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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클레피오스의 서정과 탐색
이숭원(李崇源)
인류의 역사는 농사와 의술(醫術)에서 출발했다. 중국 신화시대의 인물 신농(神農)은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갖고 있어 각종 풀을 맛보아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약초를 감별해서 병을 고쳤다고 한다. 식량을 얻는 농사와 병을 고치는 의술이 인류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임을 알려주는 신화다.
고대 희랍의 신화에도 의술의 신이 있다. 광명의 신 아폴론과 인간 세상의 왕녀 코로니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의 신이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하체는 말이고 상체는 사람인 켄타우로스족의 현자 케이론에게 의술을 배웠다. 케이론의 형상은 신농의 생김새와 유사한 점이 있다. 이것은 세계 신화의 공통된 흐름을 확인케 한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뱀의 형상을 상징으로 삼는다. 이것은 그가 우연히 뱀을 죽였을 때 또 한 마리의 뱀이 약초를 물고 와 죽은 뱀에게 문지르자 살아났다는 신화의 이야기 때문이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뱀의 행동을 통해 약초의 효과를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뱀이 그려진 지팡이는 아스클레피오스 의술의 상징으로 중동과 유럽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뱀이 머리를 내민 지팡이의 형상은 요즘 사용하는 내시경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기원전 6세기경 펠로폰네소스 지역에 세워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이 의술을 얼마나 숭배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여기서 의술의 신에 대해 장황히 이야기한 것은 이 시를 쓴 김현식 시인이 현직 외과 의사이기 때문이다. 그는 의사로서의 체험과 관찰을 바탕으로 여러 편의 시를 썼다. 위에서 말한 아스클레피오스를 제목으로 삼은 다음과 같은 시가 대표적이다.
안식의 지팡이를 미끄러지듯 내려온 전사들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몸을 뚫고 들어가 몸 속 구석구석을 핥는다
독침에 물린 너는 꼼짝도 하지 못한다
몸 속에는 종종 갖가지 열매가 열린다
너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독버섯 같은 금단의 열매들을 먹어 치우기도 한다
그들은 결코 감시에 소홀이란 낱말을 알지 못한다
사명감으로 무장한 사설탐정처럼 씨씨티비처럼
깨끗한 대욕탕에서 정성들여 목욕하고 성수를 뿌리고
몸을 정갈하게 가꾸면서 계시의 순간을 기다린다
신에게 바칠 제물을 준비하는 대제사장처럼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게 분뇨통 가득한 혐오의 골짜기
를 지나
비밀의 문을 살그머니 열고 음침하고 냄새나는 지하세계로
들어간다 암울함과 부패가 극에 달할수록 바빠지는 행보
목까지 차오른 결단의 시기에는 대홍수를 불러 오물로 가득한
고담시를 흔적도 없이 쓸어버리기도 한다
죽음의 쌍두마차를 역주행시키고
불태워버린 위대한 스승의 부활을 믿는
충직한 복음의 전도사들이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사도들」 전문
이 시에는 ‘대장내시경’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첫 행에 나오는 ‘전사’는 대장내시경을 가리킨다. 진정제를 맞은 환자의 내장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몸 속 구석구석을 관찰하는 내시경을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라고 뱀의 동작으로 표현한 것은 뱀이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으로 유통된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대장내시경 끝에는 렌즈가 달려 있고 점막을 자를 수 있는 메스, 잔류물을 빨아들이는 흡입기, 출혈 부위를 소작할 수 있는 장치 등이 있기 때문에 뱀으로 말하면 눈과 혀와 이빨까지 구비되어 있는 셈이다.
병균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체내에 삽입되기 전에 완전히 소독되어야 한다. 3연에서 몸을 정갈히 씻고 제물을 준비하는 제사장처럼 계시의 순간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러한 내시경 준비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의사이기 때문에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시 창조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대장 내의 병증이 심각할 경우 의사는 매우 다양하고 분주한 활동을 벌여야 한다. 병소의 사진을 찍고 의심 부위의 조직을 채취하고 위험한 부위는 바로 제거해야 한다. 이 모든 활동은 환자의 목숨을 구하는 행위다. 아스클레피오스가 본 뱀이 약초를 사용하여 죽은 뱀을 살렸듯이 아스클레피오스도 여러 번 죽은 자를 살려내 저승의 신 하데스의 노여움을 샀다. “죽음의 쌍두마차를 역주행시키고/불태워버린 위대한 스승”은 그러한 아스클레피오스의 행동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장내시경은 단순한 검사 기구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죽음의 늪에서 구하는 “복음의 전도사”라고 할 수 있다.
