 격퇴한 이가 최영 장군이다. 명나라가 철령위의 설치를 통고하여 철령 이북과 이서ㆍ이동을 요동에 예속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을 결심하고 팔도도통사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는 한편, 좌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사 이성계로 하여금 군사 3만 8,800여 명으로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성계가 조민수를 달래어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매죽헌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絶臣)으로 꼽힌다. 외가인 홍주(洪州) 노은골에서 출생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라고 묻는 소리가 3번 들려서 삼문(三問)이라 이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유성원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실패하여 능지처형을 당했고, 집안도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청산리 대첩’의 백야 김좌진 장군(金佐鎭, 1889~1930)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호방영민하고 용력이 뛰어나, 18세 때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양성과 신학문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겪은 후, 1917년 만주로 건너가 3·1운동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와 함께 서명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31세가 되던 해에 서백리아에 출전 중이던 일본의 기갑연대 3,000명을 화룡현 청산리로 유인하여 연대장 가납 이하 1,200명을 함몰시키고, 천수백명 을 전상자로 만든 7일간의 전투가 바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금자탑을 이룬 1920년 10월 21일에 있었던 청산리 전투이다. 1925년 김혁, 최호, 나중소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929년 김종진, 이을규 등과 함께 한국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수석에 취임하여 재미동포의 교육과 민생에 주력하는 한편, 중국의 항일 세력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하던 중 1930년 1월 24일(음 12월 25일) 북만주 중동선 산사역 부근의 정미소 앞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박상실의 흉탄에 순절하였다. 우리 '백두산우회'의 회원 중에 홍갑순님도 홍성 출신의 ~~! 남산정으로 오르는 백두들. 07:08 남산정에서 홍성의 참모습을 설명하시는 회장님. <남산(403m)>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동쪽 마온리의 뒷산에 해당하는 산으로, 『1872년 지방지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당시 홍주읍의 남쪽에 위치하며 이 산을 경계로 홍주읍과 현재의 장곡면 전신에 해당하는 오사면이 나뉘었다. 이 산이 서쪽으로 뻗어서 일월산(日月山)이 되고, 남쪽으로는 구항면 보개산(寶蓋山)이 된다. 『구한말지형도』, 『조선지형도』 등에서도 남산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산은 봉화산이고, 남산은 5번째로 많다고 한다. 그런데 면의 동쪽 마온리 마을의 뒷산을 남산이라고 한 이유는 풍수지리적 사고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홍성읍의 남쪽에 위치하여 남산이라 부르는 듯하며, 이곳 팔각정에서는 홍성읍을 비롯해 가야 할 백월산과 그 앞의 용봉산이 한눈에 들어온다는데, 아직은 신새벽이고 간간이 눈발이 날리고 있어서 먼진 조망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무척 아쉽다. 북동쪽 홍성읍 방향.
남산정을 내려와, 벤치 위에 놓인 두툼한 솜이불 위에 포즈를 취하고 앉은 박두규님. 07:12 다시 삼거리 갈림길로 돌아나와, 우측 보개산 방향으로 금북길을 이어간다. 좌측이 꽃조개고개에서 왔던 길이고, 우측이 가야 할 금북정맥길이다. 07:15 조금 더 내렸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지만 흩뿌리던 눈이 그쳤다. 그래도 이 정도면 뭐 눈산행이었다고 말해도 될만하다. 07:17 좌측으로 꽃조개고개에서 이곳 남부터널로 이어지는 29번 국도와, 지나온 금북길이 조망된다. 07:19 세상을 덮어버린 흰 눈에 백두들의 발자국만이 이어진다. 길 잃을 염려는 없겠다. 터널 위 안부를 지나자 금북길은 우측으로 휘어지며 조그마한 봉우리 위로 올라가고, 수리고개 방향으로 계속 진행한다. 07:25 좌측으로 홍성남부우회도로가 내려다 보인다. 07:27 수리고개가 내려다 보인다.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주는 수리고개 전경! <수리고개> 홍성읍 동리(東里)에서 구항면(龜項面) 마온리 수리너머 마을로 가는 고개를 수리고개라고 부른다. 또한 서낭댕이고개라고도 부르는데, 고개에 서낭당이 있었다 해서 서낭당고개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지금은 서낭당도 없고 사람의 왕래도 뜸하다. 고개 우측으로 신설도로인 홍성남부우회도로가 건설되어 차동차들이 눈길임에도 고속도로 수준으로 질주하는 모습이 보인다. 07:28 수리고개 이정표. 금북길은 직진의 보개산 방향이다. 수리고개 전경. 07:33 맞고개가 내려다 보이고, 맞고개로 향하는 백두들이 그림속 등장인물들로 보인다. 07:37 맞고개 전경. <맞고개> 홍성읍에서 구항면 육골 마을로 내려가는 한적한 시골길로, 시멘트 포장도로다. 맞고개 이정표. 자세히 봐야 읽을 수 있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재너머 사래 긴 밭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가봐야겠다. 07:41 돌아본 남산 방향. 흐린 날이라 일출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침 안개를 뚫고 붉은 해가 어슴프레 보인다. 07:46 보개산 갈림길. 좌측은 보개산 가는 길이고, 우측 옥암리 쪽이 금북정맥길이다.
