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당은 주암사(舟巖祠)로 명명되었는데 주암촌에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주암사가 된 것으로 추정되고 특별한 이유는 없다.
주암사는 1777년(정조 1) 선생의 증손 최연손(崔連孫, 1460~?) 그리고 흥성장씨 장급(張伋, 1522~1589)과 아들 장경세(張經世, 1547~1615)를 배향하여 주암서원이 되었다.
한 사람을 두 곳 이상 서원에 배향할 수 없는 법률이 있었으므로 주암서원은 처음부터 비공인서원으로 출발하였고 조선말기까지도 주암서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주암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는데 대개 주암사라 부르는 사람은 사액서원과 비교하여 비공인서원이기 때문에 낮추어서 구분해 부른 것이다.
처음 주암사가 세워진 장소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주암서원으로 발전한 이후 위치는 현재 지사초등학교 서쪽 뒤편이었다.
그 곳에 위패매봉비와 주춧돌 등 흔적이 남아 있고 또 마을 입구 길이 굽어진 곳에 하마비(下馬碑)가 전해오고 있어서 대체로 위패매봉비 앞 방계마을회관과 지사초등학교 사이에 주암서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암사도 아마 같은 장소에 있었을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서원이 남발하여 같은 성씨 선조만 배향한 곳은 서원으로 부르지 못하도록 했으므로 서원에는 반드시 둘 이상 성씨를 가진 선현을 배향해야 했고 또 학생들이 공부하는 강당 등 건물을 갖추어야 했다.
서원에 등록된 학생은 병역(兵役)을 면제받았기 때문에 양반이면 누구나 서원에 등록하려 애를 썼다.
주암서원은 1774년 주암사로 건립되어 겨우 4년 만인 1777년 주암서원으로 확장되었는데 전주최씨 가문에 갑자기 큰돈이 생긴 것은 아닐 것이므로 비용 중 많은 부분을 흥성장씨 가문에서 부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당 한 채 건립하는 데에만 6년이나 걸린 전주최씨 능력으로 강당 등 여러 채 부속건물까지 갖춘 서원을 겨우 4년 만에 건립할 수 있었겠는가?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주암서원이 철폐되어 초상화를 봉안할 장소가 없어져버리자 1870년(고종 7) 2월 28일 원래 주암서원이 있었던 자리에 다시 조그마하게 영당을 건립하여 [이모본A]를 봉안하였다.
그 자리에는 현재 위패매봉비와 선생 아들과 손자 제단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