「잠수사」라는 시에서 시인은 내시경을 “해난구조대 해군특수부대원”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어떠한 어둠의 심연에서도 병소를 확인하고 처치하는 내시경을 “소신공양의 보살들”이라고 표현했다. 내시경을 다루는 의사는 오물로 가득한 지하세계에서 생명의 물길을 여는 충직한 사제들이다. 김현식 시인이 바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사도다.
그는 시집의 제목을 ‘꿈길’로 정했다. 그것은 이 시집에 들어 있는 「꿈길」이라는 시가 시집의 성격을 대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저마다 꿈을 지니고 있고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길을 간다. 그런 의미에서 ‘꿈길’이란 자신이 정당하게 걷는 길이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길이다. 김현식 시인의 꿈길은 어떠한 길일까? 그의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가는 모든 길은
꿈길
진찰실로 가고 있다
병실로 가고 있다
꿈길로 가고 있다
태연하고 전혀 상관치 않는
가로수들이 졸고 있는
국도를 간다 지방도를 간다
꿈길을 간다
언덕 위에 꼬막집이 있는
조용한 시골길을 간다
소박한 식사를 할 수 있는
할매식당이 있는 시골길을 간다
꿈길을 간다
인생의 도반과 함께 가는 길은
모두 꿈길
처음 가보는 길도
가끔 다니는 길도
자주 다니는 길도
모두 꿈길이 된다
요사이 새로운 꿈길이
하나 더 생겼다
학생 때 헤어진 후 아직까지 만나지도
못한 옛 친구를 찾아가는 길이다
「꿈길」 전문
김현식 시인의 꿈은 소박하다. 진찰실이나 입원실로 가서 환자를 보는 일상적인 일을 하거나 아니면 가로수들이 졸고 있는 국도, 지방도를 따라 조용한 시골로 가는 것이다. 할매식당 같은 허름한 식당에서 간소한 식사를 하고 인생의 도반과 더불어 갈 길을 간다면 그곳이 어디이든 모두 꿈길이 된다고 한다. 처음 가보는 길도 자주 다니는 길도 모두 꿈길이라면 그의 꿈길은 평등 평화의 길이고 차별 없는 대동 화합의 길이다.
요즘 새로 생긴 꿈길은 옛 친구를 찾아가는 추억의 길이라고 했다. 추억이야말로 우리를 순수한 꿈으로 안내하는 정다운 손길이다. 추억의 길을 떠올린다는 것은 김현식 시인의 연륜이 그만큼 깊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제 앞을 내다보는 일보다는 지난 길을 돌아보는 지점에 서게 된 것이다. 그가 돌아본 첫 번째 꿈길에 다음 두 친구가 떠올랐다.
김병현,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초등학교
4학년 6반 2인용 책상에 나란히 같이 앉았던
순박하고 마음 좋았던 친구, 점심시간이면 나는
그의 도시락 반찬 묵은 김치를 좋아했다
한여름에도 새콤하면서도 시디 신 묵은지는 바로
그의 따뜻한 마음씨였다 5학년으로 올라간
후에는 다시 보지 못했다 정말 보고 싶은 친구다
강대석, 아마 초등학교 5학년 7반이었으리라
하교 때는 자주 같이 가곤 했다 가는 길에는
미니골프장이 있어 우리에겐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곤 하였다
그러다 2학기 때 그는 부모님을 따라 대구로
전학을 갔다 그후로 다시 보지 못했지만 지금까지도
궁금하고 그립다
「그리운 친구들」 전문
초등학교 4학년 6반 교실에 나란히 앉아 있었던 김병현. 그는 도시락 반찬으로 묵은지를 자주 싸 왔다. 냄새도 퀴퀴하고 맛도 시큼했던 묵은지는 그의 순박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떠올리게 한다. 5학년 진급 이후 다시 보지 못했지만 묵은지의 맛과 냄새를 통해 그의 추억은 생생히 살아서 환기된다. 시인은 김병현을 다시 만나 꿈길을 같이 걷고 싶어 한다. 50년의 세월을 넘어 그의 묵은지 맛을 정겨운 마음으로 다시 맛보고 싶은 것이다.
또 하나의 친구는 초등학교 5학년 7반 친구인 강대석. 그와는 하교 길이 같아 자주 동행했다. 미니골프장에서 골프 치는 모습을 신기하게 구경하기도 했다. 2학기 때 대구로 전학을 간 후 다시 보지 못했지만 그 짧은 동행의 인연이 그리움으로 남았다. 그를 다시 만나 어릴 때의 그 미니골프장을 다시 걷고 싶은 것이 시인의 꿈이다. 50년 저쪽에 삶의 자취를 남긴 그리운 친구들에 대한 꿈길의 상상은 다시 이루어질 수 없는 만남에 대한 기원이기에 애틋하면서도 허전하다.
