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갓 마구 수대선배 조갑이 아재가 우리 칠산교회 한태경목사님 제자에 우리자랑 울능도..
침례교역사- pic
2018-10-14 10:54:10
한국에서 최초로 개척된 침례교회는 충남의 江景敎會(강경교회)이고, 두 번째가 公州敎會(공주교회), 세 번째가 내가 다니던 七山敎會(칠산교회)라고 한다.
1950년 미국의 남침례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 해외 선교부에서 존 에버나티(John Abernathy) 박사를 선교사로 남한에 派送(파송)하고, 침례교단이 새로운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교회에서는 그분을 나요한 목사라고 불렀다. 그분이 1953년 대전에 침례교 성경학교를 설립하고 학생을 모집한다는 소문이 났을 때 칠산교회 한태경 목사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그때 한 목사님은 대전성경학교 신약 교수로 임명됐다. 칠산교회에서 나와 양태영, 김동란 세 사람을 데리고 대전에 갔다. 전국에서 약 60명의 남녀학생이 모였다. 대전 원동에서 교실과 기숙사가 있는 시설을 점유하고 우리는 참으로 기쁘게 가족과 같은 분위기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학비는 전액 미국 선교사들이 모여 있는 선교부에서 부담했고 기숙사비만 학생들이 부담했다.
얼마 후 이 성경학교는 문교부의 승인을 얻어 침례회 신학대학으로 승격됐다. 이후 학교를 대전 중동 10번지로 이전하고 우리들은 침례교단 최초의 신학교 제1회 신학생이 됐다. 같은 구내에 남녀 기숙사가 있었고 식당은 학생들 자율로 운영했다. 각 지방에서 학생들이 모였기 때문에 여러 지방 사투리로 대화했고, 때로는 의사소통이 잘 안 되어 웃기는 일도 있었다. 좌우지간 재미가 있었다.
김병욱 집사와 조병옥 집사 내외분이 남녀 기숙사 사감으로 있었는데 생활규율은 엄격했다. 나는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고 시간이 나면 시내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주로 일본어로 된 문학 서적이나 철학 서적을 사서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이발도 자주 안 해서 두발이 텁수룩하여 나의 별명이‘쇼펜하우어’였다. 특히 학생들 중에서 영어는 내가 제일 잘했다. 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들로부터도 주목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또 한 사람의 학생이 있었다. 여학생 중에 1933년생, 나와 동갑인 張時元(장시원)이란 학생이 있었다. 미모는 출중했으나 행동거지와 한국말이 아주 서툴고 어색했다.
방과 후에는 식당 한구석에서 일본어로 된‘구로자키’ 성경주석을 놓고 공부를 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일본 규슈에서 출생해 그곳에서 자랐고, 여고를 마치고 해방이 된 후 부모를 따라 귀국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기숙사비 일부를 벌기 위해 식당에서 일했고 누룽지가 나오면 사람들 모르게 살짝 나에게 전달했다. 결국 그녀도 내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느꼈다.
우리는 아무 허물없이 학교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후 느낀 일이지만 나의 운명을 가름하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나의 주변에서 감돌고 있었다. 엄격하고 무섭기로 이름이 난 사감 집사님들이 우리 두 사람을 자주 불러 그들의 가족식사에 참석시켰다. 무슨 특별한 음식을 차리는 날에는 나에게만 살짝 몇 시까지 집에 오라고 귀띔을 했다. 가보면 언제나 그녀가 먼저 와 있었다. 어째서 그 두 분이 우리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셨을까.
이렇게 해서 우리 두 사람은 자연스럽고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서로 마음으로 의지하는 가까운 사이가 됐다. 출출하면 마음에 맞는 몇몇 학생들이 기숙사 밖 대전역 부근에 찹쌀 도넛을 사 먹으러 몰려다녔는데 그때 그녀가 꼭 우리 편에 끼었다. 하얀 설탕 가루가 묻은 찹쌀 도넛이 그때는 왜 그렇게도 맛있었는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러나 후일에 그녀가 나의 배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당시에는 전혀 해보지 못했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학생 중에 이진석과 강창석이 내게 접근해 학교를 중단하고 울릉도에 가자고 꼬드겼다. 그들도 그랬고 나도 그랬고 그때 우리는 신학교 생활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들의 생각이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으로 들려왔다. 당시 울릉도에는 침례교회가 14개가 있었으나 연로한 김석규 목사님 한 분이 순회 목회를 하고 계신다’고 하면서 젊은 전도사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 좋다, 목회 실습 전도사로 우리가 들어가자 하면서 세 사람이 뜻을 모았다.
학교 측에서는 재학 중 그런 실습기간을 갖는 것도 장려할 일이라 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우리는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부산에 가서 총회 전도부장이신 노재천 목사님을 만나 추천장을 받은 후 포항을 거쳐 울릉도에 들어갔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물두 살, 지금 같으면 세상 물정 모르는 선머슴이지만 그때 우리는 너무나 조숙했고 어른스러웠다.
1955년 3월 초, 우리는 포항에서 ‘알마크’ 여객선을 타고 장장 11시간 동안 밤새도록 항해한 후 다음 날 아침 9시에 울릉도 저동항에 도착했다. 김석규 목사님의 아들 김용문이 나와서 우리를 맞이했다. 김 목사님 댁에서 며칠간 휴식한 후 강창석은 저동침례교회에, 이진석은 도동침례교회에, 나는 사동침례교회와 중령침례교회에 전도사로 배치됐다.