이정표에 우측 옥암리 쪽으로 금북정맥이라 표시되어 있건만, 선두들은 보개산 방향으로 알바를 했다. 07:53 금북길은 완만한 능선길로 이어지고, 07:56 돌아본 남산 위로 아침햇살이 붉게 비춘다. 07:58 송전탑을 지나며 금북길은 좌측으로 휘어지더니, 08:00 29번 국도가 지나는 하고개 절개지 위에 서게 된다. 절개지 상단에서 내려다본 29번 국도. 절개지 사면을 따라 좌측(남쪽)으로 내려서는 백두들. <하고개>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옥암리와, 구항면 황곡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29번 국도가 지난다. 황우고개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홍주목사(洪州牧使)가 홍주 읍내를 바라보기 위해 자주 올랐던 고개이며, 홍주(지금 홍성의 옛지명)를 지나 서산으로 가는 민초들이 쉬면서 말과 소에게 풀을 먹이고 한숨을 돌리는 고개라 하여 하고개, 하우고개 또는 황우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고개를 지나는 29번 국도를 넘기 위해 황곡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백두들. 08:04 임도를 따라 절개지를 내려서자 하얀 눈을 뒤집어쓴 해태상이 반겨주고, 도로가 무단 횡단하기에는 너무 넓고 중앙분리대도 있어서 우회하기로 한다. 08:07 남쪽으로 조금 진행하여 황곡마을 굴다리를 통하여 29번 국도를 통과한다. 황곡교차로 굴다리를 지나는 백두들. 08:14 황곡교차로로 우회하여 구도로를 따라 하고개 고갯마루 방향으로 올라서니, 도로 좌측에 '홍주병오의병 주둔 유지비'가 있고, 도로 앞쪽에는 '홍성민속테마박물관'이라는 상호의 음식점이 보인다. 녹색 화살표는 도로를 무단횡단하여 오는 길이고, 우리는 청색의 화살표를 따라왔다. "홍주병오의병 주둔 유지비" 안내판.(홍주 병오 의병이라고 읽어야 된다) <홍주병오의병주둔지 '하우령고개'> 홍주의병은 1906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다음 해에 결성되었으며, 당시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병의 봉화가 홍주의 하우고개에서 맨 처음 올라, 의병들이 홍산, 서천, 남포, 보령을 거쳐 광천에 와서 대부대가 되었으며, 이 주력부대가 광천에서 구항 마을과 신당곡을 거쳐 하우고개에 당도하였고, 천북, 결성, 서부에서 궐기한 의병들도 서산 도로를 따라 하우고개에 집결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홍주성 탈환의 진군나팔이 울리어 1906년의 병오의병 거사가 발화되었다고 한다. 홍주병오의병주둔 유지비.
