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리의 겨울밤, 그들은 말한다
서울 수유리. 바람이 차가운 겨울밤, 거리는 조용했다. 가로등이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간판이 낡은 작은 선술집 하나가 나타난다. 문 앞에는 희미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얼어붙은 바닥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수유리문학다방’이라고 적힌 오래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문인이었다. 세상에선 유명하지 않지만, 각자 글을 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이 선술집에 모이는 날이면 언제나 깊은 밤까지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그들은 한 자리에 모였다.
"아,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는 걸까." 박현수가 먼저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들었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그는 오랜 시간 동안 글을 써왔지만, 여전히 세상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짙은 회색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치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과연 이 사회에 닿기나 할까? 우리는 그저 소음에 불과한 걸지도 몰라.”
옆에 앉아 있던 정명숙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가이자 여성주의 운동을 해온 그녀는 현수의 말에 동의하는 듯했다. “맞아.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변하고 있어. 우리가 쓰는 글들이 그 변화 속에서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사람들은 읽지도 않는 책을 만들어내면서, 우리만이 고독하게 그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
선술집 안에는 어둡고 따뜻한 조명이 깔려 있었다. 바깥은 꽁꽁 얼어붙었지만, 이곳만큼은 피난처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이야기는 마치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조차 불안과 걱정이 가득했다.
“요즘 청년들, 말이지.” 김정호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꺼냈다. 그는 비평가로,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청년들은 더 이상 우리 세대와 다르게 살려고 해. 그들에겐 새로운 꿈이 필요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고 싶어 하지.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걸 허락하지 않아. 결국 그들이 찾아오는 건 자포자기와 좌절이야.”
정호는 잠시 술잔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희미한 눈발이 서서히 내리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대한민국은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어. 하지만 여전히 구태에 얽매여 있고, 청년들은 그 안에서 기회도 없이 허덕이고 있지. 우리 문인들이 해야 할 일은 뭘까? 그들의 고통을 기록하는 것뿐일까?”
이 말을 들은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들이 꿈을 꿀 수 없다는 건 큰 문제지. 모든 것이 돈과 지위로 결정되고, 그 꿈마저도 계급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잖아. 문인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을 대변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현실은 우리가 쓴 글들이 세상에 제대로 전달되지도 못한다는 거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각각 자신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대한민국, 이 나라가 가고 있는 길. 청년들의 좌절, 기성세대의 무책임. 모두의 마음속에는 깊은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불안이 그들의 글에 스며들었고, 그 글들이 세상 속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답답함을 느꼈다.
그때, 한참 말을 아끼던 윤재훈이 입을 열었다. 그는 비교적 신진 문인으로, 날카로운 풍자와 사회적 비판을 주로 다뤄 왔다. "우리가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맞아, 세상은 변하고 있고, 우리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지. 하지만 난 우리가 목소리를 멈춰선 안 된다고 생각해. 누군가는 계속해서 말을 해야 하고, 써야 해. 세상은 언젠가 우리의 글을 듣게 될 테니까.“
현수는 윤재훈의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상적으로는 네 말이 맞아.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힘든 게 현실이지. 글이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요즘 세상은 글이 아닌 다른 것들로 움직이는 것 같아. 돈, 권력, 기술. 우리는 그 경쟁에서 이미 밀려난 거 아니야?“
윤재훈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맞아. 우리 시대에 글은 예전만큼의 힘을 잃어버렸을지 몰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멈춘다면, 더 이상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해. 우리 문인들이 해야 할 일은 현실의 고통을 기록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거 아닐까?“
그의 말에 정명숙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이라. 그렇지, 결국 글이라는 건 희망을 기록하는 거잖아. 비록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을 보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새로운 길을 찾는 역할이 문인의 몫일지도 모르겠어.“
이야기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대한민국의 미래, 문학의 역할, 그리고 그들이 짊어져야 할 책임감에 대해 고민하는 그들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술잔이 비워지고, 밖에는 눈이 점점 더 많이 쌓여 갔다.
수유리의 겨울밤은 깊었다. 선술집의 작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그 안에서 문인들의 마음은 뜨거운 토론으로 끓고 있었다.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씩 글을 쓰는 존재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았고,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이야기를 다시금 고민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선술집 안은 조금씩 정리되었다. 각자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며 그들은 잠시 서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내일도 글을 써야지." 현수가 웃으며 말했다.
"글이 힘을 잃어가는 시대라 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윤재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그들은 하나둘씩 선술집을 나섰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그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작은 희망의 불씨가 남아 있었다. 세상은 변하고 있었고, 그들의 글 역시 세상을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믿음.
수유리의 겨울밤,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말을 곱씹으며 집으로 향했다.