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적인 관점으로 바라본 그리스도인의 국가관에 대해서 >
글 : 김 강석 목사
먼저 우리가 잘 아는 사도바울은 그의 서신서 롬 13:1-7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국가관을 제시하면서 세상의 권세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사자요 일군으로서 일하는 자이니 그들에게 굴복하고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세상의 권세자의 편을 들고 있는 것처럼 들려집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성도는 천국백성이며 동시에 세상백성이란 이중적 정체성을 띠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기독교회가 반 로마주의 입장을 고수하는 유대교와 동질집단으로 오해한 나머지 유대주의의 혁명적이며 반역적인 기질이 기독교인들에게도 있다고 간주함으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분위기였습니다.
우린 보통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면 목사만을 연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군이라고 하면 교회에서 봉사하는 신자를 연상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권세자도 역시 하나님의 사자요 일군이라고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권세자가 신자인 경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인 경우에도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사자요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세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생각과 다른 점입니다.
우린 흔히 하나님의 사자나 일군이라면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신자를 하나님의 사자나 일군이라는 호칭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자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세우신 자란 뜻입니다. 그리고 일군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세우신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느냐 마느냐, 또는 믿는 자냐 믿지 않는자냐라는 조건을 따져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것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사자인 것입니다. 즉 역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역할이기 때문에 믿는 자 믿지 않는 자의 구분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를 세워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불신앙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강대국 이방나라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 가르치십니다.
그렇다면 그때 이방인인 강대국 이방나라는 분명 하나님이 쓰시는 일군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인 것입니다.
물론 이방인 강대국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에게 쓰여 지고 있음을 전혀 모른 채 단지 이스라엘을 공격을 하고 그들을 압제할 뿐입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임을 모르고 이스라엘을 짓밟은 자신들의 힘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이방인을 쓰실 때 그들은 여호와의 사자로서 일군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고 하나님에게 의해서 쓰여 진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자이고 일군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왜 권세자에게 복종하고 굴복하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세상의 권세자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자입니다. 롬13:1절에서도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고 말씀합니다.
즉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도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지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도 아니고 선거 수완이 좋아서 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롬13:2절에 보면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권세자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하나님이 세상에 권세자를 세우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권세자를 세우신다면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롬13:3-4절에 보면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고 말합니다.
여기서 관원을 사람들의 선과 악을 징계할 권한이 있는 경찰로 이해해 봅시다. 사람들이 경찰을 두려워 할 때는 죄를 범했을 때입니다.
경찰은 선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되지 않습니다. 즉 선한 일을 하며 악한 일을 행하지 않은 사람에게 경찰은 전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찰을 세우신 것은 우리의 악함을 징계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신자를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경찰을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권세자를 세우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우리들의 선과 악을 징계하는 도구로 세움 받은 경찰을 볼 때 단지 경찰이란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악함을 징계하기 위해서 세우신 하나님의 사자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악함이 있을 때 경찰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악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권세자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고 말씀하는 것은 같은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공세, 즉 세금은 국가에 바칩니다.
그리고 세금을 바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세무서 직원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종하라는 것도 신자를 위해서 그들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세금이란 돈입니다. 결국 세금을 바치기를 싫어한다거나 세무서 직원을 싫어한다거나 세금을 속인다면 이 모두는 결국 돈을 사랑하는 결과입니다.
따라서 세무서 직원은 우리가 과연 돈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드러내는 도구로서 세워진 하나님의 일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국가에 충성하는 차원에서 세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는 신자로서 국가에 세금을 바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신자를 돕기 위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자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일군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불평만 불만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물가에 대한 불만이나, 세금에 대한 불만, 그 외 여러 가지 국가의 정책에 대한 불만들이 왜 나오는 것입니까? 그리고 왜 그러한 정책에 무조건 순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신자들을 돕기 위해서 그들을 일군으로 세우셨음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물가가 올라가면 우리는 '이렇게 물가가 비싸서 어떻게 사느냐?'고 한숨을 쉬며 정부를 원망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동안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니라 정부가 물가를 낮췄기 때문에 살아온 것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권세자를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물가를 올리게 해서 우리가 무엇으로 살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세자들이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권세자에게 순종하라는 것은, 단지 그들의 권세에 복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권세자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권세 잡은 자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돕기 위해서 세우신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두려워 할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입니다. 권세를 세우시고 거두어가시기도 하시는 하나님이 두려움의 대상이지 결코 세상의 권세나 힘이 두려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는 권세를 경배하지 않습니다.
권세가 부여된 것은 단지 역할이지 힘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우리 신자들이 어떤 권세에 있든 우리에게 권세를 주신 분을 찬양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 권세자에게 영광을 돌릴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권세자를 세우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단지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삽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들 주위에 세우신 권세자, 그리고 그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우리 신자들을 돕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일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보지 않고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삶을 위해서 권세자를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한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국가관을 제시함으로써 복음 선포를 통한 교회의 설립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데 방해받지 않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는 천국백성의 신분으로 동일하게 하나님의 권세를 받은 세상 통치자와 관원들에게 순복할 것을 요구받습니다(롬 13:1-7).
이는 소극적으로 권력자가 하나님의 사역자 곧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권선징악의 대의명분을 수행하기 때문이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자원해 좇고자 하는 선한 양심의 발로 때문입니다(5절). 나아가 복음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평화로운 신앙생활을 보장받기 위함입니다(딤전 2:1-2).
따라서 성도는 천국백성으로서 세상 나라를 나그네와 행인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세상 권세의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성도가 본질상 천상지향적인 가치관에 입각해 살아갈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세상의 권세와 권력이 총체적 관점에서 권선징악의 기본질서를 유지하는 한 이에 적극 순복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 나라의 백성으로서 통치자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공의와 공법에 따라 선정을 베풀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딤전 2:1-2).
설령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한 통치자가 있더라도 폭력적인 투쟁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마 26:52-53).
왜냐하면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박해를 받을지라도 통치자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 5:44).
이는 우리가 고요하고 단정한 가운데 평화롭게 신앙생활을 영위할 뿐 아니라 지속적인 복음전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딤전 2:1-2, 마 28:19-20). 그러하기에 이 세상 나라의 권세는 본질상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편으로 기능합니다.
그러므로 통치권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공의와 공법을 시행해야 하며, 성도는 국가수반과 관리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생각해 공권력에 순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법과 하나님의 법이 충돌할 때는 하나님 편에서 정당한 절차를 통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으나 폭력적인 방법이 동원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행 4:18-20, 5:28-29, 마 26:52-53). 왜냐하면 그러한 폭력이 하나님의 공의를 대변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설 자리를 잃고 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세상의 경험이나 세상 학문적 지식에만 의존하여 자신의 상식과 전통만을 고집하며 세상의 여론이나 사회사상에 따라 산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내 음성을 낮출 때에 타인의 음성이 들리는 것처럼 내 주장과 내 생각을 멈출 때에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나를 만나고 싶은 그분이 직접 실체로 오셔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실제적 이야기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