비석 옆에 놓여있는 마루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걷는 동안은 그리 추운 줄 몰랐는데, 막상 식사를 하려니 입이 얼어붙을 정도다. 08:22 식사 중에 보개산으로 알바 갔던 분들도 도착한다. 08:26 아침 식당으로는 최고 수준인데, 난방이 안되어서 온도가 너무 낮다. 난방비를 절약고 에너지절약으로 환경보호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인지..ㅉㅉ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따뜻한 차 한잔을 나눠 보지만, 그것도 얼은 입을 녹이기에는 역부족! 08:43 추울 때는 그냥 걷는 게 최고라며, 서둘러 금북길 잇기에 나선다. 08:46 표지기 걸라고 메어 놓은 줄이 아닌데..ㅉㅉ 이곳 표지목에는 '민속촌'이란 특이한 이름이 적혀있는데, '민속촌'은 하고개 고갯마루에 있는 음식점(홍성민속테마박물관) 이름이다. 08:49 136.2봉 도착. 08:55 등로에는 '내포문화숲길 내포역사인물길'이라는 이정목이 군데군데 보인다. 09:04 이정목 앞에서 회장님이 이 지방의 역사 속 인물들에 관해 설명해 준다. 09:07 이제 홍성 백월산이 시야에 들어오며, 백월산으로 이어진 눈 덮힌 능선길을 여유롭게 이어간다. 09:10 살포쟁이 고개를 지난다. 아무도 찾지 않을 한적한 시골길, 더욱이 눈까지 내려앉은 오솔길을 걷는 영광을 우리가 누린다. <살포쟁이고개>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와 구항면 황곡리를 넘나드는 고개로, 옛날에 이 고개에서 죄인이나 짐승들을 죽였던 곳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당산나무가 있고 허물어진 돌탑 흔적이 있다는데, 그 모든 것을 하얀 눈이 덮어 버렸다. 살포쟁이 고개 이정표. 09:25 살포쟁이 고개를 지나자 본격적인 백월산 오름길이 시작되려는지, 오름길 경사가 급해지며, 가끔씩 바위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09:28 지난밤 눈보라가 느린 수묵화의 제목은? 가파른 암릉길도 지난다. 돌아본 오서산 방향. 연무가 시야를 가리고 있어서 오서산 방향의 지나온 금북능선 가늠은 쉽지 않다. 09:32 구항면 갈림길을 만나 우틀하여 진행한다. 갈림길 이정표. 나뭇가지에 걸려 있어야 할 표지기들이 밧줄에 걸려 있다. 홍성지방의 특이한 풍습인지..ㅋㅋ 09:37 널찍한 쉼터를 지나며 백월산으로 오르는 임도를 만나고, 임도 옆 이정표가 백월산이 가까워졌음을 말해 준다. 09:38 잠시 후 따르던 임도를 두고 우측 숲으로 들어서면, 09:40 등로는 눈꽃 터널로 이어지더니, 09:44 이내 백월산 정상부에 오르고, 감시 카메라와 통신안테나가 설치되어 있는 백월산 정상에 도착한다. <내포문화의 중심 홍성> 백월산 정상에서는 내포(內浦) 문화의 중심 홍성(洪城)이 한눈에 들어온다는데, 눈구름이 온 천지를 가려버렸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여리쯤에 가야산이 있다.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큰 못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동쪽은 큰 들판이고 남쪽은 오서산에 가려져 있는데, 가야산에서 부터 이어져 온 맥으로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10개 고을을 내포라 한다."라고 언급되어있다. 가야산 앞뒤의 10고을은 홍주, 결성, 해미, 서산, 태안, 덕산, 예산 신창, 면천, 당진 등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는 내포지역을 홍주목(洪州牧, 지금의 홍성군)이 관할하던 충남 서천에서 경기도 평택까지의 20여 고을을 지칭하기도 했다. 이런 기록들에 의하면 내포지역은 충청도 지역 중에서 서해안을 끼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홍주와 결성을 합쳐서 홍성이 된 뒤, 내포지방에서 가장 큰 고을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나라 어패류의 최고 산란지로 꼽혀온 천수만을 서쪽에 거느리고 옹암포와 광천, 동산포 등의 작은 포구들이 결성으로 연결되어 풍부한 해산물이 올라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홍주는 호서의 가장 큰 고을이다. 그 땅이 기름지고 넓으며, 그 백성이 번성하고 많아서 난치의 고장으로 일컬어왔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홍성읍내 가운데에 있는 홍주성이 그것을 대변해 준다. 배산임수형인 홍주성은 홍동산~백월산~오서산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이 적의 침입을 막는 1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반타원형의 평지성(平地城)으로, 옛부터 내포지방 방어에 핵심 역할을 해 왔다. 잠시 전에 따랐던 임도도 백월산 옆으로 오르고 있다. 백월산 정상. <백월산(白月山 394.3m)> 홍성의 진산으로 홍성읍 월산리, 구항면 오봉리, 홍북면 중게리에 걸쳐있는 산이다. 정상에는 기암괴석에 ‘누어백월산기암벽상(樓於白月山奇岩璧上)’이라고 써 놓은 비가 있다. 백월산이란 이름은, '이조 말엽에 홍주 이방으로 있던 명필이며 문장가인 이종근의 시에 나오는 ‘백월산하(白月山下)라는 구절을 따서 백월산이라 한다’는데, 여암 선생의 산경표와 고산자 선생의 대동여지도에는 백월산도 일월산도 아닌 월산(月山)이고, 국립지리원의 고시지명에는 일월산으로 되어 있다. 엄청 추운 백월산 정상에서 조망을 기대하며 조금 기다려 보지만, 칼바람만 더해지고 주위의 조망은 나타날 생각을 않는다. 09:57 하는수 없이 서둘러 백월산 인증을 남기고, 나도 한장! 09:58 백월산을 뒤로한다.