그 점에서는 「사라진 번호」의 사연 역시 유사하다. 화순의 작은 할아버지 댁을 방문했더니 수몰된 지 오래 되어 마을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시골 고모를 오랜만에 찾아갔더니 낯선 사람이 나와 얼마 전 동구 밖으로 이사하셨다고 전한다. 불현듯 떠오른 친구에게 전화했더니 결번이라는 메시지만 나온다. 정성들여 보낸 시집은 수취인불명으로 도장 찍혀 반송되어 온다.
이렇듯 기대감은 늘 넘쳤으나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뿐, 오래 방치된 빈 항아리에는 먼지만 쌓일 뿐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하고 변해 버린 자리에는 허전하고 애틋한 공백만 남아 있다. 꿈길을 같이 걷고 싶은 사람들을 아예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꿈길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까? 시인의 고민은 여기서 싹트고 줄기를 벋는다.
그러면 오랜 시간이 흘러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았던 사람을 우연히 다시 보게 되면 어떠할까? 오래 전에 헤어졌던 친척이나 어릴 때 보고 못 만났던 친구를 다시 보게 될 때 기쁘기도 하지만 기쁨과 함께 슬픔을 맛보는 일도 많다. 왜냐하면 세월의 흐름이 과거의 천진했던 친구의 모습에 주름과 백발을 드리워 실망케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동창회에 가 보면 어릴 때 귀여웠던 단짝 친구가 늙고 힘없는 노인이 되어 앉아 있다. 그것은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알아보지 못하였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그를
세월에 묻혀 왜소해진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네
예고없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서는 사람,
이상한 사람이라 여겼네
원래 사람기억을 잘 못해
어디에선가
스쳐간 사람이리라 여겼네,
태산이, 준령이,
동네 야산이 되어 서 있었네
인고의 세월이 깎아내린
무수한 파편들이
돌무덤처럼 쌓였네
「사미인곡(思美人曲)」 전문
시인은 그러한 체험을 ‘사미인곡’이라는 제목으로 표현했다. 아름다운 사람을 생각하는 노래라는 뜻인데, 늘 아름다우리라 그리워했던 그 사람이 아주 낯선 초라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 때 ‘사미인곡’의 애수는 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에서 그리워했던 김병현과 강대석이 세월의 흐름에 풍화되고 마멸되어 왜소한 노인으로 내 앞에 선다면 그 실망감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기억 속에서는 태산이요 준령이었는데, 한갓 동네 야산이 되어 서 있다면 그 민망함을 어이할 것인가? 돌무덤처럼 흩어진 세월의 파편을 쓸쓸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의 진행에 따라 사람의 모습은 태산과 준령처럼 등등하던 상태가 야산으로 주저앉고 마는데, 나비 같은 경우는 성장의 후반 단계가 더욱 상승하는 방향으로 변모한다. 나비나 곤충의 변태 과정은 일반적으로 알, 애벌레, 번데기, 성충의 단계를 거친다. 알에서 애벌레가 부화하고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는 것은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번데기에서 성충이 탄생하는 것은 혁명적 비약이다. 나비의 경우 거친 껍질 모양의 번데기의 등짝이 갈라지면서 날개가 솟아나 나비로 날아가는 모습은 무척 신비스럽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는 것을 우화(羽化)라 해서 혁명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혁명적이다
번데기의 명상은
악몽처럼
지루하다
변화는 힘들다
거칠고 메마른 바닥을
오랫동안
애벌레로 기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우화」 전문
완전 변태를 하는 나비의 경우 애벌레의 기간은 길고 번데기의 기간은 짧다. 흉측한 번데기에서 아름다운 나비가 탄생하는 것을 어찌 상상할 수 있으랴. 번데기의 혁명적인 변신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번데기는 딱딱한 껍질 속에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번데기의 명상의 시간이 악몽처럼 지루하다고 했다. 애벌레와 비교할 때 번데기로 사는 기간이 짧지만 애벌레로 거친 바닥을 기는 것보다 번데기의 인고의 노력이 훨씬 힘겹다고 본 것이다.