그때 울릉도에서는 본토에서 신학생 전도사들이 왔다고 너무 기뻐했고, 그 작은 섬에서는 하나의 화제가 됐다. 부임 후 맡은 교회에서는 우리들 ‘병아리 전도사’ 주변에 같은 나이 또래 청년층 새 신자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교회에서는 매 주일마다 축제 분위기였다. 우리는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습전도사로서 교회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것 외에 급료를 전혀 받지 못했다. 모든 활동을 김석규 목사님의 지시에 따랐고 생활정착이 된 이후에는 목회자가 없는 다른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한 달 동안 또는 몇 주일 동안 순회 사역도 했다.
나는 사동교회와 중령교회를 지키면서 남양교회와 학포교회에도 한 달씩 머물렀다. 우리의 활동은 총회와 신학교에 보고됐다. 기독교한국침례회가 2007년 발간한 역사연감 1003페이지에는 사동교회 3대 교역자로, 1005페이지에는 중령교회 2대 교역자로 내 이름이 적혔다.
울릉도는 참으로 아름답고 신비한 秘景(비경)의 섬이다. 주민들은 착하고 순박하며 모두 부지런 했다. 섬의 모양은 마치 팽이를 뒤집어 놓은 것 같고 벼농사를 지을 평평한 물과 논은 한 군데도 없었다. 농경지는 모두 경사가 진 밭으로 감자와 보리가 주곡이다. 우리는 울릉도 체류기간 내내 보리밥과 감자밥만 먹고 살았다. 그러나 공기 좋고 물 좋고 여러 진미의 산나물과 바다 생선이 밥상에 올라왔다. 4~5월에는 미역을 따고 5~6월은 꽁치 잡는 철이다. 6~7월에는 오징어잡이로 섬 전체가 분주하다. 오징어 철이 되면 먼바다에 어선들의 불빛이 성시를 이룬다. 여름에는 교회 청년들과 함께 바닷가에 나가 전복, 소라, 홍합을 가마니로 따다가 소 여물 쑤는 큰 가마솥에 삶고 가족들이 밀짚 방석에 모여 앉아 즐겁게 먹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헬리콥터 비행장도 생기고 섬 주위에 포장도로가 건설되어 자가용 승용차, 택시와 화물차가 다니지만, 그때에는 자전거 한 대도 없었다. 모든 교통수단은 보행 아니면 손으로 노를 젓는 배뿐이었다. 그래도 그때 우리는 교회로부터 끔찍한 사랑을 받았고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다.
* 沙洞(사동)
沙洞 중턱에, 달, 뜨는 밤
窓을 열면, 바다는 유난히도 잔잔하다.
동백꽃 몇 그루가, 입술에 짙은 ‘루주’를 바르고
묵묵히 서서, 나의 어둔 방을 지키어본다.
中領에서 떠난 고깃배, 소리 없이 다가오면
애써 잊으려 했던, 그날들이 생각난다.
그래도 故鄕에는, 가지 않으리.
아무도 모르는, 여기, 바다가 좋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어려움이 있었다. 우리 세 사람‘병아리 전도사’들의 나이가 20대 초반이었고 총각이었기 때문에 芳年(방년)의 딸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청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참으로 지혜롭게 처신해야 했고, 교회나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가 없도록 그‘위기’를 극복해야 했다. 내가 있던 사동교회만 해도 예쁜 처녀들이 몇 명 있었는데 자기들끼리 서로 눈치를 보며 나 한 사람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나는 너무 힘들었다. 심지어 아랫집에 있는 집사 한 분은 단도직입적으로 나를 찾아와 자기 딸과 혼인하자고 간청했다. 내 마음이 약간 흔들렸으나 만약 내가 그때 결혼을 했더라면 나는 영영 울릉도에 얽매이게 됐을 것이다. 나의 꿈이 거기에서 시들어버리는 것이다. 이 전도사와 강 전도사는 어떻게 그 회오리바람에서 벗어났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이미 약속한 사람’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무렵 신학교에 있던 장시원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우리가 대전을 떠난 후 자기도 학교를 중단하고 서울에 있는 선교부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아직 그녀에게 확실한 마음을 정한 상태가 아니었지만 은근히 그녀의 소식이 궁금했고 편지가 왔을 때에는 너무 기뻤다.
한여름이 지나갔다. 바닷가에서 오징어 말리는 덕대가 사라지면 여름이 끝난 것이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또 찾아왔다. 도동에 있는 경찰서에서 수시로 찾아와 내가 징병 기피자라고 괴롭히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징집영장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기피자가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그해 연말 고향에서 징집영장이 나왔다는 기별이 왔다. 그래서 나는 불가항력적으로 울릉도를 떠나야 했다. 떠날 때 교회로부터 오징어 한 축을 선물로 받았고, 도동항에서 배를 타고 사동 앞을 지날 때 내가 머물던 숙소 앞마당에 교회식구들뿐만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도 울었고 그들도 울었을 것이다. 나를 아들처럼 아껴주었던 김숙희 집사님이 제일 많이 울었을 것이다.
도동과 저동에 있던 이 전도사와 강 전도사도 다음 해에 울릉도를 떠나 신학교에 돌아가 졸업을 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 본격적인 목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 후 軍(군)에 입대했고 운명이 나를 다른 길로 끌고 갔다.
* 鬱陵島(울릉도)
꿈속에서 읽는, 동화책 속의, 꿈같은 꿈나라.
동백꽃 속에 숨어서, 속 태우는 섬 색시
배 떠날 때 손 흔들어, 아쉬움 바람에 날리고
본토소식 기다리다, 시름없이 시드는 순정.
풍어소식 편지에 적어, 돌아오라 애원해도
한번 떠난 그리운 사람, 다시는 오지 않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