강아지를 닮았다는 바위를 지난다. 지도에는 코끼리 바위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강아지가 맞을 듯하다! 09:59 품종이 '불독' 인가! 눈을 뒤집어쓴 강가지가 마치 살아 있는 듯하다. 산림환경의 단속 대상은 뭔지?
우측 산혜암 방향의 갈림길 표지판을 지나니, 주변에는 하얀 털모자를 눌러쓴 바위들이 뛰어놀고 있다. 강아지 바위를 지나오는 백두들. 10:00 산신각 안으로 들어선다. 이곳 백월산은 전국의 유명한 무당들이 성지순례하듯이 다녀간다는데, 그 연유는 이곳이 기도빨이 가장 잘 받으며 효험이 있고, 특히 강신 하나만큼은 확실한 곳이라고 한다. 산신각 경내에 있는 '홍주청난사중수비' <백월산 산신각> 산신각 경내에는 '홍주청난사중수비'가 있고, 산신각 안에는 백월산신과 '홍가신(洪可臣)'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홍가신은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동요되자 선조 30년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켜 홍주성으로 쳐들어 왔을 때, 홍주목사로 있던 홍가신이 난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청난공신(淸難功臣) 1등에 봉해진 인물이라고 한다. 산신각 전경. 난간 위 동자 눈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산신각을 뒤로한다. 10:02 산신각을 뒤로하자 이내 팔각정이 나온다. 이곳에서 금북길은 좌틀하여 팔각정 뒤로 이어지는데, 많은 정맥꾼들이 직진하여 알바를 한다는 곳이다. 팔각정 옆으로 돌아, 팔각정 뒤로 올라서면, 10:05 코뿔소 바위를 지나게 된다. 10:08 전면 덕숭산 방향으로 조망이 좋은 곳인데, 연무로 지척조차 분간키 어렵다. 이제부터는 홍성읍을 벗어나 홍북면과 구항면의 면계를 따라 걷게 된다. 백월산을 뒤로하고 급경사의 내림길을 조심조심 내려간다. 10:16 위험한 급경사 내림길을 내려서서 다시금 여유를 찾고, 돌아본 백월산 정상 방향. 10:23 이제 금북능선은 완만한 내림길로 이어지더니, 10:25 방갈로쯤으로 보이는 건물도 지나는데, 농가 마당의 강아지들이 흰 눈에 취해 이방인의 출현조차 무시한다. 10:28 까치고개 도착. <까치고개> 홍성군 구항면 갈오리와 홍성읍으로 통하는 홍북면 미력골 마을을 지나는 지방도가 있고, 고개 우측에 있는 '고개쉼터'식당 마당으로 내려서서 홍성군 폐기물처리장 앞으로 정맥길을 이어가게 된다. 까치고개 쉼터 식당 앞에 도착해 있는 백두들. 오늘 뒤풀이를 예약해 둔 곳이다.