인생의 경우도 이와 같아서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고 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자기 변신을 위한 고뇌의 시간이 정말 의미 있는 것이다. 그러한 번데기의 고뇌와 노고를 「번데기」라는 시에서 표출했다. 애벌레 시절은 오히려 철없는 행복한 시절이었고 번데기가 되어 고치 속에 들어앉은 자신의 모습을 나비가 되는 꿈을 잊은 무력한 일상의 존재로 표현했다. 이것은 자신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김현식 시인은 일상의 무료함에서 변화를 꾀하려는 생각에서인지 생활의 변화를 이루었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는 변신은 하지 않았지만 종합병원 원장 직에서 물러나 개인병원을 개업했다. 그것도 생물의 진화라면 진화이고 변신이라면 변신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 전환을 대학에서 대학원으로 진학한 것으로 비유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늦게나마 인생대학을 졸업하고
인생대학원에 입학하였다
어렵게 받은 수료증을 고이 모셔놓고
어렵다고 소문난 인생대학원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새로운 커리큘럼과 전혀 다른 모습의
교수들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교육을 위해
미리 대기하고 있는 듯 했다
항상 보아오던 캠퍼스였지만
투명하고 만질 수 없는 울타리가
둘러져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울타리를 넘어 온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다른 모습들, 다른 삶의 프로그램들,
구태의연한 학부생활을 마감하고
어렵지만 개원이라는 새로운 인생대학원에
입학한 감회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인생 대학원」 전문
시 끝 부분에서 “개원이라는 새로운 인생대학원에 입학”했다는 말을 했으니 이 시의 내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개인병원을 개원하는 것은 젊은 시절에 하는 일인데 김현식 시인은 대형 종합병원에 장기간 근무하다가 대학교수로 정년퇴직할 나이에 개원을 했기 때문에 감회가 특별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의 첫 행에 “늦게나마”라는 말을 했다. 이 말에는 늦게라도 개원을 했으니 자유롭고 독자적으로 자신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자긍심과 새로운 사업의 미래에 대한 의구심이 함께 얽혀 있다. 그래서 “어렵다고 소문난 인생대학원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종합병원 의사나 개인병원 의사나 같은 직종이어서 대학과 대학원이라는 학술적 연결의 비유를 했지만 지금까지 수술과 진료만 한 전문인으로서 운영과 관리를 직접 한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 배우고 터득해서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커리큘럼”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교육”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의 삶을 둘러싼 또 하나의 울타리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내심 당황하고 있다. “다른 삶의 프로그램”을 요구하는 새로운 인생대학원에 발을 디딘 감회를 솔직하게 고백적으로 표현했다.
의사로서의 다양한 활동 속에서 김현식 시인의 마음에 일관되게 흐르는 물길은 순수 지향의 정신이다. 그가 시를 쓰는 것은 그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순수에 대한 향심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것은 다음 두 편의 시에서 뚜렷이 확인된다.
잔잔한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천사가 보고 싶은가
먹때알 눈을 감고 세상 위를 유영하는
아가 모습을 들여다보아라
가슴 시린 아련한 추억의 골짜기를 지나
눈가의 주름 같은 연민의 산을 넘어서
굵어진 뼈마디와 거칠어진 손으로
인내와 사랑의 강을 노 젓고 있는
파란만장한 생의 그늘을 엿보고 싶은가
고단한 삶의 틈바구니를 벗어나 잠시
멀리 흘러가버린 흰 구름의 전설을 기억해내고 있는
아내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아라
「천사와 그늘」 전문
굳은 흙더미를 밀어 올리는
연둣빛 싹의 눈이 보일 때
무거운 침묵 속에서
밝은 미소 하나 반짝일 때
마비되었던 하반신
발가락이 꼼지락거리기 시작할 때
오래된 상처에서 새살 돋는 기쁨이
너에게 옮아갈 때
「소녀의 기도」 전문
이 시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김현식 시인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순수를 발견하고 그것을 향한 마음을 키워간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어도 순수의 형상은 귀중한 것이다. 까마중 열매처럼 검은 눈을 감고 신비로운 세상을 유영하는 것 같은 아가의 모습이나 파란만장한 생의 그늘에서도 연민과 사랑의 행로를 잃지 않는 아내의 잠든 모습이 순수의 표상이다. 그것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기쁨이고 희망의 원천이다. 굳은 흙더미를 밀어 올리는 연둣빛 싹, 무거운 침묵 속에 반짝이는 밝은 미소가 생의 원동력이다. 마비되었던 다리의 발가락이 움직일 때 나오는 기적의 경이감이나 오래된 상처에서 새살이 돋을 때 얻게 되는 천진한 기쁨은 동질적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순수의 정신이요 천진의 향심이다. 김현식 시인의 시정신의 원천은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의 눈은 청징하고 섬세하다. 그는 우리 몸의 미세한 혈관과 내장의 숨은 계곡과 습지를 밝은 눈으로 탐사한다. 그리고 그 순수의 정신으로 세상과 인생을 관찰하여 시를 쓴다. 순수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세상의 어두운 구석이나 부패한 현실에 환멸을 느끼기도 하지만, 종국에는 다시 맑고 고운 곳을 바라보며 순수 지향의 몸짓을 일관되게 지켜 간다. 순수한 세계를 끝까지 추구하려는 그의 걸음이 조금 느려 보이지만 특유의 천진함으로 각박하고 삭막한 세계를 물리치며 정직한 거북이처럼 별이 빛나는 저곳을 향해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 그의 고독하고 빛나는 항해에 뜨거운 공감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