고개쉼터 식당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얻어 마시며, 배낭에서 더 이상 필요치 않은 물건들을 꺼내어 마루 밑에 감춰두고, 10:32 도로를 건너 '홍성군 폐기물처리장' 방향으로 금북길을 이어간다. 돌아본 까치고개 전경. 10:34 까치고개 삼거리를 출발, 홍성환경사업소 정문 방향의 도로를 따르다가 좌측 등로로 접어든다. 홍성환경사업소 정문에서 좌측으로 울타리를 따라 금북길을 이어간다. 홍성환경사업소 울타리를 따라 이어지는 금북길. 10:45 완만한 구릉지 같은 능선이 이어지더니, 오름길이 조금씩 가팔라지고, 11:11 수리고개라 표시된 옛고개를 지나 오른다. 11:24 190봉 오름길에 돌아본 125봉 우측으로 낙상리 저수지가 내려다 보이고, 가야 할 홍동산 방향의 능선들도 흰 눈에 말없이 기다리고 있다. 11:27 백두들도 말없이 금북능선을 따라 오르고, 11:33 조그만 봉우리에 올라서면 가야 할 홍동산 방향이 가늠되며, 지나온 금북능선도 가늠된다. 11:45 벌목이 되어 시원한 조망이 있을 듯한 능선을 따르다 보니, 11:51 저만치로 홍동산 정상이 다가와 있다. 홍동산 정상 도착.
<홍동산(弘東山, 309m)> 홍성군 홍북면에 있는 홍동산은 "서쪽으로는 산이 첩첩으로 쌓여있고, 이 산에서부터 동편이 열려 있다"라는 의미라 한다. 차가운 홍동산 정상에서 사탕 하나씩을 나눠 먹으며 잠시 쉼을 한다.
12:00 어 근데 내 핸드폰? 어디에 흘렸는지도 모를 핸드폰을 찾겠다고 돌아서 가는 손총무님! 12:01 눈구덩이 어디에 있을 핸드폰을 찾아 떠나는 분을 바라보며, '나 같으면 그냥 버리고 간다'며 홍동산을 뒤로한다. 12:17 밋밋한 능선 내림길에서 갈림길을 만난다. 양쪽 길 모두에 표지기들이 걸려 있고, 나무 둥치에 '용봉산 악귀봉 가는길'이라 표시되어 있다. 우측이 용봉산 가는 길이고, 좌측 길이 육괴정으로 이어지는 금북길이다. <용봉산(龍鳳山 381m)> 마루금에서 1.5km가량 벗어나 있는 용봉산(龍鳳山, 381m)은 산이 크고 험하지는 않으나 산 전체가 기묘한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서 '남한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아름답다. 산 이름은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얹은듯한 형상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2:22 육괴정 고개를 향하는 백두들. 12:25 다시 갈림길을 만나는데, 우측에만 표지기가 열려 있다. 12:43 다시 묘지 방향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잡자, 자그마한 이정표가 있다. 12:44 위쪽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와도 여기에서 다시 합쳐지나 보다. 12:46 육괴정고개(수덕고개) 도착. 금북정맥길은 우측으로 이동하여 철조망을 넘으며 덕숭산 오름길을 시작해야 하나, 일반적인 등산로인 철망울타리 좌측 끝지점에 있는 통로로 이동하여 덕숭산 오름길을 시작한다. 좌측 육괴들이 지키고 있는 고갯마루로 이동하여, <육괴정(六槐亭, 132m) 고개>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고개로, 수덕사를 넘나들던 고개라고 하여 이 지역 사람들은 수덕고개라고 하며, 해미에서 예산을 잇는 40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다. '육괴정'이란 조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를 계기로 지차주의와 현상정치를 추구하던 신진사류들이 몰락하고, 이때 난을 피해 낙향한 남당 엄용순이 건립했다는 정자다. 육괴정이란 이름은 당대의 명현인 모재 김안국을 비롯 규정 강은, 계산 오경, 퇴유 임내신, 두문 성담령, 남당 엄용순 등 6명의 선비가 모여 시화와 학문을 강론하며 우의를 기리는 뜻으로 정자 아래에 못을 파서 연을 심고, 각자 한 그루씩 6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는데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연못은 매워지고 6그루의 느티나무 중에 3그루가 또한 고사하여 후손들이 다시 심어 지금도 그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고 한다. 옛날 내포지역에서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이곳을 거쳐야만 했는데 바로 이곳에 주막이 있었고, 사람들은 주막에서 쉬어가곤 했다. 지금의 식당과 여관 역할을 한 곳이다. 남쪽 수덕사 방향. 육괴정 고개를 건너는 백두들. 12:49 고개 건너편 철망 울타리가 끝나는 지점에 덕숭산 들머리가 있다. 철망 울타리를 돌아 덕숭산 오름길을 시작하는 백두들. 12:52 울타리 안에서 또 오래된 철조망 울타리를 넘어야 한다. 12:55 잠시 후 조그만 계류를 건너는데, 우리가 가고 있는 등로는 전월사를 거쳐 덕숭산으로 오르는 정규 등산로이고, 우측의 능선이 금북정맥 능선이다. 계류를 건너며 백두들은 정규 등산로를 따라 오르고, 나는 우측의 능선 위로 올라서 금북정맥 능선을 따라 덕숭산으로 오르기로 한다.
** 정규 등산로를 따라 오르는 백두들은. 암릉 위로 오르며 덕숭산 정상부를 조망하고, 전월사를 지나 덕숭산 정상으로 향했다. *** 육괴정고개에서 덕숭산 들머리로 들어서서, 계류를 건너며 우측 금북능선으로 올라친 나는, 13:02 천신만고 끝에 금북능선 좌측 사면의 묘지에 오르고, 13:09 또 한참을 트레버스 한 끝에 육괴정고개에서 올라오는 금북능선과 만난다.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뚜렷한 금북능선길에 들어서며 얼마나 기뻣는지!!! 금북능선 눈길은 아무도 지난 이가 없는 미답의 새길이다. 덕숭산 장송에 주렁주렁 열린 눈송이들을 홀로 감상하며, 미답의 눈길에 한 사람의 족적을 남긴다. 13:16 눈이 신발에 들러붙어서 족적이 지저분하다. 13:18 하얀 솜이불을 덥고 있는 묘지를 만나, 한사람의 족적만 살짝 찍어 놓고는, 13:30 오래 보면 닳을세라 살짝살짝 곁눈질로 눈꽃송이를 감상하며, 13:40 작은 전망바위에 올라 지나온 홍동산 방향을 조망한다. 수덕사 방향. 용봉산(좌)과 홍동산(우) 방향. 서쪽 연암산(441m) 방향으로, 건너편 능선에 자리한 전월사도 보인다. 13:47 전월사 방향으로 오르는 정규 등산로와 만나 우틀하여 덕숭산 정상을 향하려는데, 우찌 정규 등로를 따르던 백두들에게 딱 걸려 버렸다. '화장실 다녀온다고...ㅋㅋ' 13:52 잠시 후 커다란 바위 옆 전망대에 올라서고, 남쪽 수덕사 방향. 서쪽 연암산 방향. 갈림길에서 만난 백두들과 함께 덕숭산 정상으로 향한다. 13:54 눈꽃송이 달고 있는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는 돌탑들을 지나면, 13:57 뿌였던 하늘이 파란색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덕숭산 정상에 도착하여,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인 덕숭산 정상에서 배낭털이를 하며 쉼을 한다. <덕숭산(德崇山 495m)> 수덕산(修德山)이라고도 하며, 금북정맥 줄기로 예산읍에서 서쪽으로 약 20㎞ 떨어진 지점에 있다. 높지는 않으나 아름다운 계곡과 각양각색의 기암괴석이 많아 예로부터 호서(湖西)의 금강산이라 불려 왔다. 문화재로는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수덕사 대웅전(국보 49)과 수덕사노사나불괘불탱(修德寺盧舍那佛掛佛幀, 보물 1263호)이 유명하다. 수덕사에서 동쪽으로 4㎞ 떨어진 산 아래에는 덕산온천이 있어 산행을 마친 등산객들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그 밖에 유명한 비구니 스님인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하다 입적했다는 비구니 도량 견성암(見性庵)이 있고, 산 정상에는 수덕사와 1,020개의 돌층계로 이어지는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1973년 3월 덕숭산과 인근 가야산(伽倻山:678m) 일대가 덕숭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덕숭산 자락엔 천년고찰 수덕사(修德寺)가 자리하고 있다. 1308년에 창건되었으니, 그 역사가 700년이 넘는 수덕사는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이고, 조계종 5개 총림 중 하나인 덕숭총림이 자리하고 있다. 수덕사는 우리나라 불교의 큰 산맥인 경허 만공선사의 선맥(禪脈)이 흐르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3덕(德)'이 모인 곳이라고 부른다. 산 이름 '덕숭(德崇)'과 절 이름 '수덕(修德)', 마을 이름 '덕산(德山)'이 바로 삼덕(三德)이다. 덕을 숭상하여 천년을 한결같이 덕을 닦아 덕이 넘치는 곳이다. 수덕사는 5대 총림 중에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고 스님들이 합천 해인사 다음으로 많은 대찰(大刹)이다. 수덕사 내에 있는 비구(남자)스님들이 계시는 정혜사가 있고, 우리나라 3대 비구니(여자) 도량으로 유명한 견성암이 있다. 홍주 고을에 수덕이라는 도령이 살았는데, 어느 날 노루 사냥을 하는 도중에 멀리서 덕숭 낭자를 보고 좋아하게 되었다. 수덕 도령이 덕숭 낭자를 찾아가 혼인을 하자고 졸라대자, 덕숭 낭자는 절을 세워주면 혼인을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리하여 수덕 도령은 절을 지었으나,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은 탐욕 때문에 절이 불타 버렸다. 그 뒤 부처님만 생각하고 절을 다시 지어 결혼할 수 있었으나, 덕숭 낭자는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를 참지 못한 수덕 도령이 강제로 덕숭 낭자를 안는 순간, 사람은 사라지고 낭자의 버선 한쪽만 남았다. 그 자리는 바로 바위로 변했고 하얀 버선꽃이 피었다고 한다. 관음보살의 화신인 덕숭 낭자의 이름에서 유래하여 '덕숭산'이라 하였고, 수덕 도령의 이름을 따서 사찰을 '수덕사'라 불렀다고 전해 온다. 북쪽 가야산(687m) 조망.
잠시 본디의 파란색을 드러내던 하늘이 다시 흐려지며 백두들도 배낭을 정리하고, 14:08 덕숭산 증명을 남긴다. 나도 수덕산 증명에 동참하고 덕숭산을 뒤로한다. 14:14 수덕사 갈림길을 지나 나본들 고개로 향하는데, 좌측 내리막길로 가면 수덕사이고 정맥길은 직진의 능선길로 이어진다. 14:21 서산시 해미와 예산을 연결하는 45번 국도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14:24 양지바른 암릉에는 벌써 눈이 녹아 있고, 돌아본 덕숭산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14:25 덕산터널로 이어지는 45번 국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음 구간 가게 될 첫번째 봉우리인 뒷산(449m)이 지척이다. 당겨본 45번 국도와 덕산터널. 우측으로는 가야산과 원효산이 조망된다. 14:28 서쪽 방향 파노라마. 나본들고개 너머 뒷산 방향. 가야산 방향. 다음 구간 이어갈 금북길을 가늠해 본다. 14:40 이제 덕숭산이 멀어져 있다. 14:43 이어가던 능선에서 금북길은 좌틀하고, 14:44 바로 아담하게 자리한 묘지 옆을 지나니, 14:47 나본들고개가 내려다 보이고 건너편에 주차된 우리의 애마도 사여에 들어온다. 45번 국도 절개지에서 좌측 사면으로 내려간다. 나본들고개와 뒷산 조망. <나본들고개(165m)>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에 있는 고개로, 해미와 예산을 잇는 45번 국도가 지나간다. ‘남은들고개’라는 말에서 유래되어 변음된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풍구고개라고 부른다. 이곳이 바람이 아주 강하게 불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뒷산 방향 파노라마. 14:50 나본들고개에서 45번 국도 통과는 세 방향 어느 쪽이나 무난하다. 다만 도로 무단횡단은 조심해서..ㅋㅋ 백두들은 좌틀하여 광천교차로로 우회하는 방법을 택했고, 나는 무단 횡단을 선택했다. 무단횡단 후 북쪽 광천교차로 방향. 14:53 이렇게 무단 횡단하면 안 된다고...ㅉㅉ 구도로 남쪽 방향. 광천리 버스정류장. 14:54 구도로 북쪽 가야산 방향. 다음 구간 들머리를 확인해 두고, 15:57 덕산의 세심천 온천에서 몸을 녹인다. 16:19 오늘 아침나절에 들렀던 고개쉼터 식당으로 와서,
벅찼던 금북정맥 눈꽃산행의 기억을 이어간다. 인근 내포지역에서 최고라는 보양식 식당이라나, 뭐라나! 오늘 뒤풀이를 마련하신 회장님께 감사드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금북길의 뒷얘기들을 풀어놓는다. 산행 출발도 달빛 아래서, 서울 귀가도 달빛 아래서! 홍성지역에 눈이 많다는 예기는 들었던 듯한데, 12월 초순의 금북길에서 눈꽃산행은 기대 밖이었다. 아기자기한 봉우리들과 예쁜 고개 이름들이 어우러진 금북정맥 산행은 흰 눈으로 더욱 빛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